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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정음교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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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사사기 1장 - 21장]]></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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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사사기 1:1-10

1.
1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 주었노라 하시니라
3 유다가 그의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내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네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하니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가니라

사사기입니다. 사사기는 여호수아 이후 300-400년 동안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12명의 지도자를 통한 역사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가나안 땅에 들어갔으나,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순종하고 따르지 않았습니다. 즉 가나안 백성을 온전히 멸하고 쫓아내어야 했지만 이런 저런 핑계로 가나안 백성을 수용하고 더불어 살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여러 가지 고통속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오늘 성경 1장은 사사기의 배경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1절 ‘여호수아가 죽은 후’입니다. 여호수아는 죽었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됩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사람에게 제한 되지 않으며 묶이지 않습니다. 모세가 죽어도 하나님의 약속은 계속되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죽어도 하나님의 약속은 계속됩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가 바뀌어도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지도자가 바뀌어도 하나님의 사명은 계속됩니다. 이어서 ‘이스라엘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입니다. 사람은 사라졌지만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육신의 지도자는 사라졌지만 영혼의 아버지는 영원토록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2절 하나님은 유다 지파를 세우십니다. 이는 야곱은 창세기 49장에서 유다에게 왕권을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그리고 훗날 다윗 왕도 유다 지파에서 나오며,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다 지파에서 오십니다. 따라서 여기서 유다가 먼저 나서는 것은 이후 성경의 왕권 역사와도 연결됩니다. 유다지파에게 가나안 땅을 넘겨 주시다 약속하셨습니다. 믿음은 승리를 만들어내는 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승리를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3절 유다는 시므온과 연합하여 함께 올라갑니다. 좋게 이야기하면 연합이요, 나쁜 측면에서 이야기하면 불순종의 냄새가 나는 장면입니다. 어찌 되었건 유다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서 가나안 땅을 점령하기 위하여 열심히 전쟁을 수행합니다. 

2.
4 유다가 올라가매 여호와께서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을 그들의 손에 넘겨 주시니 그들이 베섹에서 만 명을 죽이고
5 또 베섹에서 아도니 베섹을 만나 그와 싸워서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을 죽이니
6 아도니 베섹이 도망하는지라 그를 쫓아가서 잡아 그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자르매
7 아도니 베섹이 이르되 옛적에 칠십 명의 왕들이 그들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이 잘리고 내 상 아래에서 먹을 것을 줍더니 하나님이 내가 행한 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 하니라 무리가 그를 끌고 예루살렘에 이르렀더니 그가 거기서 죽었더라

유다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가나안 족속을 죽이고 처단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을 처단하여 죽이고, 6절 아도니 베섹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잘라버립니다. 이는 아도니 베섹은 행한대로 돌려받게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7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는 말씀의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악을 심으면 → 악의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선을 심으면 → 선의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3.
8 유다 자손이 예루살렘을 쳐서 점령하여 칼날로 치고 그 성을 불살랐으며
9 그 후에 유다 자손이 내려가서 산지와 남방과 평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과 싸웠고
10 유다가 또 가서 헤브론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쳐서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죽였더라 헤브론의 본 이름은 기럇 아르바였더라

유다는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헤브론을 점령하며 가나안 점령이 계속적으로 이뤄지게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의 성취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 주었노라.” 아직 눈앞에는 가나안 족속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승리를 약속하셨습니다. 믿음은 장애물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장애물이 있어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우리의 영원한 지도자며 왕이신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을 순종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사기 1:11-36

1.
11 거기서 나아가서 드빌의 주민들을 쳤으니 드빌의 본 이름은 기럇 세벨이라
12 갈렙이 말하기를 기럇 세벨을 쳐서 그것을 점령하는 자에게는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리라 하였더니
13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인 옷니엘이 그것을 점령하였으므로 갈렙이 그의 딸 악사를 그에게 아내로 주었더라
14 악사가 출가할 때에 그에게 청하여 자기 아버지에게 밭을 구하자 하고 나귀에서 내리매 갈렙이 묻되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니
15 이르되 내게 복을 주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남방으로 보내시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 하매 갈렙이 윗샘과 아랫샘을 그에게 주었더라
16 모세의 장인은 겐 사람이라 그의 자손이 유다 자손과 함께 종려나무 성읍에서 올라가서 아랏 남방의 유다 황무지에 이르러 그 백성 중에 거주하니라
17 유다가 그의 형제 시므온과 함께 가서 스밧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쳐서 그 곳을 진멸하였으므로 그 성읍의 이름을 호르마라 하니라
18 유다가 또 가사 및 그 지역과 아스글론 및 그 지역과 에그론 및 그 지역을 점령하였고
19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셨으므로 그가 산지 주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주민들은 철 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20 그들이 모세가 명령한 대로 헤브론을 갈렙에게 주었더니 그가 거기서 아낙의 세 아들을 쫓아내었고
21 베냐민 자손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족속이 베냐민 자손과 함께 오늘까지 예루살렘에 거주하니라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은 유다지파를 선두로 해서 가나안 정복을 시행합니다. 유다 지파 갈렙은 하나님의 명령의 말씀을 듣고 전투적으로 힘을 다하여 가나안 땅을 점령해 나갑니다. 

특별히 본문 말씀 11-12절에 가나안 산지인 기럇 세별은 공략하기 힘든 땅입니다. 때문에 갈렙은 그의 딸을 걸었습니다. 점령하는 자를 사위로 삼겠다고 선포했습니다. 이에 옷니엘이 일등으로 앞장서서 그 땅을 점령하고 악사를 아내로 얻게 됩니다. 훗날 옷니엘은 이스라엘 최초의 사사가 되어서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앞에서 어떤 주저함고 망설임도 없는 자를 들어서 사용하십니다. 여호수아, 갈렙을 대를 잇는 사람이 옷니엘입니다. 주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싸우고, 정복하는 사람입니다. 

14-15절 출가하는 악사는 아버지 갈렙에게 샘을 요구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악사가 요구한 샘은 이미 점령한 샘이 아니라, 점령해서 빼앗을 샘입니다. 즉 갈렙과 악사는 전쟁을 통하여 빼앗을 샘이 소유를 미리 허락받은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주실 줄 믿고 구한 것입니다. 

16-19절 유다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모든 전쟁을 수행하고 승리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한가지 아쉬움도 있습니다. 19절 철병거로 유다는 골짜기 주민을 점령하지 못하였습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못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00%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유다 지파는 전체적으로 훌륭하게 이 모든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2.
22 요셉 가문도 벧엘을 치러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니라
23 요셉 가문이 벧엘을 정탐하게 하였는데 그 성읍의 본 이름은 루스라
24 정탐꾼들이 그 성읍에서 한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보고 그에게 이르되 청하노니 이 성읍의 입구를 우리에게 보이라 그리하면 우리가 네게 선대하리라 하매
25 그 사람이 성읍의 입구를 가리킨지라 이에 그들이 칼날로 그 성읍을 쳤으되 오직 그 사람과 그의 가족을 놓아 보내매
26 그 사람이 헷 사람들의 땅에 가서 성읍을 건축하고 그것의 이름을 루스라 하였더니 오늘까지 그 곳의 이름이 되니라

22절 유다의 전쟁을 지켜보던 요셉 가문도 전쟁을 감행합니다. 역시 하나님께서 요셉 지파와도 함께 하십니다. 23-24절 전쟁을 위해서 벧엘을 정탐할때에, 벧엘 성읍의 한 사람이 비밀 통로에서 사람이 빠져나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24-25절 이에 요셉 지파는 목숨을 살려준다는 댓가로 벧엘성의 비밀 통로로 알아내게 되고 그리로 들어가서 성을 점령하게 됩니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흘러가지만 사실은 요셉 가문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게 됩니다. 즉 가나안 주민과 어떤 언약도 맺지 말라 말씀하셨지만, 요셉지파는 인간적인 판단 앞에서 사람과 언약을 맺고 하나님과 언약을 파기하는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오늘 성경의 본문은 사사기 전체의 문제를 미리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족속과 타협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3:32 “너는 그들과 그들의 신들과 언약하지 말라” 신명기 7:2도 가나안 족속에 대해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 것이요” 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점점 하나님의 명령보다 현실적인 판단을 앞세우기 시작합니다. “이 사람을 살려주면 성을 쉽게 점령할 수 있다.” 인간적으로 보면 효율적인 선택입니다. 하지만 신앙적으로 보면 질문이 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3.
27 므낫세가 벧스안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다아낙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돌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이블르암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므깃도와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들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
28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족속에게 노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29 에브라임이 게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게셀에서 그들 중에 거주하였더라
30 스불론은 기드론 주민과 나할롤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가나안 족속이 그들 중에 거주하면서 노역을 하였더라
31 아셀이 악고 주민과 시돈 주민과 알랍과 악십과 헬바와 아빅과 르홉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32 아셀 족속이 그 땅의 주민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주하였으니 이는 그들을 쫓아내지 못함이었더라
33 납달리는 벧세메스 주민과 벧아낫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그 땅의 주민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주하였으나 벧세메스와 벧아낫 주민들이 그들에게 노역을 하였더라
34 아모리 족속이 단 자손을 산지로 몰아넣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하지 아니하였으며
35 결심하고 헤레스 산과 아얄론과 사알빔에 거주하였더니 요셉의 가문의 힘이 강성하매 아모리 족속이 마침내는 노역을 하였으며
36 아모리 족속의 경계는 아그랍빔 비탈의 바위부터 위쪽이었더라

이후 27-36절 이스라엘 다른 지파는 정말 가관입니다. 27절 므낫세, 29절 에브라임, 30절 스불론, 31절 아셀, 33절 납달리 까지 모두가 가나안 족속을 살려두고 더불어 함께 공존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특별히 34절 단 지파는 더 문제입니다. 주격이 전도되어서 오히려 아무리 족속에게 밀려 산지 골짜기로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너지고, 신앙의 경계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유다 지파를 제외한 다른 모든 지파는 그렇게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고, 마치 광야에서 조상들이 했던 불신앙의 행실대로 살아갔던 것입니다. 

신앙의 가장 위험한 것은 “타협을 합리화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족속에게 노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여기서 이스라엘의 생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저들을 쫓아낼 수 없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이스라엘의 힘이 강해지자, “그렇다면 굳이 쫓아낼 필요가 있나? 노역을 시키면 되지.”라는 방향으로 바뀝니다. 즉 불순종을 현실적인 이익으로 합리화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는 대신 노동력으로 이용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유익해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가나안 사람을 노동자로 만들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우상과 문화가 이스라엘을 오염시키지 않도록 그들을 제거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지 못한 것이 아니라, 결국 가나안 사람과 함께 살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이것이 사사기의 배경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말씀대로 살며 정복하고 타협 없는 영적 전쟁을 이루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사기 2:1-10

1.
1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으로 올라와 말하되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여 내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하였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와 함께 한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2 너희는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며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니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3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4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라
5 그러므로 그 곳을 이름하여  보김이라 하고 그들이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더라

하나님의 책망과 보김의 거짓 눈물입니다. 본문은 사사기 시대의 전체적인 원인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1절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찾아오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과거를 상기시키십니다.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실 때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게 하십니다. ‘맹세한 땅에 들어가게 하며’ ‘언약의 약속을 어기지 아니하리니’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은혜를 잊었습니다. 죄의 출발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잊어버리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2절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반문하시며 ‘너희가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물으십니다. 3절 때문에 그들이 옆구리에 가시(가나안 사람)가 되고 올무(가나안 신들)가 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앞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작은 타협과 합리화가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4-5절 이들이 보김에서 눈물을 흘렸지만 이들은 진정으로 변화 각성하지 못하였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울지만 그 울음의 진명목은 자신들이 당할 고통에 대한 두려움의 눈물이지 회개의 눈물로서 삶은 변화되지 못하였습니다. 사사기의 비극은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눈물은 있었지만 회개가 지속되지 않았습니다. 울었다는 것이 곧 회개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진정한 회개는 단순히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2.
6 전에 여호수아가 백성을 보내매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그들의 기업으로 가서 땅을 차지하였고
7 백성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들이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
8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백십 세에 죽으매
9 무리가 그의 기업의 경내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 산 북쪽 딤낫 헤레스에 장사하였고
10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모세와 여호수아를 함께 했던 신앙의 세대가 저물고, 다른 세대가 등장하게 됩니다. 6-9절 여호수아의 세대는 그나마 신앙의 세대입니다. 7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들입니다. 이 세대는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홍해를 건넜습니다. 광야를 경험했습니다. 요단을 건넜습니다. 여리고가 무너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나안 정복을 경험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세대였습니다. 10절 그러나 다른 세대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는 신앙적으로 다른 세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부모 세대는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자녀 세대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부모 세대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세대는 하나님의 역사를 알지 못했습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하나님을 떠난 것”보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대”입니다. 사사기의 문제를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던 세대가 사라지고 하나님을 모르는 세대가 일어났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봅니다. 이스라엘에게 성전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율법이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다음 세대에게 가르치고 전하는 일이 끊어졌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자동으로 전수되지 않습니다. 부모가 믿는다고 자녀가 자동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오래 다닌다고 다음 세대가 하나님을 아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험한 신앙을 다음 세대에게 가르치고 보여주고 전해야 합니다.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말씀에 순종하며, 타협을 끊고, 우리의 신앙을 다음 세대에 전수할 수있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사기 2:11-23

1.
11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12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곧 그들의 주위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라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13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1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넘겨 주사 그들이 노략을 당하게 하시며 또 주위에 있는 모든 대적의 손에 팔아 넘기시매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하지 못하였으며
15 그들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니 곧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것과 같아서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더라

10절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다른 세대의 등장은 신앙의 심각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11절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며 바알을 섬깁니다. 즉 하나님도 섬기고 세상의 신도 섬기는 혼합주의적 신앙을 갖게 됩니다. 그러다가 점점 하나님을 버리고 잊어버리는 방향으로 가는 것입니다. 주일 한번 빠지고, 한 달 빠지고, 영 가버리는 것입니다. 12절 하나님께서 우려하셨던 것처럼, 조상들의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이들 주위 가나안 땅의 신들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신앙의 타락은 갑자기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음 →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사라짐 →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의지함 → 결국 하나님을 떠남. 그래서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13절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습니다. 바알 = 풍요와 비를 가져온다고 믿었던 남성 신, 아스다롯 = 다산과 풍요를 가져온다고 믿었던 여성 신입니다. 때문에 예배가 음란하고 혼잡합니다. 이 거짓 신들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고 들어온 것입니다. 14-15절 결과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십니다. 이에 이스라엘의 괴로움이 심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손은 치료와 치유 은혜와 사라으이 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는 순간 재앙과 거친 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사랑과 반대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언약을 깨뜨린 백성을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시는 거룩한 사랑의 행동입니다.

2.
16 여호와께서 사사들을 세우사 노략자의 손에서 그들을 구원하게 하셨으나
17 그들이 그 사사들에게도 순종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다른 신들을 따라가 음행하며 그들에게 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하던 그들의 조상들이 행하던 길에서 속히 치우쳐 떠나서 그와 같이 행하지 아니하였더라
18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사사들을 세우실 때에는 그 사사와 함께 하셨고 그 사사가 사는 날 동안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대적에게 압박과 괴롭게 함을 받아 슬피 부르짖으므로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셨음이거늘
19 그 사사가 죽은 후에는 그들이 돌이켜 그들의 조상들보다 더욱 타락하여 다른 신들을 따라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고 그들의 행위와 패역한 길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므로

16-19절은 사사시대의 신앙적 패턴을 잘 보여주고 있는 본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숭배로 타락하게 됩니다 → 고통에 몸 부림 치며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 하나님은 사사를 보내시어 이들을 구원하십니다 → 사사가 죽고 더 타락하게 됩니다. 성경은 19절은 그들의 해위와 패역이 그치지 아니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본문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죄의 반복보다는 절대적 하나님의 ‘은혜의 반복’에 집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은 7번 70번까지라도 용서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를 지어라가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더욱 주님의 사랑을 알고 죄를 짓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반복되는 죄의 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사사기의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나는 같은 죄를 계속 반복하고 있지는 않은가?” 회개는 단순히 죄를 후회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방향에서 하나님께로 방향을 돌리는 것입니다.

3.
20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여 이르시되 이 백성이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명령한 언약을 어기고 나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였은즉
21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 둔 이방 민족들을 다시는 그들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22 이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조상들이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을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23 여호와께서 그 이방 민족들을 머물러 두사 그들을 속히 쫓아내지 아니하셨으며 여호수아의 손에 넘겨 주지 아니하셨더라

20절 죄 가운데 하나님은 진노하십니다. 이는 이들이 명령을 어긴 까닭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21절 이 일로 하나님께서도 가나안 족속을 남겨 두심으로 이스라에을 괴롭게 하십니다. 22절 이는 그들을 시험하기 위함이라 말씀하십니다. 시험의 목적은? 돌아와 돌이키는 것입니다. 순종으로 훈련되기 위함입니다. 23절 이반 민족 가운데서에서 시험하심은? 죄 가운데 놓아 두심으로 이들이 하나님을 선택할 것인지, 가나안 문화 이방신을 선택할 것인지를 살펴보시는 것입니다. 가나안은 이스라엘 족속의 시험 거리였습니다. 시험 거리는 이겨내면 상급이 됩니다. 시험인 동시에 상급의 기회입니다. 

신앙은 유혹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믿음이 좋다는 것은 유혹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닙니다.오히려 더 많은 시험을 이겨내고 승리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유혹이 있는 가운데서도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라고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반복된 죄와 잘못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모든 시험 거리가 상급이 되는 승리가 있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사기 3:1-11

1.
1 여호와께서 가나안의 모든 전쟁들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
2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남겨 두신 이방 민족들은
3 블레셋의 다섯 군주들과 모든 가나안 족속과 시돈 족속과 바알 헤르몬 산에서부터 하맛 입구까지 레바논 산에 거주하는 히위 족속이라
4 남겨 두신 이 이방 민족들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그들의 조상들에게 이르신 명령들을 순종하는지 알고자 하셨더라
5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은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가운데에 거주하면서
6 그들의 딸들을 맞아 아내로 삼으며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고 또 그들의 신들을 섬겼더라

오늘 본문은 시험의 자리에서 드러난 이스라엘의 신앙의 실체와 그 자리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1-4절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시험하십니다. 2절 이방민족을 남겨 주심으로 전쟁하게 하십니다. 4절 시험의 목적은? 이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지에 있었습니다. 

“시험의 자리”는 반드시 나쁜 자리만은 아닙니다. 이 부분이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족속은 시험거리였지만, 동시에 믿음을 훈련하는 자리였습니다. 2절에는 “전쟁을 알게 하며”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전쟁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믿음으로 싸우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따라서 시험은 두 가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시험 → 믿음의 성장’을 또는 ‘시험 → 타협과 타락’입니다. 같은 환경에서도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고, 어떤 사람은 세상과 타협합니다. 시험은 하나님을 버릴 이유가 아니라 하나님을 선택할 기회입니다. 우리에게도 여러 가지 가나안이 있습니다. 돈, 성공, 명예, 쾌락, 세상의 가치관, 인간관계…등, 문제는 시험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아닙니다. 시험 가운데 누구를 선택하느냐입니다. 시험의 자리는 믿음이 죽는 자리가 아니라 믿음이 증명되는 자리입니다.

5-6절 이스라엘은 시험의 자리가운데 타협과 타락의 길을 선택합니다. 타락의 과정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5절 함께 거주하며, 6절 통혼하고, 6절 그들의 신을 섬기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사람들을 변화시키지 못했고, 오히려 가나안의 문화와 종교에 동화되었습니다. 타협은 한 번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우상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함께 거주하고 → 관계를 맺고 → 결혼하고 → 결국 우상을 섬겼습니다’ 작은 타협이 큰 타락으로 이어집니다. 죄는 처음부터 하나님을 부인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먼저 하나님과 세상을 함께 섬기라고 유혹합니다.

2.
7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
8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팔 년 동안 섬겼더니
9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그들을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10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그의 손에 넘겨 주시매 옷니엘의 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니라
11 그 땅이 평온한 지 사십 년에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죽었더라

7절 타락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입니다. 앞에서 계속 말씀드린 것처럼, ‘잊어버림’입니다. 잊어버림을 통하여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게 됩니다. 우상숭배가 먼저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이 먼저입니다. 하나님을 잊으면 우상이 들어옵니다. 하나님을 마음에서 밀어내면 세상의 다른 것이 하나님을 대신합니다. 그래서 사사기의 타락을 한 문장으로 말하면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이 모든 타락의 시작이었다.”입니다.

8절 결과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여기서 “파셨다”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징계를 통해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되돌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렸지만, 하나님은 완전히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심판은 사사기에서 끝이 아니라 구원의 시작점이 됩니다.

9절 고통 가운데 시작되는 구원의 역사입니다. 여기가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이스라엘은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우상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부르짖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놀라운 것은 이스라엘이 완전히 회복된 후에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통 가운데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구원의 손을 내미셨습니다.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을 여십니다. 사사기의 가장 큰 위로입니다. 이스라엘은 반복해서 넘어졌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부르짖는 자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10-11절 드디어 최초의 사사가 세워집니다. 옷니엘입니다. 옷니엘은 이미 1:11-15절에서 등장하였습니다. 옷니엘은 유다지파 용사이며, 갈렙의 사위입니다. 1장에서 갈렙이 가나안 기럇 베벨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애를 먹고 있을 때 믿음과 용기를 내어서 점령한 믿음의 용사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였습니다. 사사기 전체에서 하나님의 영이란 단어는 7번 등장합니다. 즉 하나님의 영이 임함은? 하나님이 구원의 주체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사사를 세우시고 → 성령을 부으시고 → 사사를 사용하셔서 → 이스라엘을 구원하십니다. 따라서 사사기의 중심인물은 사실 사사들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구원 이후 평안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시험의 자리에서 믿음을 지키게 하시고,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으로 이 시대의 거룩한 주의 자녀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사기 3:12-31

1.
12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므로 여호와께서 모압 왕 에글론을 강성하게 하사 그들을 대적하게 하시매
13 에글론이 암몬과 아말렉 자손들을 모아 가지고 와서 이스라엘을 쳐서 종려나무 성읍을 점령한지라
14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왕 에글론을 열여덟 해 동안 섬기니라

옷니엘 이후 40년을 평화롭게 지내던 이스라엘입니다. 12절 그런데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또’ 악을 행하였습니다. 또는 죄와 불신의 반복입니다. 고칠 수 없는 인간의 악한 성품이며, 인간의 연악함의 실체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모압와 에글론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대적하게 하십니다. 13절 종려나무 성읍(여리고)를 정렴하고, 14절 18년 동안 이스라엘을 압제하고 섬기게 합니다. 

죄를 선택한 댓가는 죄의 지배를 받고 죄로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죄는 반드시 사람을 다시 종으로 만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도 다시 죄를 지었습니다. 죄는 자유를 약속하지만 결국 종이 되게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죄를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2.
15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우셨으니 그는 곧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그를 통하여 모압 왕 에글론에게 공물을 바칠 때에
16 에훗이 길이가 한 규빗 되는 좌우에 날선 칼을 만들어 그의 오른쪽 허벅지 옷 속에 차고
17 공물을 모압 왕 에글론에게 바쳤는데 에글론은 매우 비둔한 자였더라
18 에훗이 공물 바치기를 마친 후에 공물을 메고 온 자들을 보내고
19 자기는 길갈 근처 돌 뜨는 곳에서부터 돌아와서 이르되 왕이여 내가 은밀한 일을 왕에게 아뢰려 하나이다 하니 왕이 명령하여 조용히 하라 하매 모셔 선 자들이 다 물러간지라
20 에훗이 그에게로 들어가니 왕은 서늘한 다락방에 홀로 앉아 있는 중이라 에훗이 이르되 내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왕에게 아뢸 일이 있나이다 하매 왕이 그의 좌석에서 일어나니
21 에훗이 왼손을 뻗쳐 그의 오른쪽 허벅지 위에서 칼을 빼어 왕의 몸을 찌르매
22 칼자루도 날을 따라 들어가서 그 끝이 등 뒤까지 나갔고 그가 칼을 그의 몸에서 빼내지 아니하였으므로 기름이 칼날에 엉겼더라
23 에훗이 현관에 나와서 다락문들을 뒤에서 닫아 잠그니라
24 에훗이 나간 후에 왕의 신하들이 들어와서 다락문들이 잠겼음을 보고 이르되 왕이 분명히 서늘한 방에서 그의 발을 가리우신다 하고
25 그들이 오래 기다려도 왕이 다락문들을 열지 아니하는지라 열쇠를 가지고 열어 본즉 그들의 군주가 이미 땅에 엎드러져 죽었더라
26 그들이 기다리는 동안에 에훗이 피하여 돌 뜨는 곳을 지나 스이라로 도망하니라

15절 18년 동안 이스라엘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고통의 결과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구원을 요청합니다. 이에 하나님은 한 구원자를 세우시고 이스라엘을 고통 가운데 건져주시고 구원해 주십니다. 2번 째 사사는 왼손잡이 에훗입니다. 에훗을 볼 때 우리는 왼손잡이에 주목을 해야 합니다. 에훗이 왼손잡이였다는 것은 단순히 사실이 아닙니다. 히브리어는 אִטֵּר יַד־יְמִינוֹ(잇테르 야드 예미노)로, 직역하면 “그의 오른손이 묶인 사람”, 또는 “오른손을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에훗은 단순히 오늘날 의미의 왼손잡이였을 수도 있지만, 오른손 사용에 장애가 있던 사람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으로 온전하고 능력있는 자를 들어서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약점과 연약함을 가진 자를 들어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약점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강점이 되고,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16-23절은 에훗의 지혜와 가감한 행동으로 대적 에글론을 물리치는 장면입니다. 에훗은 에글론에게 공물을 바친 후 사람들을 돌려보냅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말합니다. “왕이여 내가 은밀한 일을 왕에게 아뢰려 하나이다.” 에글론은 사람들을 물러가게 합니다. 그리고 에훗이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왕에게 아뢸 일이 있나이다.” 그리고 숨겨두었던 칼을 꺼내 에글론을 찌릅니다. 여기서 본문은 상당히 구체적으로 사건을 기록합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을 압제하던 모압 왕 에글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이스라엘의 구원이라는 사사 시대의 역사적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3.
27 그가 이르러 에브라임 산지에서 나팔을 불매 이스라엘 자손이 산지에서 그를 따라 내려오니 에훗이 앞서 가며
28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따르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원수들인 모압을 너희의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하매 무리가 에훗을 따라 내려가 모압 맞은편 요단 강 나루를 장악하여 한 사람도 건너지 못하게 하였고
29 그 때에 모압 사람 약 만 명을 죽였으니 모두 장사요 모두 용사라 한 사람도 도망하지 못하였더라
30 그 날에 모압이 이스라엘 수하에 굴복하매 그 땅이 팔십 년 동안 평온하였더라

27-28절 에글론을 물리친 에훗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군대를 모우고, 29절 모압 사람 만명을 쳐서 승리하게 됩니다. 30절 그리고 다시 이스라엘에 80년의 평화가 찾아오게 됩니다. 하나님은 부족하고 연약한 한 사람 에훗을 통하여 민족을 구원해 주십니다. 진짜 구원자는 에훗을 들어 사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에훗은 하나님의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사 에훗의 이야기는 결국 에훗의 위대함을 말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우셨으니” 이것이 핵심입니다. 이스라엘이 강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에훗이 위대한 영웅이어서 구원받은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자를 세우셨기 때문에 구원받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누구를 의지하고 살아가는가?” 죄의 압제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분은 결국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평범한 한 사람을 붙드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용하십니다.

사랑의 아버지!!
주님, 나의 약함을 보지 말게 하시고 나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사기 4:1-10

1.
1 에훗이 죽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
2 여호와께서 하솔에서 통치하는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셨으니 그의 군대 장관은 하로셋 학고임에 거주하는 시스라요
3 야빈 왕은 철 병거 구백 대가 있어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했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1절 에훗 때 80년을 평화로 지내던 이스라엘이 에훗 사후 또 하나님앞에 악을 행하게 됩니다. 우리는 평안의 때에 신앙생활의 위험에 빠져들기 쉬운 것입니다. 2절 하나님은 가나안 왕 야빈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징계하십니다. 3절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는 철병거 구백대를 소유한 강력한 군대입니다. 철 병거 900대는 강력한 군사력입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도저히 상대하기 어려운 군사력입니다. 이에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께 부르짖어 구원을 요청합니다. 사사 시대 이스라엘은 동일한 패턴으로 죄를 반복하며 하나님을 시험합니다. 

2.
4 그 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
5 그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하였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더라
6 드보라가 사람을 보내어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납달리 게데스에서 불러다가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지 아니하셨느냐 너는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으로 가라
7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의 병거들과 그의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 하셨느니라
8 바락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도 가지 아니하겠노라 하니
9 이르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그러나 네가 이번에 가는 길에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 하고 드보라가 일어나 바락과 함께 게데스로 가니라
10 바락이 스불론과 납달리를 게데스로 부르니 만 명이 그를 따라 올라가고 드보라도 그와 함께 올라가니라

4절 그 때 하나님은 여 선지자 드보라를 들어서 사사로 세웁니다. 앞장에서 왼손잡이 에훗을 사용하심처럼 하나님은 여자를 들어서 사사로 사용하십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남성 중심의 사회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여선지자 드보라를 사사로 세우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한 사람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계속해서 인간의 예상과 다른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모세 — 말이 능하지 못한 사람, 다윗 — 어린 목동, 기드온 — 가장 약한 집안, 드보라 — 여선지자, 베들레헴 — 작은 성읍에서 메시아가 나옴, 십자가 — 세상이 보기에 가장 약하고 어리석은 방법.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드보라는 어떤 여인입니까?
5절 사람들을 재판해 줄 만큼 지혜로운 여인이었습니다. 드보라의 뜻이? 꿀벌입니다. 즉 전쟁과 압제로 고통받는 백성들에게 꿀과 같은 달가움과 공정함을 주었던 여인이었습니다. 
6절 드보라는 자기의 이름을 높이는 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세워 높일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락을 전면에 세워서 일하며 자신은 뒤에서 겸손하게 설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6절 ‘하나님께서 이같이 명령하지 아니하셨느냐?’ 말씀을 담대하게 선포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눈치 보지 않고 말씀대로 전하고 증거할 수 있는 배포와 담대함이 있었습니다. 
8-9, 10절 약속과 신의에 사람이었습니다. 두려워하는 바락앞에 약속하며 자신이 뱉은 말에 대한 책임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이끄시고 인도하시며 속박과 압제에서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방법대로 또는 담대함과 신뢰함으로 주 앞에 온전히 쓰임 받는 주의 종이 되어야겠습니다. 

사랑의 아버지!!
부족한 자를 들어 사용하시는 하나님, 오늘도 주님의 손에 사용되고 쓰임 받는 주의 자녀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사기 4:11-24

1.
11 모세의 장인 호밥의 자손 중 겐 사람 헤벨이 자기 족속을 떠나 게데스에 가까운 사아난님 상수리나무 곁에 이르러 장막을 쳤더라
12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이 다볼 산에 오른 것을 사람들이 시스라에게 알리매
13 시스라가 모든 병거 곧 철 병거 구백 대와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을 하로셋학고임에서부터 기손 강으로 모은지라
14 드보라가 바락에게 이르되 일어나라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네 손에 넘겨 주신 날이라 여호와께서 너에 앞서 나가지 아니하시느냐 하는지라 이에 바락이 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에서 내려가니
15 여호와께서 바락 앞에서 시스라와 그의 모든 병거와 그의 온 군대를 칼날로 혼란에 빠지게 하시매 시스라가 병거에서 내려 걸어서 도망한지라
16 바락이 그의 병거들과 군대를 추격하여 하로셋학고임에 이르니 시스라의 온 군대가 다 칼에 엎드러졌고 한 사람도 남은 자가 없었더라

승리를 미리 준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11절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은 미리 일하고 계십니다. 갑자기 헤벨과 그의 아내 야엘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우리는 처음 읽으면 왜 갑자기 이 이야기가 나오는지 의아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한 역사적 정보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시스라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계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바락이 군대를 모으기 전에, 시스라가 전쟁터로 나오기 전에, 야엘이 시스라를 만나는 것보다 훨씬 전에, 하나님께서는 헤벨의 장막을 그곳에 옮겨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눈앞에서 일어나는 사건만 보고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이미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사건보다 먼저 움직입니다. 오늘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도 하나님께서는 이미 사용하고 계실 수 있습니다. 내가 아직 모르는 하나님의 준비가 있다. 그래서 믿음은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심을 아는 것입니다.

12-13절 시스라는 전쟁을 준비합니다. 시스라는 바락이 다볼산에 올라갔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리고 병거 900대를 이끌고 나옵니다. 당시 철 병거 900대는 엄청난 군사력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도저히 상대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시스라의 군대, 강력한 군사력, 철 병거 900대, 20년 동안 이스라엘을 압제한 세력입니다. 도저히 이길수 없는 대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승리를 준비하고 계획하시고 결국 승리를 주십니다. 승리의 원인은 군사력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14절 드보라는 싸워보지고 않은 승리를 믿음 가운데 장담합니다. “여호와께서 너보다 앞서 나가지 아니하시느냐” 바락이 앞장서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먼저 가십니다. 바락이 싸우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싸우십니다. 바락이 승리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십니다. 이것이 사사기의 중요한 신앙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앞서가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15-16절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 바락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 

2.
17 시스라가 걸어서 도망하여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에 이르렀으니 이는 하솔 왕 야빈과 겐 사람 헤벨의 집 사이에는 화평이 있음이라
18 야엘이 나가 시스라를 영접하며 그에게 말하되 나의 주여 들어오소서 내게로 들어오시고 두려워하지 마소서 하매 그가 그 장막에 들어가니 야엘이 이불로 그를 덮으니라
19 시스라가 그에게 말하되 청하노니 내게 물을 조금 마시게 하라 내가 목이 마르다 하매 우유 부대를 열어 그에게 마시게 하고 그를 덮으니
20 그가 또 이르되 장막 문에 섰다가 만일 사람이 와서 네게 묻기를 여기 어떤 사람이 있느냐 하거든 너는 없다 하라 하고
21 그가 깊이 잠드니 헤벨의 아내 야엘이 장막 말뚝을 가지고 손에 방망이를 들고 그에게로 가만히 가서 말뚝을 그의 관자놀이에 박으매 말뚝이 꿰뚫고 땅에 박히니 그가 기절하여 죽으니라
22 바락이 시스라를 추격할 때에 야엘이 나가서 그를 맞아 그에게 이르되 오라 네가 찾는 그 사람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매 바락이 그에게 들어가 보니 시스라가 엎드러져 죽었고 말뚝이 그의 관자놀이에 박혔더라

17절 전쟁에 패한 시스라는 모든 것을 놓고 도망갑니다. 그리고 도망중에 어느 야엘이라는 어느 여인의 집에 숨어 들어가게 됩니다. 성경은 겐 사람 헤벨의 집과 하솔왕 야빈 사이에 어떤 평화조약이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시스라는 안심하고 이 여인의 집으로 숨어 들었던 것입니다. 18-20절 야엘은 숨어 들어온 시스라에게 먹을 것을 주고 도와주며 표면적으로 도와주었습니다. 21절 야엘은 깊이 잠든 시스라를 죽이게 됩니다. 하나님은 여인의 손을 들어서 이스라엘의 원수를 갚은 것입니다. 

사실 본문에서 시스라를 죽인 사람은 바락이나 헤벨의 손이 아니라, 아무 빛도 없고 힘도 없는 여인 야엘의 손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하여 다시한번 나라와 인생의 운명의 주체가 하나님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① 강한 자가 항상 승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자가 승리하는 것입니다. 시스라는 강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강함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철 병거 900대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② 하나님은 절대 예상하지 못한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바락만이 아니라 야엘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도 “나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다.”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름 없는 사람, 평범한 사람,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사람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일을 이루십니다. ③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도 진행됩니다. 시스라는 자신이 도망쳐서 살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하나님의 심판을 향해 도망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사람은 자기 길을 계획하지만 하나님은 그 길까지 사용하십니다. 

사랑의 아버지!!
인생의 승패가 하나님께 있음을 다시 한번 고백합니다. 주님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이기며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사기 5:1-18

1.
1 이 날에 드보라와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이 노래하여 이르되
2 이스라엘의 영솔자들이 영솔하였고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여호와를 찬송하라
3 너희 왕들아 들으라 통치자들아 귀를 기울이라 나 곧 내가 여호와를 노래할 것이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4 여호와여 주께서 세일에서부터 나오시고 에돔 들에서부터 진행하실 때에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물을 내리고 구름도 물을 내렸나이다
5 산들이 여호와 앞에서 진동하니 저 시내 산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진동하였도다

드보라와 바락은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노래합니다. 승리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드보라와 바락이 노래하면서 가장 먼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왜냐하면 이 전쟁은 단순한 이스라엘과 가나안의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압제하던 세력과 하나님 사이의 영적 전쟁이었기 때문입니다.

2.
6 아낫의 아들 삼갈의 날에 또는 야엘의 날에는 대로가 비었고 길의 행인들은 오솔길로 다녔도다
7 이스라엘에는 마을 사람들이 그쳤으니 나 드보라가 일어나 이스라엘의 어머니가 되기까지 그쳤도다
8 무리가 새 신들을 택하였으므로 그 때에 전쟁이 성문에 이르렀으나 이스라엘의 사만 명 중에 방패와 창이 보였던가
9 내 마음이 이스라엘의 방백을 사모함은 그들이 백성 중에서 즐거이 헌신하였음이니 여호와를 찬송하라
10 흰 나귀를 탄 자들, 양탄자에 앉은 자들, 길에 행하는 자들아 전파할지어다
11 활 쏘는 자들의 소리로부터 멀리 떨어진 물 긷는 곳에서도 여호와의 공의로우신 일을 전하라 이스라엘에서 마을 사람들을 위한 의로우신 일을 노래하라 그 때에 여호와의 백성이 성문에 내려갔도다

6-8절은 과거의 회상입니다. 6절 가나안의 압제로 인하여 백성들이 숨어다니고, 7절 이스라엘 마을이 죽은 마을처럼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무엇때문입니까? 8절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새 신을 선택한 까닭입니다. 전쟁이 이르렀으나, 사만명의 군사(당시 이스라엘의 군사력)에게 방패와 창이 보이지 않는 암울한 시기였습니다. 

9-11절 그 때 하나님은 드보라를 사사로 세우시고, 당시 지도자들로 헌신하며 기쁜 마음으로 전쟁에 참가토록하였습니다. 10절 힌 나귀를 탄 신분 높은 사람이나, 양탄자에 앉은 안락하고 평안한 사람이나, 길에서 행하는 일반 백성이나, 서로 다른 형편의 사람들이 함께 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이 회복입니다. 8절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선택했을 때 방패와 창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9절 그러나 하나님께서 백성의 마음을 움직이시자 지도자들이 즐거이 헌신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0절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함께 참여했으며, 11절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을 선포했다.

3.
12 깰지어다 깰지어다 드보라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너는 노래할지어다 일어날지어다 바락이여 아비노암의 아들이여 네가 사로잡은 자를 끌고 갈지어다
13 그 때에 남은 귀인과 백성이 내려왔고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용사를 치시려고 내려오셨도다
14 에브라임에게서 나온 자들은 아말렉에 뿌리 박힌 자들이요 베냐민은 백성들 중에서 너를 따르는 자들이요 마길에게서는 명령하는 자들이 내려왔고 스불론에게서는 대장군의 지팡이를 잡은 자들이 내려왔도다
15 잇사갈의 방백들이 드보라와 함께 하니 잇사갈과 같이 바락도 그의 뒤를 따라 골짜기로 달려 내려가니 르우벤 시냇가에서 큰 결심이 있었도다
16 네가 양의 우리 가운데에 앉아서 목자의 피리 부는 소리를 들음은 어찌 됨이냐 르우벤 시냇가에서 큰 결심이 있었도다
17 길르앗은 요단 강 저쪽에 거주하며 단은 배에 머무름이 어찌 됨이냐 아셀은 해변에 앉으며 자기 항만에 거주하도다
18 스불론은 죽음을 무릅쓰고 목숨을 아끼지 아니한 백성이요 납달리도 들의 높은 곳에서 그러하도다

싸움에 참여한 지파와 참여하지 않은 지파에 대한 말씀입니다. 12-15절 에브라임, 베냐민, 마길(므낫세), 잇사갈을 칭찬합니다. 그러나 15-18절 르우벤, 길르앗, 단과 아셀지파는 책망하십니다. 

① 르우벤 — 16절 “르우벤의 시냇가에서는 큰 결심이 있었도다.” 그러나 16절 “네가 양의 우리 가운데 앉아서 양 떼의 부르짖음을 들음은 어찌함이냐” “큰 결심”은 있었지만 행동이 없었습니다. 르우벤 사람들은 생각하고 고민했습니다. “나가서 싸워야 하나?” “우리도 참여해야 하나?” 그러나 결국 양 떼 가운데 머물렀습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결심은 있었지만 헌신이 없었습니다. 

르우벤은 생각만 하고 행동하지 않은 신앙입니다. 르우벤의 문제는 전쟁의 필요성을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이런 모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가 잘되어야지.” “다음 세대가 중요하지.” “전도가 필요하지.” “기도해야지.” 그런데 생각만 있고 헌신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좋은 생각보다 순종하는 행동입니다.

② 길르앗은 자기 자리에 머문 사람들입니다. 17절 “길르앗은 요단 강 저쪽에 거주하며” 길르앗도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역에 머물렀습니다. 전쟁은 다른 곳에서 일어나고 있었지만 자기 생활을 지키는 데 머물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보다 내 삶의 안전과 편안함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신앙입니다.

③ 단과 아셀은 자기 이익에 머문 사람들입니다. 17절 “단은 배에 머물렀고 아셀은 해변에 앉아 자기 항구에 머물렀도다.” 이 말씀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단“배에 머물렀고” 자신의 생업과 생활에 머물렀습니다. 아셀 “자기 항구에 머물렀도다.” 자기 영역과 자기 안전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나는 내 삶을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목숨을 거는 자와 스스로만을 지켜려는 자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24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합니까? 자기 생명만을 지키려는 사람과 하나님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사람입니다. 자기 생명을 지키려는 사람은 자기 항구에 머물지만, 하나님의 일을 위해 자신을 드리는 사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전쟁터로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지키지 못하면 나의 터전은 없는 것입니다. 나라 없는 가정이 없고, 개인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일어나 싸우실 때에 우리도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함께 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사기 5:19-31

1.
19 왕들이 와서 싸울 때에 가나안 왕들이 므깃도 물 가 다아낙에서 싸웠으나 은을 탈취하지 못하였도다
20 별들이 하늘에서부터 싸우되 그들이 다니는 길에서 시스라와 싸웠도다
21 기손 강은 그 무리를 표류시켰으니 이 기손 강은 옛 강이라 내 영혼아 네가 힘 있는 자를 밟았도다
22 그 때에 군마가 빨리 달리니 말굽 소리가 땅을 울리도다

5장은 드보라와 바락의 승전가입니다. 19-22절은 계속된 노래와 찬양입니다. 드보라와 바락은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19절 가나안 왕들이 이스라엘을 치려왔지만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합니다. 므깃도 물 가 다아낙은 평지 지역입니다. 때문에 철병거로 싸우기 좋은 지역이었습니다. 20절 그러나 별들이 하늘로부터 싸우되-하나님께서 자연적 질서를 움직여서 이 싸움에 개입하십니다. 21절 하늘에서 비를 내리고 기손 강을 넘치게 하심으로 강력한 철병거가 아무런 쓸모가 없도록 만들어 버렸습니다. 22절 이에 군마들이 빨리 달리니-가나안 시스라의 철병거 군대가 패배로 인하여 도망가기 바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① 내가 싸우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싸우십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시스라의 철 병거 같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합니다. “사사기 4:14 여호와께서 너에 앞서 나가지 아니하시느냐?” 내가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애쓰기보다 먼저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② 하나님은 자연환경까지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특별한 기적만 사용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비, 강물, 진흙, 환경, 사람, 상황까지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상황을 보면서 “이 상황에서는 불가능하다.”라고 단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상황을 바꾸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23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에 메로스를 저주하라 너희가 거듭거듭 그 주민들을 저주할 것은 그들이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도와 용사를 치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도다
24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은 다른 여인들보다 복을 받을 것이니 장막에 있는 여인들보다 더욱 복을 받을 것이로다
25 시스라가 물을 구하매 우유를 주되 곧 엉긴 우유를 귀한 그릇에 담아 주었고
26 손으로 장막 말뚝을 잡으며 오른손에 일꾼들의 방망이를 들고 시스라를 쳐서 그의 머리를 뚫되 곧 그의 관자놀이를 꿰뚫었도다
27 그가 그의 발 앞에 꾸부러지며 엎드러지고 쓰러졌고 그의 발 앞에 꾸부러져 엎드러져서 그 꾸부러진 곳에 엎드러져 죽었도다

본문은 메로스의 저주와 야엘의 축복을 대조합니다. 같은 전쟁을 놓고 한쪽은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지 않아 책망과 저주를 받고, 다른 한쪽은 자신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아 복을 받습니다.

23절 메로스를 저주하라입니다. 메로스는 이 전쟁 당시 이스라엘을 도울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지역으로 보입니다. 정확한 위치는 확실하지 않지만, 시스라와의 전투가 벌어진 지역과 가까웠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메로스 사람들은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죄는 단지 악한 일을 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주신 일을 하지 않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기도해야 할 때 기도하지 않는 것. 전도해야 할 때 침묵하는 것. 섬겨야 할 때 외면하는 것. 교회를 세워야 할 때 방관하는 것. 어려운 성도를 도울 수 있는데 외면하는 것. 이것이 바로 방관하는 신앙의 위험성입니다. 24-27절 반면 야엘은 복을 받습니다. 한 평범한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신앙의 자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에 동참합니다. 

메로스와 야엘을 성경은 의도적으로 비교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선택하고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① 축복은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사람에게 나타납니다. 야엘의 축복은 단순히 “착하게 살았기 때문에 받은 복”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녀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의 역사에 결정적인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의미에서 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24절의 “다른 여인들보다 복을 받을 것이니”라는 말씀은 야엘의 행동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 안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를 보여줍니다. ② 하나님께서는 각자의 자리에서 충성을 요구하십니다. 메로스는 전쟁터에 있었지만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야엘은 전쟁터에 있지 않았지만 자신의 장막에서 하나님께 쓰임받았습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 반드시 특별한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있는 가정에서, 내가 섬기는 교회에서, 내가 일하는 직장에서, 내가 만나는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주신 자리에서 충성하면 됩니다.

3.
28 시스라의 어머니가 창문을 통하여 바라보며 창살을 통하여 부르짖기를 그의 병거가 어찌하여 더디 오는가 그의 병거들의 걸음이 어찌하여 늦어지는가 하매
29 그의 지혜로운 시녀들이 대답하였겠고 그도 스스로 대답하기를
30 그들이 어찌 노략물을 얻지 못하였으랴 그것을 나누지 못하였으랴 사람마다 한두 처녀를 얻었으리로다 시스라는 채색 옷을 노략하였으리니 그것은 수 놓은 채색 옷이리로다 곧 양쪽에 수 놓은 채색 옷이리니 노략한 자의 목에 꾸미리로다 하였으리라
31 여호와여 주의 원수들은 다 이와 같이 망하게 하시고 주를 사랑하는 자들은 해가 힘 있게 돋음 같게 하시옵소서 하니라 그 땅이 사십 년 동안 평온하였더라

28절 시스라의 어머니는 헛된 기대를 가집니다. 전쟁에 나간 아들이 왜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지? 걱정하며 기다립니다. 29-30절 이 물음에 지혜로운 시녀들이 대답합니다. 그들은 시스라가 전쟁에서 승리하여 전리품을 가져오느라 늦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당시 전쟁에서 약탈과 포로가 전리품으로 취급되던 잔혹한 현실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철저한 착각이었습니다. 그들이 기대했던 것은 ‘승리 → 약탈 → 전리품 → 귀환’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 결과는 ‘전쟁 → 패배 → 도망 → 죽음’이었습니다.

인간의 헛된 소망과 꿈입니다. 인간의 꿈을 절대화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우고 이루지 않으시면 이룰 수 없습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는 일을 확정된 것처럼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기 전까지는 받은 것이 아닙니다. 시스라의 어머니는 돌아올 병거를 꿈꾸었지만, 그 병거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소망은 헛될 수 있지만,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의 사역을 방관하지 않으며 동참하시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과 비전으로 헛된 인생을 이길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사기 6:1-24

1.
1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칠 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넘겨 주시니
2 미디안의 손이 이스라엘을 이긴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산에서 웅덩이와 굴과 산성을 자기들을 위하여 만들었으며
3 이스라엘이 파종한 때면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이 치러 올라와서
4 진을 치고 가사에 이르도록 토지 소산을 멸하여 이스라엘 가운데에 먹을 것을 남겨 두지 아니하며 양이나 소나 나귀도 남기지 아니하니
5 이는 그들이 그들의 짐승과 장막을 가지고 올라와 메뚜기 떼 같이 많이 들어오니 그 사람과 낙타가 무수함이라 그들이 그 땅에 들어와 멸하려 하니
6 이스라엘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궁핍함이 심한지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7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부르짖었으므로
8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한 선지자를 보내시니 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며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여
9 애굽 사람의 손과 너희를 학대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내고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었으며
10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기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 너희가 거주하는 아모리 사람의 땅의 신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였으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셨다 하니라

6장-9장까지 사사 기드온에 대한 말씀입니다. 1절 여선지 드로라 이후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악을 행하게 됩니다. 2절 이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 넘겨 주십니다. 3-6절 미디안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많은 고통을 받게 됩니다. 7절 이후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부르짖고 도움을 요청할 때 8절 하나님은 선지자로 이스라엘을 향하여 말씀하시고 구원의 은총을 다시 허락하십니다. 

8절 하나님의 말씀은 나를 기억하게 하시고, 9-10a절 하나님을 기억하게하시고, 10b절 우리의 죄를 기억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치유하시고 새롭게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때 우리에게 선지자-하나님의 말씀을 보내심으로 우리를 구원해주십니다. 

2.
11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12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매
13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나이까 또 우리 조상들이 일찍이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우리를 넘겨 주셨나이다 하니
14 여호와께서 그를 향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하시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기드온을 찾아오십니다. 11절 기드온은 미디안의 감시와 눈을 피하여 몰래 타작하였습니다. 아직 까지 기드온의 눈에 미디안은 두렵고 겁나는 존재입니다. 12절 이런 기드온에게 하나님은 오셔서 ‘큰 용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현재 겁쟁이 기드온의 모습이 아니라 장래 하나님의 영으로 감동되어 사용될 기드온을 바라보시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기드온입니다. 기드온이 큰 용사가 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13절 그러나 기드온은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이 과거에는 우리를 구원하셨건만, 지금은 왜 침묵하고 계십니까?’질문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넘겨 주셨나이다’ 하나님을 향한 원망합니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린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린 까닭이라고 사사기 6:1절은 분명히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14절 기드온의 질문에 하나님은 사명의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보내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겠다 말씀하십니다.

신앙은 “왜?”에서 “가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기드온은 하나님께 질문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하나님께서는 모든 이유를 설명하시는 대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가라.”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질문에 먼저 답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고 한 걸음 순종하도록 부르십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함께하심입니다. 기드온에게 필요한 것은 군사적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그래서 기드온의 이야기는 결국 “기드온이 얼마나 강했는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드온과 함께하셨는가”의 이야기입니다.

3.
15 그러나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 하니
16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하시니라

15절 기드온은 자신의 약함을 바라봅니다. 14절에서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가서 …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그런데 기드온은 즉시 순종하지 않고 질문합니다.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기드온이 생각하기에는 자신에게는 구원자가 될 만한 조건이 없습니다. 그 이유를 두 가지로 말합니다. ①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자신의 가문이 므낫세 지파 가운데서도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②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 자신은 아버지 집에서도 가장 작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즉 기드온의 논리는 이것입니다. “하나님, 저를 보내실 만한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기드온은 하나님의 능력보다 자신의 조건을 먼저 보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개의 시선이 있습니다. 기드온의 시선 ‘나는 약하다 → 나는 작다 → 나는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시선 ‘내가 너와 함께한다 → 그러므로 가라 → 내가 너를 사용한다’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보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사용하시는가입니다.

16절 이런 기드온에게 하나님은 약속하십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라’ 이는 하나님의 능력의 임재입니다. 기드온의 힘으로가 아닌 하나님의 힘으로입니다. ‘모세도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예레미야도 나는 아이라 말할 줄 알지 못하나이다-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기드온도 동일합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라입니다. 승리는 우리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나의 힘이 아닌 주님의 능력으로 일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사기 6:25-40

1.
25 그 날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네 아버지에게 있는 수소 곧 칠 년 된 둘째 수소를 끌어 오고 네 아버지에게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며 그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
26 또 이 산성 꼭대기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규례대로 한 제단을 쌓고 그 둘째 수소를 잡아 네가 찍은 아세라 나무로 번제를 드릴지니라 하시니라
27 이에 기드온이 종 열 사람을 데리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대로 행하되 그의 아버지의 가문과 그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하므로 이 일을 감히 낮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행하니라

25절 하나님은 기드온을 사사로 부르시고 먼저 미디안과 싸우기 전에 바알과 아세라를 제거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근본적인 문제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는 영적인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우상숭배가 내적인 문제라면, 미디안은 외적인 문제 표면적인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 자신의 내적인 문제를 해결하길 원하십니다. 

26절 헐고 찍어 넘어트린 아세라 나무의 우상을 땔감을 삼아 번제를 드리라 명령하십니다. 이는 우상은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닌 나무 조각에 지나지 않음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우상을 무너트리시며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27절 기드온은 여전히 두려움 가운데 행하되 낮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이 모든 일을 행하게 됩니다. 기드온에게 두려움이 있었지만 두려움 보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믿음의 역사가 크게 작용되었습니다. 처음부터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 가운데 하나님을 경험하고 순종하다 보면 더 큰 담대함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실천하고 순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2.
28 그 성읍 사람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본즉 바알의 제단이 파괴되었으며 그 곁의 아세라가 찍혔고 새로 쌓은 제단 위에 그 둘째 수소를 드렸는지라
29 서로 물어 이르되 이것이 누구의 소행인가 하고 그들이 캐어 물은 후에 이르되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이를 행하였도다 하고
30 성읍 사람들이 요아스에게 이르되 네 아들을 끌어내라 그는 당연히 죽을지니 이는 바알의 제단을 파괴하고 그 곁의 아세라를 찍었음이니라 하니
31 요아스가 자기를 둘러선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바알을 위하여 다투느냐 너희가 바알을 구원하겠느냐 그를 위하여 다투는 자는 아침까지 죽임을 당하리라 바알이 과연 신일진대 그의 제단을 파괴하였은즉 그가 자신을 위해 다툴 것이니라 하니라
32 그 날에 기드온을 여룹바알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가 바알의 제단을 파괴하였으므로 바알이 그와 더불어 다툴 것이라 함이었더라

28절 기드온에 의해서 바알의 제단을 도륙됩니다. 29절 이 사실을 안 마을 사람들은 분노하여 이 모든 소행의 정체가 기드온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30절 이에 기드온을 죽이기 위해 끌어내려 할 때 31절 아버지 요아스가 나타나 아들을 편들며 ‘만약 바알이 참 신이라면 자신을 위하여 기드온을 처리할 것이라’ 말합니다. 사람이 지켜 주어야 하는 신은 참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상은 사람이 만들어 놓고 사람이 지켜 줍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키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는 사람입니다.

32절 여룹바알은 기드온의 인생을 상징하는 이름입니다. 처음의 기드온은 미디안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후 먼저 자기 아버지 집의 바알 제단을 헐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사람들은 그를 “여룹바알”이라고 부릅니다. 즉, 두려움에 숨어 있던 사람이 우상과 맞서는 사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3.
33 그 때에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이 다 함께 모여 요단 강을 건너와서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친지라
34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에셀이 그의 뒤를 따라 부름을 받으니라
35 기드온이 또 사자들을 온 므낫세에 두루 보내매 그들도 모여서 그를 따르고 또 사자들을 아셀과 스불론과 납달리에 보내매 그 무리도 올라와 그를 영접하더라
36 기드온이 하나님께 여쭈되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거든
37 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 마당에 두리니 만일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주변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을 내가 알겠나이다 하였더니
38 그대로 된지라 이튿날 기드온이 일찍이 일어나서 양털을 가져다가 그 양털에서 이슬을 짜니 물이 그릇에 가득하더라
39 기드온이 또 하나님께 여쭈되 주여 내게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말하리이다 구하옵나니 내게 이번만 양털로 시험하게 하소서 원하건대 양털만 마르고 그 주변 땅에는 다 이슬이 있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40 그 밤에 하나님이 그대로 행하시니 곧 양털만 마르고 그 주변 땅에는 다 이슬이 있었더라

기드온이 양털 시험을 한 의도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해서라기보다 두려움 가운데 확신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기드온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자신이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지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기드온은 계속해서 “정말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는가?”를 확인하려는 의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기드온을 책망하지 않으셨을까요? 이것이 이 본문의 가장 은혜로운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의 연약함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요청을 받아 주셨습니다. 특히 39절을 보면 기드온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게 노하지 마옵소서” 기드온 자신도 하나님께 계속 표징을 요구하는 것이 조심스러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내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이 강한 사람만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믿음을 붙들어 강하게 하시면서 사용하십니다.

사랑의 아버지!!
우리 안에 먼저 우상의 죄를 찍어 불태우게 하시고, 여룹바알과 같이 우상과 더불어 싸워 승리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사기 7:1-14

1.
1 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과 그를 따르는 모든 백성이 일찍이 일어나 하롯 샘 곁에 진을 쳤고 미디안의 진영은 그들의 북쪽이요 모레 산 앞 골짜기에 있었더라
2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3 이제 너는 백성의 귀에 외쳐 이르기를 누구든지 두려워 떠는 자는 길르앗 산을 떠나 돌아가라 하라 하시니 이에 돌아간 백성이 이만 이천 명이요 남은 자가 만 명이었더라
4 여호와께서 또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아직도 많으니 그들을 인도하여 물 가로 내려가라 거기서 내가 너를 위하여 그들을 시험하리라 내가 누구를 가리켜 네게 이르기를 이 사람이 너와 함께 가리라 하면 그는 너와 함께 갈 것이요 내가 누구를 가리켜 네게 이르기를 이 사람은 너와 함께 가지 말 것이니라 하면 그는 가지 말 것이니라 하신지라
5 이에 백성을 인도하여 물 가에 내려가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개가 핥는 것 같이 혀로 물을 핥는 자들을 너는 따로 세우고 또 누구든지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들도 그와 같이 하라 하시더니
6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는 자의 수는 삼백 명이요 그 외의 백성은 다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신지라
7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물을 핥아 먹은 삼백 명으로 너희를 구원하며 미디안을 네 손에 넘겨 주리니 남은 백성은 각각 자기의 처소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
8 이에 백성이 양식과 나팔을 손에 든지라 기드온이 이스라엘 모든 백성을 각각 그의 장막으로 돌려보내고 그 삼백 명은 머물게 하니라 미디안 진영은 그 아래 골짜기 가운데에 있었더라

6장에서 바알과 아세라를 찍어버리고 먼저 내적인 거룩을 이루게 하신 후에 7장에서 하나님은 본격적인 전쟁을 준비하십니다. 

1절 기드온을 중심으로 모인 이스라엘의 군대는 3만 2천명입니다. 사실 미디안 군사에 비하면 3만 2천명의 군대는 결코 많은 군사가 아닙니다. 전쟁을 위해서 군대가 많은 수록 좋은 것입니다. 2절 그런데 하나님은 이 숫자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승리를 이루면 스스로의 능력과 힘으로 이겼다고 자랑하며 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우리가 승리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승리의 주체가 누구인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우리가 이겼다가 아니라, 주님이 이기게 하셨다’입니다. 3절 하나님은 두려워하는 자 2만 2천명을 돌려보내십니다. 전쟁으로 준비되지 못한자를 돌려보내시는 것입니다. 4절 그리고 하나님은 남은 1만명도 다시 헤아리십니다. 5-6절 하나님의 헤아림은 무릎을 꿇지 않고 손으로 물을 마신 자들입니다. 이것 역시 내면에 가지고 있는 정신상태, 영적 상태를 하나님은 진단하신 것입니다. 7절 결국 300명으로 하나님은 미디안 전쟁을 준비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돌려보내라”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사사기 7장의 중요한 메시지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돌려보내라.” 우리는 계속 붙잡으려고 합니다. “사람이 더 필요합니다.” “돈이 더 필요합니다.” “조건이 더 좋아야 합니다.” “힘이 더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그것이 없어도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역사는 사람의 숫자로 결정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의 손을 주님께 올려 드릴 때 주님께서 이루시고 성취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돌려보내실 때 붙잡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중요한 신앙훈련입니다. 하나님께서 “돌려보내라”고 하실 때, 우리는 붙잡으려고 합니다. “이 사람은 꼭 있어야 합니다.” “이 방법은 꼭 필요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려놓으라고 하시면 내려놓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비우신 자리를 하나님께서 다시 채우시기 때문입니다.

2.
9 그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진영으로 내려가라 내가 그것을 네 손에 넘겨 주었느니라
10 만일 네가 내려가기를 두려워하거든 네 부하 부라와 함께 그 진영으로 내려가서
11 그들이 하는 말을 들으라 그 후에 네 손이 강하여져서 그 진영으로 내려가리라 하시니 기드온이 이에 그의 부하 부라와 함께 군대가 있는 진영 근처로 내려간즉
12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의 모든 사람들이 골짜기에 누웠는데 메뚜기의 많은 수와 같고 그들의 낙타의 수가 많아 해변의 모래가 많음 같은지라
13 기드온이 그 곳에 이른즉 어떤 사람이 그의 친구에게 꿈을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내가 한 꿈을 꾸었는데 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영으로 굴러 들어와 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려 위쪽으로 엎으니 그 장막이 쓰러지더라
14 그의 친구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이라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을 그의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하더라

이스라엘이 32,000명에서 300명으로 숫자가 줄어들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절대 승리할 가능성이 없어 보입니다. 9절 하나님은 두려워하는 기드온에게 다시 오셔서 확증해 주십니다. 기드온은 항상 증거와 징표를 구하는 사람입니다(6:17-21절 번제의 징표, 6:36-40절 양털시험). 때문에 하나님은 친히 13절을 통하여 적군의 입을 통하여 승리를 확증해 주십니다. 전쟁은 기세입니다. 이미 미디안은 기세가 꺽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영적 감흥을 통하여 미디안의 기세를 꺽어 버리시고, 오히려 이스라엘의 기세를 높이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사람의 믿음을 세워주십니다. 두려움에 몰래 숨어서 추수하던 기드온을 큰 용사로 부리시고, 말씀을 보내시고 기름부으심으로 여룹바알로 삼으시고, 번제 제사와 양털시험 가운데 확증을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32000명을 돌려보내시며 300명으로 결국 미디안을 물리치기까지  놀라운 은혜와 사랑으로 기드온을 용사로 삼아 키우시고 들어서 사용하십니다. 

오늘 나와 우리의 믿음이 연약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질타하고 비난하지 않으시며 끝까지 돌보심으로 믿음의 사람으로 키워 사용하실 줄 믿습니다. 두려움에서 벗어나 믿음으로 우리가 성장하는 그 날 까지 주께서 우리를 도우시리라 믿습니다. 

사랑의 아버지!!
기드온과 300용사가 되기 까지 믿음으로 경주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사기 7:15-25

1.
15 기드온이 그 꿈과 해몽하는 말을 듣고 경배하며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아와 이르되 일어나라 여호와께서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하고
16 삼백 명을 세 대로 나누어 각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리고 항아리 안에는 횃불을 감추게 하고
17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만 보고 내가 하는 대로 하되 내가 그 진영 근처에 이르러서 내가 하는 대로 너희도 그리하여
18 나와 나를 따르는 자가 다 나팔을 불거든 너희도 모든 진영 주위에서 나팔을 불며 이르기를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 하라 하니라

전쟁을 하기 전에 하나님은 스스로 기드온으로 확신을 주십니다. 적진은 이미 동요되고 있었고 기세가 꺾이고 말았습니다. 15절 기드온은 그들의 말을 듣고,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심을 믿었던 것입니다. 믿음은 승리한 후에 감사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승리를 약속하셨을 때 먼저 미리 경배하는 것입니다. 16절 기드온은 300명의 용사를 세 대로 나누고, 나팔 항아리 횃불로 전쟁에 들어갑니다. 우리는 삼백명을 주목해서 안됩니다. 삼백명이 핵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주어지는 승리가 핵심입니다. 17-18절 기드온은 군대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작전을 지시합니다. 나팔을 불고 – 항아리를 깨뜨리고 – 외쳐라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위하여 다음 기드온을 위하여입니다. “여호와를 위하라” — 전쟁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전쟁의 목적과 주체가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을 선포하는 말입니다. “기드온을 위하라” —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하나되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앞세워야 합니다. 사람을 세우되 하나님보다 앞세우지 말아야 합니다. 기드온을 위하라는 말보다 먼저 ‘여호와를 위하라’고 외쳤습니다. 승리의 중심에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셔야 합니다.

2.
19 기드온과 그와 함께 한 백 명이 이경 초에 진영 근처에 이른즉 바로 파수꾼들을 교대한 때라 그들이 나팔을 불며 손에 가졌던 항아리를 부수니라
20 세 대가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왼손에 횃불을 들고 오른손에 나팔을 들어 불며 외쳐 이르되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다 하고
21 각기 제자리에 서서 그 진영을 에워싸매 그 온 진영의 군사들이 뛰고 부르짖으며 도망하였는데
22 삼백 명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와께서 그 온 진영에서 친구끼리 칼로 치게 하시므로 적군이 도망하여 스레라의 벧 싯다에 이르고 또 답밧에 가까운 아벨므홀라의 경계에 이르렀으며

19절 이경은 밤 10시부터 새벽 2시 사이입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이 주신 작전대로 명을 행합니다. 20절 모두가 명령에 순종하였습니다. 21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명령대로만 움직였을 뿐인데 전진에 난리가 났습니다. 서로 뛰고 부르짖고 도망하며 아비규환 지옥이 되고 맙니다. 22절 모든 전쟁의 결과는? 여호와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이 기드온을 용사로 준비시켰습니다. 그리고 300명을 친히 선발하셨습니다. 결국 승리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순종을 통해 일하십니다. 기드온과 300명은 나팔을 불고 → 항아리를 깨고 → 횃불을 들고 → 외쳤습니다. 그것이 승리의 능력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통로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하십니다. 300명이 미디안 군대를 숫자로 제압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 친구끼리 칼로 치게 하시므로” 우리의 삶에도 이런 순간이 있습니다. 내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 내 지혜로는 풀 수 없는 문제, 내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때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습니다.”

3.
23 이스라엘 사람들은 납달리와 아셀과 온 므낫세에서부터 부름을 받고 미디안을 추격하였더라
24 기드온이 사자들을 보내서 에브라임 온 산지로 두루 다니게 하여 이르기를 내려와서 미디안을 치고 그들을 앞질러 벧 바라와 요단 강에 이르는 수로를 점령하라 하매 이에 에브라임 사람들이 다 모여 벧 바라와 요단 강에 이르는 수로를 점령하고
25 또 미디안의 두 방백 오렙과 스엡을 사로잡아 오렙은 오렙 바위에서 죽이고 스엡은 스엡 포도주 틀에서 죽이고 미디안을 추격하였고 오렙과 스엡의 머리를 요단 강 건너편에서 기드온에게 가져왔더라

23절 미디안 군대가 흩어져 도망할 때 주변에 있던 납달리, 아셀 므낫세 지파 이스라엘 사람들이 합류합니다. 24절 기드온은 에브라임 지파에게 지원을 요청합니다. 25절 결과 미다안 두 방백(우두머리) 오렙과 스엡을 죽임으로 완전한 전쟁을 승리하게 됩니다.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전략과 절대적 순종 그리고 마지막 이스라엘의 연합으로 7년 대적 미디안을 물리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은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순종하고 우리의 자리를 지키면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적은 자가 강한 자를 이깁니다. 하나님이 싸우시면 불가능이 가능해집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내 자리를 지키며 순종하십시오.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싸우는 영적인 군사가 되어 모든 인생의 전쟁으로 승리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사기 8:1-21

1.
1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은 어찌 됨이냐 하고 그와 크게 다투는지라
2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 행한 일이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
3 하나님이 미디안의 방백 오렙과 스엡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으니 내가 한 일이 어찌 능히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하니라 기드온이 이 말을 하매 그 때에 그들의 노여움이 풀리니라

1절 큰 전쟁은 마무리 됩니다. 미디안 군사 12만명은 죽고, 그 남은 자가 만 오천이라고(10절) 기록 되어 있습니다. 전쟁이 마무리 될 때 에브라임 지파는 기드온을 향하여 비난하며 말합니다. ‘왜 전쟁때에 우리를 부르지 않았느냐? 우리를 무시한 것이냐?’다투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에브라임을 부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 자발적 동기로 전쟁이 시작된 것이지 누구를 미워한 상황은 아닙니다.

2-3절 기드온은 싸움을 부치는 에브라임 사람을 향하여 선한 말로 이들의 마음을 풀어줍니다. ‘에브라임의 끝물포도-마지막에 참여하여 오렙과 스엡을 잡은 것, 아비에셀은 기드온이 속한 므낫세 지파인데, 아비에셀의 공적보다 에브라임의 공적이 크다고 그들을 높이 세워줍니다. 이에 에브라임의 노여운 마음이 풀어지게 됩니다.

자칫 잘못하면 서로 오해와 갈등으로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은 기드온은 겸손한 말로 동족간의 위기의 상황을 잘 마무리하게 됩니다. 갈등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는 상대방의 수고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기드온은 “너희가 잘못했다.”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너희가 한 일이 크다.” 라고 인정했습니다. 우리의 가정과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보다 상대방의 수고를 인정해 주는 것이 갈등을 해결하는 길이 됩니다.

2.
4 기드온과 그와 함께 한 자 삼백 명이 요단 강에 이르러 건너고 비록 피곤하나 추격하며
5 그가 숙곳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를 따르는 백성이 피곤하니 청하건대 그들에게 떡덩이를 주라 나는 미디안의 왕들인 세바와 살문나의 뒤를 추격하고 있노라 하니
6 숙곳의 방백들이 이르되 세바와 살문나의 손이 지금 네 손 안에 있다는거냐 어찌 우리가 네 군대에게 떡을 주겠느냐 하는지라
7 기드온이 이르되 그러면 여호와께서 세바와 살문나를 내 손에 넘겨 주신 후에 내가 들가시와 찔레로 너희 살을 찢으리라 하고
8 거기서 브누엘로 올라가서 그들에게도 그같이 구한즉 브누엘 사람들의 대답도 숙곳 사람들의 대답과 같은지라
9 기드온이 또 브누엘 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에 이 망대를 헐리라 하니라
....
15 기드온이 숙곳 사람들에게 이르러 말하되 너희가 전에 나를 희롱하여 이르기를 세바와 살문나의 손이 지금 네 손 안에 있다는거냐 어찌 우리가 네 피곤한 사람들에게 떡을 주겠느냐 한 그 세바와 살문나를 보라 하고
16 그 성읍의 장로들을 붙잡아 들가시와 찔레로 숙곳 사람들을 징벌하고
17 브누엘 망대를 헐며 그 성읍 사람들을 죽이니라

4절 기드온은 남은 패잔병과 미디안의 두 왕 세바와 살문나를 추격하여 마지막 전쟁을 마무리 하려 합니다. 5.8절 이때 너무 피곤하고 배가고파서 숙곳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요청합니다. 그런데 어찐 일인지 숙곳 사람들은 기드온과 용사들을 선대하지 않았습니다. 숙곳, 부누엘은 갓 지파가 속한 곳입니다. 6절 이들은 이스라엘 같은 민족이었지만 기드온을 돕지 않았습니다. ’지금 세바와 살문자의 손이 지금 네 손에 있느나?“ 여전히 미디안이 부활하여 자신들을 보복할까 두려움에 돕지 못했던 것입니다.  7절 9절 이에 기드온은 너희 살을 찢으리라, 망대를 헐리라 보복을 다짐하게 됩니다. 

15-17절은 기드온이 세바와 살문나를 잡은 후 돌아오는 길에 이미 말한대로 숙곳과 브누엘을 징벌하는 말씀입니다. 

3.
18 이에 그가 세바와 살문나에게 말하되 너희가 다볼에서 죽인 자들은 어떠한 사람들이더냐 하니 대답하되 그들이 너와 같아서 하나 같이 왕자들의 모습과 같더라 하니라
19 그가 이르되 그들은 내 형제들이며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니라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만일 그들을 살렸더라면 나도 너희를 죽이지 아니하였으리라 하고
20 그의 맏아들 여델에게 이르되 일어나 그들을 죽이라 하였으나 그 소년이 그의 칼을 빼지 못하였으니 이는 아직 어려서 두려워함이었더라
21 세바와 살문나가 이르되 네가 일어나 우리를 치라 사람이 어떠하면 그의 힘도 그러하니라 하니 기드온이 일어나 세바와 살문나를 죽이고 그들의 낙타 목에 있던 초승달 장식들을 떼어서 가지니라

드디어 기드온은 세바와 살문나를 죽임으로 미디안 전쟁이 마무리 됩니다. 전쟁은 승리했으나 이제부터 더 큰 문제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두려움에 있던 기드온은 큰 용사로 부르시고, 증거와 확신을 주셔서 큰 대군 미디안을 하나님께서 기드온의 손에 주셨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기드온의 마음을 점점 변해 가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개인적인 원한을 앞세우고, 적장 앞에서 왕처럼 행동하고, 자신과 자신의 아들의 위상을 높이며, 마치 이방인의 왕처럼 조금씩 변질 되어 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과 의지가 변질되고 있었습니다. 결국 기드온의 가문은 다시 큰 위기를 경험하게 됩니다. 성을 빼앗는 것보다 마음을 지키는 것이 더 어려운 것입니다. 겸손함으로 하나님을 향한 절대 믿음이 우리 안에서 변질되지 않길 소망합니다. 

사랑의 아버지!!
승리를 주신 하나님 앞에서 늘 겸손하게 하시고, 변함없는 마음과 믿음을 경주할 수 있도록 마음을 붙들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사기 8:22-25

1.
22 그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 하는지라
23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하니라
24 기드온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요청할 일이 있으니 너희는 각기 탈취한 귀고리를 내게 줄지니라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이스마엘 사람들이므로 금 귀고리가 있었음이라
25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가 즐거이 드리리이다 하고 겉옷을 펴고 각기 탈취한 귀고리를 그 가운데에 던지니
26 기드온이 요청한 금 귀고리의 무게가 금 천칠백 세겔이요 그 외에 또 초승달 장식들과 패물과 미디안 왕들이 입었던 자색 의복과 또 그 외에 그들의 낙타 목에 둘렀던 사슬이 있었더라
27 기드온이 그 금으로 에봇 하나를 만들어 자기의 성읍 오브라에 두었더니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위하므로 그것이 기드온과 그의 집에 올무가 되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드디어 미디언 전쟁을 마무리하게 됩니다. 1절 그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을 왕으로 용립하려고 합니다. 22절 그러나 기드온은 이스라엘의 요구를 따르지 않고 말하길 나와 나의 아들은 너희를 다스리지 않을 것이며,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릴 것이라, 상당히 믿음 있는 말로서 백성들에게 선포합니다.

그러나 24절-26절에서 보여주는 행동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24절 기드온은 백성들에게 미디안 전쟁으로 얻게 된 전리품인 금 귀고리를 달라고 합니다. 25절 이에 무리들은 자신들이 얻은 금 귀고리를 기드온 앞에 받치게 됩니다. 26절 모은 금의 무게가 ‘금 천칠백 세겔’이나 되었습니다. 오늘날로 환산하면 대략 20키로(40억) 그램에 해당하는 상당히 많은 양의 무게입니다. 그리고 기타 패물과 옥과 장식품을 요구하며 소유하게 됩니다. 말과 행동이 다른 모습입니다. 말로는 왕으로 살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의 행동으로는 이미 왕의 권력과 부를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27절 더 큰 문제는 ‘에봇’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에봇은 제사장의 옷입니다. 기드온이 어떤 목적에서 에봇을 만들었을까? 학자들은 여러 가지 추측을 합니다. ① 하나님께서 주신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서 ② 하나님께 묻는 종교적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드온이 만든 목적보다는 결과에 있습니다. 백성들이 ‘이 에봇을 우상처럼 심기게 되었다’ 것입니다. 성경은 이를 ‘온 이스라엘이 그 것을 음란하게 위함으로’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기드온이 만든 에봇을 우상으로 위하는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이것이 기드온의 집에 올무가 되고 말았습니다. 즉 기드온이 만든 에봇이 결국 기드온 자신과 그의 가족, 그리고 이스라엘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영적 함정이 되고 말았습니다. 

에봇은 영적으로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우상이 처음부터 우상처럼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기드온은 하나님께서 주신 승리의 전리품으로 에봇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에봇 자체를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기억하기 위한 것 → 하나님 대신 바라보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이것이 올무입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건물이 하나님보다 중요해질 때, 직분이 하나님보다 중요해질 때, 목회자가 하나님보다 중요해질 때, 예배의 형식이 예배의 대상보다 중요해질 때, 물질이나 성공이 하나님보다 중요해질 때, 좋은 것도 하나님을 대신하면 올무가 될 수 있습니다.

2.
28 미디안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복종하여 다시는 그 머리를 들지 못하였으므로 기드온이 사는 사십 년 동안 그 땅이 평온하였더라
29 요아스의 아들 여룹바알이 돌아가서 자기 집에 거주하였는데
30 기드온이 아내가 많으므로 그의 몸에서 낳은 아들이 칠십 명이었고
31 세겜에 있는 그의 첩도 아들을 낳았으므로 그 이름을 아비멜렉이라 하였더라
32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나이가 많아 죽으매 아비에셀 사람의 오브라에 있는 그의 아버지 요아스의 묘실에 장사되었더라

28-32절 가운데서도 기드온의 나쁜 행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기드온은 말로서는 왕이 되지 않겠다고 겸손하게 선포했지만. 그의 행동 곳곳에서 보여지는 삶의 열매는 이미 왕이었습니다. 

30절 많은 아내를 두었고 칠십명의 아들을 두었습니다. 아내와 아들은 고대에 있어서 권력과 부의 상징입니다. 따라서 본문은 기드온이 공식적으로 왕이 되지는 않았지만, 왕과 같은 사회적·가정적 모습을 갖추어 갔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31절 그리고 그의 아들의 이름이 ‘아비멜렉’입니다. 이는 ‘나의 아버지는 왕이다’라는 뜻입니다. 자녀의 이름은 큰 상징을 가집니다. 어쩌면 마음의 표현이고 삶의 고백입니다. 

언행일치입니다. 우리는 신행일치해야 합니다. 믿는 대로 사는 삶. 신행일치(信行一致)는 더 깊은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교리적으로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이 우리의 선택과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17은 이렇게 말씀합니다.“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그러므로 ‘신앙 → 행동, 믿음 → 삶, 고백 → 순종’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시라고 믿는다면 → 내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왕이시라고 믿는다면 → 내 삶의 결정권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공급자라고 믿는다면 → 물질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다고 믿는다면 → 삶에서도 거룩을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고 믿는다면 →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사랑이 나타나야 합니다.
이같은 신행일치의 삶이 있길 소망합니다.

3.
33 기드온이 이미 죽으매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서서 바알들을 따라가 음행하였으며 또 바알브릿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고
34 이스라엘 자손이 주위의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 자기들을 건져내신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을 기억하지 아니하며
35 또 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이 이스라엘에 베푼 모든 은혜를 따라 그의 집을 후대하지도 아니하였더라

인간의 한계와 연약함이 여실하게 드러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면 본래 자리로 돌아갑니다. 사사기의 반복되는 패턴입니다. ‘죄 → 징계 → 부르짖음 → 구원 → 평안 → 망각 → 다시 죄’ 이스라엘의 문제는 전쟁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마음의 문제, 기억의 문제, 신앙의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34절은 매우 안타까운 말씀입니다. 사사기 8:34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을 사방 모든 대적의 손에서 건져내신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은 기억하지 않고, 은혜는 잊어버렸습니다. 성경에서 “기억한다”는 것은 단순히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새기고, 순종하며, 살아내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잊는다는 것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알브릿” — 언약의 하나님을 버리고 거짓 언약을 붙들다입니다. 바알브릿(בַּעַל בְּרִית) 뜻은 “언약의 바알”, “언약의 주인”입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와 언약을 맺은 백성이었는데, 이제는 바알을 “언약의 신”으로 삼았습니다. 하나님을 잊으면 사람은 반드시 다른 것을 붙잡게 됩니다. 하나님 대신 물질, 하나님 대신 성공, 하나님 대신 사람, 하나님 대신 세상의 가치, 인간은 무엇인가를 섬기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을 잃으면 우상을 붙듭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잊으면 다시 옛 자리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억하는 사람은 다시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의 핵심은 “얼마나 많이 경험했는가?”가 아니라, “오늘도 하나님을 기억하며 살아가는가?”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언행일치를 넘어서 신행일치의 삶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사기 9:1-21

1.
1 여룹바알의 아들 아비멜렉이 세겜에 가서 그의 어머니의 형제에게 이르러 그들과 그의 외조부의 집의 온 가족에게 말하여 이르되
2 청하노니 너희는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라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또 나는 너희와 골육임을 기억하라 하니
3 그의 어머니의 형제들이 그를 위하여 이 모든 말을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매 그들의 마음이 아비멜렉에게로 기울어서 이르기를 그는 우리 형제라 하고
4 바알브릿 신전에서 은 칠십 개를 내어 그에게 주매 아비멜렉이 그것으로 방탕하고 경박한 사람들을 사서 자기를 따르게 하고
5 오브라에 있는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가서 여룹바알의 아들 곧 자기 형제 칠십 명을 한 바위 위에서 죽였으되 다만 여룹바알의 막내 아들 요담은 스스로 숨었으므로 남으니라
6 세겜의 모든 사람과 밀로 모든 족속이 모여서 세겜에 있는 상수리나무 기둥 곁에서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으니라

기드온이 죽은 후에 그의 아들 아비멜렉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자 했습니다. 아버지 기드온의 영적 영향, 유전자가 71명의 아들 가운데 아비멜렉에게 흘러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이는 마치 창세기 9장 함의 영적 음행의 유전자가 그의 아들 가나안에게 흘려가는 것과 같은 이치일것입니다.

1-2절 아비멜렉은 자신을 왕으로 세울 것을 명령합니다. 아비멜렉은 교묘한 논리를 펼쳐서 70명의 다르심 보다, 한 사람의 다스림이 낫지 않겠냐? 말하며 자신이 세겜땅의 같은 골육임을 강조합니다. 3절 이에 세셈의 모든 사람이 아비멜렉을 선택하게 됩니다. 4절 힘을 얻은 아비멜렉은 바알브릿(바알의 언약) 신전에서 은 칠십 개로 불량자를 모은 후에 5절 여룹바알의 아들이자 자신의 형제 70명을 불러모아서 모두 죽이고 말았습니다. 5절 막내 아들인 요담만 목숨을 부지하고 모두가 죽고 말았습니다. 6절 결국 아비멜렉이 왕이 되었습니다. 

“바알브릿의 은 칠십 개”는 매우 상징적입니다. 바알브릿의 은 칠십 개가 가족을 죽이는 밑천이 된 것입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돈이 인간의 욕망을 이루는 돈이 되었고, 그 돈이 결국 형제 70명의 죽음으로 이어졌습니다. 여룹바알(바알과 다투다)의 삶이 무너지면, 바알브릿(바알과 언약을 맺다)이 세워지게 됩니다. 결국 바알브릿 우상으로부터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2.
7 사람들이 요담에게 그 일을 알리매 요담이 그리심 산 꼭대기로 가서 서서 그의 목소리를 높여 그들에게 외쳐 이르되 세겜 사람들아 내 말을 들으라 그리하여야 하나님이 너희의 말을 들으시리라
8 하루는 나무들이 나가서 기름을 부어 자신들 위에 왕으로 삼으려 하여 감람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우리 위에 왕이 되라 하매
9 감람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게 있는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나니 내가 어찌 그것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한지라
10 나무들이 또 무화과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 위에 왕이 되라 하매
11 무화과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단 것과 나의 아름다운 열매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한지라
12 나무들이 또 포도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 위에 왕이 되라 하매
13 포도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내 포도주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한지라
14 이에 모든 나무가 가시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 위에 왕이 되라 하매
15 가시나무가 나무들에게 이르되 만일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위에 왕으로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 하였느니라

목숨을 부지한 요담은 7절 그리심산 꼭대기에서 세겜 사람들에게 우화를 들려줍니다. 8절 감람나무, 10절 무화과나무, 12절 포도나무, 14절 가시나무의 비유입니다. 감람나무와 무화과나무 포도나무는 모두 왕위를 거절합니다. 거절의 이유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사명이 있기 때문에 권력을 잡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감람나무-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무화과나무-아름다운 열매, 포도나무-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시나무는 피할 수 없는 그늘과 불로 세상을 다스리는 지도자가 되겠다고 말하고 그 왕좌를 차지하게 됩니다.

요담이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진정한 지도자는 왕좌를 탐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자리에서 열매를 맺는 사람이다.” 그리고 여기서 가시나무와의 대조가 결정적입니다. 가시나무에게 열매가 없습니다. 기름도 없습니다. 포도주도 없습니다. 그런데 왕이 되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요담의 우화는 지도자의 본질을 ‘자리’가 아니라 ‘열매’로 판단하라고 가르칩니다. 한 마디로 아비멜렉이 왕으로 부적합하다는 말입니다. 

3.
16 이제 너희가 아비멜렉을 세워 왕으로 삼았으니 너희가 행한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 이것이 여룹바알과 그의 집을 선대함이냐 이것이 그의 손이 행한 대로 그에게 보답함이냐
17 우리 아버지가 전에 죽음을 무릅쓰고 너희를 위하여 싸워 미디안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냈거늘
18 너희가 오늘 일어나 우리 아버지의 집을 쳐서 그의 아들 칠십 명을 한 바위 위에서 죽이고 그의 여종의 아들 아비멜렉이 너희 형제가 된다고 그를 세워 세겜 사람들 위에 왕으로 삼았도다
19 만일 너희가 오늘 여룹바알과 그의 집을 대접한 것이 진실하고 의로운 일이면 너희가 아비멜렉으로 말미암아 기뻐할 것이요 아비멜렉도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려니와
20 그렇지 아니하면 아비멜렉에게서 불이 나와서 세겜 사람들과 밀로의 집을 사를 것이요 세겜 사람들과 밀로의 집에서도 불이 나와 아비멜렉을 사를 것이니라 하고
21 요담이 그의 형제 아비멜렉 앞에서 도망하여 피해서 브엘로 가서 거기에 거주하니라

16-18절 요담은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운 것이 정말 정의롭고 잘한 일인지? 반문합니다. 19-20절 그리고 만약에 이들이 옳은 일은 했다면 복을 받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서로를 태우게 되는 화를 입게 될 것임을 예언합니다.

잘못된 선택은 결국 선택한 사람과 공동체 모두를 무너뜨립니다.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을 이용했고, 아비멜렉도 세겜 사람들을 이용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없는 연합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습니다. 이익을 위해 맺어진 연합은 이익이 사라지면 적대관계로 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담은 “20절 불이 서로를 사른다”고 말합니다.

지도자를 세우는 일에는 공동체의 책임이 있습니다. 아비멜렉이 혼자 왕이 된 것이 아닙니다. 세겜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세웠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의 악뿐 아니라 세겜 사람들의 선택도 다루십니다. 이것은 오늘 교회 공동체에도 중요한 원리를 줍니다. 누구를 세우느냐는 곧 어떤 공동체를 만들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백성으로 지혜롭고 정의로운 지도자를 세우게 하시고, 이 나라 민족으로 기도할 수 있도록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사기 9:22-45

1.
22 아비멜렉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삼 년에
23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영을 보내시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였으니
24 이는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에게 저지른 포학한 일을 갚되 그들을 죽여 피 흘린 죄를 그들의 형제 아비멜렉과 아비멜렉의 손을 도와 그의 형제들을 죽이게 한 세겜 사람들에게로 돌아가게 하심이라
25 세겜 사람들이 산들의 꼭대기에 사람을 매복시켜 아비멜렉을 엿보게 하고 그 길로 지나는 모든 자를 다 강탈하게 하니 어떤 사람이 그것을 아비멜렉에게 알리니라

사사기 9장은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이 왕이 되는 과정에서 저지른 죄와 그 결과를 보여줍니다. 1-6절에서 아비멜렉은 자신의 형제 70명을 죽이고 왕이 되었고, 7-21절에서는 요담이 세겜 사람들을 향해 나무의 우화를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22절부터는 요담의 우화가 현실이 됩니다. “악으로 연합했던 사람들이 결국 서로를 향해 칼을 들게 됩니다.”

22절 아비멜렉 통치 3년 만에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됩니다. 23절 ‘악한 영을 보내시매’ 여기서 악한 영은 보내심이란 뜻은? 악한 길의 결과와 심판을 경험하도록 내버려 두심을 의미합니다. 땅에 가득한 악한 영으로부터 보호해 주시지 않으시고, 보호와 방패의 손을 거두심을 말씀합니다. 24절 아비멜렉이 형제를 죽인 죄가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겜사람으로 아비멜렉에 협조 가담한 죄를 하나님의 물으십니다. 악은 서로 연합과 다툼을 반복합니다. 25절 아비멜렉이 다스리는 나라에 평화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배신 약탈 폭력 의심이 판을 치게 됩니다. 하나님 없는 권력은 공동체를 세우지 못합니다.  

죄는 처음에는 사람을 하나로 묶지만 결국 사람을 서로 갈라놓습니다.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은 처음에는 한편이었습니다. 왜입니까? 공동의 이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이 이루어진 연합은 오래 지속 될 수 없습니다. 죄는 사람을 묶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사람을 갈라놓습니다. 가정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고, 사회도 그렇습니다. 하나님보다 이익을 중심으로 관계를 맺으면, 이익이 사라지는 순간 관계도 흔들립니다.

2.
26 에벳의 아들 가알이 그의 형제와 더불어 세겜에 이르니 세겜 사람들이 그를 신뢰하니라
27 그들이 밭에 가서 포도를 거두어다가 밟아 짜서 연회를 베풀고 그들의 신당에 들어가서 먹고 마시며 아비멜렉을 저주하니
28 에벳의 아들 가알이 이르되 아비멜렉은 누구며 세겜은 누구기에 우리가 아비멜렉을 섬기리요 그가 여룹바알의 아들이 아니냐 그의 신복은 스불이 아니냐 차라리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후손을 섬길 것이라 우리가 어찌 아비멜렉을 섬기리요
29 이 백성이 내 수하에 있었더라면 내가 아비멜렉을 제거하였으리라 하고 아비멜렉에게 이르되 네 군대를 증원해서 나오라 하니라
30 그 성읍의 방백 스불이 에벳의 아들 가알의 말을 듣고 노하여
31 사자들을 아비멜렉에게 가만히 보내어 이르되 보소서 에벳의 아들 가알과 그의 형제들이 세겜에 이르러 그 성읍이 당신을 대적하게 하니
32 당신은 당신과 함께 있는 백성과 더불어 밤에 일어나 밭에 매복하였다가
33 아침 해 뜰 때에 당신이 일찍 일어나 이 성읍을 엄습하면 가알 및 그와 함께 있는 백성이 나와서 당신을 대적하리니 당신은 기회를 보아 그에게 행하소서 하니

26절 아비멜렉을 대적하기 위해서 가알이 등장합니다. 27절 가알은 아비멜렉을 저주하며, 28절 백성을 선동합니다. 사실 가알은 아비멜렉을 비판하며 저주하지만 자신도 같은 부류의 사람 권력을 원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 나쁜 놈들의 싸움이 시작된 것입니다. 

30절 가알의 소리를 들은 방백(지도자) 스불이 노하여 31절 아비멜렉에게 이 사실을 고발합니다. 스불은 이미 권력자이기 때문에 권력자의 편에서서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고자 합니다. 32-33절 이 소식을 전해들은 아비멜렉은 매복과 기습을 준비하여 적을 진멸하고자 합니다. 

3.
34 아비멜렉과 그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이 밤에 일어나 네 떼로 나누어 세겜에 맞서 매복하였더니
35 에벳의 아들 가알이 나와서 성읍 문 입구에 설 때에 아비멜렉과 그와 함께 있는 백성이 매복하였던 곳에서 일어난지라
36 가알이 그 백성을 보고 스불에게 이르되 보라 백성이 산 꼭대기에서부터 내려오는도다 하니 스불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산 그림자를 사람으로 보았느니라 하는지라
37 가알이 다시 말하여 이르되 보라 백성이 밭 가운데를 따라 내려오고 또 한 떼는 므오느님 상수리나무 길을 따라 오는도다 하니
38 스불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전에 말하기를 아비멜렉이 누구이기에 우리가 그를 섬기리요 하던 그 입이 이제 어디 있느냐 이들이 네가 업신여기던 그 백성이 아니냐 청하노니 이제 나가서 그들과 싸우라 하니
39 가알이 세겜 사람들보다 앞에 서서 나가 아비멜렉과 싸우다가
40 아비멜렉이 그를 추격하니 그 앞에서 도망하였고 부상하여 엎드러진 자가 많아 성문 입구까지 이르렀더라
41 아비멜렉은 아루마에 거주하고 스불은 가알과 그의 형제들을 쫓아내어 세겜에 거주하지 못하게 하더니
  
34절 아비멜렉은 가알을 처단하기 위해서 매복하며 목줄을 조여 옵니다. 36절 스불은 가알을 속이며 매복병을 산 그림자라 말합니다. 37절 결국 실제 군대임을 깨닫게 되고, 38절 아비멜렉과 스불의 공격을 받고 40절 가알은 패하고 부상당하여 도망자가 되고 맙니다. 41절 결국 가알을 세겜에서 추방을 당하게 됩니다. 전쟁은 아비멜렉의 승리로 일단락됩니다.

그러나 앞에서 처음 언급한 것처럼, 지금의 전쟁은 승패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삼 년에 악한 영을 보내시며’ 심판의 시작을 알리는 영적인 신호인 것입니다. 악한 자들의 싸움은 의미가 없습니다. 본문의 핵심은? 아비멜렉의 심판에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세상 권력에 취한자가 어떻게 되는지를 하나님은 보여주고 계십니다. 

사랑의 아버지!!
죄의 관영과 성장을 부러워하지 않게 하시고, 언제나 어디서나 주의 편과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사기 9:46-57

1.
46 세겜 망대의 모든 사람들이 이를 듣고 엘브릿 신전의 보루로 들어갔더니
47 세겜 망대의 모든 사람들이 모인 것이 아비멜렉에게 알려지매
48 아비멜렉 및 그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이 살몬 산에 오르고 아비멜렉이 손에 도끼를 들고 나뭇가지를 찍어 그것을 들어올려 자기 어깨에 메고 그와 함께 있는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내가 행하는 것을 보나니 빨리 나와 같이 행하라 하니
49 모든 백성들도 각각 나뭇가지를 찍어서 아비멜렉을 따라 보루 위에 놓고 그것들이 얹혀 있는 보루에 불을 놓으매 세겜 망대에 있는 사람들이 다 죽었으니 남녀가 약 천 명이었더라

가알을 죽인 아비멜렉은 세겜성의 사람들을 죽이고 성을 헐고 멸망시켜 버립니다. 46절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변방 세겜 망대의 사람들은 엘브릿 신전으로 도망하며 몸을 피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가 되어야 하건만 이들은 하나님이 아닌 엘브릿 신전을 선택하고 몸을 피합니다. 우리를 위험에서 살리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우상이 아닙니다. 47절 이 사실이 아비멜렉에게 전해지자 48절 아비멜렉은 손에 도끼를 들고 나무를 해다가 49절 신정 보루 깊숙이 숨어 있는 불을 놓으니 약 천여명의 사람들이 불에 차 죽음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요담의 저주, 9:20 아비멜렉에게서 불이 나와 세겜 사람들을 사를 것이요, 이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악인은 서로를 이용하지만 결국 서로를 파괴합니다.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은 처음에는 동맹이었습니다. 세겜 사람들 →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움, 아비멜렉 → 세겜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관계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해관계가 깨지자 ‘동맹 → 갈등 → 배신 → 전쟁 → 살육’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요담이 말한 그대로 “불이 불을 사르는” 결과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없는 협력과 연합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지켜 주지 않으시면 무저지게 됩니다. 악인의 삶이 형통하고 번성하는 듯하지만, 그 결과는 멸망이고 죽음입니다. 사필귀정해서 나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2.
50 아비멜렉이 데베스에 가서 데베스에 맞서 진 치고 그것을 점령하였더니
51 성읍 중에 견고한 망대가 있으므로 그 성읍 백성의 남녀가 모두 그리로 도망하여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망대 꼭대기로 올라간지라
52 아비멜렉이 망대 앞에 이르러 공격하며 망대의 문에 가까이 나아가서 그것을 불사르려 하더니
53 한 여인이 맷돌 위짝을 아비멜렉의 머리 위에 내려 던져 그의 두개골을 깨뜨리니
54 아비멜렉이 자기의 무기를 든 청년을 급히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너는 칼을 빼어 나를 죽이라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이르기를 여자가 그를 죽였다 할까 하노라 하니 그 청년이 그를 찌르매 그가 죽은지라
55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비멜렉이 죽은 것을 보고 각각 자기 처소로 떠나갔더라

사사기 9:46-49절에서 세겜 망대의 약 천 명을 불태워 죽인 아비멜렉은 이제 세겜을 넘어 주변 성읍까지 정복하려 합니다. 그런데 50-55절에서는 그의 승리가 갑자기 비참한 최후로 바뀝니다.

50절 세겜성과 주민을 학살한 아비멜렉은 주변의 데베스(세겜에서 15키로 떨어진 성읍)을 공격합니다. 이는 아비멜렉의 개인적인 정복욕에 따른 행동입니다. 52절 세겜에서와 같이 성읍을 불로 공략하며 할때에 53절 뜻밖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전이 일어나게 됩니다. 한 여인의 망대위에서 던진 맷돌이 아비멜렉의 머리 위에 떨어짐으로 아비멜렉이 전쟁을 시도하다가 갑작스럽게 죽게 됩니다. 이 것은 하나님의 절대 개입이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한 나라의 왕의 비명행사 급사입니다. 아비멜렉은 야욕과 살인적 폭력은 성공하는 듯하지만 결국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악인의 성공은 영원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반드시 악을 심판하심을 믿습니다. 

3.
56 아비멜렉이 그의 형제 칠십 명을 죽여 자기 아버지에게 행한 악행을 하나님이 이같이 갚으셨고
57 또 세겜 사람들의 모든 악행을 하나님이 그들의 머리에 갚으셨으니 여룹바알의 아들 요담의 저주가 그들에게 응하니라

아비멜렉에 대한 일련의 모든 사건을 요약합니다. 56절 아비멜렉의 악행을 하나님이 갚으셨다는 것이며, 57절 세겜 사람들의 모든 악행 또한 하나님이 갚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요담의 저주가 응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게 되었습니다. 

사사기 9장은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시대에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아비멜렉이 왕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즉시 막지 않으셨습니다. 세겜 사람들이 악을 행할 때도 즉시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는가?” 그러나 마지막에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이같이 갚으셨고.” “하나님이 그들의 머리에 갚으셨으니.” 이것이 하나님의 간섭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방관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의 악이 역사를 움직이는 것처럼 보여도, 역사의 최종 주권자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반드시 악을 심판하심을 기억하시길 소망합니다.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의 모든 주권적인 역사를 믿습니다. 주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이 오늘도 이 땅 위에 섬기는 교회와 우리 삶 가운데 선하게 역사 되길 소망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사기 10:1-18

1.
1 아비멜렉의 뒤를 이어서 잇사갈 사람 도도의 손자 부아의 아들 돌라가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니라 그가 에브라임 산지 사밀에 거주하면서
2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이십삼 년 만에 죽으매 사밀에 장사되었더라
3 그 후에 길르앗 사람 야일이 일어나서 이십이 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니라
4 그에게 아들 삼십 명이 있어 어린 나귀 삼십을 탔고 성읍 삼십을 가졌는데 그 성읍들은 길르앗 땅에 있고 오늘까지 하봇야일이라 부르더라
5 야일이 죽으매 가몬에 장사되었더라

아비멜렉이후 돌라-이십삼 년, 야일-이십이 년 동안 이스라엘에 평화가 찾아옵니다. 이 두 사사에 대해서는 전쟁이나 큰 기적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습니다. 이것이 오히려 중요한 의미를 줍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장 큰 복 가운데 하나는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 평안입니다. 전쟁이 없고, 압제가 없고, 나라가 안정되고, 일상이 평온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인간의 문제가 시작됩니다. 고난이 없을 때 하나님을 더 잘 기억해야 하는데, 인간은 고난이 없을 때 하나님을 더 쉽게 잊어버립니다.

우리는 어려울 때는 기도합니다. 병들면 기도합니다. 사업이 어려우면 기도합니다. 자녀에게 문제가 생기면 기도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해결되면 기도가 줄어듭니다. 응답받은 후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참 신앙은 한결 같아야 합니다. 어려울때나 평안할 때나 언제나 숨쉬듯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야 합니다.

2.
6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들의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리고 그를 섬기지 아니하므로
7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블레셋 사람들의 손과 암몬 자손의 손에 그들을 파시매
8 그 해에 그들이 요단 강 저쪽 길르앗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땅에 있는 모든 이스라엘 자손을 쳤으며 열여덟 해 동안 억압하였더라
9 암몬 자손이 또 요단을 건너서 유다와 베냐민과 에브라임 족속과 싸우므로 이스라엘의 곤고가 심하였더라 

6절 이들의 평안함이 하나님을 잊게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시’ 범죄 하였습니다. 바알을 비롯하여 6신들 섬길 수 있는 모든 신을 섬겼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가나안땅의 문화와 종교적인 영향으로 눈에 보이는 우상을 의지하고 싶었습니다. 7절 때문에 하나님은 블레셋과 암몬에 손에 이스라엘을 넘기시고 8절 18년 동안 억압과 고통 속에 이스라엘을 집어 넣으셨습니다. 9절 이스라엘의 곤고함이 심하게 되었습니다. 

고난과 고통은 하나님 도구입니다. 건강을 잃어버릴 때 건강의 소중함을 알고, 물질을 잃어버릴 때 중요함을 아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은혜가 일상이 되면 은혜는 더 이상 감사한 것이 아니라, 누리고 사는 당연한 권리가 되는 것입니다. 

3.
10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김으로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
11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시되 내가 애굽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에게서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였느냐
12 또 시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마온 사람이 너희를 압제할 때에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므로 내가 너희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였거늘
13 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니 그러므로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14 가서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 너희의 환난 때에 그들이 너희를 구원하게 하라 하신지라
15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되 우리가 범죄하였사오니 주께서 보시기에 좋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니와 오직 주께 구하옵나니 오늘 우리를 건져내옵소서 하고
16 자기 가운데에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시니라

10절 이스라엘에게 고난이 오자 하나님을 찾기 시작합니다. 11-14절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니,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으라 말씀하십니다. 15절 하나님의 단호한 말씀가운데 이스라엘이 비로서 진짜 회개가 시작됩니다. 진정한 회개는 말로 끝나지 않습니다. 16절 우상을 제거하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내 삶에서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고 사랑하고 붙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그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징계하시는 하나님이지만 동시에 자녀의 고통을 마음 아파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진짜 회개는? ① 입술의 회개 — “우리가 범죄하였습니다.” ② 마음의 회개 — “주께서 보시기에 좋은 대로 하십시오.” ③ 행동의 회개 —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렸습니다.” 이것이 진짜 회개입니다.

“제하여 버리고”가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은 우상을 그냥 덜 섬긴 것이 아닙니다. “제하여 버리고” 우상을 제거했습니다. 회개란 죄를 미워한다고 말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죄와의 관계를 끊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돈을 너무 사랑했던 것 같습니다.” 라고 고백했다면, 돈을 대하는 삶의 방식도 바뀌어야 합니다. “사람의 인정을 너무 의지했습니다.” 라고 고백했다면, 사람의 평가보다 하나님의 뜻을 선택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보다 자녀를 더 의지했습니다.” 라고 고백했다면, 자녀를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을 먼저 바라보아야 합니다. 회개는 감정의 변화만이 아니라 방향의 변화입니다. 이것이 진짜 회개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생각의 변화 행동의 변화, 삶의 방향이 전환되고 인생이 주안에서 이뤄지는 참된 삶을 결심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사기 11:1-11

1.
1 길르앗 사람 입다는 큰 용사였으니 기생이 길르앗에게서 낳은 아들이었고
2 길르앗의 아내도 그의 아들들을 낳았더라 그 아내의 아들들이 자라매 입다를 쫓아내며 그에게 이르되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니 우리 아버지의 집에서 기업을 잇지 못하리라 한지라
3 이에 입다가 그의 형제들을 피하여 돕 땅에 거주하매 잡류가 그에게로 모여 와서 그와 함께 출입하였더라

11장부터 사사 입다에 대한 말씀입니다. 1절 길르앗은 본 성경에서 3가지 의미로 사용됩니다, 인명으로 입다의 아버지, 지명으로 요단강 동쪽지역, 지파로서 므낫세지파를 의미합니다. 성경은 길르앗 지역의 입다라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입다를 큰 용사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큰 용사”라는 표현은 단순히 힘이 센 사람이라는 뜻만이 아니라, 전쟁에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 용맹한 사람, 지도자로서의 잠재력이 있는 사람 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런데 그의 출생에는 사회적 약점이 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기생이었습니다. 2절 때문에 길르앗의 본처에서 낳은 아들들로부터 차별을 받고 자라게 됩니다. 3절 이에 입다는 핍박하는 형제들을 피하여 돕 땅(길르앗의 북동쪽 지역)으로 피하여 살게 될 때에 잡류들 즉 입다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자들과 함께 생활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앞서서 말씀드린 것처럼 부족한 자들을 들어서 사사로 세우십니다. 왼속잡이 에훗, 소몰이꾼 삼갈, 여선지자 드로라, 소심하고 겁많은 기드온, 그리고 오늘 기생 첩의 자식 입다에게 까지입니다. 약한 자를 들어서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에게 버림받은 입다를 하나님께서는 버리지 않으셨고, 오히려 그를 위기의 때에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2.
4 얼마 후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 하니라
5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 할 때에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를 데려오려고 돕 땅에 가서
6 입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암몬 자손과 싸우려 하니 당신은 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라 하니

그러나 반전의 역사입니다. 2절에서 입다를 쫓아냈던 사람들이 4-6절에서는 그 입다를 찾아가 지도자가 되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4절 위기가 찾아오자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얼마 후에”가 중요합니다. 입다가 돕 땅으로 쫓겨난 후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길르앗에 암몬의 공격이라는 국가적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사사기 10장에서 하나님께 범죄했고, 하나님께서 암몬 자손에게 그들을 넘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입다의 등장은 단순히 개인의 인생 역전 이야기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준비시키시는 과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5절 쫓아냈던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과거에는 “나가라!”라고 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돌아와 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6절 “장관이 되어 달라” 과거에는 입다가 “기업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우리의 장관이 되어 달라”고 합니다. 즉, 버림받은 사람 → 필요한 사람, 쫓겨난 사람 → 불러오는 사람, 무시당한 사람 → 지도자로 세우려는 사람으로 상황이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이루시는 반전의 역사입니다. 사람은 버렸지만 하나님은 준비시켜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의 상황만 보고 인생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내가 쫓겨난 자리, 실패한 자리, 외면받는 자리라고 생각하는 그곳이 하나님께서 나를 준비시키시는 자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3.
7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전에 나를 미워하여 내 아버지 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이제 너희가 환난을 당하였다고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하니라
8 그러므로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에게 이르되 이제 우리가 당신을 찾아온 것은 우리와 함께 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하려 함이니 그리하면 당신이 우리 길르앗 모든 주민의 머리가 되리라 하매
9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할 때에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넘겨 주시면 내가 과연 너희의 머리가 되겠느냐 하니
10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에게 이르되 여호와는 우리 사이의 증인이시니 당신의 말대로 우리가 그렇게 행하리이다 하니라
11 이에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과 함께 가니 백성이 그를 자기들의 머리와 장관을 삼은지라 입다가 미스바에서 자기의 말을 다 여호와 앞에 아뢰니라

7절 입다는 과거의 상처를 확인합니다. 8절 길르앗의 장로들은 입다에게 암몬 자손을 물리쳐 주면 당신으로 머리로 삼겠다고 약속합니다. 6절 군사지도자 장관에서 공동체의 머리로 입다의 위치가 크게 달라지게 됩니다. 9절 입다는 조건을 다시 확인합니다. 10절 장로들은 맹세하고 11절 입다는 정식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지도자는 상처를 넘어 사명을 보아야 합니다. 입다는 분명 상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상처가 그의 인생의 마지막 말이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입다를 “기생의 아들”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큰 용사”로 사용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돕 땅으로 밀어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도 그를 준비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위기의 때에 다시 불러 길르앗의 지도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묵상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나의 과거를 규정할 수 있지만, 나의 미래까지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은 상처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상처와 한계를 가지고도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서는 사람입니다. 신앙과 믿음으로 자신을 극복한 사람이 주님께 쓰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랑의 아버지!!
반전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믿는 자들 가운데 열매로 이뤄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사기 11:12-40

1.
12 입다가 암몬 자손의 왕에게 사자들을 보내 이르되 네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내 땅을 치러 내게 왔느냐 하니
13 암몬 자손의 왕이 입다의 사자들에게 대답하되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에 아르논에서부터 얍복과 요단까지 내 땅을 점령했기 때문이니 이제 그것을 평화롭게 돌려 달라 하니라

입다를 지도자로 삼은 이스라엘은 암몬과의 전쟁을 준비합니다. 먼저 입다는 사신을 보내어 전쟁의 책임이 암몬에게 있다는 것을 알립니다. 그러나 암몬은 오히려 자신의 땅을 이스라엘에게 빼앗겼으니 땅을 돌려 달라 요청합니다. 입다는 3가지 근거 14-22절 역사적인 근거, 23-24절 신학적근거, 25-28절 상식적 근거를 제시하면서 이스라엘의 정당성을 주장합니다. 

2.
14 입다가 암몬 자손의 왕에게 다시 사자들을 보내
15 그에게 이르되 입다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스라엘이 모압 땅과 암몬 자손의 땅을 점령하지 아니하였느니라
...
19 이스라엘이 헤스본 왕 곧 아모리 족속의 왕 시혼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우리를 당신의 땅으로 지나 우리의 곳에 이르게 하라 하였으나
20 시혼이 이스라엘을 믿지 아니하여 그의 지역으로 지나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그의 모든 백성을 모아 야하스에 진 치고 이스라엘을 치므로
21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시혼과 그의 모든 백성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겨 주시매 이스라엘이 그들을 쳐서 그 땅 주민 아모리 족속의 온 땅을 점령하되
22 아르논에서부터 얍복까지와 광야에서부터 요단까지 아모리 족속의 온 지역을 점령하였느니라
23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아모리 족속을 자기 백성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셨거늘 네가 그 땅을 얻고자 하는 것이 옳으냐
24 네 신 그모스가 네게 주어 차지하게 한 것을 네가 차지하지 아니하겠느냐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서 어떤 사람이든지 쫓아내시면 그것을 우리가 차지하리라
25 이제 네가 모압 왕 십볼의 아들 발락보다 더 나은 것이 있느냐 그가 이스라엘과 더불어 다툰 일이 있었느냐 싸운 일이 있었느냐
26 이스라엘이 헤스본과 그 마을들과 아로엘과 그 마을들과 아르논 강 가에 있는 모든 성읍에 거주한 지 삼백 년이거늘 그 동안에 너희가 어찌하여 도로 찾지 아니하였느냐
27 내가 네게 죄를 짓지 아니하였거늘 네가 나를 쳐서 내게 악을 행하고자 하는도다 원하건대 심판하시는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자손과 암몬 자손 사이에 판결하시옵소서 하였으나
28 암몬 자손의 왕이 입다가 사람을 보내어 말한 것을 듣지 아니하였더라

먼저 14-22절 역사적인 근거입니다. 입다는 역사적인 근거를 들어서 지금 이스라엘이 차지한 땅은 모압과 암몬의 땅이 아니라, 21절 출애굽 당시에 하나님이 주신 시혼의 땅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암몬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땅이라고 역사적인 근거를 들어서 설명합니다. 

그리고 23-24절에 신앙적인 근거를 들면서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의 주신 땅이 우리의 땅이라고 설명합니다. 암몬 사람들이 자기들의 신 그모스가 준 땅이라고 믿는 것처럼,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주신 땅이라고 믿는다고 말합니다.

마지막 25-28절 상식적인 근거를 들면서 300년 동안 이스라엘이 그 땅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왜 이제 와서 문제를 제기하느냐 질문합니다. 이스라엘이 그 땅을 차지한 것은 단순한 침략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이라는 것입니다. 

입다는 감정으로 싸우지 않고 말씀과 역사와 하나님의 주권을 근거로 싸웠습니다.
① 사실을 확인하라 — “무엇이 사실인가?”
② 역사를 기억하라 —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셨는가?”
③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라 — “누가 이 땅의 주인이신가?”

특히 11:27은 입다의 논증의 절정입니다. “내가 네게 범죄하지 아니하였거늘 네가 내게 전쟁을 하여 나를 해하려 하는도다. 원하건대 심판하시는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자손과 암몬 자손 사이에 판결하시옵소서.” 입다는 결국 누가 옳은지는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것이다라고 선언합니다.

입다는 역사적, 신학적, 상식적인 틀 안에서 먼저 명분을 가지고 싸움에 임하게 됩니다. 우리의 명분은 하나님이며 교회입니다. 이념도 가치도 체제도 생각도 하나님이 주신 말씀과 교회의 명분을 뛰어넘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가치를 넘어서게 된다면? 이것이 바로 인본주의적 신앙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3.
29 이에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입다가 길르앗과 므낫세를 지나서 길르앗의 미스베에 이르고 길르앗의 미스베에서부터 암몬 자손에게로 나아갈 때에
30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 주시면
31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32 이에 입다가 암몬 자손에게 이르러 그들과 싸우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의 손에 넘겨 주시매
33 아로엘에서부터 민닛에 이르기까지 이십 성읍을 치고 또 아벨 그라밈까지 매우 크게 무찌르니 이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항복하였더라
34 입다가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에 이를 때에 보라 그의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
35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어찌할꼬 내 딸이여 너는 나를 참담하게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하니
36 딸이 그에게 이르되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의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 하니라

29-33절은 입다의 승리와 서원입니다. 29절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였습니다. 30절 입다가 전재에 앞서 서원하여 하나님께 약속하기를 31절 전쟁에서 승리하여 돌아올 때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자신을 영접하는 사람을 하나님께 번제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32-33절 결국 입다는 승리하였습니다. 34절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그의 무남독녀 외동딸이 소고를 들로 아버지를 영접하였습니다. 35절 입다는 탄식하고 36절 그의 딸은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로 합니다.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 교훈입니다. 
① 입다는 가나안의 이방 몰렉 신앙에 물들게 됩니다. 잘못된 신앙은 잘못된 서원을 가져오게 됩니다. 그리고 잘못된 이행을 불러옵니다. 마치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지면 전체 옷이 틀어지는 원리입니다. 

② 하나님은 우리의 거래 대상이 아닙니다. 입다의 서원으로 인하여 승리한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은 승리를 약속하셨고 승리를 이루기 위해서 입다를 세운 것입니다. 조건부 신앙은 내 조건을 이루기 위한 신앙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목적이 하나님의 나라와 뜻이 된다면 어떤 조건도 사실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뜻대로 행하며 실천하면 되는 것입니다. 

③ 여호와의 영, 성령의 받는 것과 신앙의 성숙을 이루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우리의 성숙의 척도는 말씀과 신앙의 열매에 있습니다. 입다는 여호와의 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과 행동에는 여전히 사사시대의 어두운 신앙이 나타납니다.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능력뿐 아니라 말씀에 따른 신앙의 성숙을 추구해야 합니다.

④ 잘못된 것을 끝까지 고집하는 것은 신앙의 신실함이 아닙니다. 입다에게 가장 큰 문제는 잘못된 서원을 했다는 것뿐 아니라, 그 잘못을 어떻게 처리했느냐에 있습니다. 잘못된 서원을 했으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바로잡아야 합니다.

사랑의 아버지!!
온전한 믿음 위에 온전한 결실을 이루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사기 12:1-15

1.
1 에브라임 사람들이 모여 북쪽으로 가서 입다에게 이르되 네가 암몬 자손과 싸우러 건너갈 때에 어찌하여 우리를 불러 너와 함께 가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우리가 반드시 너와 네 집을 불사르리라 하니
2 입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와 내 백성이 암몬 자손과 크게 싸울 때에 내가 너희를 부르되 너희가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지 아니한 고로
3 나는 너희가 도와 주지 아니하는 것을 보고 내 목숨을 돌보지 아니하고 건너가서 암몬 자손을 쳤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겨 주셨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오늘 내게 올라와서 나와 더불어 싸우고자 하느냐 하니라

1절 암몬전쟁에서 승리한 입다를 향하여 에브라임 지파의 사람들이 시비를 걸어옵니다. 왜 암몬과의 전쟁때에 자신들을 불러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 따지며, 입다와 그의 집안을 불살라 없애겠다고 협박합니다. 사사기 8장 기드온때처럼 똑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드온의 때에는 기드온이 에브라임을 달래길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 순한 말로 갈등을 피했지만, 입다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2절 입다는 오히려 우리가 싸울 때 너희를 불렸지만 너희가 우리를 도와주지 아니하였다고 입바른 소리를 하고, 3절 목숨을 걸고 암몬 자손을 물리친 후에 너희가 어찌하여 내게 와서 시비하며 싸우고자 하는가? 강경하게 대응하였습니다.

에브라임 같은 신앙을 뒷북치는 신앙이라고 합니다. 힘들고 희생해야 할 때는 빠지고, 승리하고 난 뒤에는 자기 몫을 주장하는 모습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이런 모습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기도할 때는 빠지고 응답받으면 함께했다고 합니다. 헌신할 때는 뒤로 물러나고 열매가 나타나면 자기 공로를 주장합니다. 교회가 어려울 때는 침묵하고 일이 잘되면 자기 의견을 앞세웁니다. 고난의 십자가 없는 부활의 영광은 없습니다. 힘겨운 신앙의 싸움이야말로 영생의 복을 주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2.
4 입다가 길르앗 사람을 다 모으고 에브라임과 싸웠으며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을 쳐서 무찔렀으니 이는 에브라임의 말이 너희 길르앗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로서 에브라임과 므낫세 중에 있다 하였음이라
5 길르앗 사람이 에브라임 사람보다 앞서 요단 강 나루턱을 장악하고 에브라임 사람의 도망하는 자가 말하기를 청하건대 나를 건너가게 하라 하면 길르앗 사람이 그에게 묻기를 네가 에브라임 사람이냐 하여 그가 만일 아니라 하면
6 그에게 이르기를 쉽볼렛이라 발음하라 하여 에브라임 사람이 그렇게 바로 말하지 못하고 십볼렛이라 발음하면 길르앗 사람이 곧 그를 잡아서 요단 강 나루턱에서 죽였더라 그 때에 에브라임 사람의 죽은 자가 사만 이천 명이었더라
7 입다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육 년이라 길르앗 사람 입다가 죽으매 길르앗에 있는 그의 성읍에 장사되었더라

4절 민족간에 양보 없는 대립은 결국 내전으로 이어지고 말았습니다. 외부의 적보다 무서운 적은 내부의 분열입니다. 암몬을 물리친 이스라엘은 서로를 적으로 삼았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백성을 외부에서 공격할 뿐 아니라, 내부의 자존심과 상처와 경쟁심을 통해 서로 싸우게 만들 수 있습니다. 5절 길르앗 사람들이 요단강을 점령하며 승기를 잡았습니다. 전쟁에 패한 에브라임은 요단강을 건너서 도망치려 할 때 6절 ‘쉽볼렛’을 발음하게 하고 ‘십볼렛’이라고 발음하게 되면 에브라임 사람으로 간주하고 잡아 죽었는데 그 숫자가 ‘사만 이천명’에 달하였습니다.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장 무서운 전쟁은 내전입니다. 형제와 싸우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암몬과 싸워야 했는데 이스라엘끼리 싸웠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세상과 싸우기 전에 교회 안에서 서로 싸우기 시작하면, 교회의 힘은 밖으로 흘러가지 못하고 안에서 소진됩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5:15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그러므로 사사기 12장의 핵심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을 때, 형제가 형제를 적으로 삼게 된다는 것입니다. 

작은 감정이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에브라임의 처음 항의가 곧바로 내전으로 발전합니다. ‘서운함 → 자존심 → 분노 → 적대감 → 폭력’ 이 과정을 막아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에서도 “왜 나를 빼놓았습니까?”라는 서운함이 “나를 무시했다”는 자존심으로 발전하면 공동체의 평안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늘 영적으로 긴장하며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과 교회를 지켜내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공동체의 일에 함께 참여하게 하시고, 언제나 감정에 노예가 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사기 13:1-14

1.
1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십 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 주시니라
2 소라 땅에 단 지파의 가족 중에 마노아라 이름하는 자가 있더라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출산하지 못하더니
3 여호와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가 본래 임신하지 못하므로 출산하지 못하였으나 이제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4 그러므로 너는 삼가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지니라
5 보라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머리 위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하시니
6 이에 그 여인이 가서 그의 남편에게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 내게 오셨는데 그의 모습이 하나님의 사자의 용모 같아서 심히 두려우므로 어디서부터 왔는지를 내가 묻지 못하였고 그도 자기 이름을 내게 이르지 아니하였으며
7 그가 내게 이르기를 보라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이제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부터 그가 죽는 날까지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됨이라 하더이다 하니라

13장-16장까지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 삼손에 대한 기록입니다. 1절 삼손의 시작 역시 이스라엘의 범죄로부터 시작됩니다. ‘다시 악을 행함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블레셋손에 40년을 넘기시고 고통받게 하십니다. 2-3절 이스라엘이 부르짖어 구원을 요청할 때 하나님은 새 일을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불가능한 상황에서 시작됩니다. 불임으로 고통하는 가정 가운데 찾아가셔서 생명을 주십니다. 이는 마치 소망 없는 이스라엘 위에 새 소망을 주심과 같은 이치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가능성이 끝나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십니다. 4-5절 태어날 아이를 향한 하나님의 사명을 주십니다. 나실인입니다. 나실인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서원하여 자신을 드리는 사람입니다. 히브리어 나지르(נָזִיר, nāzîr)와 관련된 말로, “구별된 사람,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민수기 6장의 나실인 규례를 보면 일반적으로 나실인은 일정 기간 자신을 하나님께 특별히 구별하여 드렸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특별합니다. “태에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 즉 삼손의 구별은 자기 선택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시작됩니다. 5절 삼손의 사명은 개인의 성공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구원입니다. 특별히 이스라엘의 구원의 시작입니다. 삼손이 시작으로 세워지고 구원의 완성은 결국 하나님으로 이뤄지는 것입니다. 6-7절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에게 사명이 전달됩니다. 삼손의 어머니가 남편 마노아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내게 임하여 그 용모가 심히 두려우므로 하나님의 사자의 용모 같은데…” 그리고 천사가 말한 내용을 전달합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마노아는 직접 천사를 만나지 않았지만 아내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 내용은 분명합니다. 아이는 하나님께 구별된 사람이다.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 것, 부정한 것을 먹지 말 것,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 것입니다. 태에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 즉 삼손의 인생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과 사명 아래 있는 인생입니다.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입니다. ① 죄가 반복되어도 하나님의 구원은 중단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지만” 하나님은 “구원을 시작하십니다.” 인간의 실패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좌절시키지 못합니다. 물론 이것이 죄를 가볍게 여겨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줍니다. ② 하나님은 작은 가정에서 큰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삼손의 이야기는 왕궁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전쟁터에서 시작되지도 않습니다. 소라 땅의 한 가정에서 시작됩니다. 마노아와 그의 아내에게는 인간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가정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구원을 시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것은 반드시 크고 화려한 것이 아닙니다. 한 가정, 한 사람, 한 생명에서 하나님의 큰 역사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③ 하나님의 사람은 먼저 하나님께 구별되어야 합니다. 삼손에게 가장 먼저 요구된 것은 전쟁 기술이 아니었습니다. 힘도 아니었습니다. 단 구별됨이었습니다. 나실인이라는 이름 자체가 그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첫 번째 정체성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인가?” 가 아니라 “나는 누구에게 속한 사람인가?”입니다.

2.
8 마노아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주여 구하옵나니 주께서 보내셨던 하나님의 사람을 우리에게 다시 오게 하사 우리가 그 낳을 아이에게 어떻게 행할지를 우리에게 가르치게 하소서 하니
9 하나님이 마노아의 목소리를 들으시니라 여인이 밭에 앉았을 때에 하나님의 사자가 다시 그에게 임하였으나 그의 남편 마노아는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10 여인이 급히 달려가서 그의 남편에게 알리어 이르되 보소서 전일에 내게 오셨던 그 사람이 내게 나타났나이다 하매
11 마노아가 일어나 아내를 따라가서 그 사람에게 이르러 그에게 묻되 당신이 이 여인에게 말씀하신 그 사람이니이까 하니 이르되 내가 그로다 하니라
12 마노아가 이르되 이제 당신의 말씀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리이까
13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에게 이르되 내가 여인에게 말한 것들을 그가 다 삼가서
14 포도나무의 소산을 먹지 말며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고 내가 그에게 명령한 것은 다 지킬 것이니라 하니라

8절 아내에게 소식을 전해 들은 마노아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부인의 말을 믿음으로 받고 그대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기도의 내용이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합니까?’입니다. 금도 은도 부와 귀도 구하지 아니하고 지혜를 구한 것입니다. 9절 하나님은 마노아의 믿음의 기도를 들으시고 다시 아내에게 임하셨습니다. 10절 아내가 그의 남편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11절 마노아는 아내를 따라가 하나님의 사자를 대면하게 됩니다. 12절 그리고 다시한번 믿음을 확증하고 지혜를 구하게 됩니다. 

13-14절 하나님의 사자는 이미 일러준 말씀대로 나실인의 규례를 명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이를 키울 것을 명하십니다. 나실인으로 구별된 사람은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말씀이 구별이고 말씀이 거룩입니다. 말씀이 오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의 자세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구별과 거룩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임하게 하여 나실인으로 헌신된 삶을 살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사기 14:1-20

1.
1 삼손이 딤나에 내려가서 거기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고
2 올라와서 자기 부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딤나에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았사오니 이제 그를 맞이하여 내 아내로 삼게 하소서 하매
3 그의 부모가 그에게 이르되 네 형제들의 딸들 중에나 내 백성 중에 어찌 여자가 없어서 네가 할례 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에게 가서 아내를 맞으려 하느냐 하니 삼손이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 여자를 데려오소서 하니라
4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까닭에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함이었으나 그의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

14장 삼손이 장성하게 되었습니다. 삼손이 장성하게 됨에 하나님의 역사적인 섭리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1절 삼손이 블레셋 여인과 사랑에 빠집니다. 2절 부모님에게 결혼을 청합니다. 3절 삼손은 결혼을 반대하지만, 삼손은 강압적으로 결혼을 주장하며 부모의 뜻을 거역합니다. 4절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블레셋을 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약점과 부족함을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삼손은 블레셋 여인을 보았지만, 하나님은 블레셋 여인과의 관계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고자 합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호랑이를 잡아내듯이, 하나님은 삼손을 블레셋 진영 깊은 곳으로 이끌고 가십니다.

2.
5 삼손이 그의 부모와 함께 딤나에 내려가 딤나의 포도원에 이른즉 젊은 사자가 그를 보고 소리 지르는지라
6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니 그가 손에 아무것도 없이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는 것 같이 찢었으나 그는 자기가 행한 일을 부모에게 알리지 아니하였더라
7 그가 내려가서 그 여자와 말하니 그 여자가 삼손의 눈에 들었더라
8 얼마 후에 삼손이 그 여자를 맞이하려고 다시 가다가 돌이켜 그 사자의 주검을 본즉 사자의 몸에 벌 떼와 꿀이 있는지라
9 손으로 그 꿀을 떠서 걸어가며 먹고 그의 부모에게 이르러 그들에게 그것을 드려서 먹게 하였으나 그 꿀을 사자의 몸에서 떠왔다고는 알리지 아니하였더라
10 삼손의 아버지가 여자에게로 내려가매 삼손이 거기서 잔치를 베풀었으니 청년들은 이렇게 행하는 풍속이 있음이더라
11 무리가 삼손을 보고 삼십 명을 데려와서 친구를 삼아 그와 함께 하게 한지라
12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너희에게 수수께끼를 내리니 잔치하는 이레 동안에 너희가 그것을 풀어 내게 말하면 내가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너희에게 주리라
13 그러나 그것을 능히 내게 말하지 못하면 너희가 내게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줄지니라 하니 그들이 이르되 네가 수수께끼를 내면 우리가 그것을 들으리라 하매
14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 하니라 그들이 사흘이 되도록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였더라

5절 삼손은 결혼을 강행하기 위해서 블레셋 딤나로 내려가는 중에 젊은 사자를 만나고 6절 하나님이 힘을 주심으로 사자를 찢어 죽입니다. 8절 이후에 다시 내려가는 길에 보니 사자의 죽은 가죽안에 야생벌이 집을 짓고 꿀이 있었습니다. 9절 삼손을 꿈을 따다가 먹고 부모에게도 그 꿀을 드려 먹게 하였습니다. 11절 마을로 내려간 삼손은 신부 들러리인 동네 청년 30명으로 잔치하며 12절 삼손이 수수께기를 걸어 내기를 요청하게 됩니다. 14절 수수께끼 먹는 자에게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 먹는자는 사자입니다. 먹는 것은 꿀입니다. 강한자도 사자이고, 단 것은 꿀입니다. 그래서 정답은 사자와 꿀입니다. 삼손은 자신이 경험한 것을 토대로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수수께끼를 풀어낸 것입니다. 

나실이 삼손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나실인에게 금기시 되는 3가지,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 것, 부정한 것을 먹지 말 것,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 것인데 삼손은 포도주와 독주를 즐기고, 부정한 것 사체에 손을 대는 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3.
15 일곱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삼손의 아내에게 이르되 너는 네 남편을 꾀어 그 수수께끼를 우리에게 알려 달라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와 네 아버지의 집을 불사르리라 너희가 우리의 소유를 빼앗고자 하여 우리를 청한 것이 아니냐 그렇지 아니하냐 하니
16 삼손의 아내가 그의 앞에서 울며 이르되 당신이 나를 미워할 뿐이요 사랑하지 아니하는도다 우리 민족에게 수수께끼를 말하고 그 뜻을 내게 알려 주지 아니하도다 하는지라 삼손이 그에게 이르되 보라 내가 그것을 나의 부모에게도 알려 주지 아니하였거든 어찌 그대에게 알게 하리요 하였으나
17 칠 일 동안 그들이 잔치할 때 그의 아내가 그 앞에서 울며 그에게 강요함으로 일곱째 날에는 그가 그의 아내에게 수수께끼를 알려 주매 그의 아내가 그것을 자기 백성들에게 알려 주었더라
18 일곱째 날 해 지기 전에 성읍 사람들이 삼손에게 이르되 무엇이 꿀보다 달겠으며 무엇이 사자보다 강하겠느냐 한지라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 암송아지로 밭 갈지 아니하였더라면 내 수수께끼를 능히 풀지 못하였으리라 하니라
19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삼손이 아스글론에 내려가서 그 곳 사람 삼십 명을 쳐죽이고 노략하여 수수께끼 푼 자들에게 옷을 주고 심히 노하여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올라갔고
20 삼손의 아내는 삼손의 친구였던 그의 친구에게 준 바 되었더라

삼손의 수수께끼는 15절 아내 친구들의 협박으로 인하여 17절 그의 아내에게 알겨주게 되고 18절 결국 아내의 친구들에게 비밀이 새나가게 됩니다. 19절 결국 삼손은 블레셋 사람 삼십명을 쳐죽이게 되고 20절 삼손의 아내는 다른 곳에 시집가게 됩니다. 

갈등의 고조입니다. 영웅은 시대가 만드는 것입니다. 그 과정이 어떻게 되었든 간에 삼손은 블레셋 사람을 쳐 죽이고, 블레셋에게 있어서 삼손은 원수가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이상의 사건에서 하나님의 계획이 드러납니다. 삼손이 블레셋 여인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관계를 블레셋을 치는 기회로 사용하셨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숨겨진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삼손은 여인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보셨습니다. 삼손은 사랑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블레셋과의 싸움을 시작하셨습니다. 삼손은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실패 속에서도 자신의 계획을 진행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서도 때때로 이해되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왜 하나님은 이것을 막지 않으셨는가?” “왜 내가 이런 실패를 경험했는가?”

우리는 모든 것을 즉시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이것을 붙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의 계획을 다 이해하지 못해도, 하나님께서는 나보다 더 크고 선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사사기 14장의 하나님은 사람의 실패 때문에 일하시는 것이 중단되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의 연약함 가운데서도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랑의 아버지!!
주님의 뜻이 나의 뜻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실패를 통하여 이루기보다는 나의 선택과 길이 주님의 선한 길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사기 15:1-20

1.
1 얼마 후 밀 거둘 때에 삼손이 염소 새끼를 가지고 그의 아내에게로 찾아 가서 이르되 내가 방에 들어가 내 아내를 보고자 하노라 하니 장인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2 이르되 네가 그를 심히 미워하는 줄 알고 그를 네 친구에게 주었노라 그의 동생이 그보다 더 아름답지 아니하냐 청하노니 너는 그를 대신하여 동생을 아내로 맞이하라 하니
3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번은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해할지라도 그들에게 대하여 내게 허물이 없을 것이니라 하고
4 삼손이 가서 여우 삼백 마리를 붙들어서 그 꼬리와 꼬리를 매고 홰를 가지고 그 두 꼬리 사이에 한 홰를 달고
5 홰에 불을 붙이고 그것을 블레셋 사람들의 곡식 밭으로 몰아 들여서 곡식 단과 아직 베지 아니한 곡식과 포도원과 감람나무들을 사른지라
6 블레셋 사람들이 이르되 누가 이 일을 행하였느냐 하니 사람들이 대답하되 딤나 사람의 사위 삼손이니 장인이 삼손의 아내를 빼앗아 그의 친구에게 준 까닭이라 하였더라 블레셋 사람들이 올라가서 그 여인과 그의 아버지를 불사르니라
7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은즉 내가 너희에게 원수를 갚고야 말리라 하고
8 블레셋 사람들의 정강이와 넓적다리를 크게 쳐서 죽이고 내려가서 에담 바위 틈에 머물렀더라

1절 이후에 삼손이 다시 블레셋 신부 집을 찾았을 때, 그의 장인이 삼손의 아내를 다른 사람에게 주고 말았습니다. 2절을 삼손을 달래며 그의 동생을 신부로 주겠다고 했지만 삼손은 거절합니다. 3절 이 모든 일의 원인이 블레셋에게 있다고 생각한 삼손은 복수를 결심합니다. 4절 여우 3백마리를 잡아 꼬리에 꼬리를 붙고 횃불을 달아서 5절 곡식단 사이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불질려 복수합니다. 6절 막대한 손해를 본 블레셋 사람들은 범인이 삼손이라는 것을 알고 장인과 그의 아내를 불사라 죽여버립니다. 7절 이에 삼손은 더 큰 복수를 다짐합니다. 

인간의 갈등은 갈등을 낳고, 복수는 복수를 불러옵니다. 환경을 다스리며 이끄시는 하나님입니다. 눈에 보기에 개인적인 감정과 복수의 일인 듯 보이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이끌고 나가심을 믿습니다. 

2.
9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올라와 유다에 진을 치고 레히에 가득한지라
10 유다 사람들이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올라와서 우리를 치느냐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올라온 것은 삼손을 결박하여 그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하려 함이로라 하는지라
11 유다 사람 삼천 명이 에담 바위 틈에 내려가서 삼손에게 이르되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같이 행하였느냐 하니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들이 내게 행한 대로 나도 그들에게 행하였노라 하니라
12 그들이 삼손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결박하여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 주려고 내려왔노라 하니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치지 아니하겠다고 내게 맹세하라 하매
13 그들이 삼손에게 말하여 이르되 아니라 우리가 다만 너를 단단히 결박하여 그들의 손에 넘겨 줄 뿐이요 우리가 결단코 너를 죽이지 아니하리라 하고 새 밧줄 둘로 결박하고 바위 틈에서 그를 끌어내니라

9절 격분한 블레셋은 삼손을 잡기 위해서 유다로 올라와 진을 치게 됩니다. 10절 이 사실을 안 유다는 블레셋으로부터 자초지경을 듣고 11-12절 삼손을 잡기 위해서 삼천명의 군사를 모아서 올라오게 됩니다. 13절 이에 민족간의 싸움을 피하며 삼손은 순수히 결박을 받게 됩니다. 

문제는 유다의 잘못된 태도입니다. 유다는 블레셋의 지배를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셨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유다는 블레셋이 자신들을 지배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사실 이것은 정상적인 신앙의 언어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블레셋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유다는 블레셋의 지배를 거부하기보다 적응해 버렸습니다.

결국 유다가 삼손을 적에게 넘겨줍니다. 블레셋과 싸워야 할 이스라엘이 오히려 이스라엘의 구원자를 붙잡아 블레셋에게 넘겨주려고 합니다. 여기에서 사사기의 영적인 타락이 얼마나 깊어졌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노예의식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블레셋과 싸우자”가 아니라 “블레셋이 화내지 않도록 삼손을 넘겨주자”입니다. 이것이 유다의 잘못입니다.

유다는 평안을 지키려고 했지만 잘못된 평안, 거짓 평안이었습니다. 유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싸움이 없는 것입니다. 블레셋과 싸우고 싶지 않았습니다. 삼손 때문에 블레셋이 공격해 오는 것도 싫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쉬운 방법을 선택합니다. “삼손을 넘겨주자.” 그런데 이것은 진정한 평화가 아닙니다. 두려움 때문에 얻은 평화입니다. 신앙적으로 보면 이것이 매우 중요한 교훈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포기하면서 얻는 평안은 참된 평안이 아닙니다. 유다는 하나님께서 삼손을 통해 시작하신 구원의 역사를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현실의 안전을 위해 하나님의 사람을 희생시키려고 했습니다.

3.
14 삼손이 레히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들이 그에게로 마주 나가며 소리 지를 때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그의 팔 위의 밧줄이 불탄 삼과 같이 그의 결박되었던 손에서 떨어진지라
15 삼손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손을 내밀어 집어들고 그것으로 천 명을 죽이고
16 이르되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천 명을 죽였도다 하니라
17 그가 말을 마치고 턱뼈를 자기 손에서 내던지고 그 곳을 라맛 레히라 이름하였더라
18 삼손이 심히 목이 말라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다 하니
19 하나님이 레히에서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시니 거기서 물이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을 엔학고레라 불렀으며 그 샘이 오늘까지 레히에 있더라
20 블레셋 사람의 때에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이십 년 동안 지냈더라

14절 민족은 삼손을 버렸지만, 하나님은 버리지 않았습니다. 유다 사람들은 삼손을 결박하여 블레셋에게 넘겼지만, 여호와의 영 하나님은 오히려 그 결박된 삼손을 통해 블레셋을 치십니다. 15절 무기 하나 없이 나귀의 턱뼈로 천명을 물리쳐 죽입니다. 작은 도구에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면 놀라운 승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마치 다윗의 돌이 골리앗을 쓰러트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17절 그리고 그곳의 이름을 라맛 레히-턱뼈의 산이라 이름하였습니다.

18절 거친 전쟁 후에 삼손에게 엄청안 갈증이 찾아오게 됩니다. 위기입니다. 이는 인간의 연약함을 다시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천명의 사람을 물리치지만 인간은 물 한모금에 생과 사를 오고갈 수 있는 그런 존재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강한 듯 너무나 연약한 존재입니다. 이에 삼손은 ‘여호와께 부르짖어 ’하나님을 깨닫게 됩니다.

19절 이에 하나님은 삼손을 위하여 물을 내시며 삼손의 간구와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엔학고레-부르짖는 자의 샘’입니다. 하나님은 부르짖는 자에게 응답하시며, 갈급한 영혼에게 물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랑의 아버지!!
라맛레히를 자랑하지 않으며 엔학고레의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나에서 주님으로 중심을 이동하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사기 16:1-14

1.
1 삼손이 가사에 가서 거기서 한 기생을 보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2 가사 사람들에게 삼손이 왔다고 알려지매 그들이 곧 그를 에워싸고 밤새도록 성문에 매복하고 밤새도록 조용히 하며 이르기를 새벽이 되거든 그를 죽이리라 하였더라
3 삼손이 밤중까지 누워 있다가 그 밤중에 일어나 성 문짝들과 두 문설주와 문빗장을 빼어 가지고 그것을 모두 어깨에 메고 헤브론 앞산 꼭대기로 가니라
4 이 후에 삼손이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라 이름하는 여인을 사랑하매
5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그 여인에게로 올라가서 그에게 이르되 삼손을 꾀어서 무엇으로 말미암아 그 큰 힘이 생기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능히 그를 결박하여 굴복하게 할 수 있을는지 알아보라 그리하면 우리가 각각 은 천백 개씩을 네게 주리라 하니

1절 삼손은 잘못된 죄를 버리지 못합니다. 영웅호색이라는 말이 있듯이 삼손은 여자를 너무사랑했습니다. 14장 딤나여인, 15장 블레셋 여인, 오늘 본문에서 가사의 여인까지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힘을 맹신한 가운데 블레셋의 중심도시인 가사까지 내려가는 담대함을 부립니다. 2절 블레셋에게 있어서 삼손은 여전히 눈에 가시입니다. 삼손을 죽이려는 시도와 도전은 계속됩니다. 3절 밤새도록 매복하여 잘들기를 기다렸다가 죽이고자 했으나 삼손은 잠긴 성 문짝을 통째로 뽑아버리고 문설주(기둥)과 문빗장을 어깨에 메고 60키로 떨어진 헤브론까지 가는 괴력을 보여줍니다. 힘으로는 절대로 삼손을 이길 수 없습니다.

4절 이에 블레셋은 삼손을 잡는 방법을 바꾸기로 합니다. 즉 힘의 원천을 들릴라를 통하여 알아내고자 한 것입니다. 5절 삼손의 힘의 원천이 어디인지? 알려 주면 은 천백 개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블레셋은 다섯 방백임으로 가각 계산하면? 1100세겔 * 5명 =5500세겔입니다. 무게로는 63키로 정도입니다. 엄청난 재물입니다. 

삼손이 무너짐은 블레셋의 칼이 아인 욕망 때문이요, 들릴라의 무너짐도 욕망 때문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했던 욕망이 결국 삼손도 들릴라도 무너지게 만드는 도구가 되고 말았습니다. 

2.
6 들릴라가 삼손에게 말하되 청하건대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기며 어떻게 하면 능히 당신을 결박하여 굴복하게 할 수 있을는지 내게 말하라 하니
7 삼손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마르지 아니한 새 활줄 일곱으로 나를 결박하면 내가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
11 삼손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쓰지 아니한 새 밧줄들로 나를 결박하면 내가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하니라
....
13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당신이 이 때까지 나를 희롱하여 내게 거짓말을 하였도다 내가 무엇으로 당신을 결박할 수 있을는지 내게 말하라 하니 삼손이 그에게 이르되 그대가 만일 나의 머리털 일곱 가닥을 베틀의 날실에 섞어 짜면 되리라 하는지라

들릴라는 삼손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서 계속된 유혹을 합니다. 6절, 11절, 13절 세 번이나 반복되는 유혹으로 삼손을 무너트리게 하려 합니다. 

세 번의 유혹과 세 번의 승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삼손은 거짓말을 하면서도 자신이 여전히 강하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것이 위험합니다. 죄를 지었는데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정도는 괜찮구나.” 그러나 실제로는 죄에 점점 더 깊이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의 유혹 속에서 삼손은 점점 무너지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죄의 점진성이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나는 괜찮아.” 두 번째에는 “이 정도까지는 괜찮아.” 세 번째에는 “조금 이야기해도 괜찮아.” 결국에는 “내 마음을 다 말해버립니다.” 죄는 대부분 한순간에 사람을 무너뜨리지 않습니다. 조금씩 경계를 허물고, 조금씩 양보하게 하고, 조금씩 비밀을 공개하게 합니다.

교만은 넘어짐의 앞잡이입니다. 자신을 과신하며 신앙과 믿음을 과신하시지만 결국 과신과 교만으로 망해 버리는 것입니다. 죄 앞에서 우리는 경계를 강화해야 합니다. 특별히 반복된 죄르르 멀리해야 합니다. 과신이 답이 아니라 죄를 멀리하며 유혹의 자리를 떠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죄와 타협하며 얻은 작은 승리는 결국 큰 영적 패배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들릴라는 삼손의 육체가 아니라 그의 마음을 공격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삼손은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사랑의 아버지!!
유혹과 죄로 습관이 되지 않게 하시고, 경계하며 늘 죄를 멀리하는 경건과 구별된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사기 16:15-31

1.
15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이 내게 있지 아니하면서 당신이 어찌 나를 사랑한다 하느냐 당신이 이로써 세 번이나 나를 희롱하고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기는지를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하며
16 날마다 그 말로 그를 재촉하여 조르매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
17 삼손이 진심을 드러내어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 위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하니라
18 들릴라가 삼손이 진심을 다 알려 주므로 사람을 보내어 블레셋 사람들의 방백들을 불러 이르되 삼손이 내게 진심을 알려 주었으니 이제 한 번만 올라오라 하니 블레셋 방백들이 손에 은을 가지고 그 여인에게로 올라오니라
19 들릴라가 삼손에게 자기 무릎을 베고 자게 하고 사람을 불러 그의 머리털 일곱 가닥을 밀고 괴롭게 하여 본즉 그의 힘이 없어졌더라
20 들릴라가 이르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21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붙잡아 그의 눈을 빼고 끌고 가사에 내려가 놋 줄로 매고 그에게 옥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라
22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15절 3번의 도전과 3번의 승리 이후에 삼손은 교만함으로 죄를 가볍게 여겼습니다. 16절 데릴라는 날마다 삼손을 채촉하고 조르매 삼손의 마음에 괴롭기만 하였습니다. 17절 이에 삼손은 드디어 자신의 비밀을 말하게 됩니다. 머리가 밀리면 내힘이 떠나고 나는 약해져서 일반 사람과 같으리라, 삼손은 나실인으로 마지막 금기 사항까지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18절 결국 들릴라에 의해서 삼손은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19절 머리를 밀린 삼손은 힘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20절 블레셋 사람들이 닥쳤을 때 이제 삼손은 속절없이 당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21절 삼손은 붙잡히고 눈이 뽑히는 그들의 옥에 갇혀서 맷돌을 돌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삼손은 나실인입니다. 나실인은 거룩히 구별된 사람입니다.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고, 시체를 만지지 않으며, 머리를 깍지 않음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나실인으로서 하나님께 정체성을 지켜 나갈 때 의미가 있고 보존되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삼손은 이 모든 것을 습관성 죄와 교만으로 가볍게 여기고 말았습니다. 결국 블레셋 사람으로 조종당하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성도는 성도로서 거룩함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밖에 버리어서 밟힘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맛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성도로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자신의 존재성을 위하여입니다. 성도의 가치는 스스로 지켜내야 하는 것입니다. 

2.
23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이르되 우리의 신이 우리 원수 삼손을 우리 손에 넘겨 주었다 하고 다 모여 그들의 신 다곤에게 큰 제사를 드리고 즐거워하고
24 백성들도 삼손을 보았으므로 이르되 우리의 땅을 망쳐 놓고 우리의 많은 사람을 죽인 원수를 우리의 신이 우리 손에 넘겨 주었다 하고 자기들의 신을 찬양하며
25 그들의 마음이 즐거울 때에 이르되 삼손을 불러다가 우리를 위하여 재주를 부리게 하자 하고 옥에서 삼손을 불러내매 삼손이 그들을 위하여 재주를 부리니라 그들이 삼손을 두 기둥 사이에 세웠더니
26 삼손이 자기 손을 붙든 소년에게 이르되 나에게 이 집을 버틴 기둥을 찾아 그것을 의지하게 하라 하니라
27 그 집에는 남녀가 가득하니 블레셋 모든 방백들도 거기에 있고 지붕에 있는 남녀도 삼천 명 가량이라 다 삼손이 재주 부리는 것을 보더라  

23-24절 삼손의 실패는 하나님의 이름을 조롱거리로 만들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사느냐가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보여주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삶에서는 하나님을 부인한다면, 세상은 우리의 말보다 우리의 삶을 봅니다. 25절 삼손을 불러다가 재주를 부리게 합니다. 구경거리로 삼았습니다. 25-26절 삼손은 지금 두 기둥 사이에 서 있습니다. 그의 눈은 뽑혔습니다. 그의 머리털은 밀렸습니다. 그는 쇠사슬에 묶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한때는 누구도 막을 수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26절에서 삼손이 소년에게 말합니다. “나에게 이 집을 버틴 기둥을 찾아 그것을 의지하게 하라” 여기서 처음으로 삼손의 모습에서 자기 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동안 삼손은 자신의 힘을 의지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기둥을 의지합니다. 그리고 더 깊이 보면, 삼손은 결국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자리까지 내려온 것입니다.

나는 세상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이름을 조롱거리로 만들고 있는가?” 삼손은 한때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살다가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실패 가운데서도 다시 일으키기 시작하셨습니다. 삼손은 조롱거리가 되었지만, 하나님은 조롱거리가 되실 수 없습니다. 사람이 실패해도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삼손의 마지막 기도와 마지막 사역이 디시 시작됩니다.

3.
28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29 삼손이 집을 버틴 두 기둥 가운데 하나는 왼손으로 하나는 오른손으로 껴 의지하고
30 삼손이 이르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들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31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다 내려가서 그의 시체를 가지고 올라가서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그의 아버지 마노아의 장지에 장사하니라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이십 년 동안 지냈더라

28절 삼손은 마지막 기도를 드립니다. ‘나를 생각하옵소서’ 나의 처지를 보고 은혜를 부어 다라는 것입니다. 긍휼을 베풀어 달라는 기도입니다.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예전에는 몰랐습니다. 자신의 하고싶은데로 하고 천하장사로 활개치고 다니던 시절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몰랐습니다. 이제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힘의 원천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만 하나님께 힘을 달라고 간구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29절 두 기둥을 팔로 잡은채로 30절 온 몸과 힘을 다해서 집을 무너지게 합니다. 마지막 힘의 회복입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하나님을 의지할 때 힘이 다시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삼손의 파란만장한 삶은 이렇게 마무리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갔지만 하나님의 사명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진짜 힘은 내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성도의 가장 큰 착각은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출발점은 “하나님이 나를 강하게 하셔야 합니다.”입니다. 빌립소서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아멘.

사랑의 아버지!!
성도로서 가진 거룩함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시고, 주를 끝까지 의지하며 마지막까지 주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존재가 되게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사기 17:1-13

1.
1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더니
2 그의 어머니에게 이르되 어머니께서 은 천백을 잃어버리셨으므로 저주하시고 내 귀에도 말씀하셨더니 보소서 그 은이 내게 있나이다 내가 그것을 가졌나이다 하니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3 미가가 은 천백을 그의 어머니에게 도로 주매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내가 내 아들을 위하여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기 위해 내 손에서 이 은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이 은을 네게 도로 주리라
4 미가가 그 은을 그의 어머니에게 도로 주었으므로 어머니가 그 은 이백을 가져다 은장색에게 주어 한 신상을 새기고 한 신상을 부어 만들었더니 그 신상이 미가의 집에 있더라
5 그 사람 미가에게 신당이 있으므로 그가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한 아들을 세워 그의 제사장으로 삼았더라
6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12사사를 지나서, 사사기 17장부터 21장까지는 사사기의 마지막 부분으로, “사사기 17:6, 21:25절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라는 말씀으로 정리됩니다. 17:1-6은 바로 그 시대의 영적 타락이 어떻게 개인의 신앙생활 속에 나타났는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 생각을 따라가는 신앙은 결국 우상을 만들게 됩니다.

1-2절 미가는 어머니의 은을 훔쳤다가 저주가 두러워 자백하며 돌려주게 됩니다. 어머니도 자식이 저주를 받을까 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미가는 죄를 하나님 앞에서 회개한 것이 아니라 저주가 두려워서 돌려주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저주가 무서워서 행동한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신앙의 첫 번째 모습입니다. 이는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신앙입니다.

3-4절 하나님께 드린 은으로 하나님이 금하신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여호와께 드린다고 하면서 우상을 만듭니다. 여기에 잘못된 신앙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금하신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는 자기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이것을 신앙의 관점에서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마음대로 바꾼 것입니다.” 자기식대로 만들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완전히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보다 더 교묘합니다.

5절 신앙을 자기 필요에 맞게 만들어 버린다. 여호와 신앙, 신상, 에봇, 드라빔, 산당, 개인 제사장 즉 성경적 신앙과 이방 종교적 요소가 뒤섞인 혼합주의입니다. 미가는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종교를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자기 방식으로 이용하려고 한 것입니다.

사사의 시대를 대표하는 미가의 가정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① 말씀보다 자기 생각이 앞섰습니다. ② 하나님보다 복을 더 원했습니다. ③ 하나님을 자기 마음대로 통제하려 했습니다. 잘못된 신앙의 근본 원인은? 6절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내가 기준이 되어 살아감입니다. 참된 신앙은? “내가 원하는 하나님”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내 생각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과 삶을 하나님의 말씀에 맞추어야 합니다.

2.
7 유다 가족에 속한 유다 베들레헴에 한 청년이 있었으니 그는 레위인으로서 거기서 거류하였더라
8 그 사람이 거주할 곳을 찾고자 하여 그 성읍 유다 베들레헴을 떠나 가다가 에브라임 산지로 가서 미가의 집에 이르매
9 미가가 그에게 묻되 너는 어디서부터 오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나는 유다 베들레헴의 레위인으로서 거류할 곳을 찾으러 가노라 하는지라
10 미가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와 함께 거주하며 나를 위하여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 내가 해마다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먹을 것을 주리라 하므로 그 레위인이 들어갔더라
11 그 레위인이 그 사람과 함께 거주하기를 만족하게 생각했으니 이는 그 청년이 미가의 아들 중 하나 같이 됨이라
12 미가가 그 레위인을 거룩하게 구별하매 그 청년이 미가의 제사장이 되어 그 집에 있었더라
13 이에 미가가 이르되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하니라

사사 시대의 또 다른 문제점입니다. 레위 제사장의 타락입니다. 

7-8절 사명을 떠나 자기 살길을 찾는 레위 청년입니다. 레위인은 그 지역을 떠나 살수가 없습니다. 각자에게 할당된 48성읍에서 살면서 제사장의 사명을 감당해야했습니다. 타락한 레위인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자리보다 자신이 살 곳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청년 레위인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곳을 찾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9-10절 레위 청년을 길을 나서서 미가를 만나게 되고 서로의 필요를 확인한 결과, 미가 집안의 개인 제사장이 되어서 요즘식으로 월급을 받아먹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레위 제사장은 절대로 개인 가정의 제사장이 될 수 없습니다. 지파와 전체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께 제사하며 성전에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청년 레위인의 직분은 자신의 개인 생계를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신앙의 위기는 사명이 사라질 때 생기는 것입니다.

11-13절 오직 구하는 것은? 육신의 복입니다. 레위 청년은 육신의 안정을 얻고, 미가는 육신의 복을 기대합니다. 레위 청년은 먹고사는 복을 원했고, 미가는 가정의 복과 형통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서로의 욕망이 만나게 됩니다. 레위 청년이 구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의 살길이었습니다. 미가가 구한 것도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을 통해 얻을 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사라지고 육신의 필요만 남았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이용하여 육신의 복을 얻으려는 잘못된 신앙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사사 시대의 가정적인 타락과 교회적인 타락을 보면서 우리의 모습과 신앙을 성찰하고 바로잡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사기 18:1-20

1.
1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단 지파는 그 때에 거주할 기업의 땅을 구하는 중이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그 때까지 기업을 분배 받지 못하였음이라
2 단 자손이 소라와 에스다올에서부터 그들의 가족 가운데 용맹스런 다섯 사람을 보내어 땅을 정탐하고 살피게 하며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가서 땅을 살펴보라 하매 그들이 에브라임 산지에 가서 미가의 집에 이르러 거기서 유숙하니라
3 그들이 미가의 집에 있을 때에 그 레위 청년의 음성을 알아듣고 그리로 돌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누가 너를 이리로 인도하였으며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며 여기서 무엇을 얻었느냐 하니
4 그가 그들에게 이르되 미가가 이러이러하게 나를 대접하고 나를 고용하여 나를 자기의 제사장으로 삼았느니라 하니라
5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 보아서 우리가 가는 길이 형통할는지 우리에게 알게 하라 하니
6 그 제사장이 그들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너희가 가는 길은 여호와 앞에 있느니라 하니라

사사시대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미가라는 개인의 집과 레위 청년이라는 한 레위인의 문제를  넘어서 단 지파로 확장됩니다.

1절 이스라엘에 왕이 없음으로 총체적인 난국의 시대에, 단 지파는 아직 기업을 분배받았으나 땅이 좁아서 온전히 정착하지 못하고 거주할 기업을 찾아 떠돌던 시대입니다. 2절 단 지파는 용맹스런 다섯명의 정탐꾼을 보내서 땅을 정탐하고 살피게 합니다. 이때 북쪽으로 이동하던 다섯명의 정탐꾼들이 미가의 집에 머물며 유숙하게 됩니다. 3절 미가의 집에서 레위 청년을 만나게 되고 4절 자초지경을 이야기 하고 자신의 처지를 정탐꾼들에게 알리게 됩니다. 5절 정탐꾼들은 자신의 앞날을 묻게 되고 6절 레위 청년은 좋은 말로 이들의 환심을 사게 됩니다. 

본문에서 가짜 축복과 거짓말이 난무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고 자기 욕망을 이루려는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면서도 거짓된 평안에 빠질 수 있습니다. 5절 정탐꾼들은 제사장에게 자신의 길이 형통할지 물어봅니다. 참된 기도는 “하나님, 제가 가려는 길이 주님의 뜻에 맞습니까?” 물어보는 것이고, 자기 뜻을 위한 기도 “하나님, 제가 정한 이 길이 성공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입니다. 

우리는 세 가지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합니다. 첫째, 말씀 없는 축복을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과 상관없이 무조건 잘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성경적 축복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참된 축복은 하나님의 뜻과 말씀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둘째, 내 뜻을 확인받기 위한 신앙을 경계해야 합니다. 기도와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을 설득하여 내 뜻을 이루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는 데 있습니다. 셋째, 모든 영적 선언을 말씀으로 분별해야 합니다. 누군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평안과 형통을 약속하더라도, 그 말이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는지 살펴야 합니다. 요한일서 4:1은 영들을 다 믿지 말고 분별하라고 가르칩니다.

2.
7 이에 다섯 사람이 떠나 라이스에 이르러 거기 있는 백성을 본즉 염려 없이 거주하며 시돈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평온하며 안전하니 그 땅에는 부족한 것이 없으며 부를 누리며 시돈 사람들과 거리가 멀고 어떤 사람과도 상종하지 아니함이라
8 그들이 소라와 에스다올에 돌아가서 그들의 형제들에게 이르매 형제들이 그들에게 묻되 너희가 보기에 어떠하더냐 하니
9 이르되 일어나 그들을 치러 올라가자 우리가 그 땅을 본즉 매우 좋더라 너희는 가만히 있느냐 나아가서 그 땅 얻기를 게을리 하지 말라
10 너희가 가면 평화로운 백성을 만날 것이요 그 땅은 넓고 그 곳에는 세상에 있는 것이 하나도 부족함이 없느니라 하나님이 그 땅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하는지라
11 단 지파의 가족 중 육백 명이 무기를 지니고 소라와 에스다올에서 출발하여
12 올라가서 유다에 있는 기럇여아림에 진 치니 그러므로 그 곳 이름이 오늘까지 마하네 단이며 그 곳은 기럇여아림 뒤에 있더라
13 무리가 거기서 떠나 에브라임 산지 미가의 집에 이르니라

7절 단 지파의 정탐꾼은 라이스(가나안 북쪽지역)를 살펴보니 평온하고 좋아 보이는 땅이였습니다. 자신들이 점령하여 살기에 적합한 지역이라 판단되었습니다. 8절 돌아가 선교보고를 하고 9절 그 땅을 치려 올라가자 그 땅은 매우 좋은 땅이라 소개합니다. 10절 스스로 하나님이 허락하신 평화의 땅으로 확신하게 됩니다. 11-13절 단 지파는 라이스를 치기를 결정하고 군대 600명을 모아서 그 땅을 점령하기 위하여 다시 올라가게 됩니다. 그리고 올라가는 길에 이전에 들렸던 미가의 집에 들어가게 됩니다. 

내가 원하는 길이 열렸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 길을 승인하셨다고 단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내 계획에 붙이는 것이 아니라, 내 계획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내려놓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기회와 하나님의 뜻을 구별해야 합니다. 좋은 조건과 유리한 환경을 발견했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3.
14 전에 라이스 땅을 정탐하러 갔던 다섯 사람이 그 형제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 집에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신상과 부어 만든 신상이 있는 줄을 너희가 아느냐 그런즉 이제 너희는 마땅히 행할 것을 생각하라 하고
15 다섯 사람이 그 쪽으로 향하여 그 청년 레위 사람의 집 곧 미가의 집에 이르러 그에게 문안하고
16 단 자손 육백 명은 무기를 지니고 문 입구에 서니라
17 그 땅을 정탐하러 갔던 다섯 사람이 그리로 들어가서 새긴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과 부어 만든 신상을 가져갈 때에 그 제사장은 무기를 지닌 육백 명과 함께 문 입구에 섰더니
18 그 다섯 사람이 미가의 집에 들어가서 그 새긴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과 부어 만든 신상을 가지고 나오매 그 제사장이 그들에게 묻되 너희가 무엇을 하느냐 하니
19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잠잠하라 네 손을 입에 대라 우리와 함께 가서 우리의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 네가 한 사람의 집의 제사장이 되는 것과 이스라엘의 한 지파 한 족속의 제사장이 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낫겠느냐 하는지라
20 그 제사장이 마음에 기뻐하여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우상을 받아 가지고 그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니라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이익을 선택할 때, 우상숭배는 개인을 넘어 공동체 전체로 확산됩니다. 단 지파의 정탐꾼들이 미가의 집에서 발견한 종교적 물건들을 동족에게 알려 주고, 단 지파 사람들이 미가의 신상과 제사장을 빼앗아 가는 장면입니다. 레위 청년은 왜 침묵합니까? 레위 청년은 미가의 집에서 제사장으로 섬기다가 더 큰 공동체의 제사장이 될 기회를 얻자 그들을 따라갑니다.

본문은 총체적인 신앙의 3가지 문제점을 지적합니다. 
* 신앙을 소유물과 사유화 합니다. 미가는 우상을 만들어 자기 집에 두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나님의 말씀에 맡기기보다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구성했습니다.
* 신앙을 개인과 집단의 이익에 이용합니다. 단 지파는 새로운 거주지를 얻는 과정에서 미가의 우상과 제사장을 가져갔습니다. 잘못된 신앙이 개인의 집을 넘어 지파의 종교 체계로 확대됩니다.
* 직분을 자기 이익에 종속시키고 성공의 도구로 여깁니다. 레위 청년은 더 큰 집단의 제사장이 될 기회를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충성보다 자신에게 유리한 자리를 선택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은 더 큰 자리를 얻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신앙의 이름으로 욕망을 정당화하지 말고, 직분을 이용해 자기 이익을 구하지 말며, 사람의 제안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귀하게 여기는 충성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사랑이 아버지!!
하나님을 사유화하며 성공과 성취의 목적으로 삼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사기 18:21-31

1.
21 그들이 돌이켜서 어린 아이들과 가축과 값진 물건들을 앞세우고 길을 떠나더니
22 그들이 미가의 집을 멀리 떠난 때에 미가의 이웃집 사람들이 모여서 단 자손을 따라 붙어서
23 단 자손을 부르는지라 그들이 얼굴을 돌려 미가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일로 이같이 모아 가지고 왔느냐 하니
24 미가가 이르되 내가 만든 신들과 제사장을 빼앗아 갔으니 이제 내게 오히려 남은 것이 무엇이냐 너희가 어찌하여 나더러 무슨 일이냐고 하느냐 하는지라
25 단 자손이 그에게 이르되 네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리게 하지 말라 노한 자들이 너희를 쳐서 네 생명과 네 가족의 생명을 잃게 할까 하노라 하고
26 단 자손이 자기 길을 간지라 미가가 단 자손이 자기보다 강한 것을 보고 돌이켜 집으로 돌아갔더라

사사기 18장의 사건은 사사 시대의 영적 혼란을 보여 줍니다. 단 지파는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충분히 정착하지 못한 상황에서 새로운 거주지를 찾아 나섭니다. 그 과정에서 라이스를 정탐하고, 그곳을 정복하기 위해 북쪽으로 이동합니다. 그런데 단 지파의 이동에는 단순한 영토 확장 이상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 미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자기 방식으로 신상을 만들었습니다.
- 레위 청년: 하나님의 부르심과 직분보다 개인적인 이익을 따라 움직였습니다.
- 단 지파: 하나님의 뜻을 묻기보다 자기들의 성공을 위해 우상과 제사장을 빼앗았습니다.
사사시대 이스라엘의 문제는 한 개인, 가정, 종교와 지파로 이어지는 총체적인 문제였습니다.

21절 단 지파는 미가의 집을 약탈하고 자신들의 길을 떠납니다. 22절 이에 미가는 마을 사람을 모아서 단 지파를 추격합니다. 23절 그러나 무엇 때문에 여기 까지 왔느냐? 묻는 단 지파의 말에 변변한 대답 조차 하지 못합니다. 이는 아무런 신앙적인 명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없고, 신앙적 양심도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24절 미가는 남아있는 용기를 짜내어서 너희들이 빼앗아간 신상과 제사장 때문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내게 남은 것이 무엇이냐?’고 탄식합니다. 그러나 과연 미가의 집에 남은 것이 없습니까? 없어진 것은 거짓 신상과 자신의 집에 복을 빌어주는 제사장 뿐입니다. 그러나 미가는 모든 것을 잃어 버렸다고 착각하며 한탄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을 놓쳐버리고 버려야 할 것으로 채워진 거짓된 인생입니다. 25절 단 지파는 이런 미가를 위협하며 더 이상 떠들지 말고 조용하라 자신들의 가진 힘으로 미가를 협박하자 26절 미가는 할 수 없어 돌아서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세상의 다툼은 무엇때문입니까? 욕망과 욕심 때문입니다. 아무런 명분도 없고 근본도 없는 것으로 추격하고 도망가는 세상입니다. 세상은 찾아 떠나는 것이 이치요, 신앙과 믿음은 찾아오는 것이 이치입니다. 명분없는 우상(욕심과 욕망)으로 싸우지 말고 우리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으로 승리하는 은혜가 있길 기도합니다. 

2.
27 단 자손이 미가가 만든 것과 그 제사장을 취하여 라이스에 이르러 한가하고 걱정 없이 사는 백성을 만나 칼날로 그들을 치며 그 성읍을 불사르되
28 그들을 구원할 자가 없었으니 그 성읍이 베드르홉 가까운 골짜기에 있어서 시돈과 거리가 멀고 상종하는 사람도 없음이었더라 단 자손이 성읍을 세우고 거기 거주하면서
29 이스라엘에게서 태어난 그들의 조상 단의 이름을 따라 그 성읍을 단이라 하니라 그 성읍의 본 이름은 라이스였더라
30 단 자손이 자기들을 위하여 그 새긴 신상을 세웠고 모세의 손자요 게르솜의 아들인 요나단과 그의 자손은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어 그 땅 백성이 사로잡히는 날까지 이르렀더라
31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미가가 만든 바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었더라 

27절 단 지파는 라이스를 공격하고 점령합니다. 28절 그 곳에 성읍을 세우고 29절 단이라고 이름을 붙었습니다. 30절 모세의 손자 게르솜의 아들 요나단-여기서 놀라운 사실이 밝혀집니다. 사사기 17장에서 이름 없이 등장했던 미가의 젊은 레위 청년이 사사기 30절에서 ‘요나단’이라는 이름으로 밝혀집니다. 31절 그리고 미가의 우상 신상이 단 지파의 손에서 계속 섬김을 받게 되었습니다. 미가의 집에서 시작된 우상숭배가 결국 단 지파 전체의 종교적인 관행으로 확대되고 말았습니다. 

작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바로 잡아야 할 책임 있는 사람이 레위 제사장들입니다. 그럼에도 욕망과 욕심으로 주님 주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하고 방관하게 되면 교회와 지파와 나라가 악으로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바로 잡아야 할 것은? 바로 내 안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사명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 없는 싸움을 멈추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안에 작은 누룩을 제거하며 지금 나로 악을 제거하는 결심과 결단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사기 19:1-30

1.
1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거류하는 어떤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맞이하였더니
2 그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 유다 베들레헴 그의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서 거기서 넉 달 동안을 지내매
3 그의 남편이 그 여자에게 다정하게 말하고 그를 데려오고자 하여 하인 한 사람과 나귀 두 마리를 데리고 그에게로 가매 여자가 그를 인도하여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니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기뻐하니라

사사기 19장은 사사기 전체에서 가장 어둡고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를 다룹니다. 17–18장에서 우상숭배와 잘못된 신앙을 다루었다면, 19–21장에서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도덕적 타락과 그로 인한 비극을 보여 줍니다. 특히 19:1-3절은 한 레위인의 가정에서 시작된 문제가 어떻게 이스라엘 전체의 비극으로 이어지는지 보여 주는 서론입니다.

1-3절은 사사시대 레위인의 타락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1절 경건해야 할 레위인이 첩을 두었습니다. 2절 그리고 그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3절 더 심각한 것은 행음한 여인을 다시 찾았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경건해고 거룩해야 할 레위인의 가정이 불법과 불의 죄로 가득 채워져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신 직분에서 타락하면 그 것은 일반인들보다 더 타락하고 추악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2.
4 그의 장인 곧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를 머물게 하매 그가 삼 일 동안 그와 함께 머물며 먹고 마시며 거기서 유숙하다가
5 넷째 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떠나고자 하매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의 사위에게 이르되 떡을 조금 먹고 그대의 기력을 돋운 후에 그대의 길을 가라 하니라
6 두 사람이 앉아서 함께 먹고 마시매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청하노니 이 밤을 여기서 유숙하여 그대의 마음을 즐겁게 하라 하니
7 그 사람이 일어나서 가고자 하되 그의 장인의 간청으로 거기서 다시 유숙하더니
8 다섯째 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떠나고자 하매 그 여자의 아버지가 이르되 청하노니 그대의 기력을 돋우고 해가 기울도록 머물라 하므로 두 사람이 함께 먹고
9 ...청하건대 이 밤도 유숙하라 보라 해가 기울었느니라 ...
10 그 사람이 다시 밤을 지내고자 하지 아니하여 일어나서 떠나 여부스 맞은편에 이르렀으니 여부스는 곧 예루살렘이라 안장 지운 나귀 두 마리와 첩이 그와 함께 하였더라
11 그들이 여부스에 가까이 갔을 때에 해가 지려 하는지라 종이 주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우리가 돌이켜 여부스 사람의 이 성읍에 들어가서 유숙하십시다 하니
12 주인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돌이켜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하지 아니한 이방 사람의 성읍으로 들어갈 것이 아니니 기브아로 나아가리라 하고
....
15 기브아에 가서 유숙하려고 그리로 돌아 들어가서 성읍 넓은 거리에 앉아 있으나 그를 집으로 영접하여 유숙하게 하는 자가 없었더라

4-10절까지 아내를 찾아 처가댁으로 간 레위인은 장인의 극직한 환대를 받고 삼일, 사일을 지낸 후에 오일째 되는 날 장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길을 떠나게 됩니다. 11절 늦게 출발한 까닭에 중간에 해가 져서 밤이 되어 쉴 곳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부스(예루살렘)은 아직 점령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여전히 이방인의 땅이라 불안함이 있어서 12-14절 기브아 자신들의 민족이 살고 있는 지역으로 이동하여 머물게 됩니다. 15절 그러나 왠 일인지 동족중에 누구도 나그네를 영접해 숙소를 제공해 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레위기 19:33-34절 말씀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실천이 없었던 것입니다. 

레위기 19:33절 거류민이 너희의 땅에 거류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34절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3.
16 저녁 때에 한 노인이 밭에서 일하다가 돌아오니 그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 산지 사람으로서 기브아에 거류하는 자요 그 곳 사람들은 베냐민 자손이더라
18 그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는 유다 베들레헴에서 에브라임 산지 구석으로 가나이다 나는 그 곳 사람으로서 유다 베들레헴에 갔다가 이제 여호와의 집으로 가는 중인데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는 사람이 없나이다
20 그 노인이 이르되 그대는 안심하라 그대의 쓸 것은 모두 내가 담당할 것이니 거리에서는 유숙하지 말라 하고
21 그를 데리고 자기 집에 들어가서 나귀에게 먹이니 그들이 발을 씻고 먹고 마시니라

22 그들이 마음을 즐겁게 할 때에 그 성읍의 불량배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들기며 집 주인 노인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와 관계하리라 하니
23 집 주인 그 사람이 그들에게로 나와서 이르되 아니라 내 형제들아 청하노니 이같은 악행을 저지르지 말라 이 사람이 내 집에 들어왔으니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
24 보라 여기 내 처녀 딸과 이 사람의 첩이 있은즉 내가 그들을 끌어내리니 너희가 그들을 욕보이든지 너희 눈에 좋은 대로 행하되 오직 이 사람에게는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 하나
25 무리가 듣지 아니하므로 그 사람이 자기 첩을 붙잡아 그들에게 밖으로 끌어내매 그들이 그 여자와 관계하였고 밤새도록 그 여자를 능욕하다가 새벽 미명에 놓은지라
26 동틀 때에 여인이 자기의 주인이 있는 그 사람의 집 문에 이르러 엎드러져 밝기까지 거기 엎드러져 있더라
27 그의 주인이 일찍이 일어나 집 문을 열고 떠나고자 하더니 그 여인이 집 문에 엎드러져 있고 그의 두 손이 문지방에 있는 것을 보고
28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라 우리가 떠나가자 하나 아무 대답이 없는지라 이에 그의 시체를 나귀에 싣고 행하여 자기 곳에 돌아가서
29 그 집에 이르러서는 칼을 가지고 자기 첩의 시체를 거두어 그 마디를 찍어 열두 덩이에 나누고 그것을 이스라엘 사방에 두루 보내매

다행스럽게, 16절 한 노인을 만나게 되고 18절 자신의 자초지경을 말한 뒤 20-21절 노인의 환대를 받아 집으로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22절부터 생각하지도 못한 비극적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그 노인의 집을 에워싸고 그 집안으로 들어간 남자를 내놓으라 요청합니다. 이유는? ‘우리가 그와 관계(동성애) 하리라’입니다. 이는 창세기 19장의 소돔 사람들이 롯의 집을 에워싸고 요청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읍이 소돔과 같았다는 것입니다. 

23-24절 집 주인은 차선책으로 자신의 딸과 레위인의 첩을 내어 주어서 그 문제를 무마하려합니다. 이것 역시 잘못된 선택이며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악을 막으려 하면서도 또 다른 악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선한 목적을 내세운다고 해서 잘못된 방법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25절 이 본문은 참으로 참혹한 내용입니다. 레위인은 피해자를 보호해야 할 남편이었지만, 오히려 자기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 여인을 폭도들에게 내어 주었습니다. 레위인은 종교적 도덕적 양심 모든 부분에서 바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6-27절 결국 밤새도록 끔찍한 폭행을 당한 뒤 여인은 죽음을 맞이 하게 됩니다. 28절 레위인을 여인의 시체를 거두어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29절 집에 돌아온 레위인은 여인을 12조각 내어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게 보내어 이스라엘 전체에게 알리게 됩니다. 결국 이 기브아의 사건으로 인하여 민족이 민족을 죽이는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하나님의 떠난 레위인, 하나님을 떠난 민족에게 닥치는 죄와 결과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죄는 반드시 그 열매를 드러냅니다. 

사사기 19장은 하나님을 떠난 시대의 모습을 세 가지로 보여 줍니다.
- 레위인: 직분을 가졌지만 책임을 저버렸습니다.
- 기브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름은 있었지만 약자를 보호하지 않았습니다.
- 이스라엘: 한 성읍의 죄악이 민족 전체의 분열과 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사사기 21:25은 이 모든 비극을 요약합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하나님을 떠난 레위인은 자신의 직분을 잃어버린 신앙의 모습을 보여 주었고, 하나님을 떠난 기브아는 공동체의 도덕성이 무너진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은 한 여인의 비극을 민족 전체의 비극으로 확대시켰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름에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리에 죄가 들어오고, 죄가 자리 잡은 곳에는 파괴와 고통이 열매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을 떠난 모든 것의 결과와 열매를 보게 하시고 마음에 경종을 울리며 각성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사기 20:1-7

1.
1 이에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와 길르앗 땅에서 나와서 그 회중이 일제히 미스바에서 여호와 앞에 모였으니
2 온 백성의 어른 곧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어른들은 하나님 백성의 총회에 섰고 칼을 빼는 보병은 사십만 명이었으며

집으로 돌아온 레위인은 죽은 첩을 12조각 내어 온 이스라엘 지파로 보내었습니다. 기브아의 사건을 알리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이 사건은 지금 까지 이스라엘 역사에서 전래가 없었던 일로 온 이스라엘이 충격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1절 때문에 온 이스라엘은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즉 남에서 북까지, 길르앗 땅-요단동편 지파까지 온 지파가 분기하여 미스바에 모이게 됩니다. 2절 온 이스라엘 백성이 칼을 빼들고 모였는데 그 숫자가 무려 40만명에 달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모임의 가치판단이 감정에 치우쳐 있었습니다. ‘여호와 앞에 모였으니’라고 기록하지만 신앙적인 어떤 행위나 하나님께 구하는 어떤 모습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였지만, 하나님은 없고 인간의 감정과 분노만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감정과 분노는 일을 망치고 키울 뿐입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정죄 판단보다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내어놓고 먼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2.
3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올라간 것을 베냐민 자손이 들었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이르되 이 악한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우리에게 말하라 하니
4 레위 사람 곧 죽임을 당한 여인의 남편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내 첩과 더불어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에 유숙하러 갔더니
5 기브아 사람들이 나를 치러 일어나서 밤에 내가 묵고 있던 집을 에워싸고 나를 죽이려 하고 내 첩을 욕보여 그를 죽게 한지라
6 내가 내 첩의 시체를 거두어 쪼개서 이스라엘 기업의 온 땅에 보냈나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중에서 음행과 망령된 일을 행하였기 때문이라
7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가 다 여기 있은즉 너희의 의견과 방책을 낼지니라 하니라 

레위인은 주관적인 진술로 분노를 유발시킵니다. 3절 일의 경위를 묻는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4절 경위를 설명하며 자신과 첩이 기브아에 유숙하는 중에 5절 기브아의 사람이 자신을 치려고 밤에 집을 에워싸고 죽이려 하고 자신의 첩을 욕보였다고 설명합니다. 

이 진술에서 레위인은 자신을 위협받은 피해자로 제시하고, 기브아 사람들의 악행을 강조합니다. 특히 사사기 19:25에는 레위인이 자기 첩을 밖으로 내보낸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사기 20장의 진술에서는 그 행동이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습니다. 이 점은 중요합니다. 레위인은 실제로 악을 당한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건의 모든 책임에서 자유로운 인물은 아닙니다. 일부의 잘못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인을 불량자에게 내어주고 자신은 밤새 편히 쉬었던 사실을 철저하게 숨기고 자신이 가장 괴로운 피해자가 된 것처럼 사실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죄를 짓기도 하지만, 때로는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한 채 다른 사람의 죄를 심판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정의는 다른 사람을 향한 정죄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 앞에 자신을 세우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 없는 분노와 정의를 가장한 위선으로부터 사람들을 정죄 심판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모든 상황 중에서 말씀을 발견하게 하시고 나를 발견하는 은혜를 주옵소서. 예수님이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사기 20:8-28

1.
8 모든 백성이 일제히 일어나 이르되 우리가 한 사람도 자기 장막으로 돌아가지 말며 한 사람도 자기 집으로 들어가지 말고
9 우리가 이제 기브아 사람에게 이렇게 행하리니 곧 제비를 뽑아서 그들을 치되
10 우리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백 명에 열 명, 천 명에 백 명, 만 명에 천 명을 뽑아 그 백성을 위하여 양식을 준비하고 그들에게 베냐민의 기브아에 가서 그 무리가 이스라엘 중에서 망령된 일을 행한 대로 징계하게 하리라 하니라
11 이와 같이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하나 같이 합심하여 그 성읍을 치려고 모였더라
12 이스라엘 지파들이 베냐민 온 지파에 사람들을 보내어 두루 다니며 이르기를 너희 중에서 생긴 이 악행이 어찌 됨이냐
13 그런즉 이제 기브아 사람들 곧 그 불량배들을 우리에게 넘겨 주어서 우리가 그들을 죽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거하여 버리게 하라 하나 베냐민 자손이 그들의 형제 이스라엘 자손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14 도리어 성읍들로부터 기브아에 모이고 나가서 이스라엘 자손과 싸우고자 하니라
15 그 때에 그 성읍들로부터 나온 베냐민 자손의 수는 칼을 빼는 자가 모두 이만 육천 명이요 그 외에 기브아 주민 중 택한 자가 칠백 명인데
16 이 모든 백성 중에서 택한 칠백 명은 다 왼손잡이라 물매로 돌을 던지면 조금도 틀림이 없는 자들이더라

미스바에 모신 이스라엘은 레위인이 설명한 자초지경을 듣고 8-9절 분노하며 기브아를 치기를 결정합니다. 10절 각 지파별로 병력을 배정하고 양식을 준비합니다. 11절 이스라엘이 하나가 되어서 전쟁을 결심합니다. 

12절 이스라엘은 베냐민 지파에게 사람을 보내어 13절 불량배를 넘겨 주어서 악을 제하고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지만, 베냐민은 불량배를 감싸고 말을 듣지 아니하였습니다. 베냐민 지파는 형제 이스라엘보다는 자기 지파의 사람을 선택합니다. 이들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감싸느라 죄를 바로잡지 못합니다. 진실을 밝히기보다 자기편을 보호하는 데 집중합니다. 공동체의 명예를 지키려다가 오히려 공동체 전체를 위기에 빠뜨립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그 사람의 죄를 감싸는 것은 다릅니다. 참된 사랑은 죄를 숨기는 것이 아니라 회개와 책임의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14절 결국 베냐민은 이스라엘과 전쟁을 선택합니다. 만약 베냐민 지파가 이스라엘의 요구를 받아들였다면, 기브아의 범죄자들을 조사하고 책임을 물어 더 큰 충돌을 막을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감싸는 행동으로 더 큰 죄를 낳게 됩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있다는 사실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 잘못을 알면서도 관계와 체면 때문에 바로잡지 못하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화평을 지킨다는 이유로 불의를 묵인하면, 그것은 참된 화평이 아닙니다. 진실을 밝히고 책임을 묻는 과정이 오히려 회복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2.
17 베냐민 자손 외에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칼을 빼는 자의 수는 사십만 명이니 다 전사라
18 이스라엘 자손이 일어나 벧엘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유다가 먼저 갈지니라 하시니라
19 이스라엘 자손이 아침에 일어나 기브아를 대하여 진을 치니라
20 이스라엘 사람이 나가 베냐민과 싸우려고 전열을 갖추고 기브아에서 그들과 싸우고자 하매
21 베냐민 자손이 기브아에서 나와서 당일에 이스라엘 사람 이만 이천 명을 땅에 엎드러뜨렸으나
22 이스라엘 사람들이 스스로 용기를 내어 첫날 전열을 갖추었던 곳에서 다시 전열을 갖추니라
23 이스라엘 자손이 올라가 여호와 앞에서 저물도록 울며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다시 나아가서 내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올라가서 치라 하시니라
24 그 이튿날에 이스라엘 자손이 베냐민 자손을 치러 나아가매
25 베냐민도 그 이튿날에 기브아에서 그들을 치러 나와서 다시 이스라엘 자손 만 팔천 명을 땅에 엎드러뜨렸으니 다 칼을 빼는 자였더라

17절 연합군 40만명대 베냐민 지파 26500명의 전쟁이 시작됩니다. 18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묻고 유다가 선두가 되어서 전쟁을 합니다. 그러나 21절 이스라엘이 패하여 22000명이 죽고, 22절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서 23절 기도하여 올라가서 싸울 때 25절 2차에서도 18000명이 죽어 패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악을 징계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이 왜 두 번이나 패배했는가?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이유를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기록된 문맥을 통하여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물었지만, 먼저 이스라엘은 전쟁을 해야 하는지, 자신들의 판단이 옳은지, 어떤 죄를 돌아보아야 하는지? 먼저 묻지 않았습니다. 누가 먼저 전쟁에 나갈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이미 자신의 결정을 확정해 놓고 방법만 묻는다면,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가 아니라 자기 계획을 확인받으려는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해 달라고 요청하기 전에, 내가 가려는 길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지 먼저 살펴야 합니다.

3.
26 이에 온 이스라엘 자손 모든 백성이 올라가 벧엘에 이르러 울며 거기서 여호와 앞에 앉아서 그 날이 저물도록 금식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고
27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물으니라 그 때에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거기 있고
28 아론의 손자인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그 앞에 모시고 섰더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쭈기를 우리가 다시 나아가 내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말리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내일은 내가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 하시는지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도 전쟁에 패하여 18000명이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의야해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응답 후 패배를 받아 들을 수 없으며 쉽게 이해 할 수 없습니다. 왜 이스라엘이 2차에도 또 패배하게 되었는가? 

이 질문의 해답을 본문으로 가름해 볼 수 있습니다. 26절 금식과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입니다. 첫 번째 패배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군사적 자신감을 무너뜨렸고, 두 번째 패배는 그들을 더욱 깊이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결국 2차례의 패배가 이스라엘의 감정적 도전과 복수가 신앙과 믿음으로 다시 승화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2번째 패배를 통하여 더 많이 엎드리고, 더 뜨겁게 예배하며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2번의 패배가 이스라엘에게 신앙과 믿음에 약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공만이 아니라 실패를 통하여서도 우리를 세워 새롭게 하는 줄 믿습니다. 신앙인의 실패를 통하여 더 무르익는 신앙과 믿음이 되길 소망합니다. 

사랑의 아버지!!
전쟁의 승리보다 더 값진 것, 주님을 더 알아가는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사기 20:29-48

1.
29 이스라엘이 기브아 주위에 군사를 매복하니라
30 이스라엘 자손이 셋째 날에 베냐민 자손을 치러 올라가서 전과 같이 기브아에 맞서 전열을 갖추매
31 베냐민 자손이 나와서 백성을 맞더니 꾀임에 빠져 성읍을 떠났더라 그들이 큰 길 곧 한쪽은 벧엘로 올라가는 길이요 한쪽은 기브아의 들로 가는 길에서 백성을 쳐서 전과 같이 이스라엘 사람 삼십 명 가량을 죽이기 시작하며
32 베냐민 자손이 스스로 이르기를 이들이 처음과 같이 우리 앞에서 패한다 하나 이스라엘 자손은 이르기를 우리가 도망하여 그들을 성읍에서 큰 길로 꾀어내자 하고
33 이스라엘 사람이 모두 그들의 처소에서 일어나서 바알다말에서 전열을 갖추었고 이스라엘의 복병은 그 장소 곧 기브아 초장에서 쏟아져 나왔더라
34 온 이스라엘 사람 중에서 택한 사람 만 명이 기브아에 이르러 치매 싸움이 치열하나 베냐민 사람은 화가 자기에게 미친 줄을 알지 못하였더라
35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앞에서 베냐민을 치시매 당일에 이스라엘 자손이 베냐민 사람 이만 오천백 명을 죽였으니 다 칼을 빼는 자였더라

하나님에 약속의 말씀대로 2차례 패배 이후에 이스라엘 연합군은 승리를 얻게 됩니다. 베냐민은 2번의 승리로 자신감이 충만했고, 이스라엘의 연합군은 신중하게 매복작전을 펼치며 전쟁에 임하게 됩니다. 

29-35절 전쟁의 승리를 먼저 요약합니다. 29절: 기브아 사방에 복병을 배치합니다. 30-32절  이스라엘이 물러나는 척하자 베냐민이 추격합니다. 33-34절 이스라엘 본대와 복병이 협공합니다. 35절 여호와께서 베냐민을 치셨으며, 베냐민 사람 25,100명이 죽임을 당합니다.

특히 35절은 이 전쟁을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앞에서 베냐민을 치시매…” 이 구절은 전쟁의 결과를 신학적으로 해석합니다. 이스라엘의 승리가 단순한 군사 전략의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으로 제시되는 것입니다. 핵심은 ‘누가 승리하게 하셨는가?’입니다. 

2.
36 이에 베냐민 자손이 자기가 패한 것을 깨달았으니 이는 이스라엘 사람이 기브아에 매복한 군사를 믿고 잠깐 베냐민 사람 앞을 피하매
37 복병이 급히 나와 기브아로 돌격하고 나아가며 칼날로 온 성읍을 쳤음이더라
38 처음에 이스라엘 사람과 복병 사이에 약속하기를 성읍에서 큰 연기가 치솟는 것으로 군호를 삼자 하고
39 이스라엘 사람은 싸우다가 물러가고 베냐민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 삼십 명 가량을 쳐죽이기를 시작하며 이르기를 이들이 틀림없이 처음 싸움 같이 우리에게 패한다 하다가
40 연기 구름이 기둥 같이 성읍 가운데에서 치솟을 때에 베냐민 사람이 뒤를 돌아보매 온 성읍에 연기가 하늘에 닿았고
41 이스라엘 사람은 돌아서는지라 베냐민 사람들이 화가 자기들에게 미친 것을 보고 심히 놀라
42 이스라엘 사람 앞에서 몸을 돌려 광야 길로 향하였으나 군사가 급히 추격하며 각 성읍에서 나온 자를 그 가운데에서 진멸하니라
43 그들이 베냐민 사람을 에워싸고 기브아 앞 동쪽까지 추격하며 그 쉬는 곳에서 짓밟으매
44 베냐민 중에서 엎드러진 자가 만 팔천 명이니 다 용사더라
45 그들이 몸을 돌려 광야로 도망하였으나 림몬 바위에 이르는 큰 길에서 이스라엘이 또 오천 명을 이삭 줍듯 하고 또 급히 그 뒤를 따라 기돔에 이르러 또 이천 명을 죽였으니
46 이 날에 베냐민 사람으로서 칼을 빼는 자가 엎드러진 것이 모두 이만 오천 명이니 다 용사였더라

36-46절은 전쟁에 대한 상세 설명입니다. 36-38절 이스라엘의 후퇴와 복병의 기브아-작전의 실제 진행, 39-41절 기브아에서 연기가 올라오고 베냐민이 패배를 깨달음-전세의 역전, 42-44절	베냐민 군대의 도주와 추격-패배의 확대, 45-46절 림몬 바위로 도망하는 생존자들과 전사자 수-심판의 참혹함입니다. 

베냐민은 처음에 자신들이 승리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기브아에서 연기가 올라오는 순간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핵심은 ‘그 심판이 어떻게 진행되었는가?’입니다.

3.
47 베냐민 사람 육백 명이 돌이켜 광야로 도망하여 림몬 바위에 이르러 거기에서 넉 달 동안을 지냈더라
48 이스라엘 사람이 베냐민 자손에게로 돌아와서 온 성읍과 가축과 만나는 자를 다 칼날로 치고 닥치는 성읍은 모두 다 불살랐더라

베냐민 군대 26700명(26000+기브아병력 700) 중 전사자 26000명, 생존자는 600명입니다. 잔인한 결과입니다. 나아가서 이스라엘 연합군은 베냐민의 성읍에 들어가서 마치 가나안백성들을 도륙하듯이 잔인하게 죽이고 불살라 버리고 말았습니다. 

폭주하는 심판과 비극적 결말입니다. *죄를 감싸는 공동체는 함께 무너질 수 있습니다. 교회의 하나 됨은 죄를 덮는 데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진실을 인정하고 회개하며 말씀 앞에 바로 설 때 참된 공동체의 회복이 시작됩니다.

*정의를 향한 분노도 통제되지 않으면 또 다른 비극을 낳습니다. 처음의 문제는 기브아의 악행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한 지파의 생존 자체가 위태로워졌습니다. 죄를 바로잡으려는 마음이 중요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분노와 보복이 앞서면 본래의 목적을 잃을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1:20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이 말씀은 악을 묵인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악을 바로잡는 과정에서도 인간의 분노가 하나님의 의를 대신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죄를 엄중하게 다루되, 사람을 파괴하는 보복이 아니라 진실과 회개와 회복을 향해야 합니다.

교회는 죄를 덮어서도 안 되며, 죄를 바로잡는다는 이유로 사람을 함부로 파괴해서도 안 됩니다. 말씀에 따라 죄를 드러내고 책임을 묻되, 회개와 회복의 길을 함께 찾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기억할 교훈은? 죄에는 엄중하되, 분노에는 사로잡히지 말라. 공의를 세우되,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거짓된 사랑으로 죄를 덮지 않게 하시고, 잘못된 분노로 하나님의 자리를 넘어가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사기 21:1-12

1.
1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맹세하여 이르기를 우리 중에 누구든지 딸을 베냐민 사람에게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 하였더라
2 백성이 벧엘에 이르러 거기서 저녁까지 하나님 앞에 앉아서 큰 소리로 울며
3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스라엘에 이런 일이 생겨서 오늘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없어지게 하시나이까 하더니
4 이튿날에 백성이 일찍이 일어나 거기에 한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라

1절 사람이 한 맹세의 말에 스스로 갇히게 됩니다. 마태복음 5장 우리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맹세하지 말라 말씀하십니다. 하늘로도 말고 땅으로도 말며 예루살렘으로도 말고 자기의 이름을 두고도 하지 말라 말씀하십니다. 맹세는 인간이 지킬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할 수 없는 것으로 하지 않으면 더 이상의 맹세가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맹세에 스스로 갇혀서 베냐민 지파로 큰 고통에 빠지게 하고 말았습니다. 

2절 하나님 앞에서 울며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백성이 벧엘에 올라가 기도할 때에 본정신이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기도는 우리를 정신 차리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죄를 짓고 기도할 때 회개가 터지고, 하나님 앞에서 울며 자복 할 때 원수가 사랑이 됩니다. 기도할 때 앞길이 보이며 소망이 생기게 되는 줄 믿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순간에도 기도의 줄을 붙들어야 정신줄을 잡을 수 있습니다. 

3절 하나님을 탓하기 전에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잘되면 내 탓이요 못되면 조상 탓 하나님 탓입니다.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이런 일이 생겼나이까? 이런 일이 생긴 것은? 누구의 탓도 아닌 나의 탓입니다. 나의 잘못과 선택으로 인하여 얻어진 결과입니다.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듯이 신앙의 법칙입니다. 육으로 뿌리면 육으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둘 것이요, 영으로 성령으로 심으면 영생의 복을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탓하지 말고 신앙으로 심고 뿌리는 은혜가 있길 기도합니다. 

4절 예배는 드렸지만, 아직 바른 길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다음 날 일찍 일어나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번제는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제사이며, 화목제는 하나님과의 교제와 감사, 공동체적 나눔을 나타내는 제사입니다. 백성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예배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들이 제사를 드린 뒤 곧바로 올바른 해결책을 찾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어지는 5-12절에서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을 공격하고 처녀들을 데려오는 비극이 벌어집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중요한 경고를 줍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은 분리될 수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삶에서는 자기 뜻을 고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예배의 형식만이 아니라, 예배를 통해 변화되어 말씀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2.
5 이스라엘 자손이 이르되 이스라엘 온 지파 중에 총회와 함께 하여 여호와 앞에 올라오지 아니한 자가 누구냐 하니 이는 그들이 크게 맹세하기를 미스바에 와서 여호와 앞에 이르지 아니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라 하였음이라
6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형제 베냐민을 위하여 뉘우쳐 이르되 오늘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끊어졌도다
7 그 남은 자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아내를 얻게 하리요 우리가 전에 여호와로 맹세하여 우리의 딸을 그들의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8 또 이르되 이스라엘 지파 중 미스바에 올라와서 여호와께 이르지 아니한 자가 누구냐 하고 본즉 야베스 길르앗에서는 한 사람도 진영에 이르러 총회에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니
9 백성을 계수할 때에 야베스 길르앗 주민이 하나도 거기 없음을 보았음이라
10 회중이 큰 용사 만 이천 명을 그리로 보내며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가서 야베스 길르앗 주민과 부녀와 어린 아이를 칼날로 치라
11 너희가 행할 일은 모든 남자 및 남자와 잔 여자를 진멸하여 바칠 것이니라 하였더라
12 그들이 야베스 길르앗 주민 중에서 젊은 처녀 사백 명을 얻었으니 이는 아직 남자와 동침한 일이 없어 남자를 알지 못하는 자라 그들을 실로 진영으로 데려오니 이 곳은 가나안 땅이더라

5-7절 이스라엘은 잘못된 맹세에 갇혀서 또 다른 희생양을 찾게 됩니다. 8-11절 베냐민 지파를 살리기 위해서 길르앗 야베스를 공격합니다. 12절 처녀 400명을 데려와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자신들의 죄를 해결하고자 또 다른 죄를 지어서는 안됩니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소견입니다. 자기 소견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서면, 죄를 심판하려는 열심조차 또 다른 죄를 낳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제 앞에서 먼저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분노와 보복이 아니라 말씀과 사랑으로, 사람을 희생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다가 또 다른 폭력을 낳지만,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은 말씀과 사랑으로 악의 반복을 끊습니다.

사랑의 아버지!!
자신의 소견과 의지와 맹세와 고집을 따르는 거듭된 죄의 습관에서 벗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사기 21:13-25

1.
13 온 회중이 림몬 바위에 있는 베냐민 자손에게 사람을 보내어 평화를 공포하게 하였더니
14 그 때에 베냐민이 돌아온지라 이에 이스라엘 사람이 야베스 길르앗 여자들 중에서 살려 둔 여자들을 그들에게 주었으나 아직도 부족하므로
15 백성들이 베냐민을 위하여 뉘우쳤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지파들 중에 한 지파가 빠지게 하셨음이었더라

베냐민은 전쟁에서 패하였습니다. 성읍이 초토화되고 말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맹세하길 베냐민지파에게 주신들의 딸을 아내로 주지 않기로 맹세하였습니다. 때문에 베냐민지파에 자녀 출산이 막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길르앗 여인 400명을 잡아서 베냐민지파에게 주었으나 아직 200명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2.
16 회중의 장로들이 이르되 베냐민의 여인이 다 멸절되었으니 이제 그 남은 자들에게 어떻게 하여야 아내를 얻게 할까 하고
17 또 이르되 베냐민 중 도망하여 살아 남은 자에게 마땅히 기업이 있어야 하리니 그리하면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사라짐이 없으리라
18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딸을 그들의 아내로 주지 못하리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맹세하여 이르기를 딸을 베냐민에게 아내로 주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하였음이로다 하니라
19 또 이르되 보라 벧엘 북쪽 르보나 남쪽 벧엘에서 세겜으로 올라가는 큰 길 동쪽 실로에 매년 여호와의 명절이 있도다 하고
20 베냐민 자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가서 포도원에 숨어
21 보다가 실로의 여자들이 춤을 추러 나오거든 너희는 포도원에서 나와서 실로의 딸 중에서 각각 하나를 붙들어 가지고 자기의 아내로 삼아 베냐민 땅으로 돌아가라
22 만일 그의 아버지나 형제가 와서 우리에게 시비하면 우리가 그에게 말하기를 청하건대 너희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그들을 우리에게 줄지니라 이는 우리가 전쟁할 때에 각 사람을 위하여 그의 아내를 얻어 주지 못하였고 너희가 자의로 그들에게 준 것이 아니니 너희에게 죄가 없을 것임이니라 하겠노라 하매
23 베냐민 자손이 그같이 행하여 춤추는 여자들 중에서 자기들의 숫자대로 붙들어 아내로 삼아 자기 기업에 돌아가서 성읍들을 건축하고 거기에 거주하였더라
24 그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그 곳에서 각기 자기의 지파,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갔으니 곧 각기 그 곳에서 나와서 자기의 기업으로 돌아갔더라

때문에 찾아 낸 방법이 19절 여호와의 명절에 에브라임 실로에 신앙 축제가 벌어질 때 20-21절 포도원에 숨어 있다가 여인을 붙잡아 가는 방법을 생각해 내었습니다. 여인을 보쌈해 가는 것입니다. 이는 여인의 동의가 없는 폭력적인 해결책입니다. 불법으로 해결하는 것입니다. 22절 그리고 항의하는 가족에게 은혜를 베풀어 줄것과 너희가 자의로 내어 준 것이 아니니 맹세를 어긴 것이 아니라 설명합니다. 23절 이에 베냐민의 남자들은 그대로 행하여 실행하게 됩니다. 

3.
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사사시대의 결론입니다. 사사기는 이스라엘이 어떻게 무너졌는지를 보여 주면서 끝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절기를 지켰지만, 절기에 나온 여인들을 납치하는 일까지 벌였습니다. 신앙의 외형은 남아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공의는 삶 속에서 무너져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이 주어집니다. “나는 내 소견을 따라 살아가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가?” 교회가 진정으로 회복되려면 단순히 조직을 유지하고 숫자를 늘리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말씀에 순종하며, 한 사람의 생명과 존엄을 소중히 여기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사사기의 마지막 장면은 우리에게 참된 왕을 바라보게 합니다. 궁극적으로 성경 전체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자기 백성을 의와 진리로 다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그분의 다스림 아래 있을 때, 공동체는 자기 소견을 넘어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실천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아버지!!
자기의 소견대로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description>
			<author><![CDATA[정음교회]]></author>
			<pubDate>Mon, 26 Oct 2026 16:53:3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jungumch.com/?kboard_redirect=5"><![CDATA[성경묵상코너]]></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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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2026년 10월 25일]]></title>
			<link><![CDATA[https://www.jungumch.com/?kboard_content_redirect=1463]]></link>
			<description><![CDATA[1. 환영합니다.
* 예배로 함께 하신 성도님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 새롭게 교회를 방문하신 성도님들은 ‘새신자 카드’ 작성하시고 등록해 주시길 바랍니다. 

2. 가을이웃초청예배 
* 오늘 교회행사로 참석하신 모든 분들게 감사드립니다.
* 다음 주에도 계속 뵐 수 있길 소망합니다.
* 오신 분들은 교회에서 준비한 선물(1인 1개)을 받아 가시길 바랍니다.
* 식당이용: 교회식당은 방문성도, 나머지 성도님은 본당을 이용 바랍니다.
* 남자 화장실은 교회사무실을 이용해 주세요. 
* 오늘 오후 찬양 예배는 없습니다. 방문 성도님과 함께하시길 바랍니다.

4. 세례식
* 11월 08일 세례식이 있습니다.
* 대상자: 김은례성도님 

5. 교회사역일정
* 토요전도:11월 14/28일    * 추수감사주일: 15일    * 오후구역모임: 22일]]></description>
			<author><![CDATA[정음교회]]></author>
			<pubDate>Mon, 26 Oct 2026 16:50:53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jungumch.com/?kboard_redirect=4"><![CDATA[교회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2026년 10월 18일]]></title>
			<link><![CDATA[https://www.jungumch.com/?kboard_content_redirect=1462]]></link>
			<description><![CDATA[1. 환영합니다.
* 예배로 함께 하신 성도님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 새롭게 교회를 방문하신 성도님들은 ‘새신자 카드’ 작성하시고 등록해 주시길 바랍니다. 

2. 전도대상자작성 
* 가을 이웃초청예배 전도대상자를 작성해서 헌금함에 넣어주시길 바랍니다. 

3. 이웃초청예배(10월 25일)
* 111-100명의 출석, 10명의 등록성도, 1명의 전도대상자를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 10/20(화)-23일(토) 3시부터 전도합니다. 
* 부침개 전도 22일 오후 3시입니다.
* 특별저녁기도회는 월-금요일 저녁 6시 30분입니다. 
* 대청소 모임은 토요일(24일) 12시입니다.

4. 오후구역모임
* 이번 주(18일) 오후 찬양 예배는 구역예배로 모입니다. 

5. 교회사역일정
* 이웃초청저녁기도회:19일~23일   *대청소: 24일    * 이웃초청예배: 10/25일]]></description>
			<author><![CDATA[정음교회]]></author>
			<pubDate>Mon, 26 Oct 2026 16:50:02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jungumch.com/?kboard_redirect=4"><![CDATA[교회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2026년 10월 11일]]></title>
			<link><![CDATA[https://www.jungumch.com/?kboard_content_redirect=1461]]></link>
			<description><![CDATA[1. 환영합니다.
* 예배로 함께 하신 성도님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 새롭게 교회를 방문하신 성도님들은 ‘새신자 카드’ 작성하시고 등록해 주시길 바랍니다. 

2. 전도대상자작성 
* 가을 이웃초청예배 전도대상자를 작성해서 헌금함에 넣어주시길 바랍니다. 

3. 이웃초청예배(10월 25일)
* 1인-1명 전도초청 위해서 힘써주세요.
* 100명의 출석과 10명의 새가족 등록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 10/13(화)-17일(토) 3시부터 전도합니다. 
* 부침개 전도 15일 오후 3시입니다.
* 선물과 출장 뷔페가 준비되니 많은 전도 바랍니다. 

4. 오후구역모임
* 다음 주(18일) 오후 찬양 예배는 구역예배로 모입니다. 
* 구역 공과는 106페이지‘심히 목마른 삼손’입니다.

5. 교회사역일정
* 이웃초청저녁기도회:19일~23일   *대청소: 24일    * 이웃초청예배: 10/25일]]></description>
			<author><![CDATA[정음교회]]></author>
			<pubDate>Mon, 26 Oct 2026 16:49:16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jungumch.com/?kboard_redirect=4"><![CDATA[교회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2026년 10월 04일]]></title>
			<link><![CDATA[https://www.jungumch.com/?kboard_content_redirect=1460]]></link>
			<description><![CDATA[1. 환영합니다.
* 예배로 함께 하신 성도님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 새롭게 교회를 방문하신 성도님들은 ‘새신자 카드’ 작성하시고 등록해 주시길 바랍니다. 

2. 성찬주일
* 이번 주일(10/04일)은 성찬 예배로 드립니다. 
* 경건한 마음으로 성찬 예식에 참여하시길 바랍니다.

3. 전도대상자작성 
* 가을 이웃초청예배 전도대상자를 작성해서 헌금함에 넣어주시길 바랍니다. 

4. 이웃초청예배(10월 25일)
* 1인-1명 전도초청 위해서 힘써주세요.
* 100명의 출석과 10명의 새가족 등록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 10/6(화)-10일(토) 3시부터 전도합니다. 
* 계속해서 전도대상자 작성 제출해 주시길 바랍니다.
* 선물과 출장 뷔페가 준비되니 많은 전도 바랍니다. 

5.  교회사역일정
* 오후 구역모임: 10/18일          * 이웃초청예배: 10/25일]]></description>
			<author><![CDATA[정음교회]]></author>
			<pubDate>Mon, 26 Oct 2026 16:48:2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jungumch.com/?kboard_redirect=4"><![CDATA[교회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이사야 1장 - 28장]]></title>
			<link><![CDATA[https://www.jungumch.com/?kboard_content_redirect=1459]]></link>
			<description><![CDATA[이사야 1:1-20

1.
1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

이사야서의 시대적인 배경입니다. 이사야는 남유다에서 활동하던 선지자입니다. 이사야는 남유다 10대왕 웃시아로부터 요담-아하스-히스기야왕까지 60년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였습니다. 이사야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당하고 남유다도 점차 멸망을 향하여 가던 매우 혼란스럽고 위험한 시기였습니다. 

국제정세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당시의 강국 앗수르와 쇠퇴해 가던 애굽, 그리고 신흥 강국 바벨론으로 둘려 싸인 국제정세에서 매우 위험한 국제관계에 빠져 있었습니다. 

남유다의 영적상태는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겉으로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성전도 있고, 제사도 드렸고, 절기도 지켰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형식적인 예배"를 책망하셨습니다. 대표적인 죄는 우상숭배, 불의, 탐욕, 가난한 자 압제, 재판의 부패, 지도자의 타락, 외교 동맹을 하나님보다 의지함 이었습니다.

2.
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을 향하여 고발하시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이는 마치 법정에서 하나님이 재판장이 되시고,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워 언약을 깨뜨린 백성을 심판하시는 모습입니다.

2절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여기서 "양육하였다"는 말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광야에서 보호하시며 가나안 땅을 주시고 율법을 주시며 끊임없이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마치 부모가 자녀를 정성껏 키우듯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돌보셨습니다.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그러나 백성은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거역하다"는 히브리어는 반역하다, 배신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즉, 단순히 실수한 것이 아니라 왕이신 하나님께 반기를 든 것입니다. 영적으로는 우상숭배 형식적인 예배 불순종 교만을 의미합니다.

3절 "소는 그 임자를 알고" 소는 비교적 둔한 동물입니다. 그러나 자기 주인을 알아봅니다. 누가 자신을 먹이고 돌보는지 압니다.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안다" 나귀는 당시 가장 고집 센 동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나귀조차도 자기를 먹여 주는 구유를 기억합니다. 주인의 은혜를 잊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알지 못한다" 여기서 "알다"는 단순히 지식을 뜻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알다"는 인격적인 관계와 인정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대해 아는 지식은 있었지만,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깨닫지 못한다" 깨닫는다는 것은 영적인 분별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은 성전은 있었고 제사는 드렸고 절기도 지켰지만 왜 예배하는지, 누구를 섬기는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짐승보다 못하다." 고 말씀하십니다.

3.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때문에 패역한 이스라엘이 올려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은 받지 않으십니다. 11절 수수한 제물도 받지 아니하시며, 12절 이스라엘이 예배하는 예배를 무익한 예배, 마당만 밟는 소용없이 예배라고 말씀하십니다. 13절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며, 가증한 분향을 올리지 말라 말씀하십니다. 15절 너희가 손을 펼 때 주님은 눈을 가리시며, 기도할지라도 듣지 아니하시라 말씀하십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피 즉 죄악 때문이라 말씀하십니다.

4.
16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17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19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20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결국 주님의 요청은?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에 있습니다.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고 행악을 그치라. 아멘. 

형식적인 예배, 말과 제물만이 있는 예배가 아니라 변화된 삶의 예배가 올려 져야 합니다. "15절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그 이유는 기도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하다"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피'는 단순히 살인을 의미하기보다, 가난한 자를 억압하고, 불의를 행하며, 약자를 착취한 죄악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예배와 삶이 분리되는 것을 가장 싫어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당에서는 경건하지만 삶에서는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예배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물보다 회개이며, 형식보다 순종이며, 의식보다 변화된 삶입니다. 참된 예배는 예배당에서 시작하여 삶으로 이어집니다. 회개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그 은혜를 받은 사람이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그 예배를 기쁘게 받으십니다.

사랑의 아버지!!
삶의 참 변화, 참 예배가 올려지며 드려지는 삶을 살아가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사야 1:21-31

1.
21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정의가 거기에 충만하였고 공의가 그 가운데에 거하였더니 이제는 살인자들뿐이로다
22 네 은은 찌꺼기가 되었고 네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도다
23 네 고관들은 패역하여 도둑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예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지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하지 아니하는도다

이사야는 앞장에서 형식적인 예배를 책망하십니다. 이후에 회개를 통한 변화을 강조하십니다. 오늘 본문 역시 변질된 이스라엘의 모습을 다시 말씀해 주십니다. 21절 ‘어찌하여’입니다. 정의롭고 공의롭던 이스라엘이 어찌하여 창기가되고 살인자가 되었는가?. 22절 찌꺼기가 되고 물로 희석되어진 민족이 되었는가? 23절 패역한 도둑이 되었는지? 주님은 변질된 이스라엘을 향하여 물음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는 15절 이스라엘의 손에 피가 가득하였기 때문입니다. 손에 가득한 피의 죄는 모든 것을 오염시키고 병들게 하였습니다. 그러니 그 피의 손을 씻어 정결하게 되어야 합니다. 스스로 회개하고 돌이켜 원래 순수하고 온전했던 모습을 회복해야 합니다. 예배와 신앙의 본질을 회복해야 합니다. 

2.
24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전능자가 말씀하시되 슬프다 내가 장차 내 대적에게 보응하여 내 마음을 편하게 하겠고 내 원수에게 보복하리라
25 내가 또 내 손을 네게 돌려 네 찌꺼기를 잿물로 씻듯이 녹여 청결하게 하며 네 혼잡물을 다 제하여 버리고
26 내가 네 재판관들을 처음과 같이, 네 모사들을 본래와 같이 회복할 것이라 그리한 후에야 네가 의의 성읍이라, 신실한 고을이라 불리리라 하셨나니

하나님은 장래에 회복을 위한 심판을 이루시리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원수를 심판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러나 목적은 단순한 멸망이 아닙니다. 은에서 찌꺼기를 제거하듯 백성을 정결하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처음처럼 재판관 지도자를 회복시키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심판은 회복을 위한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공의의 하나님이기도 합니다. 죄를 그냥 지나가지 않으십니다. 특히 불의 뇌물 약자 억압을 매우 미워하십니다. 심판의 목적은 회복이다. 24-26절의 핵심은? 불로 태워 버리는 것이 아니라 불순물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금을 정련하듯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징계는 버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회복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3.
27 시온은 정의로 구속함을 받고 그 돌아온 자들은 공의로 구속함을 받으리라
28 그러나 패역한 자와 죄인은 함께 패망하고 여호와를 버린 자도 멸망할 것이라
29 너희가 기뻐하던 상수리나무로 말미암아 너희가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요 너희가 택한 동산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할 것이며
30 너희는 잎사귀 마른 상수리나무 같을 것이요 물 없는 동산 같으리니
31 강한 자는 삼오라기 같고 그의 행위는 불티 같아서 함께 탈 것이나 끌 사람이 없으리라

27-28절 회개한 자와 악인의 결말입니다. 시온은 공의로 구속됩니다. 그러나 죄인은 멸망합니다. 같은 심판이지만 회개하는 자에게는 구원이지만,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는 멸망입니다.  29-31절 우상숭배의 최후입니다. 이스라엘은 상수리나무 아래, 동산에서 우상을 섬겼습니다. 상수리나무와 아름다운 동산은 풍요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풍요는 결국 메마름으로 끝납니다. 사람이 의지하는 것이 곧 그 사람의 우상이 됩니다. 결국 나무는 마르고 동산은 메마르며 우상을 섬긴 자도 불에 타는 삼과 같이 됩니다. 우상은 결코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형식적인 종교를 기뻐하지 않으시며, 공의와 거룩함으로 살아가는 백성을 원하십니다. 또한 심판조차도 자기 백성을 정결하게 하여 회복시키기 위한 사랑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회개를 통해 하나님께 돌아가고, 예배와 삶이 일치하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사랑의 아버지!!
말씀하실 때 돌아와 주께로 나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공의와 거룩함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사야 2:1-22

1.
1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받은 바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이라
2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3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4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

2절 말일-여호와의 날, 하나님의 때가 이르면, 여호와의 전의 산이(교회)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가 된다는 것입니다. 3절 많이 백성이 가며 오며, 하나님의 전에 몰려들어서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게 될 것입니다. 4절 전쟁이 사라지고 평화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날에는 하나님의 산이(교회) 중심이 됩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무릎을 꿇고 그의 가르침에 순종하며, 전쟁이 아닌 생명과 평화의 날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소망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2.
6 주께서 주의 백성 야곱 족속을 버리셨음은 그들에게 동방 풍속이 가득하며 그들이 블레셋 사람들 같이 점을 치며 이방인과 더불어 손을 잡아 언약하였음이라
7 그 땅에는 은금이 가득하고 보화가 무한하며 그 땅에는 마필이 가득하고 병거가 무수하며
8 그 땅에는 우상도 가득하므로 그들이 자기 손으로 짓고 자기 손가락으로 만든 것을 경배하여
9 천한 자도 절하며 귀한 자도 굴복하오니 그들을 용서하지 마옵소서

말일, 하나님의 날과 대조되는 현재의 상태입니다. 미래는 영광이지만 현재는 죄악입니다. 유다가 왜 버림을 받습니까? 동방풍속 세상 풍속을 따르며, 블레셋과 같이 점치며, 이방 문화와 타협하고, 은금을 추구하고, 전쟁을 쫓으며, 우상숭배하였기 때문입니다. 

3.
11 그 날에 눈이 높은 자가 낮아지며 교만한 자가 굴복되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시리라
12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날이 모든 교만한 자와 거만한 자와 자고한 자에게 임하리니 그들이 낮아지리라
13 또 레바논의 높고 높은 모든 백향목과 바산의 모든 상수리나무와
14 모든 높은 산과 모든 솟아 오른 작은 언덕과
15 모든 높은 망대와 모든 견고한 성벽과
16 다시스의 모든 배와 모든 아름다운 조각물에 임하리니
17 그 날에 자고한 자는 굴복되며 교만한 자는 낮아지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요
18 우상들은 온전히 없어질 것이며
19 사람들이 암혈과 토굴로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땅을 진동시키려고 일어나실 때에 그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할 것이라
20 사람이 자기를 위하여 경배하려고 만들었던 은 우상과 금 우상을 그 날에 두더지와 박쥐에게 던지고
21 암혈과 험악한 바위 틈에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땅을 진동시키려고 일어나실 때에 그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하리라
2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

그날-여호와의 날을 다시 말씀하십니다. ‘그날이 오면’ 11절, 17절 모든 교만이 무너지고 겸손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날에 오직 하나님이 홀로 영광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 날은 입을 닫고 눈을 감고 재를 덮어쓰는 날이 될 것입니다. 욥과 그의 세 친구 엘리바스 빌닷 소발처럼 묵묵부답 소리 없이 침묵하는 날이 되는 것입니다. 그의 장엄함과 광대함 앞에서 인간은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22절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날에 인간은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겸손을 무장하고 하나님 앞으로만 나아 갈 수 밖에 없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그날 여호와의 날에 겸손하게 하시고 인간이 아닌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사야 3:1-12

1.
1 보라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가 의뢰하며 의지하는 것을 제하여 버리시되 곧 그가 의지하는 모든 양식과 그가 의지하는 모든 물과
2 용사와 전사와 재판관과 선지자와 복술자와 장로와
3 오십부장과 귀인과 모사와 정교한 장인과 능란한 요술자를 그리하실 것이며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버팀목을 제거하십니다. "양식과 물을 의뢰함과..." '의뢰함'은 버팀목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두 가지를 제거하십니다. ① 생존의 기반인 양식과 물 ② 국가의 기반인 용사 군인 재판관 선지자 장로 오십부장 귀인 모사 기술자 능숙한 자를 제거하십니다. 이는 경제도 무너지고, 군대도 무너지고, 정치도 무너지고, 종교도 무너지고, 기술도 무너집니다. 사람들이 의지했던 모든 것이 사라지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제거하신다는 것입니다. 심판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제거의 이유는? 인간이 의지하는 세상의 모든 의지와 죄인의 교만을 꺽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회개를 통하여 새롭게 세우기 위함입니다. 인생의 버팀목 의지는 세상의 어떤 것이 아니라. 참된 버팀목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되심을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2.
4 그가 또 소년들을 그들의 고관으로 삼으시며 아이들이 그들을 다스리게 하시리니
5 백성이 서로 학대하며 각기 이웃을 잔해하며 아이가 노인에게, 비천한 자가 존귀한 자에게 교만할 것이며
6 혹시 사람이 자기 아버지 집에서 자기의 형제를 붙잡고 말하기를 네게는 겉옷이 있으니 너는 우리의 통치자가 되어 이 폐허를 네 손아래에 두라 할 것이면
7 그 날에 그가 소리를 높여 이르기를 나는 고치는 자가 되지 아니하겠노라 내 집에는 양식도 없고 의복도 없으니 너희는 나를 백성의 통치자로 삼지 말라 하리라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 중 하나는? 지도자의 부재입니다. 어리석은 지도자, 미련하고 포악한 지도자가 나타나서 백성을 다스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고통을 받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 4절 소년, 아이는 어리석고 미숙하며 분별력없는 지도자입니다. 때문에 5절 백성이 학대를 받으며 잔해하게 됩니다. 6-7절 결국 아무도 지도자가 되려하지 않는 시대가 될 것입니다. 참된 지도자의 부재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이 땅에 모세와 다윗과 같은 지도자 예수의 마음을 품고 가르치고 백성을 위하는 지도자가 나올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3.
8 예루살렘이 멸망하였고 유다가 엎드러졌음은 그들의 언어와 행위가 여호와를 거역하여 그의 영광의 눈을 범하였음이라
9 그들의 안색이 불리하게 증거하며 그들의 죄를 말해 주고 숨기지 못함이 소돔과 같으니 그들의 영혼에 화가 있을진저 그들이 재앙을 자취하였도다
10 너희는 의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 그들은 그들의 행위의 열매를 먹을 것임이요
11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 이는 그의 손으로 행한 대로 그가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
12 내 백성을 학대하는 자는 아이요 다스리는 자는 여자들이라 내 백성이여 네 인도자들이 너를 유혹하여 네가 다닐 길을 어지럽히느니라

심판의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왜 심판하시는가? 첫째 8절 말이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그들의 혀와 행위가 여호와를 거슬렀다." 말과 행동 모두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둘째 9절 죄를 숨기지 않았습니다. "소돔같이 드러내며 숨기지 아니한다." 이는 죄를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를 자랑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소돔과 같은 모습입니다. 죄를 짓는 것보다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것이 더 무섭습니다.

의인과 악인의 결말입니다. 심판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구별하십니다. 10절 의인은 "복이 있으리니" 왜냐하면? 자기가 행한 열매를 먹기 때문입니다. 반면 11절 악인은 "화가 있으리라" 이는 자기가 행한 대로 보응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롭습니다.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망시키지 않으십니다.

이 본문은 하나님께서 겉모습이 아니라 말과 행동, 그리고 마음의 태도를 보신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특히 죄를 짓는 것보다 더 위험한 것은 죄에 무감각해져 죄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반대로 세상이 혼란스러워도 하나님은 의로운 자를 잊지 않으시며, 그의 삶을 반드시 기억하시고 선한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심판 가운데서도 의인과 악인을 분명히 구별하시며, 의인에게는 복을, 악인에게는 그 행위에 따른 보응을 내리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선포하십니다.

사랑의 아버지!!
주님을 버팀목으로 의지하게 하시고, 말이나 행동에서 죄짓지 않게 하시며, 죄를 부끄러이 여길 수 있는 마음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사야 3:13-26

1.
13 여호와께서 변론하러 일어나시며 백성들을 심판하려고 서시도다
14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장로들과 고관들을 심문하러 오시리니 포도원을 삼킨 자는 너희이며 가난한 자에게서 탈취한 물건이 너희의 집에 있도다
15 어찌하여 너희가 내 백성을 짓밟으며 가난한 자의 얼굴에 맷돌질하느냐 주 만군의 여호와 내가 말하였느니라 하시도다

13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재판장 심판자가 되어서 일어나십니다. 14절 피고는 장로들 지도자들 백성의 통치자들입니다. 왜입니까? 15절 "너희가 어찌하여 내 백성을 짓밟으며 가난한 자의 얼굴에 맷돌질하느냐." 지도자들은 백성을 보호해야 하는데 오히려 착취했고 학대했고 가난한 자를 짓밟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직접 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지도자의 책임을 가장 먼저 물으신다. 하나님은 언제나 지도자를 먼저 심판하십니다. 왜냐하면 지도자는 하나님의 백성을 맡은 청지기이기 때문입니다. 목회자/ 장로/ 부모/ 교사/ 모든 리더는 하나님 앞에서 책임이 있습니다. 세워진 자는 더 많이 기도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2.
16 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시되 시온의 딸들이 교만하여 늘인 목, 정을 통하는 눈으로 다니며 아기작거려 걸으며 발로는 쟁쟁한 소리를 낸다 하시도다
17 그러므로 주께서 시온의 딸들의 정수리에 딱지가 생기게 하시며 여호와께서 그들의 하체가 드러나게 하시리라
18 주께서 그 날에 그들이 장식한 발목 고리와 머리의 망사와 반달 장식과
19 귀 고리와 팔목 고리와 얼굴 가리개와
20 화관과 발목 사슬과 띠와 향합과 호신부와
21 반지와 코 고리와
22 예복과 겉옷과 목도리와 손 주머니와
23 손 거울과 세마포 옷과 머리 수건과 너울을 제하시리니
24 그 때에 썩은 냄새가 향기를 대신하고 노끈이 띠를 대신하고 대머리가 숱한 머리털을 대신하고 굵은 베 옷이 화려한 옷을 대신하고 수치스러운 흔적이 아름다움을 대신할 것이며
25 너희의 장정은 칼에, 너희의 용사는 전란에 망할 것이며
26 그 성문은 슬퍼하며 곡할 것이요 시온은 황폐하여 땅에 앉으리라

16절 시온의 딸들의 교만입니다. "시온의 딸"은 단순히 여자들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상류층, 부유한 귀부인, 사치와 교만의 상징입니다. 그들의 모습은 목을 길게 하고 눈짓하며 아기작거리며 발목 장식을 흔들며 걸어갑니다. 이것은 교만 허영 자기 과시를 의미합니다.

17-26절 까지 하나님은 교만과 거만으로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아름다움을 제거해 버리십니다. 20가지도 넘는 장식품을(발목 고리/ 머리 장식/ 귀걸이/ 목걸이/ 향수/ 반지/ 화려한 옷/ 거울/ 세마포/ 머리수건/ 면박 등) 이것들은 제거해 버리십니다. 이것들은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라 "하나님 없이 누리는 교만한 삶"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화려함을 제거하십니다.

① 하나님은 외적인 아름다움보다 내면을 보신다. 시온의 딸들은 겉은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외모는 화려했지만 신앙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겉보다 중심을 보십니다. ② 교만은 심판의 시작입니다. 이사야서에서 계속 반복되는 죄가 있습니다. 교만입니다. 웃시야도 교만하여 무너졌습니다. 바벨론도 교만했습니다. 앗수르도 교만했습니다. 사탄도 교만했습니다. 교만은 하나님 자리에 자신을 두는 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반드시 낮추십니다. ③ 하나님 없는 아름다움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아름다움을 없애시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교만을 제거하시는 것입니다. 참된 아름다움은 화장 명품 장신구가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겸손과 거룩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사야 4:1-5:17

1.
4:1 그 날에 일곱 여자가 한 남자를 붙잡고 말하기를 우리가 우리 떡을 먹으며 우리 옷을 입으리니 다만 당신의 이름으로 우리를 부르게 하여 우리가 수치를 면하게 하라 하리라
2 그 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 그 땅의 소산은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를 위하여 영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며
3 시온에 남아 있는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 곧 예루살렘 안에 생존한 자 중 기록된 모든 사람은 거룩하다 칭함을 얻으리니
4 이는 주께서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기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청결하게 하실 때가 됨이라
5 여호와께서 거하시는 온 시온 산과 모든 집회 위에 낮이면 구름과 연기, 밤이면 화염의 빛을 만드시고 그 모든 영광 위에 덮개를 두시며
6 또 초막이 있어서 낮에는 더위를 피하는 그늘을 지으며 또 풍우를 피하여 숨는 곳이 되리라

4장 1절은 앞장과 연결된 심판의 결과입니다. 앞장에서 전쟁으로 많은 남자가 죽고, 지도자가 사라지고, 예루살렘이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일곱 여자-많은 여자들이 한 남자(전쟁으로 인하여 남자가 죽은 결과)를 붙들고 결혼을 구걸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3장 죄의 결과로 인하여 사회질서가 붕괴 되고 여자들이 남자들을 붙들고 결혼을 부탁할 정도로 비참한 상황입니다. 즉 죄의 결과가 얼마나 처참한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2-6절은 다시 심판 후 남겨진 자들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2절부터는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죄악 가운데 끝까지 남은 자입니다. 이들을 하나님이 보존하신다는 말씀입니다. 2절 여호와의 싹, 즉 예수그리스도로 3절 시온에 남아 있는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 생존한 모든 자를 4절 하나님이 씻기시며 청결하게 하시며, 5절 구름과 연기로 덮으시며 함께 하심으로 보호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6절 초막으로 피난처를 세워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는 심판 가운데 회복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징계로 끝내지 아니하시며, 남은 자를 통하여 회복이라는 새 일을 이루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참된 정결함을 받아야 합니다.

2.
5:1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2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3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서 사리를 판단하라
4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
5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지를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하게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6 내가 그것을 황폐하게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찔레와 가시가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에게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리라 하셨으니
7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5장 본문은 포도원의 노래입니다. 하나님은 5장의 말씀을 통하여 왜 이스라엘을 심판할 수밖에 없는지를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1-2절로 기름진 산-좋은 환경, 땅을 파고 돌을 제거-성장에 방해되는 모든 것을 제거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고-가장 좋은 품종을 선택, 망대를 세우고-도둑과 짐승으로부터 보호, 좋은 포도를 기대하였건만 결과는 들포도 입니다. 들포도는 포도의 모양을 하고 있지만 시어서 먹을 수 없는 야생 포도입니다. 즉 쓸모없는 열매를 맺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4절 이같은 결과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질문하십니다.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겠느냐?" 이 질문의 답은 하나입니다.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잘못이 없습니다.

5-6절 결국 하나님은 포도원을 허무어 버리십니다. 열매가 없자 하나님은 보호를 거두십니다.
울타리를 제거, 담을 헐었습니다. 황폐하게 하시며, 가시와 엉겅퀴가 자라게 하였습니다. 비도 내리지 않게 하겠다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새로운 재앙을 만드시는 것만이 아니라, 그동안 베풀어 오셨던 보호와 은혜를 거두시는 것으로도 나타납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기억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지 말고 감사로 응답해야 합니다. 신앙의 열매를 점검하십시오. 예수님 안에 거하십시오. 열매는 우리의 노력만으로 맺히지 않습니다. 참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와의 지속적인 교제를 통해 맺히는 것입니다.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는 성도가 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말보다 삶을 보십니다. 가정과 교회, 직장과 사회에서 공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열매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의 주신 그 은혜와 은택을 기억하며, 예수 안에서 좋은 열매를 맺어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사야 5:18-30

1.
18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
19 그들이 이르기를 그는 자기의 일을 속속히 이루어 우리에게 보게 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는 자기의 계획을 속히 이루어 우리가 알게 할 것이라 하는도다
20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21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22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잘 빚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23 그들은 뇌물로 말미암아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서 그 공의를 빼앗는도다

하나님은 들포도 열매를 맺는 백성에게 앞 8절, 11절에 이어서 화를 선포합니다. 18-19절 죄를 끌어당기는 사람들에게 화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죄악을 끈으로 끌며" 이 표현은 매우 강렬합니다. 보통은 죄가 사람을 끌어갑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사람이 죄를 스스로 끌어옵니다. 마치 소가 수레를 끌 듯이 죄를 즐기며 죄를 포기하지 않고 죄를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죄가 반복되면 양심이 마비되고 심판도 믿지 않게 됩니다.

*20절 선과 악이 뒤바뀐 자들에게 화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 타락의 가장 심각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아니라 인간의 기준이 진리가 됩니다. 때문에 빛을 어둠이라 하고 어둠을 빛이라 합니다. 오늘날에도 ‘죄를 자유’라고 부르고 ‘탐욕을 성공’이라고 하며 거룩함을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여기는 모습에서 이 말씀이 적용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가치관의 전도를 가장 큰 죄 가운데 하나로 보십니다. *21절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자들에게 화를 선포하십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생각을 더 신뢰합니다. 잠언 3:7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라." 교만은 사람을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멀어지게 만드는 죄입니다. *22-23절 술취함과 부패한 재판관에게 화를 선포하십니다. 이들은 술 잘 마시는 것을 자랑하고 뇌물을 받고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억울하게 만듭니다. 재판이 무너지면 사회 전체가 무너집니다. 하나님은 지도자의 부패를 매우 심각하게 보십니다.

2.
24 이로 말미암아 불꽃이 그루터기를 삼킴 같이, 마른 풀이 불 속에 떨어짐 같이 그들의 뿌리가 썩겠고 꽃이 티끌처럼 날리리니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멸시하였음이라
25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노를 발하시고 그들 위에 손을 들어 그들을 치신지라 산들은 진동하며 그들의 시체는 거리 가운데에 분토 같이 되었도다 그럴지라도 그의 노가 돌아서지 아니하였고 그의 손이 여전히 펼쳐져 있느니라

24-25절은 심판의 이유입니다. 24절은 심판의 원인을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율법을 버렸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멸시하였다." 결국 심판의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불이 지푸라기를 삼키듯 뿌리는 썩고 꽃은 먼지처럼 날아갑니다. 겉은 화려해 보여도 뿌리가 썩으면 반드시 무너집니다. 25절에서는 산이 진동하고 시체가 거리에 버려지는 심판을 말씀합니다. 그러나 "그의 노가 돌아서지 아니하며"
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즉 아직 심판은 끝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말씀을 버리면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24절은 이사야 전체의 핵심입니다. 유다가 망한 이유는
군사가 약해서가 아니라 경제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말씀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가정도 성도도 말씀을 붙들 때만 살아납니다.

3.
26 또 그가 기치를 세우시고 먼 나라들을 불러 땅 끝에서부터 자기에게로 오게 하실 것이라 보라 그들이 빨리 달려올 것이로되
27 그 중에 곤핍하여 넘어지는 자도 없을 것이며 조는 자나 자는 자도 없을 것이며 그들의 허리띠는 풀리지 아니하며 그들의 들메끈은 끊어지지 아니하며
28 그들의 화살은 날카롭고 모든 활은 당겨졌으며 그들의 말굽은 부싯돌 같고 병거 바퀴는 회오리바람 같을 것이며
29 그들의 부르짖음은 암사자 같을 것이요 그들의 소리지름은 어린 사자들과 같을 것이라 그들이 부르짖으며 먹이를 움켜 가져가 버려도 건질 자가 없으리로다
30 그 날에 그들이 바다 물결 소리 같이 백성을 향하여 부르짖으리니 사람이 그 땅을 바라보면 흑암과 고난이 있고 빛은 구름에 가려서 어두우리라

26~30절 하나님은 심판의 도구로서 외국 군대를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멀리 있는 민족에게 기를 세우십니다. 이것은 앗수르를 가리키는 예언으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 나라조차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27-29절 이 군대는 지치지 않고 졸지 않고 신속하게 달려오며 사자처럼 먹이를 삼키고 아무도 막을 수 없습니다. 30절 온 땅이 어둠과 환난으로 덮이는 모습으로 끝납니다. 이는 하나님을 떠난 백성이 맞이할 절망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역사를 주관하십니다. 앗수르도 하나님의 도구였습니다. 세상의 모든 역사도
결국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을 두려워하기보다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사랑의 아버지!!
죄의 본질을 깨닫게 하시고, 주님의 심판의 날에 회개하며 말씀으로 돌아가는 신앙을 이루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사야 6:1-13

1.
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4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이사야 6장은 소명장입니다. 이사야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2절 스랍-불타는 자 천사들로 둘러싸여서 3절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끊임없는 찬양으로 받으십니다. 

하나님의 대표적인 속성은? 거룩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천사들은 두 날개로 얼굴을 가립니다. → 하나님의 영광을 감히 직접 바라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두 날개로 발을 가립니다. → 자신을 낮추며 겸손히 섬기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두 날개로 날아다닙니다. → 즉시 순종하는 종의 모습입니다. '거룩'(카도쉬, קָדוֹשׁ)은 '구별되다', '분리되다', '다르다'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은 피조물과 완전히 다르시며 죄와 완전히 분리되시고 완전한 순결과 의로움 가운데 계시는 분입니다. 거룩은 단순히 죄가 없는 상태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만이 가지시는 절대적인 존재의 완전함을 말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2.
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6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7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거룩한 하나님의 모습앞에 발견된 자신의 모습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을 만난 이사야의 첫 번째 반응은 5절 자신의 죄를 보는 것입니다. 5장까지 이사야는 유다 백성을 향해 여섯 번이나 "화 있을진저"(사 5:8, 11, 18, 20, 21, 22)라고 외치며 그들의 죄를 책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을 직접 본 순간,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죄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장 먼저 자신의 죄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선 사람의 모습입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의 능력을 본 후 "누가복음 5:8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고백했고, 욥도 하나님을 만난 후 "욥기 42:6 내가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만날수록 자신의 의가 아니라 자신의 죄를 보게 됩니다.

부정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이는 하나님입니다. 6절 구약에서 제단의 숯불로 우리 죄를 태웠다면, 신약 오늘날에는 우리 주님의 십자가로 보혈로 우리를 대속하시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대속의 역사는 하나님으로 부터입니다. 

3.
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11 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12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13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반드시 사명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먼저 사람을 거룩하게 하신 후에 사명을 맡기십니다. 8절 죄 사함 이후에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놀라운 점은 하나님께서 사명을 말씀하신 시점입니다. 하나님을 봄-자신의 죄를 깨달음-죄 사함을 받음입니다. 그 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사람을 회복시키신 후에 사용하십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 질문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없어서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의 자발적인 헌신을 원하셨습니다. 강요가 아니라 사랑으로 드리는 순종을 기다리신 것입니다. 이사야는 주님의 요청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자원합니다. 히브리어 "힌네니"(הִנֵּנִי) 는 "제가 여기 있습니다." "언제든지 순종하겠습니다." 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말이 아니라 자신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의 고백입니다.

11-13절 심판 가운데 남겨지는 소망입니다. 하나님은 도성이 황폐해지고 백성이 포로로 잡혀가며 나라가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마지막 절에서 놀라운 소망을 주십니다. "그루터기는 거룩한 씨라." 그루터기의 의미? 나무를 베면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뿌리가 살아 있으면 새싹이 다시 올라옵니다. 그루터기는 남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회복의 희망을 의미합니다. 유다는 심판받지만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거룩한 씨"는 직접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보존하시는 남은 백성을 가리킵니다. 더 나아가 이사야서 전체의 흐름에서는 이 약속이 장차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성취됩니다. 심판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구원의 시작이었습니다.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을 발견하고 나를 깨달으며 사명을 발견하게 하여 주옵소서. 이 땅의 남아 있는 거룩한 그루터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사야 7:1-25

1.
1 웃시야의 손자요 요담의 아들인 유다의 아하스 왕 때에 아람의 르신 왕과 르말리야의 아들 이스라엘의 베가 왕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쳤으나 능히 이기지 못하니라
2 어떤 사람이 다윗의 집에 알려 이르되 아람이 에브라임과 동맹하였다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과 그의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
3 그 때에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에 나가서 아하스를 만나
4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르신과 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
5 아람과 에브라임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악한 꾀로 너를 대적하여 이르기를
6 우리가 올라가 유다를 쳐서 그것을 쓰러뜨리고 우리를 위하여 그것을 무너뜨리고 다브엘의 아들을 그 중에 세워 왕으로 삼자 하였으나
7 주 여호와의 말씀이 그 일은 서지 못하며 이루어지지 못하리라
8 대저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며 육십오년 내에 에브라임이 패망하여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할 것이며
9 에브라임의 머리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머리는 르말리야의 아들이니라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은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라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시대의 패권국가는 앗수르입니다. 앗수르를 대적하기 위하여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연합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남 유다에게 자신들과 연합 즉 아람+북이스라엘+남유다 연합전선을 펼쳐서 앗수르를 대항 할 것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이 연합의 제안을 남 유다 아하스왕은 거절을 하게 됩니다. 미운 털이 박힌 남유다는 거절로 인하여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2절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공격에 남유다의 왕과 백성들의 마음을 바람에 흔들리는 숲과 같이 갈피를 잡지 못합니다. 3절 이에 하나님은 이사야와 그의 아들을 보내서 아하스 왕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4절  ‘삼가며 조용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이는 이들이 연기나는 부지깽이 같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연기나는 부지깽이는 다 타버리고 아무힘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5절 아람와 북이스라엘 왕이 악한 꾀를 내어 6절 다브엘 자신들의 사람을 왕으로 세우고자 하지만 7절 이 계획은 서지 못하며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8절 왜냐하면 사람의 나라는 패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9절 결국 하나님을 믿고 믿음위에 굳게 설 것을 하나님은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의 핵심은 "두려움 앞에서 누구를 의지할 것인가?"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해야 나라가 서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으면 결국 무너지게 됩니다. 아하스는 현실을 보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눈에 보이는 강대국 앗수르를 의지했습니다. 반면 하나님은 "적들의 힘이 아니라 나의 약속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 왕조를 지키시겠다는 자신의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① 두려움은 믿음의 반대입니다. 위기는 누구에게나 오지만, 하나님은 먼저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② 하나님은 문제보다 크신 분입니다. 우리가 크게 보는 문제도 하나님께는 "연기 나는 부지깽이"에 불과합니다. ③ 하나님의 언약은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다윗 왕조를 지키신 것처럼,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약속도 끝까지 이루십니다. ④ 믿음이 삶을 견고하게 합니다.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2.
10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1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하시니
12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13 이사야가 이르되 다윗의 집이여 원하건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
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15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가 되면 엉긴 젖과 꿀을 먹을 것이라
16 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네가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 되리라
17 여호와께서 에브라임이 유다를 떠날 때부터 당하여 보지 못한 날을 너와 네 백성과 네 아버지 집에 임하게 하시리니 곧 앗수르 왕이 오는 날이니라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남 유다를 지켜 주실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단지 9절에서 이 사실을 굳게 믿으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일에 대한 증거를 주실 것이니, 11절 하나님께 한 징조를 구하라, 그리하면 믿음을 징조를 보여 주실 것이라 하십니다. 12절 그러나 아하스는 하나님께 어떤 징조도 구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왜입니까? 아하스는 하나님이 아닌 앗수르가 자신들을 구해줄 것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구원의 징조가 필요없기 때문입니다. 13절에서 하나님은 이런 아하스의 위선과 불신앙을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14절 하나님의 징조 임마누엘의 표적을 친히 보여주실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임마누엘은 임(Im)=함께, 마누(Manu)=우리와, 엘(El)=하나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입니다. 결국 남 유다는 15절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침략 그리고 곧 이어질 앗수르의 침공으로 유다는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농토는 황폐해지고 포도원과 밭은 사라집니다. 곡식을 재배하지 못하게 되므로 사람들은 남은 소와 양의 젖 들에서 얻는 꿀로 살아가게 됩니다. 전쟁 이후의 황폐한 삶을 나타냅니다. 16절 두 왕, 아람(2년뒤 멸망)와 북이스라엘(12년 뒤 기원전 722년 멸망)은 앗수르에 의해서 망하게 될 것이며 17절 결국 앗수르가 남유다를 침공하게 될 것임을 예언합니다. 

① 하나님은 믿음을 원하십니다. 눈에 보이는 힘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② 위선적인 신앙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아하스는 믿음 없는 경건을 보였습니다. 겉모습보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③ 예수님은 진정한 임마누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해 오셨고,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④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문제보다 하나님의 임재가 더 큽니다.

위기의 순간에 먼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선택해야 합니다. 신앙의 말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실제 삶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도 "임마누엘"로 우리와 함께하심을 기억하며 담대히 살아갑시다. 세상의 방법만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삶을 살아가는 믿음의 승리자가 되시길 소망합니다. 

3.
18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애굽 하수에서 먼 곳의 파리와 앗수르 땅의 벌을 부르시리니
19 다 와서 거친 골짜기와 바위 틈과 가시나무 울타리와 모든 초장에 앉으리라
20 그 날에는 주께서 하수 저쪽에서 세내어 온 삭도 곧 앗수르 왕으로 네 백성의 머리 털과 발 털을 미실 것이요 수염도 깎으시리라
21 그 날에는 사람이 한 어린 암소와 두 양을 기르리니
22 그것들이 내는 젖이 많으므로 엉긴 젖을 먹을 것이라 그 땅 가운데에 남아 있는 자는 엉긴 젖과 꿀을 먹으리라
23 그 날에는 천 그루에 은 천 개의 가치가 있는 포도나무가 있던 곳마다 찔레와 가시가 날 것이라
24 온 땅에 찔레와 가시가 있으므로 화살과 활을 가지고 그리로 갈 것이요
25 보습으로 갈던 모든 산에도 찔레와 가시 때문에 두려워서 그리로 가지 못할 것이요 그 땅은 소를 풀어 놓으며 양이 밟는 곳이 되리라

아하스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앗수르를 의지한 결과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유다를 보호하기 위해 앗수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유다를 심판하는 도구로 앗수르를 사용하실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18절 하나님은 애굽의 파리와 앗수르의 벌을 부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파리와 벌의 의미? 파리는 떼를 지어 몰려오는 성가시고 끈질긴 존재입니다. 벌은 조직적이고 공격적으로 쏘는 존재입니다. 이것은 실제 곤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침략군을 상징하는 비유입니다. 애굽 군대
앗수르 군대 모두 하나님의 명령을 받는 심판의 도구입니다. 19절 적군이 유다 전역을 점령하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골짜기, 바위, 가시덤불, 초장까지 남김없이 군대가 가득 차게 됩니다.
이는 심판이 나라 전체를 덮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20절 삭도는 머리카락과 수염을 모두 밀어버리는 칼입니다. 고대에는 머리와 수염을 강제로 깎는 것은 수치와 굴욕을 의미했습니다. 21-22절 가축의 숫자가 줄어듭니다. 전쟁 때문에 농토도 사라지고 사람도 죽고 경제도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남은 몇 마리의 가축에서 젖이 많이 나오므로 사람들은 엉긴 젖을 먹으며 살아갑니다. 이는 풍요라기보다 농업 사회가 목축 중심의 생존 사회로 전락한 모습입니다. 23-25절 심판 후에는 가시와 찔레만 자랍니다. 사람들은 농사 대신 활과 화살을 들고 다니며 짐승을 사냥합니다. 또 밭은 경작하지 못하고 소와 양이 풀을 뜯는 장소가 됩니다. 즉비옥한 땅이 황무지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①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앗수르도, 애굽도, 강대국도 하나님의 명령 아래 움직입니다. 세상 권세보다 하나님의 주권이 더 큽니다. ② 잘못된 의지는 결국 올무가 됩니다. 아하스는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앗수르를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이 더 큰 고통을 가져왔습니다. 우리도 돈, 권력, 인맥, 세상 방법을 하나님보다 먼저 의지하면 결국 그것이 우리를 지배하게 됩니다. ③ 심판 가운데도 하나님은 남은 자를 보존하십니다. 21-22절에는 비록 암소 한 마리와 양 두 마리뿐이지만 그래도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사야서에서 반복되는 남은 자 사상이 여기에서도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심판 가운데서도 언약 백성을 완전히 끊어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을 의지하면, 그 세상이 결국 우리의 심판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심판 가운데서도 남은 자를 보존하시며, 임마누엘의 약속을 끝까지 이루어 가십니다.

사랑의 아버지!!
사람과 환경이 아닌 하나님을 의지하는 임마누엘의 신앙을 이루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사야 8:1-22

1.
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큰 서판을 가지고 그 위에 통용 문자로 마헬살랄하스바스라 쓰라
2 내가 진실한 증인 제사장 우리야와 여베레기야의 아들 스가랴를 불러 증언하게 하리라 하시더니
3 내가 내 아내를 가까이 하매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라 하라
4 이는 이 아이가 내 아빠, 내 엄마라 부를 줄 알기 전에 다메섹의 재물과 사마리아의 노략물이 앗수르 왕 앞에 옮겨질 것임이라 하시니라

이사야 8장은 7장에서 시작된 임마누엘 예언의 연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하스 왕에게 믿음을 요구하셨지만, 아하스는 하나님보다 앗수르를 의지했습니다. 8장은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보여 주며, 동시에 심판 가운데서도 남은 자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을 약속합니다.

1절 하나님은 이사야로 큰 두루마리에 ‘마헬살랄하스바스’라 기록하게 하십니다. 3절 이사야의 아들로도 ‘마할살랄하스바스’라 이름 짓게 합니다. 이는 ‘노략이 속히 이루어지고 탈취가 신속히 온다’라는 뜻입니다. 즉 이름 자체에 예언을 담아서 기록하였습니다. 4절 기록된 예언처럼 아람은 기원전 732년에 멸망되고, 북이스라엘은 722년에 멸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사람은 믿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은 역사 속에서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부정하고 믿지 않는다고 해도 하나님앞에서 심판을 받게 될 것이요. 천국과 지옥을 부정하며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고 해도 천국과 지옥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2.
5 여호와께서 다시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6 이 백성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기뻐하느니라
7 그러므로 주 내가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으로 그들을 뒤덮을 것이라 그 모든 골짜기에 차고 모든 언덕에 넘쳐
8 흘러 유다에 들어와서 가득하여 목에까지 미치리라 임마누엘이여 그가 펴는 날개가 네 땅에 가득하리라 하셨느니라
9 너희 민족들아 함성을 질러 보아라 그러나 끝내 패망하리라 너희 먼 나라 백성들아 들을지니라 너희 허리를 동이라 그러나 끝내 패망하리라 너희 허리에 띠를 띠라 그러나 끝내 패망하리라
10 너희는 함께 계획하라 그러나 끝내 이루지 못하리라 말을 해 보아라 끝내 시행되지 못하리라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이니라

하나님은 실로아의 물과 큰 강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6절 실로아의 물은 예루살렘 안으로 천천히 흐르는 작은 샘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조용한 통치를 의미합니다. 반면 7절 유브라데의 강,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의 물은 앗수르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 위력즉 앗수르의 위력이 남유다를 집어 삼켜 버릴 것입니다. 남 유다는 작고 조용한 하나님의 인도보다는 세상의 강한 힘을 선택하지만 결국 그 세상의 힘에 의해서 삼킴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대신 세상을 선택한 남유다 아사스왕의 결과입니다. 무엇을 의지하는가? 유다는 하나님보다 앗수르를 선택했습니다. 오늘날도 우리는 돈, 권력, 사람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지 않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8-10절 ‘임마누엘’ 흥미로운 것은 앗수르가 유다를 덮지만 완전히 멸망시키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임마누엘의 땅"이기 때문입니다. 즉 이 나라는 하나님의 언약의 땅입니다. 하나님은 징계는 하시지만, 언약은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8절 앗수르는 목까지 차오르지만 머리까지 잠기지는 않습니다. 9절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열방은 패망합니다. 10절 모근 계획은 끝내 이루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3.
11 여호와께서 강한 손으로 내게 알려 주시며 이 백성의 길로 가지 말 것을 내게 깨우쳐 이르시되
12 이 백성이 반역자가 있다고 말하여도 너희는 그 모든 말을 따라 반역자가 있다고 하지 말며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13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를 너희가 두려워하며 무서워할 자로 삼으라
14 그가 성소가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주민에게는 함정과 올무가 되시리니
15 많은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걸려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덫에 걸려 잡힐 것이니라

11절 "여호와의 강한 손"은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와 권능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의 마음을 붙드시며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이 가는 길을 따라가지 말라." 즉 세상의 가치관, 사람들의 판단, 정치적 계산, 불신앙적인 분위기이 모든 것에 휩쓸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여론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12절 당시 백성들은 "나라가 망한다." "적들이 몰려온다." "큰일 났다." 하며 공포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두려움을 함께 두려워하지 말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은 현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보다 하나님을 더 크게 보는 것입니다. 13절 본문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높이고 존귀하게 여기며, 절대적인 분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즉 사람을 무서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것입니다. 14절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성소가 됩니다. 성소는 피난처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에게는 걸림돌이며 넘어지는 반석이며 함정과 올무입니다. 15절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불신앙으로 인하여 넘어지고 부러지고 올무에 걸리고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무엇을 두려워하며 살아갈 것인가?" 세상은 사람을 두려워하고 권력을 두려워하고, 미래를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만 경외해야 합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하나님을 놓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4.
16 너는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율법을 내 제자들 가운데에서 봉함하라
17 이제 야곱의 집에 대하여 얼굴을 가리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
18 보라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이스라엘 중에 징조와 예표가 되었나니 이는 시온 산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19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주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
20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를지니 그들이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
21 이 땅으로 헤매며 곤고하며 굶주릴 것이라 그가 굶주릴 때에 격분하여 자기의 왕과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며 위를 쳐다보거나
22 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뿐이리니 그들이 심한 흑암 가운데로 쫓겨 들어가리라

"말씀을 붙드는 자는 빛을 보지만, 하나님을 버리는 자는 흑암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본문은 16과 20절이 중심입니다. 16절 증거의 말씀과 율법을 봉함하라 즉 소중하게 보존하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믿지 않는 자는 거부할 것이지만 믿는 자는 소중하게 간직하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세상이 말씀을 외면할수록 하나님의 사람은 더욱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17절 하나님께서 얼굴을 가리신다는 것은 죄 때문에 은혜를 거두시고 심판하신다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나는 기다리며 바라보리라." 백성은 하나님을 떠났지만 선지자는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믿음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18절 이사야와 그의 두 아들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표적이었습니다. 첫째 아들 스알야숩(사 7:3)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 둘째 아들 마헬살랄하스바스(사 8:3) "노략이 속히 임하고 탈취가 빠르리라." 심판이 오지만 남은 자를 통해 회복이 있다는 메시지를 이름으로 선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뿐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통해서도 세상에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20절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를지니 입니다. 모든 가르침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그들이 이 말씀대로 말하지 아니하면 그들에게 아침빛이 없느니라." '아침빛'은
소망 생명 구원을 의미합니다. 말씀을 떠난 사람에게는 참된 빛이 없습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세상의 빛"(요 8:12)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를 떠난 삶은 영적 어둠으로 이어집니다. 21-22절 말씀을 버린자의 결과입니다. 21절 그들은 방황하고 굶주리고 분노하며 하나님과 왕을 원망합니다. 22절 흑암 고통 환난 캄캄한 어둠
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떠난 시대 속에서 두 부류의 사람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사람은 기다림 속에서도 소망을 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는 사람은 점술과 인간의 지혜를 의지하다가 결국 흑암에 빠집니다. 따라서 이 본문의 핵심은 "위기의 시대일수록 하나님의 말씀만이 참된 기준이며 유일한 소망이다."라는 것입니다.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최종 기준으로 삼으십시오. 응답이 늦어 보여도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주님이 승리 주실 줄 믿습니다. 

사랑의 아버지!!
말씀의 터전위에 서서 임마누엘의 신앙으로 승리하며 끝까지 주와 더불어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사야 9:1-7

1.
1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오늘 이사야 9장은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메시아 예언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사야는 남 유다 아하스 왕(악한왕) 가장 어두운 시대를 지나고 있을 때 이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8장 마지막을 보면 이스라엘의 현실은 이렇습니다. "사 8:22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 나라에는 전쟁이 있었고,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었으며, 왕은 하나님보다 앗수르를 의지했고, 백성들은 하나님보다 무당과 신접한 자를 찾았습니다. 영적으로 완전히 밤이 된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장 어두운 밤에 가장 밝은 빛을 약속하십니다.

1-2절 하나님은 흑암 가운데 빛을 비추시는 분입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당시의 역사적 배경 여기 나오는 스불론과 납달리지역은 북이스라엘의 가장 북쪽입니다. 앗수르가 침략할 때 가장 먼저 공격당했던 지역입니다. 가장 먼저 무너졌고, 가장 먼저 포로가 되었고, 가장 먼저 절망을 경험했던 곳입니다. 그곳은 죽음의 땅, 전쟁의 땅, 이방 문화가 섞인 땅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끝났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곳을 가장 먼저 회복시키십니다.

이 약속은 신약에서 성취 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부활 때’ 어디서 시작하셨습니까? 예루살렘이 아닙니다. 갈릴리입니다. 바로 스불론, 납달리입니다. 세상은 버린 곳이었지만 예수님은 가장 먼저 그곳으로 가셨습니다. 왜입니까? 빛은 어두운 곳에서 가장 빛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삶에도 흑암의 갈릴리가 있습니다. 질병 경제적 어려움 자녀 문제 신앙의 침체 관계의 갈등 그러나 하나님은 가장 어두운 곳에서 가장 먼저 역사하십니다. 빛은 낮에 필요하지 않습니다. 어둠 속에서 필요합니다.

2.
3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4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5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3-5절 참된 기쁨은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입니다. 이사야는 계속해서 세 가지 그림을 보여줍니다. 첫째 3a절 추수의 기쁨, 둘째 3b절전리품을 나누는 기쁨, 셋째 5절 전쟁이 끝난 평화입니다. 

왜 이런 기쁨입니까? 4절 "미디안의 날과 같이하셨기 때문입니다." 미디안의 날은 사사기 7장의 기드온 사건입니다. 300명으로 수십만 명을 이겼습니다. 누가 싸웠습니까? 하나님이 싸우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승리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구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이 잘 싸워서 이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대신 싸우셨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죄를 해결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싸우셨습니다. 우리는 이미 이루어진 승리를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5절 군화/ 피 묻은 옷/ 불에 태워집니다. 전쟁이 끝났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면 죄와 사탄과 사망의 전쟁이 끝납니다. 십자가는 영적인 종전 선언입니다.

3.
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6-7절 우리의 소망은 한 아기에게 있습니다. 이사야는 갑자기 놀라운 말씀을 합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왜 하나님은 군대를 보내지 않으셨습니까? 왜 영웅을 보내지 않으셨습니까? 왜 왕을 보내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은 한 아기를 보내셨습니다.

세상은 힘으로 세상을 바꾸려 하지만, 하나님은 아기를 보내 세상을 바꾸셨습니다. 겸손으로 오셨습니다. 사랑으로 오셨습니다. 십자가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네 가지 이름입니다. ① 기묘자: 인간의 지혜를 뛰어넘는 분입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길도 하나님은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② 모사: 완전한 상담자입니다. 세상의 조언은 한계가 있지만 주님의 말씀은 결코 실패하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의 최고의 모사는 예수님입니다. ③ 전능하신 하나님: 이분은 단순한 인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죄를 이기시고 죽음을 이기시고 사탄을 이기신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④ 영존하시는 아버지: 변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부모도 떠날 수 있지만 주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⑤ 평강의 왕: 평화는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상태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평화조약입니다.

7절 하나님의 나라는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세상 나라는 흥망성쇠가 있습니다. 앗수르도 바벨론도 로마도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마지막 말씀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열심’입니다.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십니다. 우리의 믿음보다 하나님의 열심이 더 큽니다. 우리의 능력보다 하나님의 열심이 더 강합니다. 우리의 실패보다 하나님의 열심이 더 위대합니다. 그래서 구원도 은혜이고 회복도 은혜입니다.

오늘 말씀은 세 가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첫째, 아무리 어두워도 하나님의 빛은 비춥니다. 둘째, 참된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서 시작됩니다. 셋째,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열심으로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혹시 지금 여러분의 삶이 흑암과 같습니까? 이사야는 말합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그 빛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도 그 빛이 우리 가정을 비추고, 우리 교회를 비추며, 우리의 심령을 비추시기를 소망합니다.

사랑의 아버지!!예수그리스도의 은혜에 축복이 우리 가운데 온전히 이뤄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사야 9:8-21

1.
8 주께서 야곱에게 말씀을 보내시며 그것을 이스라엘에게 임하게 하셨은즉
9 모든 백성 곧 에브라임과 사마리아 주민이 알 것이어늘 그들이 교만하고 완악한 마음으로 말하기를
10 벽돌이 무너졌으나 우리는 다듬은 돌로 쌓고 뽕나무들이 찍혔으나 우리는 백향목으로 그것을 대신하리라 하는도다
11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르신의 대적들을 일으켜 그를 치게 하시며 그의 원수들을 격동시키시리니
12 앞에는 아람 사람이요 뒤에는 블레셋 사람이라 그들이 모두 입을 벌려 이스라엘을 삼키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진노가 돌아서지 아니하며 그의 손이 여전히 펴져 있으리라

이사야 9:8-21은 앞부분(9:1-7)의 메시아와 평강의 왕에 대한 소망과 대조를 이루는 말씀입니다. 1-7절이 장차 오실 메시아를 통한 구원을 보여 준다면, 8-21절은 현재 북이스라엘(에브라임)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북이스라엘의 멸망은 교만 때문입니다. 8절 심판의 말씀으로 선포하십니다. 9절 그들은 교만하고 완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교만은 하나님 없이 살아갈수 있다는 태도이며, 완악함은 말씀을 들어도 움직이지 않는 상태입니다. 10절 벽돌(집)이 무너졌으나 다듬은 돌로 쌓고, 뽕나무(평범한 나무)가 찍혔으나 백향목(최고급 목재)을 대신한다고 자신있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회개의 기회가 아닌 재기의 기회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11절 그러므로입니다. 교만의 결과입니다. 르신의 대적 즉 앗수르를 통하여 북이스라엘을 무너지게 하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12절 아람과 블레셋으로 공격을 받게 될 것이며 결국 벌린 입으로 이스라엘은 삼킨 바 될 것입니다.  

결국 교만한 마음입니다.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경고를 받고도 "우리는 더 크게, 더 강하게 다시 세우면 된다"며 자신의 힘을 의지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주변 나라들을 사용하여 그들을 징계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실패와 고난은 단순한 불운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라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키우는 것보다 먼저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교만은 사람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지만, 겸손한 회개는 하나님의 긍휼과 회복의 문을 엽니다.

2.
13 그리하여도 그 백성이 자기들을 치시는 이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도다
14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하루 사이에 이스라엘 중에서 머리와 꼬리와 종려나무 가지와 갈대를 끊으시리니
15 그 머리는 곧 장로와 존귀한 자요 그 꼬리는 곧 거짓말을 가르치는 선지자라
16 백성을 인도하는 자가 그들을 미혹하니 인도를 받는 자들이 멸망을 당하는도다
17 이 백성이 모두 경건하지 아니하며 악을 행하며 모든 입으로 망령되이 말하니 그러므로 주께서 그들의 장정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그들의 고아와 과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진노가 돌아서지 아니하며 그의 손이 여전히 펴져 있으리라

두 번째 심판의 선언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백성과 그들을 잘못 인도한 지도자들을 향한 심판을 선포합니다. 이 단락의 핵심은 "하나님은 잘못된 지도자와 그들을 따르는 백성 모두에게 책임을 물으신다."는 것입니다.

13절 ‘그리하여도’입니다. 즉 전쟁과 경제적 어려움을 주어도 백성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14절 이에 하나님은 그 책임을 지도자에게서 찾습니다. 15절 머리는 장로와 존귀한 자요, 꼬리는 거짓 선지자입니다. 왜 거짓 선지자가 꼬리입니까? 꼬리는 몸을 따라 흔들립니다.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백성의 비위를 맞추며 권력자를 따라다녔습니다. 그들은
"평안하다." "괜찮다." "심판은 없다." 라고 말하며 백성을 속였습니다. 16절 백성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 할 지도자가 오히려 백성을 미혹하니 그 책임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17절 나아가 청년 고아 과부 한 사람도 긍휼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이 경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사회 전체가 죄로 물들었기 때문입니다.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일에 충실해야 합니다. 또한 성도들은 고난을 단순한 불행으로만 여기지 말고, 그 시간을 통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이사야 9:13-17절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입니다.

3.
18 대저 악행은 불 타오르는 것 같으니 곧 찔레와 가시를 삼키며 빽빽한 수풀을 살라 연기가 위로 올라가게 함과 같은 것이라
19 만군의 여호와의 진노로 말미암아 이 땅이 불타리니 백성은 불에 섶과 같을 것이라 사람이 자기의 형제를 아끼지 아니하며
20 오른쪽으로 움킬지라도 주리고 왼쪽으로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여 각각 자기 팔의 고기를 먹을 것이며
21 므낫세는 에브라임을, 에브라임은 므낫세를 먹을 것이요 또 그들이 합하여 유다를 치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진노가 돌아서지 아니하며 그의 손이 여전히 펴져 있으리라

죄는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교만과 지도자의 타락은 결국 공동체 전체를 무너뜨립니다.

18절 죄는 불과 같습니다. 작은 불씨가 온 산을 태우듯 죄는 자신과 가정, 공동체, 나라까지 삼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심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만큼 분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19절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땅은 불타고 백성은 땔감처럼 소모됩니다. 하나님은 죄를 결코 묵인하지 않으시며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20절 죄는 결코 사람을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아무리 얻어도 허기지고, 더 많이 가져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결국 죄는 자기 자신까지 파괴하는 삶으로 이끕니다. 21절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서로를 삼키듯, 죄는 형제를 원수로 만들고 공동체를 분열시킵니다. 내부의 갈등은 결국 나라 전체의 멸망으로 이어집니다.

죄는 처음에는 작아 보이지만 불처럼 번져 공동체 전체를 태웁니다. 탐욕은 더 큰 탐욕을, 거짓은 더 큰 거짓을, 미움은 더 큰 미움을 낳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회는 사랑보다 경쟁과 욕심이 지배하게 되고, 가정과 교회와 국가까지 파괴하게 됩니다.

사랑의 아버지!!
죄로 헤매는 인생 위에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회복시켜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사야 10:1-19

1.
5 앗수르 사람은 화 있을진저 그는 내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내 분노라
6 내가 그를 보내어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를 치게 하며 내가 그에게 명령하여 나를 노하게 한 백성을 쳐서 탈취하며 노략하게 하며 또 그들을 길거리의 진흙 같이 짓밟게 하려 하거니와
7 그의 뜻은 이같지 아니하며 그의 마음의 생각도 이같지 아니하고 다만 그의 마음은 허다한 나라를 파괴하며 멸절하려 하는도다
8 그가 이르기를 내 고관들은 다 왕들이 아니냐
9 갈로는 갈그미스와 같지 아니하며 하맛은 아르밧과 같지 아니하며 사마리아는 다메섹과 같지 아니하냐
10 내 손이 이미 우상을 섬기는 나라들에 미쳤나니 그들이 조각한 신상들이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의 신상들보다 뛰어났느니라
11 내가 사마리아와 그의 우상들에게 행함 같이 예루살렘과 그의 우상들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하는도다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사용하여 이스라엘과 유다를 심판하시지만, 교만한 앗수르 역시 심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북이스라엘은 우상숭배와 죄악으로 결국 주전 722년 앗수르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남유다 역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강대국을 의지하며 영적으로 타락했습니다. 하나님은 앗수르라는 강력한 제국을 사용하여 자기 백성을 징계하셨습니다. 5절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앗수르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였지만, 7절 자신들이 하나님의 손에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앗수르를 "막대기"처럼 사용하셨지만, 막대기가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려 했기 때문에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우리의 인생의 주인이십니다. 그 어떤 사람도 세상의 강대국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앗수르가 강해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라의 흥망성쇠, 개인의 성공과 실패, 결국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것을 내 것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재능, 건강, 물질, 사역, 성공, 모두 하나님께 받은 것입니다. 교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했다." 그러나 믿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하셨다."

2.
12 그러므로 주께서 주의 일을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 다 행하신 후에 앗수르 왕의 완악한 마음의 열매와 높은 눈의 자랑을 벌하시리라
13 그의 말에 나는 내 손의 힘과 내 지혜로 이 일을 행하였나니 나는 총명한 자라 열국의 경계선을 걷어치웠고 그들의 재물을 약탈하였으며 또 용감한 자처럼 위에 거주한 자들을 낮추었으며
14 내 손으로 열국의 재물을 얻은 것은 새의 보금자리를 얻음 같고 온 세계를 얻은 것은 내버린 알을 주움 같았으나 날개를 치거나 입을 벌리거나 지저귀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는도다
15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 함과 같음이로다

12절 앗수르의 교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벌하십니다. 죄로 가득한 이스라엘과 남 유다를 심판하십니다. 그리고 교만한 앗수르를 징계하십니다. 13-14절 앗수르의 착각합니다. 앗수르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손의 힘과 내 지혜로 내가 이것을 행하였다" 이것이 인간의 가장 큰 착각입니다. 성공한 사람은 쉽게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 능력 때문이다." "내 노력 때문이다." "내 힘으로 이루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시127: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아멘. 15절 도끼가 찍는 자에게 자랑하겠느냐? 가장 중요한 비유입니다.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생각해 보십시오. 도끼가 나무를 찍고 나서 "내가 위대한 일을 했다!" 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도끼는 도구일 뿐입니다. 앗수르는 도끼였습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셨는데, 자기가 주인인 줄 착각했습니다. 

하나님은 도구를 사용하시지만 도구를 높이지 않으십니다. 앗수르는 하나님의 도구였습니다. 그러나 도구가 하나님 자리에 올라가려 했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겸손하게 쓰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반드시 낮추십니다. 성경의 반복되는 원리입니다. 야고보서 4:6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앗수르는 세계 최강국이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도끼였습니다. 그러니 겸손해져야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쓰임 받을 때 더 겸손해야 합니다. 사역자가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능력이 아니라 교만입니다.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은 사람일수록 더 기도하고 더 낮아지고 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3.
16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진 자를 파리하게 하시며 그의 영화 아래에 불이 붙는 것 같이 맹렬히 타게 하실 것이라
17 이스라엘의 빛은 불이 되고 그의 거룩하신 이는 불꽃이 되실 것이니라 하루 사이에 그의 가시와 찔레가 소멸되며
18 그의 숲과 기름진 밭의 영광이 전부 소멸되리니 병자가 점점 쇠약하여 감 같을 것이라
19 그의 숲에 남은 나무의 수가 희소하여 아이라도 능히 계수할 수 있으리라

그러므로 다시 결론입니다. 16-19절 하나님은 앗수르의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앗수르의 영광을 꺾으십니다. 그들의 군대 권력 경제력 명예가 하루아침에 사라질 것입니다. 19절 "그의 숲의 남은 나무가 얼마 되지 아니하여 어린 아이도 능히 기록할 수 있으리라" "숲"은 앗수르의 거대한 군사력을 의미합니다. 한때 거대한 제국이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작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움직이시는 분이며,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들린 도구일 뿐이다." 앗수르는 하나님께 쓰임 받았지만 교만하여 심판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반드시 겸손으로 무장하고 살아야 합니다.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 나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주인이 되지 않게 하시고 끝까지 겸손한 도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사야 10:20-34

1.
20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
21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22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음이라
23 이미 작정된 파멸을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

하나님은 교만한 앗수르를 심판하십니다. 앗수르가 무너지고 심판을 받게 되는 날에, 남은 자들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의 신앙은 한 축은 남은 자의 신앙입니다. 이사야의 첫째 아들 ‘스알야숩-남은 자가 돌아오리라’를 통하여 하나님은 남 유다로 심판하시지만 남은 자로 다시 새롭게 회복시켜 주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21절 하나님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를 남겨두십니다. 돌아온다는 것은? 회개입니다. 회개할 수 있는 자가 남게 됩니다. 회개하여 돌아올 때 하나님은 그 생명을 보존하시고 끝까지 함께 하십니다. 22절 아무리 많은 사람이 있어도 회개하고 돌아오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가진 남은 자가 구원받습니다. 예수님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 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구원의 길은 좁고 협착한 길입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남은 자의 신앙을 찾으십니다. 남은 자는 세상에서 소수일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가장 귀한 사람들입니다. 남은 자는?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사람, 회개하며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 심판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키는 사람,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붙드는 사람입니다. 오늘 주님으로 마지막 세상 가운데 남겨진 신앙을 이루길 소망합니다. 

2.
24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시온에 거주하는 내 백성들아 앗수르가 애굽이 한 것처럼 막대기로 너를 때리며 몽둥이를 들어 너를 칠지라도 그를 두려워하지 말라
25 내가 오래지 아니하여 네게는 분을 그치고 그들은 내 진노로 멸하리라 하시도다
26 만군의 여호와께서 채찍을 들어 그를 치시되 오렙 바위에서 미디안을 쳐죽이신 것 같이 하실 것이며 막대기를 드시되 바다를 향하여 애굽에서 하신 것 같이 하실 것이라
27 그 날에 그의 무거운 짐이 네 어깨에서 떠나고 그의 멍에가 네 목에서 벗어지되 기름진 까닭에 멍에가 부러지리라

이어서 하나님께서 남은 자를 위로하시며 앗수르의 압제에서 반드시 구원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24절 앗수르를 두려워 하지 말라입니다. 앗수르는 기원전 722년에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나아가 친 앗수를 정책을 펼친 남 유다를 위협합니다. 특히 아하스왕때 남 유다는 앗수르의 속국으로 전략합니다. 히스시야왕때는 앗수르의 산헤립이 군대를 끌고 남 유다를 공격합니다. 그러나 앗수르가 강한 것은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도구 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앗수르의 교만으로 인하여 버리셨습니다. 때문에 두려워할 이유가 없어진 것입니다. 25절 하나님의 진노의 방향이 바뀌어서 이제는 교만해진 앗수르를 심판하십니다. 26절 역사적인 두 사건, 사사기 7장 기드온을 통하여 오렙 바위에서 미디안을 친 사건, 홍해에서 애굽을 심판하신 사건을 들어서 반드시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27절 무거운 짐과 멍에와 같은 앗수르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의 핵심은 "두려움보다 하나님의 주권을 바라보라."입니다. 앗수르는 매우 강한 나라였지만, 하나님이 사용하실 때는 심판의 도구였고, 교만해졌을 때는 심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권세는 영원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통치는 영원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징계하시더라도 결코 버리지 않으십니다. 징계에는 끝이 있으며, 그 이후에는 회복이 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3.
28 그가 아얏에 이르러 미그론을 지나 믹마스에 그의 장비를 두고
29 산을 넘어 게바에서 유숙하매 라마는 떨고 사울의 기브아는 도망하도다
30 딸 갈림아 큰 소리로 외칠지어다 라이사야 자세히 들을지어다 가련하다 너 아나돗이여
31 맛메나는 피난하며 게빔 주민은 도망하도다
32 아직 이 날에 그가 놉에서 쉬고 딸 시온 산 곧 예루살렘 산을 향하여 그 손을 흔들리로다
33 보라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혁혁한 위력으로 그 가지를 꺾으시리니 그 장대한 자가 찍힐 것이요 그 높은 자가 낮아질 것이며
34 쇠로 그 빽빽한 숲을 베시리니 레바논이 권능 있는 자에게 베임을 당하리라

28-32절 이 본문은 앗수르 군대가 예루살렘을 향해 진격하는 장면을(아얏-미그론-믹마스-높-예루살렘) 매우 생생하게 묘사한 예언입니다. 마치 전쟁 현장을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지명을 하나씩 나열하며 긴장감을 높이다가, 33-34절 하나님의 등장과 개입,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친히 앗수르를 꺾으시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앗수르는 점점 가까워지고 사람들은 점점 두려워졌고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계산하지 못한 한 분이 계셨습니다. 바로 하나님입니다. 인간은 기세 등등 전진하는 앗수르를 보지만 하나님은 앗수르의 멸망 마지막을 보고 계셨습니다.

앗수르의 진격이 아무리 위협적으로 보여도 하나님의 주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지명을 하나하나 나열하는 것은 백성들이 느꼈던 현실의 공포를 생생하게 보여 주지만,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숲을 베어 버리는 장면으로 모든 긴장을 뒤집으십니다. 우리 삶 가운 문제가 점점 가까워질지라도 하나님은 더 가까이 계시며,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가장 결정적인 때에 역사하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 하나님의 약속과 주권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사랑의 아버지!!
주 앞에 남겨진 자로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믿음을 경주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사야 11:1-16

1.
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2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3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4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5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남유다의 아하스왕은 하나님을 버리고 친 앗수르 정책을 펼쳤습니다. 여러 차례 하나님이 돌아오라는 신앙적인 싸인을 주셨지만 아하스왕은 불신앙과 우상숭배로 하나님을 등지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은 앗수르로 북이스라엘을 심판하시고 남 유다도 심판하실 것을 예언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심판 중에도 긍휼하심을 보이십니다. 남 유다를 모두 태워버리고 없애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1절 한뿌리와 한 줄기 그루터기를 남겨 두셨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으로 약속한 새 언약입니다. 아브라함으로 다윗으로 남겨진 거룩한 씨앗으로 결실하게 하십니다. 이 결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2절 예수는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자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으로 열매와 결실을 맺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은 지혜와 총명입니다. 모략과 재능입니다.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입니다. 3절 그는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습니다. 즐거움은 레아흐-향기입니다. 즉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향기 나는 생명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기준으로 살아가는 자는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모든 선택과 판단이 자신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이 기준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4절 공의로 심판하고 정직으로 판단합니다. 입의 막대기와 입의 기운으로 심판하십니다. 5절 공의와 성실로 기준 삼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 남겨진 줄기(이새의 줄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살아가는 즐거움을 누려야 합니다. 우리는 공의와 정직과 성실로 살아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2.
6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9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6-9절은 메시아 예수가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6절 예수가 다스리는 나라는 모든 사람 동물 짐승의 본성이 바뀌게 됩니다. 이리와 표범이 순해지고, 사자와 짐승과 어린이가 함께 공존하는 세상이 됩니다. 7절 먹는 식성도 변화되고 8절 참된 공존이 이뤄지게 됩니다. 9절 온 세상 가운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가 다스리는 나라만이 화평과 평화의 나라입니다. 갈등과 미움은 죄의 결과입니다. 그리스도의 통치만이 화해와 평화를 만들어냅니다. 주님이 다스리는 나라를 소망하며, 이 땅에 주님의 나라가 임하는 통로가 되시길 소망합니다. 주를 아는 지식으로 충만하시길 기도합니다. 

3.
10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11 그 날에 주께서 다시 그의 손을 펴사 그의 남은 백성을 앗수르와 애굽과 바드로스와 구스와 엘람과 시날과 하맛과 바다 섬들에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
12 여호와께서 열방을 향하여 기치를 세우시고 이스라엘의 쫓긴 자들을 모으시며 땅 사방에서 유다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리니
13 에브라임의 질투는 없어지고 유다를 괴롭게 하던 자들은 끊어지며 에브라임은 유다를 질투하지 아니하며 유다는 에브라임을 괴롭게 하지 아니할 것이요
14 그들이 서쪽으로 블레셋 사람들의 어깨에 날아 앉고 함께 동방 백성을 노략하며 에돔과 모압에 손을 대며 암몬 자손을 자기에게 복종시키리라
15 여호와께서 애굽 해만을 말리시고 그의 손을 유브라데 하수 위에 흔들어 뜨거운 바람을 일으켜 그 하수를 쳐 일곱 갈래로 나누어 신을 신고 건너가게 하실 것이라
16 그의 남아 있는 백성 곧 앗수르에서 남은 자들을 위하여 큰 길이 있게 하시되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과 같게 하시리라

1-5절에서는 메시아의 성품, 6-9절 메시아가 다스리는 나라 평화의 통치를, 10-16절에서는 메시아를 중심으로 열방이 모이고, 흩어진 하나님의 백성이 회복되는 역사를 보여 줍니다.

10절 흩어진 자들이 만민의 기치인 예수로 모이게 될 것입니다. 11-12절 앗수르 애굽 구스 엘람 시날 하맛 바다 섬들로 사방으로 흩어진 백성들이 모이게 될 것입니다. 13절 200년 동안 분열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더 이상 질투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14절 서쪽으로 블레셋, 동쪽으로 에돔과 모압 암몬을 복종시키게 될 것입니다. 15절 애굽 해만(출애굽 홍해)을 말리시고, 16절 남아 있는 자들이 출애굽 홍해를 건너던 날과 같이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모임의 기치(깃발)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민족의 소망이십니다. 복음은 특정 민족이나 문화에 제한되지 않고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입니다. 복음은 분열을 화해로 바꿉니다. 에브라임과 유다의 화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미움과 경쟁보다 사랑과 연합을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막힌 길을 여시는 분입니다. 홍해를 가르시고 유브라데를 건너게 하신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삶의 장애물을 넘어 구원의 길을 여십니다. 우리는 새로운 출애굽의 백성입니다.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순례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사랑의 아버지!!
주님의 오시는 그날을 소망하며 주님의 기치 앞에 온 이방 백성이 모여들며 예배하는 그날을 속히 이루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사야 12:1-6절

1.
1 그 날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주의 진노가 돌아섰고 또 주께서 나를 안위하시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 할 것이니라
2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3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11장에서 메시아 예수가 다스리는 나라를 예언한 후, 12장은 구원의 찬양을 노래합니다. 1절 그날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완성하시는 날입니다. 붙들려 갔던 포로가 돌아오고, 메시아 예수를 통한 구원의 약속이 이루어지고며,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재림과 새 하늘 새 땅, 새 예루살렘이 완성되는 날입니다. 신앙을 전과 이후로 나눌 때 전에는 진노이고 심판이지만, 이제는 안위이고 감사입니다. 그날에 남은 자는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2절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십니다. 보라는 주목하라입니다. 즉 구원의 하나님 되심을 주목하여 시선을 돌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볼 때 주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것이며, 두려움이 사라지게 될 것이며, 힘과 노래와 구원의 찬양이 회복될 것입니다. 3절 그러므로 결과입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바라 봄으로서 얻게 되는 기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찬양이며 감사이며 기쁨입니다. 출애굽 애굽을 벗어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노래하고 찬양했듯이, 앗수르와 바벨론 포로에서 벗어난 주의 백성들은 주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모든 세상으로부터 속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2.
4 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의 이름이 높다 하라
5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 이를 온 땅에 알게 할지어다
6 시온의 주민아 소리 높여 부르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너희 중에서 크심이니라 할 것이니라 

앞의 찬양이 개인적인 감사와 찬양이라면, 4-6절은 만국이 선포할 찬양입니다. 4절 만민에게 알리는 찬양입니다. 구원받은 백성은 네 가지 사명을 받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라. 하나님의 행하심을 만민에게 알리라.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라.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만민"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를 독점하는 백성이 아니라, 열방에 하나님의 영광을 전하는 통로입니다. 5절 하나님의 구원은 예루살렘 안에만 머무르지 말아야 합니다. "온 땅"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구원이 모든 민족을 향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극히 아름다운 일"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완성된 온 땅을 향한 구원 사역입니다. 6절 시온 온 이스라엘이 찬양할 이유는 하나님의 너희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가중 큰 축복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축복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구원의 은혜를 감사로만 간직하지 말고 이웃에게 전하는 사명자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알리는 선교 공동체임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임재를 삶의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기며 예배하십시오. 그리고 우리의 가정과 교회가 "시온"처럼 하나님이 크시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공동체가 되도록 힘쓰시길 소망합니다. 이사야는 이미 구약에서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비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시작되었고, 오늘날 교회의 선교를 통해 확장되며, 마지막 날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함께 찬양하는 예배 가운데 완성될 것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이제는 주님을 찬양하며 구원의 은혜를 노래하는 주님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사야 13:1-22

1.
1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바벨론에 대하여 받은 경고라
2 너희는 민둥산 위에 기치를 세우고 소리를 높여 그들을 부르며 손을 흔들어 그들을 존귀한 자의 문에 들어가게 하라
3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자들에게 명령하고 나의 위엄을 기뻐하는 용사들을 불러 나의 노여움을 전하게 하였느니라
4 산에서 무리의 소리가 남이여 많은 백성의 소리 같으니 곧 열국 민족이 함께 모여 떠드는 소리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싸움을 위하여 군대를 검열하심이로다
5 무리가 먼 나라에서, 하늘 끝에서 왔음이여 곧 여호와와 그의 진노의 병기라 온 땅을 멸하려 함이로다

이사야 13장부터는 새로운 단락이 시작됩니다. 13-23장은 주변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 예언입니다. 그 첫 번째 대상이 바로 바벨론입니다. 이사야가 사역하던 당시(BC 8세기 후반) 가장 강력한 나라는 앗수르였습니다. 바벨론은 아직 세계를 지배하는 제국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장차 바벨론이 세계를 정복할 것과, 결국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할 것까지 미리 예언하십니다. 이 예언은 훗날 메대·바사 연합군에 의해 바벨론이 무너지면서 역사 속에서 부분적으로 성취되었고, 동시에 마지막 날 하나님께서 악한 세상을 심판하시는 '여호와의 날'을 예표합니다. 이사야는 바벨론의 미래 170년 뒤를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1-5절 본문은 하나님이 바벨론의 멸망을 위해서 군대를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특별히 3절 하나님은 자신의 군대를 일으켜, 자신의 계획 가운데 사용하십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이방 군대까지도 자신의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우연이라 말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합니다. 오늘도 만남도 환경도 국가의 역사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모든 우연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필연과 계획입니다.

2.
6 너희는 애곡할지어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니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할 것임이로다
7 그러므로 모든 손의 힘이 풀리고 각 사람의 마음이 녹을 것이라
8 그들이 놀라며 괴로움과 슬픔에 사로잡혀 해산이 임박한 여자 같이 고통하며 서로 보고 놀라며 얼굴이 불꽃 같으리로다
9 보라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 중에서 죄인들을 멸하리니
10 하늘의 별들과 별 무리가 그 빛을 내지 아니하며 해가 돋아도 어두우며 달이 그 빛을 비추지 아니할 것이로다
11 내가 세상의 악과 악인의 죄를 벌하며 교만한 자의 오만을 끊으며 강포한 자의 거만을 낮출 것이며
12 내가 사람을 순금보다 희소하게 하며 인생을 오빌의 금보다 희귀하게 하리로다
13 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분하여 맹렬히 노하는 날에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 그 자리에서 떠나게 하리니 

본문은 여호와의 날입니다. 그날은 반드시 옵니다. 6절, 9절, 13절 여호와의 날에 죄인들은 두려워 떨 것이며, 교만은 무너질 것이며,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왕 되심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특히 11절 악인의 죄를 벌하시며, 교만한 자의 오만을 끊으시며, 강포한 자의 거만을 낮추신다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삶에도 반드시 여호와의 날은 있습니다. 언젠가 모든 직분도 재산도 명예도 성공도 끝이 옵니다. 그날 남는 것은 "나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이었는가" 뿐입니다. 그러니 여호와의 날을 준비하십시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십니다. 그날은 믿는 자에게는 구원의 날이며 믿지 않는 자에게는 심판의 날입니다. 오늘도 거룩한 삶으로 그날을 준비해야 합니다.

3.
14 그들이 쫓긴 노루나 모으는 자 없는 양 같이 각기 자기 동족에게로 돌아가며 각기 본향으로 도망할 것이나
15 만나는 자마다 창에 찔리겠고 잡히는 자마다 칼에 엎드러지겠고
16 그들의 어린 아이들은 그들의 목전에서 메어침을 당하겠고 그들의 집은 노략을 당하겠고 그들의 아내는 욕을 당하리라
17 보라 은을 돌아보지 아니하며 금을 기뻐하지 아니하는 메대 사람을 내가 충동하여 그들을 치게 하리니
18 메대 사람이 활로 청년을 쏘아 죽이며 태의 열매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며 아이를 애석하게 보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심판은 피할 수 없습니다. 14절 사람들은 각자 살길을 찾아 도망하겠지만, 15절 칼에 엎드려지고, 16절 메어침을 당하고 욕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심판의 날에 돈도 권력도 무기도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구원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피난처는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그러니 세상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세상은 화려하지만 영원하지 않습니다. 돈도 직장도 건강도 언젠가는 끝이 옵니다. 오직 하나님만 영원하십니다.

사랑의 아버지!!
영원한 것 없는 우리의 인생 위에 주님의 세우고 살며 피난처 되신 주님을 의지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사야 14:1-23

1.
1 여호와께서 야곱을 긍휼히 여기시며 이스라엘을 다시 택하여 그들의 땅에 두시리니 나그네 된 자가 야곱 족속과 연합하여 그들에게 예속될 것이며
2 민족들이 그들을 데리고 그들의 본토에 돌아오리니 이스라엘 족속이 여호와의 땅에서 그들을 얻어 노비로 삼겠고 전에 자기를 사로잡던 자들을 사로잡고 자기를 압제하던 자들을 주관하리라

이사야는 훗날 170년-200년 뒤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앗수르가 지고 바벨론 때에 남 유다가 멸망(기원전 586년) 포로로 끌러가게됩니다. 이후 70년 만에 페르시아에 의해서 바벨론이 멸망을 당한뒤 페르시아 고레스왕에 의해서 남 유다는 고국으로 3차례에 걸쳐서 42,360명이 귀국하게 됩니다. 

남 유다가 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는 3가지입니다. 1절 야곱을 긍휼히 여기시며, 다시 택하여, 본토에 두시기 위함입니다. '긍휼'은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입니다. 이스라엘은 심판받아 마땅했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심판은 끝이 아니라 회복을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다시 택하여"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셨다가 다시 선택하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언약을 새롭게 확인하시고 다시 회복시키시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우신다는 뜻입니다. ‘본토에 드시리니’ 이는 본향 약속에 대한 회복입니다. 2절 민족들이 그들을 데리고 본토에 돌아오리니, 이는 나그네가 야곱 족속과 연합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3차 귀향때에 42360+ 노비 7337명 + 노래하는 자200명이 함께 본향으로 귀국하게 됩니다. 심판보다 큰 긍휼입니다. 13장 심판에 이어서 14장 회복의 말씀입니다. 선경은 심판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항상 마지막은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노래합니다. 

2.
3 여호와께서 너를 슬픔과 곤고와 및 네가 수고하는 고역에서 놓으시고 안식을 주시는 날에
4 너는 바벨론 왕에 대하여 이 노래를 지어 이르기를 압제하던 자가 어찌 그리 그쳤으며 강포한 성이 어찌 그리 폐하였는고
5 여호와께서 악인의 몽둥이와 통치자의 규를 꺾으셨도다
6 그들이 분내어 여러 민족을 치되 치기를 마지아니하였고 노하여 열방을 억압하여도 그 억압을 막을 자 없었더니
7 이제는 온 땅이 조용하고 평온하니 무리가 소리 높여 노래하는도다
8 향나무와 레바논의 백향목도 너로 말미암아 기뻐하여 이르기를 네가 넘어져 있은즉 올라와서 우리를 베어 버릴 자 없다 하는도다

3-8절은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압제에서 자기 백성을 해방시키신 후, 바벨론 왕을 향한 조롱의 노래(비유적인 풍자시)를 부르라 말씀하십니다. 3절 슬픔과 곤고와 수고 고역에서 놓임을 받는 날에. 4절 바벨론 왕에게 이 노래를 지어 부르라 5절 여호와께서 악인을 꺽으셨도다. 6절 분노로 여러 민족을 치던 자가 7절 무너지고 이 땅이 조용하고 평온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8절 그러므로 온 땅에 기쁨이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의 교만한 권세를 꺾으시고, 압제받던 자기 백성에게 안식을 주시는 역사의 주권자이십니다. 바벨론의 몰락은 모든 인간 권세의 한계를 보여 주며, 참된 평안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3.
12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13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14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15 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

이 본문은 이사야서에서 가장 유명한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바벨론 왕을 조롱하는 노래(14:4)의 한 부분으로 시작하지만, 그 교만의 모습이 너무도 극적이어서 오랫동안 사탄의 타락을 연상시키는 본문으로도 읽혀 왔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1차적인 의미는 바벨론 왕의 교만에 대한 심판이며, 동시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 배후에 있는 사탄의 교만한 본성을 비추는 말씀으로 이해해 왔습니다.

12절 '계명성'은 새벽에 가장 밝게 빛나는 금성(새벽별)을 가리키는 시적인 표현입니다. 가장 밝게 빛나던 존재가 한순간에 추락하는 모습으로, 교만한 바벨론 왕의 몰락을 상징합니다. 13절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죄는 언제나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바벨론 왕은 다섯 번이나 "내가"라고 말하며 자신을 높입니다. 내가 하늘에 올라가겠다. 내가 하나님의 별 위에 내 보좌를 높이겠다. 내가 북쪽 끝 산 위에 앉겠다. 내가 구름 위로 올라가겠다.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와 같아지겠다. 교만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마음입니다. 14절 교만은 단순히 자신감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도 내가 주인이 되려는 마음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뱀이 하와에게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라고 유혹한 것과 같은 본질입니다. 15절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반드시 낮추십니다. 하늘 끝까지 올라가려던 자가 가장 낮은 곳으로 떨어집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① 교만은 모든 죄의 뿌리입니다. 성경은 교만을 하나님을 대적하는 태도로 묘사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처럼 되려 했습니다. 바벨탑 사람들은 자기 이름을 높이려 했습니다. 바벨론 왕은 하나님과 같아지려 했습니다. 교만은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시도입니다. ② 하나님만이 높임을 받으실 분입니다. 인간은 높아질수록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성경은 높아지는 길이 스스로 자신을 높이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데 있다고 가르칩니다. 

사람은 스스로 높아질 때 무너지지만,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릴 때 하나님께서 가장 선한 때에 높여 주십니다.

사랑의 아버지!!
교만을 물리치고 겸손한 자리에서 주님 주시는 치료와 회복을 소망하고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사야 14:24-15:9

1.
24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이르시되 내가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내가 경영한 것을 반드시 이루리라
25 내가 앗수르를 나의 땅에서 파하며 나의 산에서 그것을 짓밟으리니 그 때에 그의 멍에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고 그의 짐이 그들의 어깨에서 벗어질 것이라
26 이것이 온 세계를 향하여 정한 경영이며 이것이 열방을 향하여 편 손이라 하셨나니
27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의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

바벨론에 대한 심판에 이어서 앗수르에 대한 심판입니다. 당시 앗수르가 패권국가이며 아무도 그 권위에 도전할 수 없을 것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나라들이 아무리 강해 보여도 역사의 주인공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앗수르가 무너질 것을 말씀하십니다. 24절 ‘내가’ 즉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26-27절 하나님이 계획하신대로 경영하시며 결국 이루십니다. 

  
결국 열방의 흥망성쇠는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앗수르도, 블레셋도, 모압도, 바벨론도 역사 속에서는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모두 지나가는 나라였습니다. 강대국이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만 영원하십니다. 그래서 성도는 세상의 힘을 보고 두려워하기보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2.
28 아하스 왕이 죽던 해에 이 경고가 임하니라
29 블레셋 온 땅이여 너를 치던 막대기가 부러졌다고 기뻐하지 말라 뱀의 뿌리에서는 독사가 나겠고 그의 열매는 날아다니는 불뱀이 되리라
30 가난한 자의 장자는 먹겠고 궁핍한 자는 평안히 누우려니와 내가 네 뿌리를 기근으로 죽일 것이요 네게 남은 자는 살륙을 당하리라
31 성문이여 슬피 울지어다 성읍이여 부르짖을지어다 너 블레셋이여 다 소멸되리로다 대저 연기가 북방에서 오는데 그 대열에서 벗어난 자가 없느니라
32 그 나라 사신들에게 어떻게 대답하겠느냐 여호와께서 시온을 세우셨으니 그의 백성의 곤고한 자들이 그 안에서 피난하리라 할 것이니라

블레셋을 향한 심판입니다. 블레셋은 아하스왕때 남유다를 공격했습니다. 28절 남 유다의 아하스왕이 죽고, 앗수르가 약해졌다고 해서, 29절 너를 치던 막대기가 부러졌다고 해서 기뻐하지 말라 말씀하십니다. 30절 더 강력한 국가가 등장하여 죽음을 당하고 살륙당하게 될 것입니다. 31절 그러므로 블레셋은 소멸을 슬피울며 부르짖으라 말씀하십니다. 32절 여기에서 분위기가 바뀌게 됩니다. 블레셋은 무너지지만 시온은 세워지게 됩니다. 블레셋이 약하고 시온이 강해서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시온을 세우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하나님이 세우시는 시온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성도는 환경을 보고 낙심하지 말고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사람이 무너뜨릴 수 있어도 하나님이 세우시는 것은 무너지지 않는다.” “여호와께서 시온을 세우셨다.” 우리의 교회와 가정과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능력으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3.
15:1 모압에 관한 경고라
하룻밤에 모압 알이 망하여 황폐할 것이며 하룻밤에 모압 기르가 망하여 황폐할 것이라
2 그들은 바잇과 디본 산당에 올라가서 울며 모압은 느보와 메드바를 위하여 통곡하는도다 그들이 각각 머리카락을 밀고 각각 수염을 깎았으며
3 거리에서는 굵은 베로 몸을 동였으며 지붕과 넓은 곳에서는 각기 애통하여 심히 울며
4 헤스본과 엘르알레는 부르짖으며 그들의 소리는 야하스까지 들리니 그러므로 모압의 군사들이 크게 부르짖으며 그들의 혼이 속에서 떠는도다
5 내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부르짖는도다 그 피난민들은 소알과 에글랏 슬리시야까지 이르고 울며 루힛 비탈길로 올라가며 호로나임 길에서 패망을 울부짖으니
6 니므림 물이 마르고 풀이 시들었으며 연한 풀이 말라 청청한 것이 없음이로다
7 그러므로 그들이 얻은 재물과 쌓았던 것을 가지고 버드나무 시내를 건너리니
8 이는 곡성이 모압 사방에 둘렸고 슬피 부르짖음이 에글라임에 이르며 부르짖음이 브엘엘림에 미치며
9 디몬 물에는 피가 가득함이로다 그럴지라도 내가 디몬에 재앙을 더 내리되 모압에 도피한 자와 그 땅에 남은 자에게 사자를 보내리라

모압에 대한 심판입니다. 1절 하루 밤에 성읍이 무너지고 2-3절 백성들은 통곡합니다. 4절 군사들고 두러워합니다. 5절 이사야도 모압을 위해서 슬퍼합니다. 6절 땅과 물이 황폐해지고 7절 사람들이 재물을 가지고 도망합니다. 8절 통곡이 온 땅에 퍼집니다. 9절 도망자에게 까지 심판이 미치게 됩니다. 

특별히 5절에서 이사야는 모압의 멸망을 보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모압은 이스라엘과 가까운 민족입니다. 모압은 롯의 후손입니다(창 19:30-38). 따라서 이스라엘과 혈연적으로 가까운 민족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도 모압과의 관계는 복잡했습니다. 때로는 이스라엘을 대적했고 때로는 이스라엘과 관계를 맺었으며 룻은 모압 여인이었지만 다윗의 가문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므로 모압의 멸망은 이사야에게 단순한 “적국의 패배”가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원수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나를 힘들게 한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면 속으로 “그러니까 잘됐다.” 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성경에 하나님의 사람은 다릅니다. 이사야는 모압의 죄를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의 고통 앞에서 울었습니다. 이것은 죄를 용납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우셨습니다. “마 23: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죄에 대해서는 단호해야 하지만, 죄인에 대해서는 울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의 아버지!!
역사의 주권자 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시온을 세우듯이 교회와 나라를 회복시키시고 세워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사야 16:1-14

1.
1 너희는 이 땅 통치자에게 어린 양들을 드리되 셀라에서부터 광야를 지나 딸 시온 산으로 보낼지니라
2 모압의 딸들은 아르논 나루에서 떠다니는 새 같고 보금자리에서 흩어진 새 새끼 같을 것이라
3 너는 방도를 베풀며 공의로 판결하며 대낮에 밤 같이 그늘을 지으며 쫓겨난 자들을 숨기며 도망한 자들을 발각되게 하지 말며
4 나의 쫓겨난 자들이 너와 함께 있게 하되 너 모압은 멸절하는 자 앞에서 그들에게 피할 곳이 되라 대저 토색하는 자가 망하였고 멸절하는 자가 그쳤고 압제하는 자가 이 땅에서 멸절하였으며
5 다윗의 장막에 인자함으로 왕위가 굳게 설 것이요 그 위에 앉을 자는 충실함으로 판결하며 정의를 구하며 공의를 신속히 행하리라

15장에 이어서 모압에 대한 계속적 심판입니다. 1절 모압은 심판 가운데 예물을 바치며 시온인 남유다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2절 모압의 백성들은 새 새끼처럼 흩어짐을 당하게 됩니다. 5절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의 장막인 유다를 굳건하게 세우십니다. 그의 위에 앉을 자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는 충실과 정의 공의를 이 땅 가운데 실행할 것입니다. 

모압은 강한 나라이지만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피난민 도망자 흩어지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그 때에 되면 시온 앞에 초라하게 생명을 구결하게 되는 것입니다. 풍년의 때에 흉연을 준비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어찌되었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흉년의 때입니다. 그러나 아끼고 절약하고 절제하고 조심하여 마지막 흉년의 때를 준비해야 합니다. 이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주님 앞에 서는 날을 준비해야 합니다.

2.
6 우리가 모압의 교만을 들었나니 심히 교만하도다 그가 거만하며 교만하며 분노함도 들었거니와 그의 자랑이 헛되도다
7 그러므로 모압이 모압을 위하여 통곡하되 다 통곡하며 길하레셋 건포도 떡을 위하여 그들이 슬퍼하며 심히 근심하리니
8 이는 헤스본의 밭과 십마의 포도나무가 말랐음이라 전에는 그 가지가 야셀에 미쳐 광야에 이르고 그 싹이 자라서 바다를 건넜더니 이제 열국의 주권자들이 그 좋은 가지를 꺾었도다  

모압이 심판을 받는 이유는? 6절 교만입니다. 모압은 경제적으로 풍요했으며 많은 힘을 가진 나라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없이도 잘 먹고 잘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7절 교만의 결과는 통곡과 슬픔과 근심입니다. 자신을 믿고 의지하고 살았으면 자신으로 든든하게 세워져야 할 것인데 그렇지 못합니다. 자신이 자신을 실망시킵니다. 돈으로 무너집니다. 건강으로 흔들리게 됩니다. 자녀로 고통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자신을 의지한 댓가입니다. 때문에 교만의 열내는 통곡과 슬픔과 근심입니다. 8절 때문에 포도나무의 말라버림처럼 말라버리고 맙니다. 자신의 믿었던 모든 것이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랑이 오직 주님이길 소망합니다. “고린도후서 10:17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하나님이 주신 것을 자랑하기보다, 그것을 주신 하나님을 자랑하길 소망합니다. 하나님이 자랑이 될 때 모압의 포도원은 말랐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의 소망은 마르지 않습니다. 세상의 풍요는 사라질 수 있습니다. 사람도 떠날 수 있습니다. 건강도 약해질 수 있습니다. 물질도 없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영원한 기업이 되십니다. 그래서 성도는 풍성할 때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부족할 때도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3.
9 그러므로 내가 야셀의 울음처럼 십마의 포도나무를 위하여 울리라 헤스본이여, 엘르알레여, 내 눈물로 너를 적시리니 너의 여름 실과, 네 농작물에 즐거운 소리가 그쳤음이라
10 즐거움과 기쁨이 기름진 밭에서 떠났고 포도원에는 노래와 즐거운 소리가 없어지겠고 틀에는 포도를 밟을 사람이 없으리니 이는 내가 즐거운 소리를 그치게 하였음이라
11 이러므로 내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수금 같이 소리를 발하며 내 창자가 길하레셋을 위하여 그러하도다
12 모압이 그 산당에서 피곤하도록 봉사하며 자기 성소에 나아가서 기도할지라도 소용없으리로다
13 이는 여호와께서 오래 전부터 모압을 들어 하신 말씀이거니와
14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품꾼의 정한 해와 같이 삼 년 내에 모압의 영화와 그 큰 무리가 능욕을 당할지라 그 남은 수가 심히 적어 보잘것없이 되리라 하시도다

9절 모압의 심판을 보고 이사야는 울며 눈물을 흘립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선지자이지만, 심판받는 사람들의 고통을 보면서 슬퍼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필요한 마음입니다. 심판을 믿는 것과 심판을 즐기는 것은 다릅니다. “저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났으니 망해야 해.” 이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은 의롭지만,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원합니다.” 라는 마음입니다.

12절 여기에는 모압의 종교적인 모습이 나옵니다. 모압이 어려움을 당하자 신을 찾습니다. 산당에 올라갑니다. 성소에 갑니다. 기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소용이 없으리로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이 평소에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다가 심판이 닥치자 자신들의 신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위기가 왔을 때만 하나님을 찾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평안할 때 하나님을 찾고, 풍성할 때 하나님께 감사하고, 문제가 없을 때도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필요할 때 사용하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14절 하나님은 모압의 심판을 3년이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에는 하나님의 정하신 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압은 자신들의 영화가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삼 년 내에 모압의 영화가 능욕을 당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남은 수가 심히 적으리라.” 하십니다. 인간의 영광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제국도 사라지고 부요도 사라지고 명예도 사라지고 사람의 자랑도 사라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사랑의 아버지!!
나의 교만을 낮추시고, 겸손으로 주님을 섬기며 나에게 정해진 심판의 날에 구원받는 주의 백성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사야 17:1-14

1.
1 다메섹에 관한 경고라 보라 다메섹이 장차 성읍을 이루지 못하고 무너진 무더기가 될 것이라
2 아로엘의 성읍들이 버림을 당하리니 양 무리를 치는 곳이 되어 양이 눕되 놀라게 할 자가 없을 것이며
3 에브라임의 요새와 다메섹 나라와 아람의 남은 자가 멸절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영광 같이 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7장은 다메섹(아람)에 대한 멸망입니다. 더불어 북이스라엘의 멸망까지 함께 예언합니다. 이는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함께 연합(이사야 7장)한 까닭입니다. 이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남 유다를 공경했습니다. 하나님은 남 유다로 두려워하지 말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다른 사람을 의지한다고 해서 안전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세상의 동맹이 하나님과 동행함을 대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지켜 주지 못하며 우리가 의지하는 것과 함께 멸망을 받을 것입니다. 

2.
4 그 날에 야곱의 영광이 쇠하고 그의 살진 몸이 파리하리니
5 마치 추수하는 자가 곡식을 거두어 가지고 그의 손으로 이삭을 벤 것 같고 르바임 골짜기에서 이삭을 주운 것 같으리라
6 그러나 그 안에 주울 것이 남으리니 감람나무를 흔들 때에 가장 높은 가지 꼭대기에 과일 두세 개가 남음 같겠고 무성한 나무의 가장 먼 가지에 네다섯 개가 남음 같으리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7 그 날에 사람이 자기를 지으신 이를 바라보겠으며 그의 눈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뵙겠고
8 자기 손으로 만든 제단을 바라보지 아니하며 자기 손가락으로 지은 아세라나 태양상을 보지 아니할 것이며

이스라엘은 한때 풍성하고 번성하였지만. 4절 심판의 날에 야곱(이스라엘)은 쇠하고 파리 쇠약해 질 것입니다. 5절 추수 때에 떨어진 이삭과 같은 처지가 될 것입니다. 6절 그러나 모든 심판 가운데 하나님은 주울 것을 남겨두시고, ‘두 세개 네다섯 개’를 남겨 두신다 말씀하십니다. 이는 남은 자의 사상입니다. 하나님이 심판 하시지만 완전히 버리지는 않으십니다. 7-8절 그날에 남은 자가 이스라엘은 심판을 통하여 우상을 버리고 다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말씀을 기억하는 것과 순종은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하면서 실제의 삶에서는 사람과 환경을 더 의지 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럼으로 매일 믿음으로 말씀을 순종하며 살아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언제나 신앙으로 믿음으로 순종으로 남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거룩과 언약을 마음속에 품고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3.
9 그 날에 그 견고한 성읍들이 옛적에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버린 바 된 수풀 속의 처소와 작은 산 꼭대기의 처소 같아서 황폐하리니
10 이는 네가 네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리며 네 능력의 반석을 마음에 두지 아니한 까닭이라 그러므로 네가 기뻐하는 나무를 심으며 이방의 나무 가지도 이종하는도다
11 네가 심는 날에 울타리를 두르고 아침에 네 씨가 잘 발육하도록 하였으나 근심과 심한 슬픔의 날에 농작물이 없어지리라
 
9절 이스라엘의 성읍이 황폐해지고 심판을 받는 이유는? 10절 하나님을 잊어버린 까닭입니다.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① 네 구원의 하나님-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② 네 능력의 반석-하나님께서 그들의 진정한 힘이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이 가장 큰 문제이며 심판의 이유입니다. 11절 하나님을 떠난 수고는 헛된 수고입니다. 울타리를 쳐도 지킬수 없으며, 씨를 뿌려도 나서 자라지 못하며, 결국 슬픔의 날에 모든 농작물이 살아지고 말 것입니다. 

주를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① 주를 잊으면 견고한 것도 무너집니다. 9절 — 견고한 성읍이 황폐하게 됩니다. ② 주를 잊으면 다른 것을 의지하게 됩니다. 10절 — 하나님을 잊고 이방나라를 의지하게 됩니다. ③ 주를 잊으면 우리의 수고가 헛될 수 있습니다. 11절 — 열심히 심고 가꾸었지만 농작물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를 기억하십시오.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기억하십시오. 나의 능력의 반석 되시는 주님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주신 주님을 기억하십시오. 어려울 때 더욱 주님을 기억하십시오. 성도의 가장 큰 위기는 문제가 커지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커질 때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주를 기억함으로 신행일치하게 하시고, 문제 가운데 더욱 주를 바라보는 믿음의 눈을 주옵소서. 예수님이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사야 18:1-19:15

1.
18:1 슬프다 구스의 강 건너편 날개 치는 소리 나는 땅이여
2 갈대 배를 물에 띄우고 그 사자를 수로로 보내며 이르기를 민첩한 사절들아 너희는 강들이 흘러 나누인 나라로 가되 장대하고 준수한 백성 곧 시초부터 두려움이 되며 강성하여 대적을 밟는 백성에게로 가라 하는도다
3 세상의 모든 거민, 지상에 사는 너희여 산들 위에 기치를 세우거든 너희는 보고 나팔을 불거든 너희는 들을지니라
4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1)내가 나의 처소에서 조용히 감찰함이 쬐이는 일광 같고 가을 더위에 운무 같도다
5 추수하기 전에 꽃이 떨어지고 포도가 맺혀 익어갈 때에 내가 낫으로 그 연한 가지를 베며 퍼진 가지를 찍어 버려서
6 산의 독수리들과 땅의 들짐승들에게 던져 주리니 산의 독수리들이 그것으로 여름을 지내며 땅의 들짐승들이 다 그것으로 겨울을 지내리라 하셨음이라
7 그 때에 강들이 흘러 나누인 나라의 장대하고 준수한 백성 곧 시초부터 두려움이 되며 강성하여 대적을 밟는 백성이 만군의 여호와께 드릴 예물을 가지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두신 곳 시온 산에 이르리라

18장은 구스(에디오피아)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성경의 배경이 이것입니다. 당시 앗수르 주도로 국제 정세가 흘려갈 때, 북이스라엘은 암몬과 연합하여 앗수르를 대적하고, 구스는 애굽과 연합하여 앗수르를 대적하였습니다. 앗수르의 주변 국가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서로 연합하여 세력을 키워서 앗수르를 대적하고 자신들의 나라를 지키고자 했습니다. 북이스라엘과 암몬이 남 유다로 연합을 도모하였듯이, 구스와 애굽 역시 남 유다를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드려서 앗수르로부터 자신들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1절 구스는 남유다를 설득하여 손을 잡기 위하셔 ‘그의 사자’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남 유다로 그 누구도 어떤 나라도 의지하지 말며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할 것을 요청하십니다. 2절 이에 남 유다에게 그들과 연합하지 말며 ‘자신의 백성에게로 가라’ 돌려 보낼 것을 명하십니다. 3절 세상의 나라와 사람들이 기치를 세우며, 나팔을 불며 전쟁을 움직이며 전쟁을 준비할 때, 4절 하나님은 그 것을 조용히 감찰하시며 바라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심이 아니라 때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5절 때가 됨에 포도나무에 열매가 익어갈때에 극적으로 그 연한 가지를 베어 버리시며 찍어버리십니다. 6절 그리고 그 것을 독수리와 들짐승의 먹이로 던져 주십니다. 7절 그 때에 비로서 만국의 백성이 예물을 가지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두신 시온 산에 예루사렘에 나오게 될 것입니다. 

*사람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시지만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즉각적인 개입을 원하지만 하나님은 세상과 악이 무르익을 때까지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의 부재가 아닌, 기다림입니다. *그리고 결국 심판 가운데 열방을 구원해 주십니다. 

2.
19:1 애굽에 관한 경고라 보라 여호와께서 빠른 구름을 타고 애굽에 임하시리니 애굽의 우상들이 그 앞에서 떨겠고 애굽인의 마음이 그 속에서 녹으리로다
2 내가 애굽인을 격동하여 애굽인을 치리니 그들이 각기 형제를 치며 각기 이웃을 칠 것이요 성읍이 성읍을 치며 나라가 나라를 칠 것이며
3 애굽인의 정신이 그 속에서 쇠약할 것이요 그의 계획을 내가 깨뜨리리니 그들이 우상과 마술사와 신접한 자와 요술객에게 물으리로다
4 내가 애굽인을 잔인한 주인의 손에 붙이리니 포학한 왕이 그들을 다스리리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은 애굽에 대하여서도 경고하십니다. 1절 주님께서 애굽에 임하실때에 애굽의 우상들이 떨며 녹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지 않으며, 하나님은 우리가 의지하고 섬기는 것을 모두 무너뜨리십니다. 2절 애굽 내부가 분열됩니다. 애굽인들이 애굽인들을 치게 하십니다. 각기 형제가 가 형제를 치게 됩니다.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의 분열로 서로 싸우고 망하게 될 것입니다. 3절 애굽인들의 정신이 쇠약해 질 것이요. 정신적인 분열로 고통을 받게 만드십니다. 4절 결국 다른 나라의 통치 아래에 애굽을 던져버리십니다. 

주께서 임하실 때 참과 거짓이 드러나게 됩니다. 우상은 헛것이며 세상을 의지하던 우리의 의지도 헛된 것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왕의 자리에 우리는 이 땅에 엎드리며 모든 것이 자리를 찾게 될 것입니다. 

3.
5 바닷물이 없어지겠고 강이 잦아서 마르겠고
6 강들에서는 악취가 나겠고 애굽의 강물은 줄어들고 마르므로 갈대와 부들이 시들겠으며
....
12 너의 지혜로운 자가 어디 있느냐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께서 애굽에 대하여 정하신 뜻을 알 것이요 곧 네게 말할 것이니라
13 소안의 방백들은 어리석었고 놉의 방백들은 미혹되었도다 그들은 애굽 종족들의 모퉁잇돌이거늘 애굽을 그릇 가게 하였도다
....
15 애굽에서 머리나 꼬리며 종려나무 가지나 갈대가 아무 할 일이 없으리라

주께서 애굽땅에 임하실 때에, 5-6절 나일강이 마르며 악취가 나게 될 것입니다. 나일강은 애굽의 생명줄입니다. 악취가 나듯이 모든 것이 붕괴될 것입니다. 어업 농업 경제가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12-13절 애굽의 지혜자들이 어리석게 될 것입니다. 출애굽시대 모든 애굽의 술사처럼 할 것을 알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 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경제를 계산할 수 있습니다. 정치 전략도 세울 수 있습니다. 군사력을 계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지혜는 결국 어리석음이 됩니다. 15절 그래서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신세가 됩니다. 왕이 있고, 군대가 있고, 경제가 있고, 나일강이 있고, 지혜자가 있고, 지도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리라." 이것이 인간의 힘의 한계입니다.

하나님보다 강한 것은 없으며, 하나님보다 의지할 것은 없습니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대신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의 아버지!!
세상을 향하여 손을 놓고, 놓은 손으로 주님을 붙들고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방법으로 지혜로 이 세상을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사야 19:16-20:6

1.
16 그 날에 애굽이 부녀와 같을 것이라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께서 흔드시는 손이 그들 위에 흔들림으로 말미암아 떨며 두려워할 것이며
17 유다의 땅은 애굽의 두려움이 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애굽에 대하여 정하신 계획으로 말미암음이라 그 소문을 듣는 자마다 떨리라

18장 구스에 이어, 19장은 애굽에 대한 심판입니다. 16절 그 날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애굽은 여자와 같아질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하여 두려워하며 떨게 될 것입니다. 17절 그날에 애굽은 남 유다를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으로 인한 것입니다. 

사실 애굽은 유다보다 강한 나라입니다. 두려워 떨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애굽은 유다를 두려워했으며 떨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배경이 되면 세상이 두러워떠는 것입니다. 내가 강해서가 아니라 내가 믿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우리는 강한 군대가 되고 용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함께 하신다면 아무리 작은 나라라도 힘 없는 사람이라도 세상이 두려워 떠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38절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2.
18 그 날에 애굽 땅에 가나안 방언을 말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는 다섯 성읍이 있을 것이며 그 중 하나를 멸망의 성읍이라 칭하리라
19 그 날에 애굽 땅 중앙에는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이 있겠고 그 변경에는 여호와를 위하여 기둥이 있을 것이요
20 이것이 애굽 땅에서 만군의 여호와를 위하여 징조와 증거가 되리니 이는 그들이 그 압박하는 자들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부르짖겠고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 한 구원자이자 보호자를 보내사 그들을 건지실 것임이라
21 여호와께서 자기를 애굽에 알게 하시리니 그 날에 애굽이 여호와를 알고 제물과 예물을 그에게 드리고 경배할 것이요 여호와께 서원하고 그대로 행하리라
22 여호와께서 애굽을 치실지라도 치시고는 고치실 것이므로 그들이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들의 간구함을 들으시고 그들을 고쳐 주시리라
23 그 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24 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 및 앗수르와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25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 주시며 이르시되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라

그날 하나님의 심판이 애굽땅 위에 임하게 되는 날입니다. 애굽이 그날을 경험하게 된 후에 18절 애굽땅안에서 믿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다섯 성읍-작은 변화가 생기게 됩니다. 19.21절 하나님으로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경배하게 될 것입니다. 22절 하나님은 애굽을 고치시고 그들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것입니다. 23-24절 그날에 애굽과 앗수르와 이스라엘이 하나가 되어 더 이상 전쟁하지 않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복이 되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완벽한 회복의 축복입니다. 

그 날 심판의 날은 회복과 회개의 날입니다. 모든 이방인들의 교만이 무너지고 깨어지는 날입니다. 그 날의 심판은 축복이며 은혜의 날임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징계에는 회복의 목적이 있습니다. 22절 "치시고는 고치실 것이라." 하나님께서 나를 책망하시고 징계하실 때 그것이 나를 버리셨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나를 다시 하나님께로 돌이키시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의 손은 치시는 손인 동시에 고치시는 손입니다. 치심이 끝이 아닙니다. 돌아옴이 목적입니다. 심판이 끝이 아닙니다. 회복이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흔드시는 이유는 우리를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하나님만 붙들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3.
20:1 앗수르의 사르곤 왕이 다르단을 아스돗으로 보내매 그가 와서 아스돗을 쳐서 취하던 해니라
2 그 때에 여호와께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갈지어다 네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네 발에서 신을 벗을지니라 하시매 그가 그대로 하여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니라
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종 이사야가 삼 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며 애굽과 구스에 대하여 징조와 예표가 되었느니라
4 이와 같이 애굽의 포로와 구스의 사로잡힌 자가 앗수르 왕에게 끌려갈 때에 젊은 자나 늙은 자가 다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볼기까지 드러내어 애굽의 수치를 보이리니
5 그들이 바라던 구스와 자랑하던 애굽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놀라고 부끄러워할 것이라
6 그 날에 이 해변 주민이 말하기를 우리가 믿던 나라 곧 우리가 앗수르 왕에게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달려가서 도움을 구하던 나라가 이같이 되었은즉 우리가 어찌 능히 피하리요 하리라

20장은 분위기가 다시 바뀝니다. 앗수르 왕 사르곤이 아스돗을 공격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특별한 행동을 명령하십니다. 2-3절 "가서 네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네 발에서 신을 벗을지니라." 이사야는 3년 동안 벗은 몸과 맨발로 다니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개인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살아 있는 표징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4절 애굽과 구스가 앗수르에게 패하고 포로가 되는 사건을 이사야의 행동으로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5-6절 우리가 바라던 나라, 우리가 믿던 나라, 우리가 의지하던 나라가 무너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의지하는 것을 무너뜨리시고, 결국 하나님 자신을 의지하게 하도록 하십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내가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이 오늘의 애굽이 될 수 있습니다. 돈이 나를 지켜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돈이 애굽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도움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한다면 사람이 애굽이 될 수 있습니다. 권력과 지위를 의지한다면 그것이 애굽이 될 수 있습니다. 내 경험과 능력을 하나님보다 신뢰한다면 그것이 애굽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 자체가 아닙니다. 하나님보다 그것을 더 의지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 나는 누구를 의지하고 믿고 살아가고 있는가? 이 질문의 답이 하나님이길 소망합니다.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날을 대비하고 준비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사야 21:1-17

1.
1 해변 광야에 관한 경고라 적병이 광야에서, 두려운 땅에서 네겝 회오리바람 같이 몰려왔도다
2 혹독한 묵시가 내게 보였도다 속이는 자는 속이고 약탈하는 자는 약탈하도다 엘람이여 올라가고 메대여 에워싸라 그의 모든 탄식을 내가 그치게 하였노라 하시도다
3 이러므로 나의 요통이 심하여 해산이 임박한 여인의 고통 같은 고통이 나를 엄습하였으므로 내가 괴로워서 듣지 못하며 놀라서 보지 못하도다
4 내 마음이 어지럽고 두려움이 나를 놀라게 하며 희망의 서광이 변하여 내게 떨림이 되도다
5 그들이 식탁을 베풀고 파수꾼을 세우고 먹고 마시도다 너희 고관들아 일어나 방패에 기름을 바를지어다
6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가서 파수꾼을 세우고 그가 보는 것을 보고하게 하되
7 마병대가 쌍쌍이 오는 것과 나귀 떼와 낙타 떼를 보거든 귀 기울여 자세히 들으라 하셨더니
8 파수꾼이 사자 같이 부르짖기를 주여 내가 낮에 늘 망대에 서 있었고 밤이 새도록 파수하는 곳에 있었더니
9 보소서 마병대가 쌍쌍이 오나이다 하니 그가 대답하여 이르시되 함락되었도다 함락되었도다 바벨론이여 그들이 조각한 신상들이 다 부서져 땅에 떨어졌도다 하시도다
10 내가 짓밟은 너여, 내가 타작한 너여, 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께 들은 대로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바벨론 멸망에 대한 말씀입니다. 1절 해변 광야는 유프라테스 강을 중심으로 번성했던 바벨론을 의미합니다. 2절 하나님은 바벨론을 향하여 ‘혹독한 묵시’를 보여 주십니다. 바벨론은 다른 나라를 속이고 약탈하면서 강대국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엘람+메대+바사와 같은 국가들에 의해서 공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3-4절 이사야는 바벨론이 멸망당하는 환상을 보고 엄청난 두려움과 아픔을 느꼈습니다. 5절 그러나 바벨론은 장차 당할 환난과 멸망을 알지 못하고 식탁을 베풀고 먹고 마시며 잔치를 벌이고 있습니다. 6-9절 하나님은 이사야로 파수꾼을 세우십니다. 6절 적들이 오는 가를 살피게 하시고, 7절 군대의 움직임을 지켜보게 하십니다. 8절 밤 낮으로 지키게 하십니다. 9절 결국 바베론은 함락당하고 멸망할 것이며 10저 이 사실을 이사야는 그대로 증거하며 전하게 됩니다.

* 바벨론은 자신이 행한 대로 보응을 받아 멸망 당하게 됩니다. 인생은 뿌린 씨앗의 열매를 먹게 됩니다. * 어리석은 자는 자신이 멸망을 당하는 날까지 자신의 운명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육대대로 살아가 육신대로 망하게 됩니다. * 하나님은 파수꾼 선지자로 통하여 멸망과 심판을 예고하시고 경계하십니다.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2.
11 두마에 관한 경고라 사람이 세일에서 나를 부르되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냐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냐
12 파수꾼이 이르되 아침이 오나니 밤도 오리라 네가 물으려거든 물으라 너희는 돌아올지니라 하더라

11절 두마(에돔)에 관한 경고입니다. 에돔의 사람이 파수꾼에게 질문하길 ‘밤이 언제 끝나는가?’ 거듭 질문합니다. 밤은 전쟁과 환난 고난의 시간입니다. 12절 이에 파수꾼이 대답하길 ‘아침이 오나니 밤도 오리라’ 대답합니다. 보통이라면 "밤이 끝나고 아침이 옵니다." 라고 대답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다릅니다. ‘아침이 온다. 그러나 다시 밤이 온다’ 즉, 잠시의 회복이나 평안이 있다고 해서 심판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라는 의미 말하고 있습니다. 에돔에게는 아직 심판의 밤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니 "너희는 돌아올지니라" 여기서 "돌아오다"는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영적 의미를 함께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심판의 소식을 들었다면 하나님께 돌아오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말씀하시는 목적은 단순히 사람을 겁주는 것이 아닙니다. 돌아오게 하기 위한 경고입니다.

이사야 21장 자체에서는 에돔의 구체적인 죄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에서 에돔은 교만과 형제에 대한 적대감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특히 오바댜서를 보면 에돔은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기뻐하고, 유다의 고난을 이용했습니다. 그래서 에돔의 심판은 단순히 한 나라의 정치적 몰락이 아니라, 교만하고 형제의 고난을 이용하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큰 성경적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① 심판의 때에는 하나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너희는 돌아올지니라." 이것이 가장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심판의 경고 → 회개 → 하나님께 돌아옴’ 이것이 선지자들의 메시지입니다. ② 밤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에도 밤이 있습니다. 그러나 밤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아침이 옵니다. ③ 아침만 기대하지 말고 하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아침이 오나니 밤도 오리라." 신앙은 좋은 환경만 기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침에도 하나님, 밤에도 하나님입니다.

3.
13 아라비아에 관한 경고라 드단 대상들이여 너희가 아라비아 수풀에서 유숙하리라
14 데마 땅의 주민들아 물을 가져다가 목마른 자에게 주고 떡을 가지고 도피하는 자를 영접하라
15 그들이 칼날을 피하며 뺀 칼과 당긴 활과 전쟁의 어려움에서 도망하였음이니라
16 주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품꾼의 정한 기한 같이 일 년 내에 게달의 영광이 다 쇠멸하리니
17 게달 자손 중 활 가진 용사의 남은 수가 적으리라 하시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아라비아에 대한 경고입니다. 13절 아라비아는 무역의 힘이 있었습니다. 드단의 대상(무역상)들이 있었습니다. 14절 경제적 힘이 있었습니다. 데마(아라비아의 지역)와 같은 오아시스가 있었습니다. 15절 군사적 힘이 있었습니다. 게달의 활 쏘는 용사들이 있었습니다. 16절 그러나 하나님께서 심판하시자 경제력도, 생존력도, 군사력도 무너집니다.

바벨론이 "무너졌도다." → 세계적인 제국도 무너집니다.
에돔 "아침이 오나니 밤도 오리라." → 심판의 밤을 피할 수 없습니다.
아라비아 "게달의 영광이 다 쇠멸하리니." → 경제적·군사적 영광도 사라집니다.

결국, 세상의 힘과 영광은 영원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17절이 결론처럼 중요합니다. "이는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셨음이니라." 성도의 소망은 나라의 힘이나 경제력이나 군사력에 있지 않고, 말씀하신 하나님께 있습니다.

사랑의 아버지!!
땅의 사라질 영광이 아닌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거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사야 22:1-25

1.
1 환상의 골짜기에 관한 경고라 네가 지붕에 올라감은 어찌함인고
2 소란하며 떠들던 성, 즐거워하던 고을이여 너의 죽임을 당한 자들은 칼에 죽은 것도 아니요 전쟁에 사망한 것도 아니라
3 너의 관원들도 다 함께 도망하였다가 활을 버리고 결박을 당하였고 너의 멀리 도망한 자들도 발견되어 다 함께 결박을 당하였도다
4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지어다 나는 슬피 통곡하겠노라 내 딸 백성이 패망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나를 위로하려고 힘쓰지 말지니라

22장은 예루살렘에 대한 경고입니다. 1절에 예루살렘을 환상의 골짜기라고 명하십니다. 이는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고 선지자들이 말씀을 선포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가 가장 많이 받는 도시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도시가 되고 말았습니다. 말씀이 임하지만 ‘이들은 지붕에 올라가’ 전쟁을 구경하고 바라보며 심각한 위기를 인식하지 못하는 영적인 무감각에 빠져 있습니다. 2절 오히려 떠들며 즐겁게 기뻐하고 있습니다. 무엇때문입니까? 8-11절 스스로 준비한 병기를 바라보며, 물을 저장하며, 성벽을 견고하게 함으로 나름대로 대비하고 준비하였다고 생각하는 까닭입니다. 즉 ‘우리는 준비했으니 괜찮다’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3절에 지도자가 등장합니다. 그러니 지도자는 백성을 지켜 주지 못합니다. 도망하고 무기를 버리고 붙잡혀 포로가 될 것입니다. 4절 결국 이사야는 백성의 패망을 바라보며 슬피울며 통곡합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① 위기 자체보다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려움을 허락하실 때 우리는 먼저 문제의 해결만 찾기 쉽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 이 일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② 외적인 준비가 영적인 준비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은 성벽도 있었고 무기도 있었고 물 저장 시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크고, 재정이 있고, 조직이 있고, 프로그램이 많아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면 안전하지 않습니다. ③ 하나님의 사람은 죄를 보고 슬퍼해야 합니다. 이사야는 다른 사람들은 즐거워할 때 통곡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보고 계시는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사람은 세상이 웃을 때 함께 웃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슬퍼하시는 것을 보고 함께 슬퍼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④ 가장 무서운 것은 심판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는 것입니다. 22장 전체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회개입니다. 1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백성에게 울며 애통하며 머리를 밀고 굵은 베를 띠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오히려 "먹고 마시자" 라고 합니다.

2.
5 환상의 골짜기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이르는 소란과 밟힘과 혼란의 날이여 성벽의 무너뜨림과 산악에 사무쳐 부르짖는 소리로다
6 엘람 사람은 화살통을 메었고 병거 탄 자와 마병이 함께 하였고 기르 사람은 방패를 드러냈으니
7 병거는 네 아름다운 골짜기에 가득하였고 마병은 성문에 정렬되었도다
8 그가 유다에게 덮였던 것을 벗기매 그 날에야 네가 수풀 곳간의 병기를 바라보았고
9 너희가 다윗 성의 무너진 곳이 많은 것도 보며 너희가 아랫못의 물도 모으며
10 또 예루살렘의 가옥을 계수하며 그 가옥을 헐어 성벽을 견고하게도 하며
11 너희가 또 옛 못의 물을 위하여 두 성벽 사이에 저수지를 만들었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이를 행하신 이를 앙망하지 아니하였고 이 일을 옛적부터 경영하신 이를 공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 

5절 전쟁으로 인해 예루살렘 전체가 혼란에 빠지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분요, 밟힘, 혼란, 성벽을 헐음, 부르짖음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단순히 우연히 발생한 전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오는"이라고 말씀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권자이십니다. 적군이 공격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심판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6절 엘람과 기르는 외국 세력입니다. 이들이 군사력을 가지고 예루살렘을 압박해 들어옵니다. 8절 이들이 유다의 덮였던 것을 벗기매 즉 전쟁이 실제 임하게 될 때입니다. 9-11a절 남 유다가 준비했던 모든 것들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11b절 이는 하나님을 앙망하고 공경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앙망하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을 한 번 쳐다본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의 문제는 이것입니다. 성벽은 바라보았지만 하나님은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저수지는 만들었지만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무기는 준비했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① 위기 때 무엇을 바라보는지가 믿음을 결정합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무기 → 성벽 → 물 → 저수지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어려움을 만나면 먼저 돈, 사람, 능력, 경험, 계획을 바라보기 쉽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 모든 것보다 먼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② 인간의 최선도 하나님을 떠나면 교만이 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준비는 상당히 지혜로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없이 이루어진 준비였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지혜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교만으로 변했습니다. ③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대책"보다 먼저 "회개"입니다. 1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먼저 울며 애통하며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들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군사 전략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 상태의 문제입니다.

3.
12 그 날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명령하사 통곡하며 애곡하며 머리 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라 하셨거늘
13 너희가 기뻐하며 즐거워하여 소를 죽이고 양을 잡아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하는도다
14 만군의 여호와께서 친히 내 귀에 들려 이르시되 진실로 이 죄악은 너희가 죽기까지 용서하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2절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것은 회개였습니다. "너희가 왜 이런 위기를 당하게 되었는지를 돌아보라." 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시기 전에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징계하실 때 그 목적은 단순히 사람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닙니다.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13절 그러나 백성이 선택한 것은? 기뻐하라 즐거워하라 먹어라 마셔라입니다. 왜 이렇게 반응했을까요? 그들은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이 아니라, "어차피 내일 죽을 것인데 오늘 마음껏 즐기자." 라는 허무주의적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들은 위기를 통해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고, 위기를 잊기 위해 쾌락을 선택했습니다. 14절 하나님께서 심판을 확정하십니다. 단순히 그들이 한 번 실수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의도적으로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12절에서 하나님께서 회개를 요구하셨습니다. 13절에서 백성은 그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14절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선언됩니다.

① 하나님께서 문제를 주실 때 먼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려움을 만나면 항상
"어떻게 해결하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사야 22장은 먼저 이렇게 질문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무엇을 깨닫게 하시는가?" 문제 해결보다 먼저 영적 상태를 점검해야 합니다. ② 가장 위험한 상태는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죄를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위기를 보고도 자신들의 죄를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시는데도 "먹고 마시자"라고 합니다. 이것이 영적 무감각입니다. ③ 쾌락은 회개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마음속의 불안과 죄책감을 잊기 위해 쾌락을 찾습니다. 그러나 먹는 것으로 영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마시는 것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즐거움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없습니다. 영혼의 문제는 회개와 하나님께로 돌아감으로 해결됩니다.

사랑의 아버지!!
문제 가운데 돌이켜 회개하게 하여 주옵소서. 문제가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사야 23:1-18

1.
1 두로에 관한 경고라 다시스의 배들아 너희는 슬피 부르짖을지어다 두로가 황무하여 집이 없고 들어갈 곳도 없음이요 이 소식이 깃딤 땅에서부터 그들에게 전파되었음이라
2 바다에 왕래하는 시돈 상인들로 말미암아 부요하게 된 너희 해변 주민들아 잠잠하라
3 시홀의 곡식 곧 나일의 추수를 큰 물로 수송하여 들였으니 열국의 시장이 되었도다
4 시돈이여 너는 부끄러워할지어다 대저 바다 곧 바다의 요새가 말하기를 나는 산고를 겪지 못하였으며 출산하지 못하였으며 청년들을 양육하지도 못하였으며 처녀들을 생육하지도 못하였다 하였음이라
5 그 소식이 애굽에 이르면 그들이 두로의 소식으로 말미암아 고통 받으리로다
6 너희는 다시스로 건너갈지어다 해변 주민아 너희는 슬피 부르짖을지어다
7 이것이 옛날에 건설된 너희 희락의 성 곧 그 백성이 자기 발로 먼 지방까지 가서 머물던 성읍이냐

23장 마지막 두로와 시돈에 대한 심판입니다. 두로와 시돈은 지중해 해상무역의 중심지입니다. 두로와 시돈은 해상무역을 통하여 막강한 경제적인 부를 이루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경제적인 부와 번영에 하나님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두로와 시돈을 심판하시는데 이유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교만 때문입니다.

1-5절 두로와 시돈에 대한 심판의 내용이며, 6절 멸망된 두로와 시돈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자기 도시를 떠나 피난하게 되는 상황입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대상에서 이제는 도장자의 신세가 된 것입니다. 7절 이들의 번영과 번성은 옛날일이 되었습니다. 번영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오늘의 부요가 내일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① 인간이 자랑하는 경제력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두로는 강했습니다. 군사력 때문만이 아니라 돈과 무역으로 강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손을 대시면 그것도 무너집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네가 의지하는 것이 무엇인가?” 돈입니까? 사업입니까? 부동산입니까? 사람입니까? 사회적 지위입니까? 두로의 문제는 부유했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보다 자신의 부를 의지했다는 것입니다. ② “희락의 성읍”도 하나님 없이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두로는 즐거움이 넘쳤습니다. 그러나 그 즐거움은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흔드셨습니다. 세상이 주는 즐거움은 환경이 바뀌면 사라질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환경을 넘어섭니다. ③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의지하는 것을 흔드십니다. 두로에게는 배와 항구와 무역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항구를 닫으시면 배도 소용없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입니다. 배를 준비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사업을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재산을 관리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미래를 준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을 대신해서는 안 됩니다.

2.
8 면류관을 씌우던 자요 그 상인들은 고관들이요 그 무역상들은 세상에 존귀한 자들이었던 두로에 대하여 누가 이 일을 정하였느냐
9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것을 정하신 것이라 모든 누리던 영화를 욕되게 하시며 세상의 모든 교만하던 자가 멸시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10 딸 다시스여 나일 같이 너희 땅에 넘칠지어다 너를 속박함이 다시는 없으리라
11 여호와께서 바다 위에 그의 손을 펴사 열방을 흔드시며 여호와께서 가나안에 대하여 명령을 내려 그 견고한 성들을 무너뜨리게 하시고
12 이르시되 너 학대 받은 처녀 딸 시돈아 네게 다시는 희락이 없으리니 일어나 깃딤으로 건너가라 거기에서도 네가 평안을 얻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13 갈대아 사람의 땅을 보라 그 백성이 없어졌나니 곧 앗수르 사람이 그 곳을 들짐승이 사는 곳이 되게 하였으되 그들이 망대를 세우고 궁전을 헐어 황무하게 하였느니라
14 다시스의 배들아 너희는 슬피 부르짖으라 너희의 견고한 성이 파괴되었느니라

8-14절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왜 하나님께서 두로를 심판하시는가?”, 그리고 누가 그 심판을 계획하시는가?를 보여줍니다. 핵심은 두로의 교만입니다.

8절 누가 이 일을 계획하였느냐? 9절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 것을 정한 것이라. 두로의 몰락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권자이십니다. 강대국이 등장하고 사라지는 것, 도시가 번성하고 쇠퇴하는 것까지도 모두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습니다.

① 하나님은 교만을 반드시 다루십니다. 9절이 핵심입니다. “모든 교만한 영광을 욕되게 하시며”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은 단순히 사람이 많이 가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 내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부자가 되는 것이 죄가 아닙니다. 성공하는 것이 죄가 아닙니다. 영향력을 갖는 것이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내 힘으로 이루었다.” “나는 하나님이 없어도 된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두로의 교만과 같은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② 하나님께서 우리의 “강한 부분”을 흔드실 수 있습니다. 두로에게 가장 강한 것은 바다와 무역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부분을 흔드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가장 의지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의지하지 않도록 때로는 우리의 의지처를 흔드십니다. ③ 세상의 영광은 일시적입니다. 두로는 당시 세계적인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그 도시가 무너질 것을 선포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기업도, 경제도, 권력도, 명예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의 영광에 인생의 소망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3.
15 그 날부터 두로가 한 왕의 연한 같이 칠십 년 동안 잊어버린 바 되었다가 칠십 년이 찬 후에 두로는 기생의 노래 같이 될 것이라
16 잊어버린 바 되었던 너 음녀여 수금을 가지고 성읍에 두루 다니며 기묘한 곡조로 많은 노래를 불러서 너를 다시 기억하게 하라 하였느니라
17 칠십 년이 찬 후에 여호와께서 두로를 돌보시리니 그가 다시 값을 받고 지면에 있는 열방과 음란을 행할 것이며
18 그 무역한 것과 이익을 거룩히 여호와께 돌리고 간직하거나 쌓아 두지 아니하리니 그 무역한 것이 여호와 앞에 사는 자가 배불리 먹을 양식, 잘 입을 옷감이 되리라

15-17절 두로가 70년 동안 쇠퇴한 후 다시 회복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회복되었다”는 사실보다 “회복된 후 무엇을 하는가”입니다. 15-17절은 회복의 과정을, 18절은 그 회복된 물질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① 하나님의 심판에는 끝이 있습니다. 두로는 70년 동안 고난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자 다시 회복됩니다. 이것은 성도에게도 큰 위로가 됩니다. 때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낮추실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사업이 흔들릴 수도 있고, 사람과의 관계가 무너질 수도 있고, 내가 의지하던 것이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하나님의 최종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는 회복의 때도 있습니다. ② 그러나 회복 자체가 목표는 아닙니다.
두로가 다시 부유해졌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17절을 보면 다시 세상과 거래합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회복시키신 후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물질을 다시 얻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회복된 물질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18절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③ 하나님은 우리가 실패한 자리에서도 다시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두로는 완전히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시 돌보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소망이 됩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폐기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돌이키게 하기 위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의 아버지!!
회복의 기회를 무시하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고, 하나님으로 변함없이 살아가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사야 24:1-13

1.
1 보라 여호와께서 땅을 공허하게 하시며 황폐하게 하시며 지면을 뒤집어엎으시고 그 주민을 흩으시리니
2 백성과 제사장이 같을 것이며 종과 상전이 같을 것이며 여종과 여주인이 같을 것이며 사는 자와 파는 자가 같을 것이며 빌려 주는 자와 빌리는 자가 같을 것이며 이자를 받는 자와 이자를 내는 자가 같을 것이라
3 땅이 온전히 공허하게 되고 온전히 황무하게 되리라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하셨느니라

13-23절로 열방에 대한 심판을 넘어서, 24장은 온 땅의 심판입니다. 그래서 24-27장을 이사야의 묵시록이라고 합니다. 

1절 여호와께서 땅을 뒤집어 엎으십니다. 본절 1절은 마치 창세기 1:2절을 연상시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창세기 1:2절 혼돈과 공허의 상태로 다시 돌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창조된 세계가 죄로 인하여 혼돈과 황폐의 상태로 돌아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질서를 인간의 죄가 무너뜨렸고, 하나님께서 심판을 통해 그 죄악된 질서를 뒤엎으시는 것입니다. 2절 여섯 가지 관계가 등장합니다. 백성/제사장, 종/상전, 여종/여주인, 사는자/파는자, 빌려 주는 자/빌리는자, 채주/빛진자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상하 갑을 관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앞에는 모두가 같을 것이라 동일관계가 됩니다. 하나님앞에서는 모두가 심판의 대상일 뿐입니다. 3절 때문에 그 심판 앞에서 ‘땅이 온전히 공허하고’ ‘온전히 황무합니다’ 온전히는 완전한 심판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것을 말씀하셨습니다. 

① 세상의 지위가 심판을 피하게 하지 못합니다.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지도자도, 평범한 사람도 제사장도, 백성도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지할 것은 신분이 아니라 그리스도입니다. ②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심판은 반드시 옵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하셨느니라.” 성도는 세상의 상황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③ 지금은 회개할 때입니다. 24장에서는 심판이 시작되지만, 25장에서는 놀랍게도 구원과 잔치가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이사야의 심판 메시지는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심판 → 정결 → 구원 → 하나님 나라의 완성 이라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2.
4 땅이 슬퍼하고 쇠잔하며 세계가 쇠약하고 쇠잔하며 세상 백성 중에 높은 자가 쇠약하며
5 땅이 또한 그 주민 아래서 더럽게 되었으니 이는 그들이 율법을 범하며 율례를 어기며 영원한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6 그러므로 저주가 땅을 삼켰고 그 중에 사는 자들이 정죄함을 당하였고 땅의 주민이 불타서 남은 자가 적도다 

4–6절은 1–3절에서 선포한 온 땅에 대한 하나님 심판의 이유입니다. 4절 하나님의 심판은 슬픔과 쇠잔과 쇠약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높은 자라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낮아집니다. 사람은 세상에서 높아지는 것을 성공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얼마나 높으냐보다 얼마나 의롭게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믿음입니다. 5절 심판의 이유입니다. 왜 땅이 심판받습니까? 세 가지 죄 때문입니다. ① 율법을 범했다-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습니다. ② 율례를 어겼다-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를 무시했습니다. ③ 영원한 언약을 깨뜨렸다-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렸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문제는 단순한 사회적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진 것이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6절 그러므로 ‘죄 → 저주 → 심판’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심판 가운데 남은 자입니다. 명맥을 잊고 믿음을 계승한 남은 자는 회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3.
7 새 포도즙이 슬퍼하고 포도나무가 쇠잔하며 마음이 즐겁던 자가 다 탄식하며
8 소고 치는 기쁨이 그치고 즐거워하는 자의 소리가 끊어지고 수금 타는 기쁨이 그쳤으며
9 노래하면서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고 독주는 그 마시는 자에게 쓰게 될 것이라
10 약탈을 당한 성읍이 허물어지고 집마다 닫혀서 들어가는 자가 없으며
11 포도주가 없으므로 거리에서 부르짖으며 모든 즐거움이 사라졌으며 땅의 기쁨이 소멸되었도다
12 성읍이 황무하고 성문이 파괴되었느니라
13 세계 민족 중에 이러한 일이 있으리니 곧 감람나무를 흔듦 같고 포도를 거둔 후에 그 남은 것을 주움 같을 것이니라 

심판의 결과 땅에 기쁨과 인간 사회의 모든 질서가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7절 포도주와 기쁨이 사라집니다. 포도주는 고대 사회에서 기쁨과 풍요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심판이 임하자 ‘포도즙이 슬퍼하고 → 포도나무가 쇠잔하고 → 사람의 마음에서 기쁨이 사라’집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기쁨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돈과 음식과 문화와 오락으로 기쁨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기반을 흔드시면 인간의 기쁨도 사라질 수 있습니다. 8절 음악과 즐거움이 사라지고, 9절 술도 더 이상 즐거움을 주지 못합니다. 10절 약탈과 황폐함 11절 모든 즐거움이 사라지고 12절 파괴될 것입니다. 13절 심판의 때에 이런 일이 세계 민족 중에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심판 후에 살아남은 자가 있을 것입니다. 온 세상이 흔들리고 심판받지만 모든 것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남은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사야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남은 자 사상”과 연결됩니다.

사랑의 아버지!!
심판중에 은혜를 징계 가운데 긍휼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주님이 남겨두신 한 사람 남은 자가 되어 하나님 나라를 이루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사야 24:14-23

1.
14 무리가 소리를 높여 부를 것이며 여호와의 위엄으로 말미암아 바다에서부터 크게 외치리니
15 그러므로 너희가 동방에서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며 바다 모든 섬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것이라
16 땅 끝에서부터 노래하는 소리가 우리에게 들리기를 의로우신 이에게 영광을 돌리세 하도다 그러나 나는 이르기를 나는 쇠잔하였고 나는 쇠잔하였으니 내게 화가 있도다 배신자들은 배신하고 배신자들이 크게 배신하였도다

14–23은 하나님의 심판과 그 심판 이후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함께 보여주는 본문입니다. 앞부분 1–13절이 온 세상을 향한 심판을 묘사했다면, 14–23절은 남은 자들의 찬양, 심판의 철저함, 그리고 여호와의 최종 통치를 강조합니다.

14–16절은 남은 자들의 찬양입니다. "무리가 소리를 높여 여호와의 위엄을 찬양한다." 심판 가운데서도 살아남은 자들은 하나님의 위엄과 의로우심을 찬양합니다. 서쪽(바다)과 동쪽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은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상에 알려질 것을 의미합니다. 16절의 "의로우신 이에게 영광"은 하나님이 공의로운 심판자이심을 인정하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곧바로 "나는 쇠잔하였도다!" 라고 탄식합니다. 이는 아직 세상에 배신과 악이 계속되고 있음을 보며 느끼는 슬픔입니다.

심판 중에도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환경이 좋아서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찬양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성도의 찬양은 환경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에 대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상황은 무너져도 하나님은 무너지지 않으십니다.

2.
17 땅의 주민아 두려움과 함정과 올무가 네게 이르렀나니
18 두려운 소리로 말미암아 도망하는 자는 함정에 빠지겠고 함정 속에서 올라오는 자는 올무에 걸리리니 이는 위에 있는 문이 열리고 땅의 기초가 진동함이라
19 땅이 깨지고 깨지며 땅이 갈라지고 갈라지며 땅이 흔들리고 흔들리며
20 땅이 취한 자 같이 비틀비틀하며 원두막 같이 흔들리며 그 위의 죄악이 중하므로 떨어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리라

피할 수 없는 심판입니다. 이 부분은 매우 강렬한 심판의 이미지입니다. 세 가지 표현이 반복됩니다. ‘공포 함정 올무’ 이는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나타냅니다. 또한 땅이 갈라지고 흔들리며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고 초막처럼 흔들립니다. 이는 죄 때문에 창조 질서 자체가 흔들리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20절에서 "그 죄악이 중하므로" 땅이 무너지는 원인이 인간의 죄라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죄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가져옵니다. 우리는 죄를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은 죄를 “그 정도는 괜찮다.” 라고 말하지만 성경은 죄를 하나님을 대적하는 심각한 문제로 봅니다. 따라서 성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공이나 부요보다도 죄와 타협하지 않는 것입니다.

3.
21 그 날에 여호와께서 높은 데에서 높은 군대를 벌하시며 땅에서 땅의 왕들을 벌하시리니
22 그들이 죄수가 깊은 옥에 모임 같이 모이게 되고 옥에 갇혔다가 여러 날 후에 형벌을 받을 것이라
23 그 때에 달이 수치를 당하고 해가 부끄러워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고 그 장로들 앞에서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라

21-22절 하나님은 높은 데의 군대(하늘의 권세나 영적 세력으로 이해되기도 함), 땅의 왕들 모두를 심판하십니다. 그들은 감옥에 갇힌 죄수처럼 모여 있다가 결국 형벌을 받습니다. 이 장면은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권세도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23절 하나님의 최종 통치입니다. 마지막 절은 소망으로 끝납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고" 심판의 목적은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하나님의 왕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달과 해조차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는 빛을 잃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피조물의 모든 영광보다 크다는 뜻입니다. 장로들 앞에서 영광을 나타내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의 통치를 직접 목격하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권력이나 돈이나 사람을 지나치게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의 권세는 일시적이고 하나님의 왕권은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세상의 왕은 사라집니다. 세상의 영광은 사라집니다. 해와 달도 그 빛을 잃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은 영원합니다. 

사랑의 아버지!!
영원한 왕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며 찬양합니다. 세상의 모든 영광은 무너져도 하나님의 왕권은 영원하며, 심판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분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사야 25:1-12

1.
1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주는 기사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
2 주께서 성읍을 돌무더기로 만드시며 견고한 성읍을 황폐하게 하시며 외인의 궁성을 성읍이 되지 못하게 하사 영원히 건설되지 못하게 하셨으므로
3 강한 민족이 주를 영화롭게 하며 포학한 나라들의 성읍이 주를 경외하리이다
4 주는 포학자의 기세가 성벽을 치는 폭풍과 같을 때에 빈궁한 자의 요새이시며 환난 당한 가난한 자의 요새이시며 폭풍 중의 피난처시며 폭양을 피하는 그늘이 되셨사오니
5 마른 땅에 폭양을 제함 같이 주께서 이방인의 소란을 그치게 하시며 폭양을 구름으로 가림 같이 포학한 자의 노래를 낮추시리이다

13-23장 열방을 향한 심판과 24장 범세계를 향한 종말론적 심판을 말씀하신 후에 25장 하나님의 회복 구원과 승리를 찬양합니다.  

1절 여호와 주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정하신 뜻, 성실함, 진실함으로 약속하신 모든 언약을 이루어 성취하십니다. 우리 눈에는 세상이 혼란스럽고 하나님의 일이 늦어지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자신이 정하신 뜻을 이루고 계십니다. 그래서 믿음은 환경을 보고 하나님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고 환경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2-3절 하나님은 교만한 세상의 성을 무너지게 하십니다. 군사력, 경제력, 정치적 권력, 인간의 지혜, 문명, 자신의 능력 모든 성읍이 하나님앞에서 낮아지고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4-5절 하나님은 가난한 자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세상의 각종 폭풍 가운데 요세가 되어주십니다. 세상은 강한 자를 의지하지만 하나님은 약한 자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그래서 성도는 세상의 힘이 부족하다고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①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1절의 핵심입니다.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이루셨음이라”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지금 상황이 하나님의 약속과 반대로 가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의 계획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② 세상의 성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아야 합니다. 인간이 아무리 견고한 성을 만들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무너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피하는 자는 폭풍 속에서도 보호받습니다. 우리의 진짜 안전은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2.
6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
7 또 이 산에서 모든 민족의 얼굴을 가린 가리개와 열방 위에 덮인 덮개를 제하시며
8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잔치입니다. 6절 여기서 잔치는 단순히 먹고 마시는 식사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잔치는 자주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최고의 잔치를 준비하십니다. “기름진 것”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 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는 구원이 풍성하고 완전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7절 가리어진 것이 제거됩니다. 사람의 눈을 가리고 있던 것이 제거됩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죄와 무지로 인해 하나님을 보지 못하던 상태가 제거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4에서 바울은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때에는 우리의 눈을 열어 하나님을 보게 하십니다. 

8절 죽음을 영원히 멸하십니다.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여기에는 복음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사망 → 생명, 눈물 → 위로, 수치 → 영광, 고통 → 구원 으로 바뀝니다. 이 말씀은 요한계시록 21:4와 연결됩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이사야가 바라본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완성입니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이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최종적인 소망은 이 세상에서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음까지 정복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입니다.

3.
9 그 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의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할 것이며
10 여호와의 손이 이 산에 나타나시리니 모압이 거름물 속에서 초개가 밟힘 같이 자기 처소에서 밟힐 것인즉
11 그가 헤엄치는 자가 헤엄치려고 손을 폄 같이 그 속에서 그의 손을 펼 것이나 여호와께서 그의 교만으로 인하여 그 손이 능숙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누르실 것이라
12 네 성벽의 높은 요새를 헐어 땅에 내리시되 진토에 미치게 하시리라

9절 우리의 하나님을 기다렸으니, 믿음은 기다림을 포함합니다. 하나님께서 즉시 일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일 때도 기다립니다. 왜 기다릴 수 있습니까?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하나님의 성품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이것은 단순한 지식이 아닙니다. 관계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계십니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10-12절 모압이 등장합니다. 모압은 교만을 대표하는 나라입니다. 교만은 무너지게 됩니다. 교만한 자기 가랑은 무너지고 하나님의 손이 이루실 것입니다. 인간의 능숙한 손보다 하나님의 손이 강합니다. 인간은 자기 능력을 자랑합니다. “내가 했다.” “내 힘으로 이루었다.” “내가 지켜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낮추십니다.

이사야 25:1-12절은 세상의 교만한 성은 무너지고 하나님의 구원은 완성되므로, 성도는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끝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은 무너져도 하나님의 약속은 무너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오늘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끝까지 참고 기다리는 삶이 되길 소망합니다. 

사랑의 아버지!!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인내와 소망을 품고 주와 함께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사야 26:1-21

1.
1 그 날에 유다 땅에서 이 노래를 부르리라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구원을 성벽과 외벽으로 삼으시리로다
2 너희는 문들을 열고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나라가 들어오게 할지어다
3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4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신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
5 높은 데에 거주하는 자를 낮추시며 솟은 성을 헐어 땅에 엎으시되 진토에 미치게 하셨도다
6 발이 그것을 밟으리니 곧 빈궁한 자의 발과 곤핍한 자의 걸음이리로다

25장 하나님의 구원의 찬양에 이어서 26장은 구원받은 백성들의 믿음과 기도입니다. 26장은 단순히 개인적인 평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바라보며 현재를 살아가는 성도의 믿음을 보여줍니다.

본문 3절 완전한 평강은 하나님을 신뢰할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평강하고 평강하도록”은 히브리어로 “샬롬 샬롬”이라는 반복 표현입니다. 단순한 평안이 아니라 완전하고 온전한 평안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평안을 얻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환경이 좋아서 평안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가 없어서 평안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평안한 것입니다. 4절 사람, 경제, 건강, 권력, 환경도 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영원한 반석”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평안을 빼앗는 것은 문제가 아니라 때로는 문제를 하나님보다 크게 보는 것입니다. 믿음은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보다 하나님이 크시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2.
7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하게 하시도다
8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또 주를 기억하려고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
9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움이니이다
10 악인은 은총을 입을지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하며 정직한 자의 땅에서 불의를 행하고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 아니하는도다
11 여호와여 주의 손이 높이 들릴지라도 그들이 보지 아니하오나 백성을 위하시는 주의 열성을 보면 부끄러워할 것이라 불이 주의 대적들을 사르리이다

7-11절 의인과 악인의 길입니다. 의인은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이지만, 악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자입니다. 의인의 사모는 어두은 밤에 이뤄지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드러나는 것이 믿음이고 참 성도입니다. 반면 악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도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다고 반드시 믿음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받은 복보다 복을 주신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① 인생의 밤에도 하나님을 사모하시길 바랍니다.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밤은 하나님을 잊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 깊이 찾는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② 하나님의 응답이 늦어도 기다리십시오. 8절의 핵심은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입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이 일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기다림이 믿음입니다. ③ 하나님의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악인은 은총을 입으면서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을 돌아보며 “하나님, 이것이 은혜입니다.” 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④ 하나님의 손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일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손을 보지 못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환경만 보지 말고 그 환경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보게 하소서.”

3.
12 여호와여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평강을 베푸시오리니 주께서 우리의 모든 일도 우리를 위하여 이루심이니이다
13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여 주 외에 다른 주들이 우리를 관할하였사오나 우리는 주만 의지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14 그들은 죽었은즉 다시 살지 못하겠고 1)19사망하였은즉 일어나지 못할 것이니 이는 주께서 벌하여 그들을 멸하사 그들의 모든 기억을 없이하셨음이니이다
15 여호와여 주께서 이 나라를 더 크게 하셨고 이 나라를 더 크게 하셨나이다 스스로 영광을 얻으시고 이 땅의 모든 경계를 확장하셨나이다
16 여호와여 그들이 환난 중에 주를 앙모하였사오며 주의 징벌이 그들에게 임할 때에 그들이 간절히 주께 기도하였나이다
17 여호와여 잉태한 여인이 산기가 임박하여 산고를 겪으며 부르짖음 같이 우리가 주 앞에서 그와 같으니이다
18 우리가 잉태하고 산고를 당하였을지라도 바람을 낳은 것 같아서 땅에 구원을 베풀지 못하였고 세계의 거민을 출산하지 못하였나이다
19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

하나님을 향한 2가지 소망입니다. 먼저 13절 이스라엘은 하나님 외에 다른 주들을 섬겼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스라엘은 앗수르와 바벨론 같은 강대국의 지배를 경험했고, 영적으로는 우상과 세상의 힘을 의지했습니다. 그런데 13절에서 다시 고백합니다. “우리가 주만 의지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이것이 회복입니다. “주님 외에는 없습니다.” 주님만을 섬기겠다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19절 부활소망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티끌”은 인간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깨어나라.” 그리고 “노래하라.” 죽음의 장소가 찬양의 장소로 바뀝니다. 이것이 부활의 소망입니다.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요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 이슬은 메마른 땅에 생명을 줍니다. 하나님께서 죽음의 땅에 생명을 주시는 모습을 시적으로 표현합니다. 완전히 죽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곳에서도 하나님은 생명을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에스겔 37장의 마른 뼈와도 연결해서 묵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죽은 것도 끝이 아닙니다.

이사야 26:19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지만 사망에 머물지 않으셨습니다.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2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그러므로 성도의 소망은 단순히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 아닙니다. 성도의 소망은 더 큽니다. “죽어도 다시 산다.” 이것이 기독교의 부활 신앙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인생의 밤을 지나서 그날, 주님의 날에 주님만을 영원히 소망하며, 부활의 신앙으로 굳건하게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사야 27:1-13

1.
1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2 그 날에 너희는 아름다운 포도원을 두고 노래를 부를지어다
3 나 여호와는 포도원지기가 됨이여 때때로 물을 주며 밤낮으로 간수하여 아무든지 이를 해치지 못하게 하리로다
4 나는 포도원에 대하여 노함이 없나니 찔레와 가시가 나를 대적하여 싸운다 하자 내가 그것을 밟고 모아 불사르리라
5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 힘을 의지하고 나와 화친하며 나와 화친할 것이니라
6 후일에는 야곱의 뿌리가 박히며 이스라엘의 움이 돋고 꽃이 필 것이라 그들이 그 결실로 지면을 채우리로다

이사야 27장은 26장의 “26:19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라는 부활과 회복의 약속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27:2에서 다시 “아름다운 포도원”이 등장합니다. 5장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심으신 포도원이었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여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27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다시 포도원을 돌보시고 지키십니다. 따라서 27장은 “심판받은 포도원이 다시 하나님의 포도원이 되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1절에서 먼저 리워야단(악의 세력)을 물리치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질서를 파괴하는 모든 악의 세력을 최종적으로 제압하십니다. 2절 이후 하나님은 5장의 포도원 부패하고 타락한 포도원을 새롭게 꾸미시고 아름답게 하십니다. 3절 직접 포도원을 가꾸시고 보호하십니다. 4-5절 하나님은 분노를 거두시고 화친을 통하여 관계적 회복을 이루십니다. 6절 그 결과 ‘뿌리 → 움이 돋음 → 꽃 → 열매’입니다. “그들이 그 결실로 지면에 채우리로다.” 회복은 단순히 살아남는 것이 아닙니다.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아남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열매 맺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① 하나님은 무너진 인생을 다시 포도원으로 만드십니다. 우리의 과거에 실패와 죄가 있었다고 해서 그것이 마지막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심판 이후에도 회복의 길을 준비하십니다. ② 하나님이 돌보시는 포도원은 다시 열매를 맺습니다. “밤낮으로 간수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는 목적은 단순히 편안하게 살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열매 맺는 삶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2.
7 주께서 그 백성을 치셨던들 그 백성을 친 자들을 치심과 같았겠으며 백성이 죽임을 당하였던들 백성을 죽인 자가 죽임을 당함과 같았겠느냐
8 주께서 백성을 적당하게 견책하사 쫓아내실 때에 동풍 부는 날에 폭풍으로 그들을 옮기셨느니라
9 야곱의 불의가 속함을 얻으며 그의 죄 없이함을 받을 결과는 이로 말미암나니 곧 그가 제단의 모든 돌을 부서진 횟돌 같게 하며 아세라와 태양상이 다시 서지 못하게 함에 있는 것이라

징계의 목적은 죄를 제거하여 정화하는 것입니다. 7절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징계하시지만 이방만족을 심판하심과 같이 하지 않으시며 8절 자기 백성을 적당히 견책하사 9절 모든 불의를 속하여 씻어 정결케 하십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버림이 아니라 정결하게 하시는 과정입니다. 7-9절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를 바라보는 시각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고치기 위해 때로는 아픔을 허락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려움 가운데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주님, 이 일을 통해 내 안에서 제거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은 징계와 고난을 통하여 새 포도원처럼 우리를 거룩하고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3.
10 대저 견고한 성읍은 적막하고 거처가 황무하며 버림 받아 광야와 같은즉 송아지가 거기에서 먹고 거기에 누우며 그 나무 가지를 먹어 없이하리라
11 가지가 마르면 꺾이나니 여인들이 와서 그것을 불사를 것이라 백성이 지각이 없으므로 그들을 지으신 이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며 그들을 조성하신 이가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시리라
12 너희 이스라엘 자손들아 그 날에 여호와께서 창일하는 2)하수에서부터 애굽 시내에까지 과실을 떠는 것 같이 너희를 하나하나 모으시리라
13 그 날에 큰 나팔을 불리니 앗수르 땅에서 멸망하는 자들과 애굽 땅으로 쫓겨난 자들이 돌아와서 예루살렘 성산에서 여호와께 예배하리라

10-11절 하나님 없는 성읍은 결국 황폐해집니다. 10절에서는 견고한 성읍이 황폐해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11절은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이는 그 백성이 지각이 없음이라…” 여기서 “지각이 없음”은 단순히 지능이 부족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 영적 무지를 말합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매우 중요한 원리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문명이 아무리 견고해 보여도 결국 무너집니다. 반대로 하나님께 뿌리를 내린 백성은 하나님께서 지키십니다.

12-13절 하나님은 흩어진 백성을 다시 모으십니다. 마지막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창일하는 하수에서부터 애굽 시내에 이르기까지 열매를 모으듯이 너희 이스라엘 자손아 하나하나 모으리라.” 그리고 13절 여기서 “하나하나 모으리라”는 말씀이 참 은혜롭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대충 모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 모으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목적지가 어디입니까? “예루살렘 성산에서 여호와께 예배하리라.” 회복의 최종 목적은 단순히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돌아와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흩어진 사람을 하나하나 찾으십니다. 27:12의 “하나하나 모으리라”는 말씀은 목회적으로도 큰 위로가 됩니다. 교회를 떠난 사람, 믿음에서 멀어진 사람, 낙심한 사람, 상처받은 사람을 하나님은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회복의 목적지는 예배입니다. 27:13의 마지막이 중요합니다. “여호와께 예배하리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회복은 ‘ 환경의 회복 → 관계의 회복 → 영혼의 회복 → 예배의 회복’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사랑의 아버지!!
무너지 포도원을 새롭게 하시고, 정결하게 씻어 다시 예배로 회복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사야 28:1-29

1.
1 에브라임의 술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은 화 있을진저 술에 빠진 자의 성 곧 영화로운 관 같이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세운 성이여 쇠잔해 가는 꽃 같으니 화 있을진저
2 보라 주께 있는 강하고 힘 있는 자가 쏟아지는 우박 같이, 파괴하는 광풍 같이, 큰 물이 넘침 같이 손으로 그 면류관을 땅에 던지리니
3 에브라임의 술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이 발에 밟힐 것이라
4 그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있는 그의 영화가 쇠잔해 가는 꽃이 여름 전에 처음 익은 무화과와 같으리니 보는 자가 그것을 보고 얼른 따서 먹으리로다

이사야 28장은 주로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향한 말씀입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 때 상당한 경제적·정치적 번영을 누렸습니다. 사마리아는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아름답고 견고한 성읍이었고, 사람들은 자신들의 풍요와 힘을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겉으로는 영화로웠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떠나 있었습니다. 결국 앗수르가 침략했고, 북이스라엘은 BC 722년 사마리아가 함락되면서 역사적으로 멸망합니다. 따라서 이 본문은 단순히 “술 취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보다 자신들의 번영과 힘을 의지하는 백성에게 임할 심판의 말씀입니다.

1절 북이스라엘을 술취한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는 쾌락과 물질과 자기만족에 취한 영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사람이 술에 취하면 무엇을 잃습니까? 판단력을 잃습니다.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위험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상태를 모릅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에 취하면 자신의 영적 상태를 깨닫지 못합니다. 2-3절 술 취한 이스라엘은 심판하십니다. 우박과 광풍, 큰 물로 영화롭던 면류관을 던져버리십니다. 4절 그 영화가 쇠잔하며 처음 익은 무화과나무 열매 같이 따먹혀 순간 사라져 버리게 될 것입니다. 

2.
7 그리하여도 이들은 포도주로 말미암아 옆 걸음 치며 독주로 말미암아 비틀거리며 제사장과 선지자도 독주로 말미암아 옆 걸음 치며 포도주에 빠지며 독주로 말미암아 비틀거리며 환상을 잘못 풀며 재판할 때에 실수하나니
8 모든 상에는 토한 것, 더러운 것이 가득하고 깨끗한 곳이 없도다


여호와께서 그들이 붙잡히게 하시리라
9 그들이 이르기를 그가 누구에게 지식을 가르치며 누구에게 도를 전하여 깨닫게 하려는가 젖 떨어져 품을 떠난 자들에게 하려는가
10 대저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구나 하는도다
11 그러므로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그가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12 전에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이것이 너희 안식이요 이것이 너희 상쾌함이니 너희는 곤비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13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고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사 그들이 가다가 뒤로 넘어져 부러지며 걸리며 붙잡히게 하시리라

7-8절 지도자의 타락입니다. 7절 지도자 제사장이 영적 부패와 교만으로 취해서 실수하며 토하고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9-10절 하나님의 말씀을 조롱합니다.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구나…”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어린아이에게 반복해서 가르치는 것처럼 조롱하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런 태도입니다. “또 잔소리하네.” “똑같은 말씀 또 하네.” “우리가 그것도 모를 줄 아나?”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으로 받지 않고 조롱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는 영적 부패와 교만으로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조롱하였습니다. 결과 13절 심판-넘어져 부러지고 걸리며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또 그 말씀인가?”가 아니라 “왜 하나님은 이 말씀을 내게 또 들려 주시는가?”물으며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반복되는 말씀은 하나님의 무관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오래 참으심입니다. 말씀을 조롱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을 가볍게 여지기 말아야 합니다. 말씀을 아는 것으로 끝내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 앞에 자신을 내려놓고 순종해야 합니다. 

3.
23 너희는 귀를 기울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자세히 내 말을 들으라
24 파종하려고 가는 자가 어찌 쉬지 않고 갈기만 하겠느냐 자기 땅을 개간하며 고르게만 하겠느냐
25 지면을 이미 평평히 하였으면 소회향을 뿌리며 대회향을 뿌리며 소맥을 줄줄이 심으며 대맥을 정한 곳에 심으며 귀리를 그 가에 심지 아니하겠느냐
26 이는 그의 하나님이 그에게 적당한 방법을 보이사 가르치셨음이며
27 소회향은 도리깨로 떨지 아니하며 대회향에는 수레 바퀴를 굴리지 아니하고 소회향은 작대기로 떨고 대회향은 막대기로 떨며
28 곡식은 부수는가, 아니라 늘 떨기만 하지 아니하고 그것에 수레바퀴를 굴리고 그것을 말굽으로 밟게 할지라도 부수지는 아니하나니
29 이도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난 것이라 그의 경영은 기묘하며 지혜는 광대하니라

본문은 유다는 애굽과 인간의 정치적 지혜를 의지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농부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방법은 인간의 생각보다 깊고 정확하다는 사실을 가르치십니다.

유다는 자기들의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애굽을 의지하고 인간적인 동맹을 만들고 자기들이 안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23–29절에서 농부를 보여주십니다. 인간의 방법은? “우리가 이렇게 하면 안전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내가 적당한 방법을 알고 있다.” 그래서 29절 “그의 경영은 기묘하며 지혜는 광대하니라.” 즉, “너희가 너희의 방법을 고집하지 말고 하나님의 지혜를 신뢰하라.” 말씀하십니다.

농부가 씨앗에 따라 적절한 방법으로 다루듯이, 하나님께서도 우리 인생을 가장 선하고 지혜로운 방법으로 다루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원하는 방법과 때를 고집하지 말고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때를 신뢰해야 합니다.” “그의 경영은 기묘하며 지혜는 광대하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단지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만이 아니라,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방법과 하나님의 때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신앙이 아닌 다른 조건에 만족하지 않으며, 나와 세상의 방식이 아닌 말씀의 뜻대로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description>
			<author><![CDATA[정음교회]]></author>
			<pubDate>Tue, 29 Sep 2026 15:21:11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jungumch.com/?kboard_redirect=5"><![CDATA[성경묵상코너]]></category>
		</item>
				<item>
			<title><![CDATA[2026년 09월 27일]]></title>
			<link><![CDATA[https://www.jungumch.com/?kboard_content_redirect=1458]]></link>
			<description><![CDATA[1. 환영합니다.
* 예배로 함께 하신 성도님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 새롭게 교회를 방문하신 성도님들은 ‘새신자 카드’ 작성하시고 등록해 주시길 바랍니다. 

2. 추석연휴예배일정
* 이번 주 주일 예배는 10:45분 예배만 드립니다. 주일 식사는 없습니다.

3. 성찬주일
* 다음 주일(10/04일)은 성찬 예배로 드립니다. 
* 성찬 준비위원(염금순, 유옥자)은 준비해 주시길 바랍니다. 

4. 이웃초청예배(10월 25일)
* 1인-1명 전도초청 위해서 힘써주세요.
* 100명의 출석과 10명의 새가족 등록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 10/1일 목요일 3시부터 전도합니다. 주중전도 토요전도 시작합니다. 
* 다음 주(4일)부터 전도대상자 작성 제출해 주시길 바랍니다.
* 이웃초청행사 일정에 적극 참여 함께 해 주시길 바랍니다.

5.  교회사역일정
* 주일성찬예배: 10/4일    * 오후 구역모임: 10/18일   * 이웃초청예배: 10/25일]]></description>
			<author><![CDATA[정음교회]]></author>
			<pubDate>Tue, 29 Sep 2026 15:18:3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jungumch.com/?kboard_redirect=4"><![CDATA[교회소식]]></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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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2026년 09월 20일]]></title>
			<link><![CDATA[https://www.jungumch.com/?kboard_content_redirect=1457]]></link>
			<description><![CDATA[1. 환영합니다.
* 예배로 함께 하신 성도님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 새롭게 교회를 방문하신 성도님들은 ‘새신자 카드’ 작성하시고 등록해 주시길 바랍니다. 
* 새 가족모임: 매 주일 1시~1시 30분 본당입니다.

2. 오후구역예배
* 이번 주(20일) 오후 구역예배로 드립니다. 
* 구역 공과는 70페이지 ‘백만 대군을 상대할 손’입니다.

3. 추석연휴예배일정
* 24(목)-25(금)일 새벽기도는 자율적으로 드리시길 바랍니다.
* 25일 금요기도회는 가정예배로 대신합니다. 
* 27일 주일 예배는 10:45분 예배만 드립니다. 주일 식사는 없습니다.

4. 신앙생활
* 주일 예배 전 예배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 예배 생활 주일성수, 수요예배, 금요기도회 힘쓰시길 바랍니다.
* 예배 불참시 주일 실시간 예배가 정음교회 밴드로 동시간 송출됩니다.
* 100명의 출석 성도를 위해서 전도하시고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5.  교회사역일정
* 추석 연휴: 24-27일    * 주일성찬예배: 10/4일   * 이웃초청예배: 10/25일]]></description>
			<author><![CDATA[정음교회]]></author>
			<pubDate>Tue, 29 Sep 2026 15:17:56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jungumch.com/?kboard_redirect=4"><![CDATA[교회소식]]></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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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2026년 09월 13일]]></title>
			<link><![CDATA[https://www.jungumch.com/?kboard_content_redirect=1456]]></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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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롭게 교회를 방문하신 성도님들은 ‘새신자 카드’ 작성하시고 등록해 주시길 바랍니다. 
* 새 가족모임: 매 주일 1시~1시 30분 본당입니다.

2. 원로목사님 입국
* 원로목사님, 사모님께서 미국에서 입국하셨습니다. 환영합니다. 

3. 오후구역예배
* 다음 주(20일) 오후 구역예배로 드립니다. 
* 구역 공과는 70페이지 ‘백만 대군을 상대할 손’입니다. 

4. 토요전도
* 이번 주(19일) 토요전도로 오후 3시에 모입니다. 참석 바랍니다.

5. 신앙생활
* 주일 예배 전 예배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 예배 생활 주일성수, 수요예배, 금요기도회 힘쓰시길 바랍니다.
* 예배 불참시 주일 실시간 예배가 정음교회 밴드로 동시간 송출됩니다.
* 100명의 출석 성도를 위해서 전도하시고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6. 교회사역일정
* 토요전도: 9/19일        * 구역예배: 20일       * 추석 연휴: 24-26일]]></description>
			<author><![CDATA[정음교회]]></author>
			<pubDate>Tue, 29 Sep 2026 15:17:16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jungumch.com/?kboard_redirect=4"><![CDATA[교회소식]]></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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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2026년 09월 06일]]></title>
			<link><![CDATA[https://www.jungumch.com/?kboard_content_redirect=1455]]></link>
			<description><![CDATA[1. 환영합니다.
* 예배로 함께 하신 성도님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 새롭게 교회를 방문하신 성도님들은 ‘새신자 카드’ 작성하시고 등록해 주시길 바랍니다. 
* 새 가족모임: 매 주일 1시~1시 30분 본당입니다.

2. 강서시찰회
* 이번 주(8일) 가을 시찰회가 보라매 교회에서 있습니다. 

3. 원로목사님 입국
* 이번 주 목요일(10일) 원로목사님께서 미국에서 입국하십니다.  
* 위해서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4. 토요전도
* 이번 주(12일) 토요전도로 오후 3시에 모입니다. 참석바랍니다.  

5. 신앙생활
* 주일 예배 전 예배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 예배 생활 주일성수, 수요예배, 금요기도회 힘쓰시길 바랍니다.
* 예배 불참시 주일 실시간 예배가 정음교회 밴드로 동시간 송출됩니다.
* 100명의 출석 성도를 위해서 전도하시고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6. 교회사역일정
* 토요전도: 9/12,19일         * 강서시찰회: 8일        * 구역예배: 20일]]></description>
			<author><![CDATA[정음교회]]></author>
			<pubDate>Tue, 29 Sep 2026 15:16:3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jungumch.com/?kboard_redirect=4"><![CDATA[교회소식]]></category>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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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2026년 08월 30일]]></title>
			<link><![CDATA[https://www.jungumch.com/?kboard_content_redirect=1454]]></link>
			<description><![CDATA[1. 환영합니다.
* 예배로 함께 하신 성도님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 새롭게 교회를 방문하신 성도님들은 ‘새신자 카드’ 작성하시고 등록해 주시길 바랍니다. 
* 새 가족모임: 매 주일 1시~1시 30분 본당입니다.

2. 매일성경
* 9-10월 매일성경이 안내데스크에 준비되었습니다. 
* 구역장은 가져가시길 바랍니다. 

3. 수요달란트예배
* 이번 주 수요일(9/2일) 달란트 잔치가 있습니다. 
* 점심이 준비되니 12시 30분까지 오시길 바랍니다.
* 9월부터 예배 시작을 1시 45분으로 변경합니다. 

4. 신앙생활
* 예배 생활 주일성수, 수요예배, 금요기도회 힘쓰시길 바랍니다.
* 예배 불참시 주일 실시간 예배가 정음교회 밴드로 동시간 송출됩니다.
* 100명의 출석 성도를 위해서 전도하시고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5. 교회사역일정
* 토요전도: 9/5,19일         * 강서시찰회: 8일        * 구역예배: 20일]]></description>
			<author><![CDATA[정음교회]]></author>
			<pubDate>Tue, 29 Sep 2026 15:15:5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jungumch.com/?kboard_redirect=4"><![CDATA[교회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2026년 08월 23일]]></title>
			<link><![CDATA[https://www.jungumch.com/?kboard_content_redirect=1453]]></link>
			<description><![CDATA[1. 환영합니다.
* 예배로 함께 하신 성도님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 새롭게 교회를 방문하신 성도님들은 ‘새신자 카드’ 작성하시고 등록해 주시길 바랍니다. 
* 새 가족모임: 매 주일 1시~1시 30분 본당입니다.

2. 오후 구역예배
* 이번 주(8/23일)는 오후 구역예배로 드립니다. 
* 구역별로 참석 바랍니다. 

3. 토요전도
* 이번 주 토요일(29일) 오후 4시에 전도로 모입니다. 

4. 담임목사휴가(24일-28일)
* 월-금요일 새벽기도회는 자율로 드리시길 바랍니다.
* 수요예배는 가정예배로 대신합니다. 

5. 신앙생활
* 예배 생활 주일성수, 수요예배, 금요기도회 힘쓰시길 바랍니다. 
* 100명의 출석 성도를 위해서 전도하시고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6. 교회사역일정
*구역예배: 8/23일         * 담임목사휴가:8월24-28일]]></description>
			<author><![CDATA[정음교회]]></author>
			<pubDate>Tue, 29 Sep 2026 15:15:0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jungumch.com/?kboard_redirect=4"><![CDATA[교회소식]]></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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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2026년 08월 16일]]></title>
			<link><![CDATA[https://www.jungumch.com/?kboard_content_redirect=1452]]></link>
			<description><![CDATA[1. 환영합니다.
* 예배로 함께 하신 성도님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 새롭게 교회를 방문하신 성도님들은 ‘새신자 카드’ 작성하시고 등록해 주시길 바랍니다. 
* 새 가족모임: 매 주일 1시~1시 30분 본당입니다.

2. 오후 구역예배
* 다음 주(8/23일)는 오후 구역예배로 드립니다. 
* 구역 공과는 108페이지 ‘줄기에서 난 한 싹’입니다.

3. 리더모임
* 8월 22일 토요일 오후 2시입니다. 
* 구역장 부구역장은 기억하시고 참석바랍니다. 

4. 토요전도
* 이번 주 토요일(22일) 오후 4시에 전도로 모입니다. 

5. 신앙생활
* 예배 생활 주일성수, 수요예배, 금요기도회 힘쓰시길 바랍니다. 
* 100명의 출석 성도를 위해서 전도하시고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6. 교회사역일정
*구역예배: 8/23일       *리더모임:8/22일      * 담임목사휴가:8월24-28일]]></description>
			<author><![CDATA[정음교회]]></author>
			<pubDate>Tue, 29 Sep 2026 15:13:5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jungumch.com/?kboard_redirect=4"><![CDATA[교회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2026년 08월 09일]]></title>
			<link><![CDATA[https://www.jungumch.com/?kboard_content_redirect=1451]]></link>
			<description><![CDATA[1. 환영합니다.
* 예배로 함께 하신 성도님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 새롭게 교회를 방문하신 성도님들은 ‘새신자 카드’ 작성하시고 등록해 주시길 바랍니다. 
* 새 가족모임: 매 주일 1시~1시 30분 본당입니다.

2. 오후 구역예배
* 다음 주(8/16일)는 오후 구역예배로 드립니다. 
* 구역 공과는 108페이지 ‘줄기에서 난 한 싹’입니다.

3. 공예배 출석
* 주일성수와 수요예배, 금요기도회에 참석에 힘써 주시길 바랍니다. 
* 주일 예배 불참시에는 꼭 밴드로 설교를 들이시길 바랍니다. 

4. 리더모임
* 8월 22일 토요일 오후 2시입니다. 
* 구역장 부구역장은 기억하시고 참석바랍니다. 

5. 교회사역일정
*구역예배: 8/16일    * 구역장세미나:8/22일      * 담임목사휴가:8월24-28일]]></description>
			<author><![CDATA[정음교회]]></author>
			<pubDate>Tue, 29 Sep 2026 15:13:0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jungumch.com/?kboard_redirect=4"><![CDATA[교회소식]]></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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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고린도전서 1장 - 16장]]></title>
			<link><![CDATA[https://www.jungumch.com/?kboard_content_redirect=1450]]></link>
			<description><![CDATA[고린도전서 1:1-31

1.
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고린도전서는 사도 바울이 약 AD 55년경 에베소에서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신약성경의 7번째 책으로, 교회 안에 발생한 여러 문제(분열, 음행, 소송, 예배 질서 등)를 바로잡고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지도하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고린도는 상업과 문화가 발달한 도시였지만, 우상숭배와 성적 타락이 만연했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교회도 세속적 영향에 흔들리고 있었기에 바울은 교회의 문제들을 교정하고 복음의 본질을 가르쳤습니다. 고린도전서는 "복음 안에서 거룩하고 질서 있는 공동체를 이루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교회의 연합, 성결한 삶, 사랑의 실천, 그리고 부활의 소망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입니다.

2.
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11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12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14 나는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15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16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그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 교회에 나타난 첫 번째 문제는 분열입니다. 분열은 교회의 가장 큰 위기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뒤로 줄을 세우기 위해서 노력을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사람을 만들며 추종자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주 예수와 주의 종들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한 교회는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을 품어야 합니다. 

같은 말이란? 세상의 말이 아니라 복음을 주제로 한 예수 그리스도의 말이며, 같은 마음이란? 그리스도를 머리로 인정하는 믿음이며, 같은 뜻이란?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공동의 목표입니다. 교회는 다른 사람이 모인 공동체이지만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로 하나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나눠지는 자들을 향하여 3가지로 질문합니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즉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입니다. 몸이 절대로 나누어질 수 없음입니다. 교회가 여러 파벌로 나뉘는 것은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찢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두 번째.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느냐? 즉 구원자는 예수입니다. 오직 예수만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러니 예수 외에는 중요한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을 지나치게 높이는 순간 교회는 무너지고 이단과 사이비에 빠지게 됩니다. 

세 번째.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느냐? 세례는 측정 지도자가 행하는 것이지만,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결국 연합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목사의 교회도 장로의 교회도 아닌 오직 주님의 교회입니다. 주님과 연합된 것만이 교회입니다. 

교회가 분열되는 이유는 그리스도보다 사람을 앞세우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교회가 하나 되는 길은 사람보다 그리스도를 높이고, 지도자보다 복음을 붙들고, 나의 주장보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교회의 중심은 사람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3.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입니다. 예수가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를 해결하는 능력, 사탄을 무너뜨리는 능력, 죽음을 이기는 능력, 사람을 새롭게 하는 능력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죄를 이길 수 없지만 십자가의 복음은 죄인을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와 방법입니다.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인간을 구원할 방법이 없습니다. 어떤 인간으로도 죄를 속량할 수 없습니다. 이는 모든 인간의 가진 원죄 때문입니다. 그러니 한분 온전하고 죄없는 자로만 인간의 죄를 벗겨 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없으신 하나님이 인간의 형상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사단은 권능은 율법이요 죄입니다. 그런데 사단은 죄 없으신 예수를 십자가에서 죽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단은 십자가에 속박되고 십자가에 법에 파괴되고 무너질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권능과 지혜를 유능하고 똑똑하고 유력한 자에게 비밀로 하시고, 어리석고 미련하고 약하고 천하고 멸시받는 자에게 오픈하셨습니다. 이것은 29절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인간의 지혜와 능력과 공로를 의지하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자에게 십자가의 비밀을 알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인간의 자랑이 될 수 없습니다. 구원은 학벌의 결과도 아니고, 재물의 결과도 아니고, 능력의 결과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은혜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자랑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십자가이며, 자신의 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주의 십자가의 능력과 지혜로 충만한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린도전서 2:1-16

1.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사도바울의 설교 철학과 복음 전도의 자세를 잘 보여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증거?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만을 증거합니다. 자신의 어떤 말이나 지혜를 의지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고린도는 철학과 수사학이 매우 발달된 도시입니다. 사람들은 화려하고 논리적인 말들을 쏟아내었지만 사도바울은 화려함과 논리보다 더 위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만을 증거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세상의 논리와 화려함보다 아름답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입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3절 ‘심히 떨었노라’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을 떨게한 것이 무엇입니까? 내 말과 내 전도로서 즉 내 능력으로 나타나는 복음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성령의 나타나심’을 간절히 사모하였습니다. 성령의 나타나심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증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에게 있어 심히 떨리는 그 마음이야 말로 성령께서 붙들고 쓰시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복음에 핵심 예수그리스도와 십자가를 붙들 때, 주의 성령이 우리를 붙들어 사용하실 줄 믿습니다. 성령의 나타나심이 이루어 질 줄 믿습니다. 

2.
6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7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9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복음은 세상의 지혜, 통치자들의 지혜가 아닌 성령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지혜로만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것은 영적인 일로만 분별하고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공부만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철학이나 논리로 완전히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께서 마음을 열어 주실 때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의 지혜를 의지하기보다 성령의 조명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복음은 세상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인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것은 성령께서 열어 주실 때에만 바르게 보고 바르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3.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사도바울의 구분은 단순히 똑똑한 사람과 무식한 사람,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의 구분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성령의 지배를 받는가, 받지 않는가의 차이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프쉬키코스(psychikos)로,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을 의미합니다. 즉, 자신의 이성에 의존하는 사람, 자신의 경험에 의존하는 사람, 세상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십자가의 복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죽은 사람이 살아나느냐?" "어떻게 십자가 처형당한 사람이 구원자냐?" "어떻게 예수만이 구원의 길이냐?" 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이 어리석게 보이는 이유는 영적인 눈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령한 자는 원어로 프뉴마티코스(pneumatikos)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모든 것을 판단한다"는 것은 모든 분야의 전문가라는 뜻이 아닙니다. 영적인 진리를 분별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무엇이 죄인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무엇이 참된 가치인지 분별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육에 속한 사람? "패배다" "범죄자의 죽음이다" 라고 봅니다. 반면 신령한 사람? "나를 위한 구속이다" "하나님의 사랑이다" 라고 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세상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신령한 사람은 성령의 눈으로 세상을 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십자가를 실패로 보지만, 신령한 사람은 십자가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봅니다. 신령한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하루 하루 주의 성령으로 살아가는 떨리는 심정으로 살아가게 하시고, 오직 신령한 사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품고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린도전서 3:1-23

1.
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3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4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영적 수준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를 육에 속한 자, 어린 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육신에 속한 자란 불신자를 의미하기 보다는 구원은 받았지만 육적인 가치와 욕심의 지배를 받는 성도를 의미합니다. 어린 아이는 시기 다툼 분열이 특징입니다. 신앙의 성숙이란? 성경적 지식이나 은사적인 특징을 초워라여 겸손과 사랑과 하나 됨을 특징으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성숙해야 합니다. 육에 속한 어린아이의 신앙을 벗어버리고 믿음으로 굳건하게 세워지며 성령의 열매로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선 온유 절재의 삶을 살아가는 성숙함이 있어야 합니다. 

2.
5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8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그런즉 모든 분열과 자랑을 멈추어야 합니다. 우리의 노력과 수고는 아무것도 아니며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심는 이와 물주는 이는 하나입니다. 사역의 방식은 달라도 목적은 하나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경쟁적인 관계가 아닌 협력적 관계로 관계를 정리해야 합니다. 이것이 연합을 위한 성도의 마음가짐입니다. 

가치 있는 재료 금 은 보석으로 건축해야 합니다. 금·은·보석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삶, 믿음, 사랑, 충성, 복음 중심의 사역을 의미합니다. 반면 나무·풀·짚은 인간적 자랑 세속적 방법
자기 영광 육신적 동기를 의미합니다. 이 모든 것은 그날에 판단됩니다. 그 날은 주님의 심판대를 의미합니다. 성도의 구원을 심판하는 자리가 아니라, 성도의 삶과 사역을 평가하는 자리입니다. 중요한 원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얼마나 많이 했는가보다, 어떤 동기로 했는가? 무엇을 위해 했는가? 를 보십니다. 사람 앞에서 화려했던 것도 불 앞에서는 모두 드러납니다. 예수 그리스도 위에 금·은·보석으로 세워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과 사역은 언젠가 주님 앞에서 평가받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칭찬보다 하나님의 인정을 구하며, 믿음으로 사랑으로 충성으로 교회를 세워 가야 합니다.

3.
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18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19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20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21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22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23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16절 여기서 "너희"는 복수형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개인 성도의 몸을 가리키는 고린도전서 6:19과는 조금 다릅니다. 여기서는 한 사람의 성도보다 교회 공동체 전체 를 의미합니다. 즉,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구약시대에는 성막에 하나님이 임재하셨고 솔로몬 성전에 하나님이 임재하셨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공동체 안에 성령께서 거하십니다. 교회가 성전인 이유 교회 건물이 거룩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임재하시는 공동체가 곧 교회입니다.

17절 성전을 더럽히면 멸망 당합니다. "더럽히다"는 말은 파괴하다 무너뜨리다 손상시키다라는 의미입니다. 문맥상 가장 큰 의미는 교회의 분열과 파괴입니다. 고린도교회는 파벌 시기 다툼으로 교회를 무너뜨리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매우 강하게 경고합니다. 교회는 사람의 모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세우는 사람은 하나님께 상을 받지만 교회를 무너뜨리는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①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성령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② 교회를 무너뜨리는 죄를 경계해야 합니다. 시기, 분쟁, 파벌은 성전을 훼손하는 행위입니다. ③ 세상 지혜보다 십자가의 지혜를 붙들어야 합니다.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야 합니다. ④ 사람을 자랑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자랑해야 합니다. 목회자도, 직분자도, 모든 사역도 결국 교회를 섬기기 위한 도구입니다. ⑤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교회는 성령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므로 분열과 인간 자랑을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께 속한 공동체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주의 몸 된 교회의 성도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교회를 세우며 교회의 참 된 일꾼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린도전서 4:1-21

1.
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3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4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바울은 교회 안의 분쟁과 파벌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4장에서는 "그리스도의 일꾼은 어떤 사람인가?" 설명하며, 교회의 지도자와 성도들이 가져야 할 바른 자세를 가르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일꾼입니다. 일꾼은? 배 밑창에서 노를 젓는 하급 선원입니다. 드러남도 없고 주장도 없고 묵묵히 노만을 저어 나아가게 하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교회의 주인이냐 영웅이나 지도자가 아닌 그리스도의 종, 일꾼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일꾼은 청지기입니다. 청지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충성입니다. 충성의 가늠은? 맡겨진 일을 감당하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교회와 가정 직분의 청지기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맡겨진 일에 대한 열매를 물으십니다. 

교회로 아무 것도 판단 할 것없이 하나님의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판단해 주실 것입니다. 사람의 인정이 아닌 하나님의 칭찬이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럼으로 묵묵히 소리 없이 나에게 주어진 청지기의 사역과 사명을 감당해 내시길 기도합니다. 

2.
6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7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8 너희가 이미 배 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
9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10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11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13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6절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하십니다. 말씀 밖은? 대적과 교만한 마음입니다. 7절 모든 것이 주께로 왔으니 우리의 자랑도 교만도 무의미한 것입니다. 사도들은 10절 굶주리고 목마르고 매맞고 핍박받고 비방을 받았습니다. 왜 이런 삶을 살았습니까? 이 길이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죽음 없이는 영광의 부활을 경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9절 사형 선고 받은 자처럼입니다. 당시 로마의 개선 행렬에서는 패배한 포로들이 맨 끝에 끌려와 공개적으로 수치를 당하고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들의 사도적 삶을 그 이미지에 비유합니다. 사도직은 명예의 왕좌가 아니라 희생의 행렬이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받은 모든 것은 은혜로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참된 길은 십자가의 길이어야 합니다. 이 것이 사도바울의 삶의 고백입니다. 나아가서 우리의 신앙에 고백이어야 합니다. 

3.
14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17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18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19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
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21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14절 사도바울의 권면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책망은 파괴가 아닌 회복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꾸짖는 것은 미워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없는 책망은 상처가 되지만 사랑으로 하는 책망은 회복의 통로가 됩니다. 15절 바울은 영적 아버지입니다. 교회는 단순히 지식을 가르치는 곳이 아닙니다. 영혼을 낳고 돌보고 눈물로 기도하는 영적 가족 공동체입니다. 목회자와 교사도 영적 아버지와 어머니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16절 나를 본 받으라, 왜 본받으라고 했는가? 당시에는 신약성경이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성도들은 복음을 삶으로 보여주는 모델이 필요했습니다. 바울은 겸손 희생 충성 사랑을 실제로 보여주었습니다.

20절 말이냐 능력이냐? 이 말씀은 고린도전서 전체의 핵심 중 하나입니다. 고린도는 수사학과 철학이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말 잘하는 사람은 존경받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합니다. 복음은 말솜씨 경쟁이 아니다. 여기서 능력이란? 성령의 역사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죄인이 회개하는 것 사람이 변화되는 것 거룩해지는 것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짜 능력은 병 고침보다, 먼저 사람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교회의 일꾼 되게 하여 주옵소서. 교만하지 않으며 순종하게 하시고 모든 것 위에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사역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린도전서 5:1-13

1.
1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2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3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런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4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5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전서 5장은 교회 안에 있는 심각한 죄와 교회의 거룩성에 대한 말씀입니다. 바울은 분쟁과 파벌 문제(1-4장)를 다룬 후, 이제 교회 내부의 도덕적 타락 음행의 문제를 다룹니다.

고린도 교회는 음행의 문제에 빠져있습니다. 단순한 음행이 아니라 ‘아버지의 아내’ 즉 계모와의 관계를 맺은 사건입니다. 이는 도덕적으로나 율법적으로 금지된 행위입니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죄 자체보다도 이 문제를 대하는 교회의 태도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죄를 슬퍼하기 보다는 관용과 자유를 자랑하고 이 문제를 묵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죄를 범한 사람보다도 죄를 용납하는 교회와 공동체의 태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죄를 범한 사람을 5절 사탄에게 내어 주라 말하고 있습니다. 사탄에게 내어 주라는 것은? 저주의 뜻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 밖으로 내 보내어서 세상의 고통을 경험하게 함으로서 회개하도록 하라는 의미입니다. 목적은 영혼을 살리는데 있는 것입니다. ‘이는 육신으로 멸하지만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징계의 목적은 회복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십니다. 교회의 권징은 처벌이 아니라 치료입니다.

2.
6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8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

6절 사도 바울은 두 번째로 누룩의 비유를 사용하여 죄의 파급력을 경고합니다. 누룩은 아주 적은 양이지만 결국 반죽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의 죄를 가볍게 여기고 방치하면 그 영향은 개인에게만 머물지 않고 공동체 전체로 퍼져 나갑니다.

그래서 교회는 죄를 묵인하거나 감싸 주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죄를 덮어 버리는 것은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교회는 죄를 드러내어 정죄하기 위한 공동체가 아니라, 죄를 깨닫게 하여 회개에 이르게 하는 공동체입니다. 만일 공동체가 죄를 방치하고 용납한다면 죄를 지은 사람은 담대함을 얻게 됩니다. 더 나아가 다른 성도들에게도 잘못된 영향을 미쳐 "이 정도는 괜찮다"는 생각을 심어 줄 수 있습니다. 결국 죄의 씨앗이 공동체 안에 퍼져 더 큰 타락을 가져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고 권면합니다. 이는 죄인을 버리라는 뜻이 아니라 죄를 제거하라는 뜻입니다. 죄를 뿌리 뽑아 회개하게 하고, 하나님 앞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라는 것입니다. 권징의 목적은 정죄가 아니라 회복이며, 배제가 아니라 구원입니다. 특별히 7절 유월절에 누룩을 제거하였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옛 죄악의 삶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교회의 거룩성은 인간의 노력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희생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억할 때 지켜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죄를 숨기는 공동체가 아니라 회개를 돕는 공동체이며, 죄인을 정죄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죄인들을 그리스도께로 다시 돌아오게 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권면한 목적입니다.

3.
9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10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11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12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13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권면을 오해한 것 같습니다. 바울이 "음행하는 자를 사귀지 말라"고 하자,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까지 끊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9-13절에서 세상 사람의 죄와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의 죄를 구별하여 설명합니다.

10절 세상의 음행하는 자입니다. 바울은 세상 사람들에게 죄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불신자는 예수님을 모릅니다. 복음을 알지 못합니다. 성령의 다스림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음행과 탐욕과 우상숭배가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세리와 함께 식사하셨고 죄인들과 함께하셨으며 창녀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교회가 세상과 완전히 단절한다면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만일 그리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성도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며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문제는 11절 형제라 일컫는 자의 음행입니다. 즉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말하고 교회에 속해 있으며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음행과 탐욕과 우상숭배를 지속하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세상 사람은 아직 복음을 모르는 상태이지만, 교회 안의 사람은
복음을 들었고 진리를 알며 하나님의 백성이라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죄를 고집한다면 공동체 전체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바울이 문제 삼는 것이 무엇입니까? 죄 자체보다 회개 없는 지속성, 본문은 죄를 한 번 지은 사람을 내쫓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의 모든 인물들도 죄를 범했습니다. 다윗도 범죄했고, 베드로도 예수님을 부인했고 바울도 자신을 죄인 중 괴수라고 했습니다. 차이는 무엇입니까? 회개입니다. 고린도전서 5장의 사람은 죄를 짓고 있으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돌이키지 않고 교회도 그것을 묵인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강하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의도는 "죄인을 버리라"가 아니라 "교회를 거룩하게 하여 죄인을 회개시키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 죄인을 향해서는 복음의 문을 열어야 하고, 교회 안의 죄에 대해서는 거룩함을 지켜 회개와 회복을 이루어야 합니다.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고 각종 죄와 어둠이 틈타지 못하는 성결함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회개의 삶으로만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린도전서 6:1-20

1.
1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2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3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4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5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6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7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8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

고린도전서 5장에서 교회 안의 음행 문제를 다룬 바울은, 6장에서는 성도들 사이의 분쟁과 송사 문제를 다룹니다. 고린도 교회는 세상 법정에 서로를 고소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것이 복음과 교회의 본질에 맞지 않는다고 강하게 책망합니다.

당시 재판관들은 대부분 불신자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형제 간의 문제를 세상 사람들에게 맡기고 있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깁니다. 바울이 말하는 핵심은 단순히 "법정에 가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인데 형제를 원수처럼 대하고 세상 앞에 교회의 수치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로서 수치스럽게 살지 말고 6-8절 말씀처럼,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내 권리를 끝까지 주장하라고 말하지만, 복음은 형제를 잃어버릴 만큼 권리를 주장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5:39 누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 하셨습니다. 교회 안의 사랑과 화목이 개인의 권리보다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교회와 성도가 세상으로 판단 받지 않도록 살아야겠습니다. 인간의 권리보다는 복음적 관계가 중요합니다. 

2.
12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13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하나님은 이것 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
14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15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6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ㄱ)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17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18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지금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헬라주의적인 이원론을 이해해야 합니다. 당시 교회는 방종주의가 만행되고 있었습니다. 몸은 어차피 악하고 사라질 것이니 마음대로 사용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영혼만 깨끗하면 되지 육체로 무엇을 하든 무슨 상관인가?" 그래서 음행도 가볍게 여겼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자주 사용하던 구호입니다. "우리는 은혜 아래 있다." "율법에서 자유하다." 이를 핑계로 육체적 욕망을 정당화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배가 음식을 위해 존재하듯 몸도 성욕을 위해 존재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먹는 것 성관계를 같은 수준의 본능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전혀 다르게 말합니다.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이것이 바울의 핵심 선언입니다. 몸은 욕망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주님을 위한 존재입니다.

14절 헬라 철학은 영혼은 영원함, 육체는 버려질 껍데기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님의 육체 부활을 믿습니다. 그리고 성도도 육체로 부활합니다. 이것은 헬라 철학과 정면 충돌합니다. 복음의 선언은 몸은 버려질 것이 아니다. 몸도 구속받고 몸도 부활하고 몸도 영광을 입는다. 그러므로 몸을 함부로 사용할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19절 여기서 바울은 이원론을 완전히 무너뜨립니다. 헬라 철학에서 주장한 영혼만 중요하다가 아니라 바울이 말하는 몸도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에 임했고 성전에 임했습니다. 이제는 성도의 몸이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바울의 결론은 매우 분명합니다. 몸은 욕망의 도구가 아니라 성령의 전이며 그리스도의 지체이며 장차 부활할 몸이며 주님의 소유입니다. 그러므로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몸은 중요하지 않다"가 아니라 "몸은 주님의 것이다."
"영혼만 구원받는다"가 아니라 "몸도 구원받고 부활한다."
"몸은 욕망을 위해 존재한다"가 아니라 "몸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존재한다."
따라서 성도의 삶은 영적인 영역만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먹고, 말하고, 일하고, 섬기고, 결혼하고, 살아가는 모든 육체의 삶까지도 하나님께 드려진 예배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성도로서 세상으로 판단 받지 않게 하시고, 온 영과 혼과 육이 그리스도 예수에 오실 그날에 흠 없이 보존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린도전서 7:1-24

1.
1 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 말하면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2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3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4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5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6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허락이요 명령은 아니니라
7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
8 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9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라 정욕이 불 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

7장은 결혼, 독신, 이혼,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음란한 문화 속에 있었는데,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결혼 자체가 영적으로 좋지 않다"고 생각하며 극단적인 금욕주의를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균형 잡힌 답변을 제시합니다.

결혼 2절 음란을 피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 합니다. 5절 결혼을 하였으면 의무를 다하며 분방하거나 떨어져 지내지 말 것을 요청합니다. 이는 9절 절제 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정욕 가운데 죄를 짓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나아가 부부의 관계는 단순히 육적인 음욕을 피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라. 부부의 관계는영적인 관계 그리스도와 신부된 우리의 연합을 보여주기 위한 비밀입니다. 부부는 한몸이며 한 지체입니다. 이처럼 예수그리스도와 우리는 한 몸이며 한 지체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몸입니다. 연합되어서 사는 것이 신앙이고, 믿음입니다. 부부의 관계를 통하여 연합을 깨달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때문에 부부의 관계는?
하나님이 주신 연합의 관계이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을 보여주는 모형이다.
함께 동행하는 복음의 실습장이다. 
이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2.
10 결혼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고
11 (만일 갈라섰으면 그대로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12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를 버리지 말며
13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14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15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사도바울은 이혼에 대한 말씀을 증거합니다. 먼저 10-11절 대전제 원칙은 이혼하지 말라입니다. 12-13절에서 특별히 한 쪽(불신자)에서 이혼을 원치 아니할 때 버리지 말고 참고 품으며 살 것을 명령합니다. 그러나 15절 이혼이 가능한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불신자 배우자가 이혼을 원할 경우는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12-15절 내용을 사도 바울이 말하면서, 12절에서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는 말에 걸려서 우리가 생각하길 이것은 사도 바울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라고 판단한다면 이것을 또한 잘못된 것입니다.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는 것은 주님이 공생애 가운데 이것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지, 지금 12-15절의 내용의 주장이 자신의 생각에서 나온 주관적인 판단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성경에 기록되는 순간 ‘성경은 성경의 권위를 가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딤후 3:16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3.
17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18 할례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19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20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21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22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24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예수를 믿고 나서
결혼했으면 독신이 되어야 하나? 독신이면 결혼해야 하나? 할례를 받아야 하나? 종이면 자유인이 되어야 하나? 끊임없이 자신의 외적 상태를 바꾸려 했습니다.

이에 바울은 세 번이나 반복해서 말합니다. "17절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지내라" "20절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24절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즉 외적인 어떤 상태를 바꾸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부르신 대로 살아가는 삶 즉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찾아 행하는 삶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나의 상태가 환경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어떻게 살까?를 고민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23절 이를 위하여 우리 주님이 우리를 사셨으니 우리는 사람의 종이 되지 말고 주님의 종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영적 부부의 관계를 통하여 연합을 이루며, 우리를 피 값으로 사신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린도전서 7:25-40

1.
25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스러운 자가 된 내가 의견을 말하노니
26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27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28 그러나 장가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본문은 결혼과 독신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 중 마지막 부분입니다. 이 본문은 단순히 결혼 여부를 결정하는 지침이 아니라, 종말을 바라보며 어떻게 하나님께 집중하여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25절 여기서 "처녀"는 미혼 남녀 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계명은 없지만, 사도로서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권면합니다. 26절 "임박한 환난 때문에" 당시 교회는 박해와 어려움 가운데 있었습니다. 바울은 결혼이 죄라는 뜻이 아니라, 환난의 시대에는 독신이 유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27절 아내가 있으면 이혼하려 하지 말라. 독신이면 굳이 결혼을 강요받을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28절 "장가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결혼과 독신 모두 하나님의 뜻 안에 있습니다. 바울은 결혼을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결혼하면 세상적 염려와 책임이 늘어난다는 현실을 말합니다.

결혼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바울은 결혼을 높이거나 독신을 높이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얼마나 집중할 수 있는가를 중요하게 봅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2.
29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0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1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29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즉 때가 가까워진즉 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재림의 때를 기다리는 자입니다. 그 때가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에 성도는 영원에 대한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29-30절 아내있는 자는 없는 듯이, 우는 자는 울지 않는 듯이, 기쁜 자는 기쁘지 않은 듯이, 매매하는 자는 없는 자 같이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 말의 핵심은? 삶의 책임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것에 가치를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31절 세상의 외형(스케마)는 일시적인 배경이며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은 영원하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 나라만이 영원한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붙들고 있는 재산 직업 인간관계 명예 모두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삶은 영원히 남습니다.

3.
32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 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 하되
33 장가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까 하여
34 마음이 갈라지며 시집 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까 하느니라
35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당하게 하여 흐트러짐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독신자 주의 일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힘쓰지만,  기혼자 배우자를 돌보고 가정을 책임지기 때문에, 35절 주를 섬기는 일에 흐트러짐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독신은 하나님께 더욱 집중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성도의 삶은 35절 주를 섬기기 위한 최상의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은? "결혼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닙니다. "남은 인생을 누구를 위해 살 것인가?"입니다. 결혼한 사람은 가정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고, 독신자는 자유함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모든 성도는 세상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에 살되 세상에 매이지 말고, 결혼했어도 하나님을 위해 살고, 독신이어도 하나님을 위해 살며, 모든 삶의 중심에 그리스도를 두라."입니다. 이 같은 은혜와 결단이 이루어지길 소망합니다. 

사랑의 아버지!!
모든 것이 주를 위한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신 것으로 주를 섬기며 세상으로가 아닌 하나님이 나라를 목표로 경주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이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린도전서 8:1-13

1.
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2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3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고린도 교회는 우상숭배가 만연한 도시 가운데 있었습니다. 시장에서 판매되는 고기의 상당수 가 우상에게 제사한 후 나온 고기였기 때문에 성도들 사이에 논쟁이 생겼습니다. 한쪽은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니 먹어도 된다." 라고 주장했고, 다른 쪽은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것은 우상숭배와 관련된 일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단순히 "먹어도 된다", "먹으면 안 된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보다 사랑이 중요하다"는 원리를 가르칩니다.

신앙은 지식이 아닌 관계가 중요합니다. 지식적인 부분이 지나치게 강조되는 것을 율법주의라고 합니다. 반면에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를 통하여 진리를 추구하는 것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무엇이 중요합니까? 당연히 관계적인 복음입니다. 지식의 필요는 관계를 이루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성경 본문 3절은 지식이 아닌 사랑을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 사랑을 하나님이 알아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지식적으로 아는가보다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 주시는가? 이것이 핵심입니다.

2.
4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5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6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세상에는 많은 우상이 있지만 하나님은 한 분뿐입니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반드시 섬깁니다. 문제는 "무엇을 섬기고 있는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존재합니다. 세상은 "네 인생은 네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너는 하나님을 위해 존재한다" 고 말합니다.

우상의 섬기는 일이나 제물의 먹는 일이 아무것도 아닌 것은? 우리가 한 하나님, 한 주 예수그리스도를 섬기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영적본질이며 관계의 본질입니다. 

3.
7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8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
9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10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12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13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그래서 어찌하는 말입니까? 우상의 제물로 인하여 형제가 실족한다면,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고 마신다고 해서 더 잘 사는 것도 아니요, 못 사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먹고 마시는 일따위로 고민하고 말아야 합니다. 

먹고 마시는 일을 초월하여 하나님과 관계를 생각하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생각해야 합니다. 관계란 사랑이며, 관계란 복음입니다. 바울은 형제를 살리기 위해서 평생 우상에게 제사드린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증거를 위하여, 성도의 신앙과 성숙을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것이 믿음이며 결단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신앙적 지식이 아닌 사랑이라는 관계로 복음을 이룰 수 있는 성도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린도전서 9:1-27

1.
1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2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 됨을 1)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3 나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변명할 것이 이것이니
4 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
5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6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
7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8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9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사도바울은 1-2절에서 자신의 사도됨을 선포합니다. 고린도 교회안에서 사도 바울의 권위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을 보았고, 고린도 교회를 개척하였으며, 교인들이 자신이 사도임을 증명할 열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이 있으며, 교회를 세운 사명이 있고, 성도라는 열매가 있는 참 사도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누가 사도이며 주의 종입니까? 예수를 품고, 교회를 세우며, 성도로 열매를 맺는 것이 사도이며 주의 종입니다. 

3-14절 사도들에게 주어지는 정당한 권리를 언급합니다. 4절 교회의 지원을 받을 권리, 5절 결혼할 권리, 6절 생계 걱정 없이 사역할 권리입니다. 이같은 권리는 당연한 것이며, 구약 시대에 신명기 25:4절을 인용하여 9절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는 말씀을 예를 들었습니다. 

2.
15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17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18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 모든 권리를 자발적으로 포기할 것을 선언합니다. 이상의 것들을 누리는 것이 당연하지만 사도바울은 이 사도적 권리를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무엇때문입니까? 15절 복음 전파에 조금이라도 방해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는 돈 문제에 민감한 도시였습니다. 바울이 사례비를 받으면 사람들이 "저 사람도 돈 벌려고 복음 전한다" 고 오해할 수 있었습니다. 때문에 오해의 소지를 피하기 위함입니다. 16-17절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바울은 복음 전파를 자신의 사명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예레미야처럼 전하지 않을 수 없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습니다. 18절 그의 상급은 돈이 아닙니다. 복음을 값없이 전하는 기쁨 자체가 상급입니다. 복음으로부터 받는 기쁨을 큰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3.
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6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이 부분은 선교와 전도의 핵심원리입니다. 눈높이 선교와 전도입니다. 유대인에게 유대인처럼, 율법 없는 자에게는 없는 자처럼, 약한 자에게 약한 자처럼입니다. 이 모든 원칙은 하나 22절 여러 사람, 몇 사람이라고 구원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전달 방법을 달리하는 것입니다. 

24절 우리는 운동장에서 달음질 하는 사람입니다. 이는 오직 하나님 나라의 상급을 받기 위한 달음질입니다. 25절 때문에 사도바울처럼 모든 것에 절제해야 합니다. 권리라도 자유라도 절제하며 자제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신앙은 절제와 훈련의 경주입니다. 구원은 은혜로 받지만 성화와 거룩의 삶은 끊임없는 훈련과 순종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27절 마지막 복음을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리라. 무슨 말씀입니까? 분명히 버림을 받는 자가 있다는 전제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

사랑의 아버지!!
권리와 자유를 포기하고 살아감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자기 절제임을 고백합니다. 우리의 생명과 구원받지 못한 자의 생명을 끝까지 보존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린도전서 10:1-33

1.
1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3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5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이스라엘은 특별한 민족입니다. 이스라엘의 특별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택에 있습니다. 이를 우리는 선민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선민으로 특별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민족입니다. 구름은 불기둥입니다. 바다는 홍해의 사건입니다. 세례는 영적 할례와 연합입니다. 이들은 신령한 음식인 하늘의 만나를 먹고, 신령한 음료 반석에서 솟아나는 물을 마셨습니다. 즉 이같이 은혜를 받은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4절에서 이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다 구름 아래 있었고, 다 바다를 건넜고, 다 세례를 받고, 다 만나를 먹고, 다 물을 마셨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다 받았음에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2.
6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7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ㄱ)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8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9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10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11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무엇때문입니까? 6절 악을 즐겨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 세대가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순종으로 멸망한 이유를 네 가지 죄로 설명합니다. 7절 우상숭배, 8절 음행, 9절 하나님을 시험, 10절 하나님을 원망함입니다. 

*우상숭배의 본질은? 단순히 절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이 우상입니다. 돈 성공 쾌락 명예 자기 자신입니다. 우상의 신전에서 식사하며 "나는 자유하다"고 말하던 성도들에게 "금송아지 사건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음행입니다. 배경은 민수기 25장 바알브올 사건입니다. 모압 여인들과 음행하며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습니다. 이사건으로 죽은 자가 24,000명입니다. 바울은 "23,000명"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하루 동안 죽은 숫자를 말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성경에서 음행은 육체적 죄, 하나님에 대한 영적 간음 두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님보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도 영적 음행입니다.

*주를 시험한다는 뜻은 하나님의 능력을 확인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신앙으로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면 해보시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면 증명해 보라? 와 같은 태도입니다. 믿음은 이해 후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원망입니다.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현실을 원망했습니다. 그 결과 심판이 임했습니다. 원망의 본질은 단순한 불평이 아닙니다. 사실상 "하나님이 나를 잘못 인도하고 계신다" 는 불신앙입니다. 감사는 믿음의 언어이고, 원망은 불신앙의 언어입니다.

광야에서 망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아니라, 은혜를 받고도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상숭배, 음행, 하나님을 시험하는 태도, 원망을 멀리하고 끝까지 믿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과거 이스라엘의 실패는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3.
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
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32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그런즉 결론입니다. 그런즉 우리는 선 줄로 생각하며 교만하지 말고 늘 넘어질까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또한 시험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의 유익을 구하며, 많은 사람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충성된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10장이 우리에게 주는 결론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믿음의 경륜과 직분을 자랑하지 않으며, 겸손으로 경주하며, 겸비함으로 주님의 나라를 이룰수 있는 주의 백성이 되게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린도전서 11:1-34

1.
2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전통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3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4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5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라
6 만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가릴지니라
7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를 마땅히 가리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8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9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10 그러므로 여자는 천사들로 말미암아 권세 아래에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11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12 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고린도전서 11장을 한마디로 정리하라면? 예배에 대한 질서입니다. 당시 교회안에는 예배적인 질서과 규례가 존재했습니다. 예를 든다면, 4절 남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한다든지, 5절 반대로 여자가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하는 것은 당시의 시대에 있어서 예배의 질서를 무너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형태의 질서를 가지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중요한 것임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배 가운데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와 권위를 존중하라는 원리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요즘 식 질서로 표현하고 나타낸다면? 예배중 너무 짧은 치마를 입고 온다든지, 또는 슬리퍼나 다른 사람의 시선을 거슬리는 옷을 입고 예배드리는 모습은 좋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예배중 핸드폰을 본다든지, 울린다든지 등 모든 것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질서에서 벗어난 행위입니다. 

이같이 예배의 질서를 지킨다는 것의 핵심은? 하나님 중심의 마음가짐입니다. 내가 편한 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높이고, 공동체에 덕을 세우며, 예배 가운데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는 태도가 참된 예배의 질서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 아래에서 드려져야 합니다. 예배는 내 자유를 드러내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존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리이다.

2.
17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18 먼저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어느 정도 믿거니와
19 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20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21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22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1-16절이 예배의 외적인 질서라면, 17-34절은 예배의 본질적인 질서, 즉 성도들 사이에 사랑과 연합에 관한 말씀입니다. 

특별히 17-22절은 성만찬이 오히려 분열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가정집에 모여 성만찬을 했는데, 먼저 온 부유한 사람들은 음식을 많이 먹고 심지어 술에 취하기까지 했습니다. 반면 늦게 오는 가난한 성도들은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성만찬은 하나 됨을 나타내야 하는데, 오히려 빈부격차와 차별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교회안에 내적 질서인 사랑이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3.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27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28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29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30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31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32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33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34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밖의 일들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바로잡으리라

이에 사도바울은 성만찬의 의미를 다시 새기며, 고린도 성도들에게 깨우침을 주고 있습니다. 
깨우침을 통하여 예배의 질서와 하나님의 관계를 이루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먼저 23-26절 성만찬의 3가지 의미입니다. 
① 24-25절 과거를 돌아봄 - 십자가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성만찬의 첫 번째 의미는 기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하시면서 떡과 잔을 자신의 몸과 피에 비유하셨습니다. 떡은 찢기신 그리스도의 몸, 잔은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성만찬을 할 때마다 "내 죄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셨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내가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다시 기억합니다. 성만찬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를 현재 내 삶에 새롭게 적용하는 시간입니다. 교회는 성만찬을 통해 십자가를 기억합니다.

② 28절 현재를 돌아봄 -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성만찬은 자기 성찰의 시간입니다. 바울은 성찬에 참여하기 전에 자신을 살피라고 권면합니다. 이것은 "나는 죄가 없나?" "나는 완전한가?" 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지금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가? 나는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살고 있는가? 나는 형제와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가? 나는 십자가의 은혜를 잊고 살고 있지는 않은가? 를 점검하는 것입니다. 성만찬은 거울과 같습니다. 거울을 보면 얼굴 상태를 확인하듯이, 성만찬은 영혼의 상태를 점검하는 시간입니다.

③ 26절 미래를 바라봄 -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성만찬은 과거만 바라보는 의식이 아닙니다. 앞으로 오실 주님을 바라보는 소망의 예식입니다 
성만찬은 장차 이루어질 천국 잔치의 예고편입니다. 성도는 성찬에 참여하면서 "주님은 다시 오실 것이다."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라는 소망을 붙잡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박해와 고난 속에서도 성만찬을 행하며 재림의 소망을 확인했습니다.

즉 성만찬은 뒤를 돌아보며 십자가를 기억하고, 안을 돌아보며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고, 앞을 바라보며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는 예식입니다. 즉 성만찬은 십자가의 은혜를 기억하며, 현재의 믿음을 점검하고, 장차 오실 주님을 소망하는 복음의 예식인 것입니다.

질서의 회복을 통하여 성도들 사이의 사랑과 연합의 질서를 교회안에서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교회안에서 예배의 질서를 이루고 하나님과의 관계와 성도간의 온전한 관계를 이루는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린도전서 12:1-31

1.
1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2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4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5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6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7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전서 12장을 우리는 은사장이라고 합니다. 고린도교회는 각종 은사를 받은 성도들입니다. 그런데 은사를 받았지만, 그 은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은사가 자신의 자랑이 되고 교만이 되는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이에 사도바울은 12장을 통하여 은사를 정리하고 교회를 질서를 바로 잡고자 성경의 본장을 기록하게 됩니다. 

먼저, 모든 은사는 4절 같은 성령, 5절 같은 주, 6절 같은 하나님안에서 주어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은사의 출발점이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목적은 7절 사람으로 신앙과 믿음에 유익을 주기 하기 위함에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은사를 가지고 자신을 자랑할 것도 드러낼 것도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세움에 필요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2.
7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8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9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0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
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22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23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24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하나님은 7-11절 9가지 은사와, 27-28절 8가지 직분의 일을 한 성령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같은 은사와 직분을 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① 7절 공동체의 유익를 주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유익"은 개인의 유익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 전체의 유익을 말합니다. 지혜의 말씀은 교회를 바르게 인도하기 위해 지식의 말씀은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믿음의 은사는 공동체를 격려하기 위해, 병 고치는 은사는 하나님의 긍휼을 나타내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은사는 "나를 위해"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주신 선물입니다.

② 11절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주셨습니다.
은사는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왜 나는 저 은사가 없을까?" 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은사를 어떻게 사용할까?" 를 고민해야 합니다.

③ 25절 서로를 섬기게 하시기 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일부러 다양한 은사를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서로 필요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예를 들어 교사는 가르치고, 리더는 다스리고, 봉사자는 섬기고, 기도자는 중보하고, 위로의 은사가 있는 사람은 격려합니다. 그래서 누구도 혼자 신앙생활 할 수 없도록 만드셨습니다.

④ 27절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주셨습니다.
교회는 몸이고 성도는 지체입니다. 눈만 있어서도 안 되고, 손만 있어서도 안 되고, 발만 있어 도 안 됩니다. 각각의 은사와 직분은 몸을 건강하게 세우기 위해 존재합니다. 은사는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몸을 위한 기능입니다. 직분은 개인의 지위가 아니라 몸을 위한 섬김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나를 높이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직분도 나의 명예를 위한 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다른 은사와 직분을 주신 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고, 서로를 섬기며,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사를 자랑할 것이 아니라 사용해야 하고, 직분을 누릴 것이 아니라 섬겨야 합니다. 그때 교회는 건강한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가진 은사와 직분으로 교만하지 않게 하시며, 부르신대로 주신대로의 사명을 감당하며 하나님의 교회와 나라를 세우는 협력자 참된 지체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린도전서 13:1-13

1.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13장을 우리는 사랑장이라고 합니다. 12장에서 7-11절 9가지 은사와, 27-28절 8가지 직분을 살펴보았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은사는 풍부했지만 사랑은 부족했습니다. 사랑이 결여된 채로 심각한 분열이 있었고, 사랑보다 지식을 앞세웠습니다. 성만찬 역시 사랑없이 행하여졌습니다. 

우리는 많은 은사와 능력을 하나님께 구해야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모든 은사와 직분은 보여지고 드러나는 결과라고 한다면, 사랑은 모든 은사와 직분의 내적 동기 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무엇을 했는가? 그 결과과 어떠한가? 많은 열매를 맺었는가?를 물어보시는 하나님이기 전에 우리가 어떤 동기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때문에 즉 하나님은 사람의 외적 모습 보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때문에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오늘날 교회에도 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성경 지식이 많아도 사랑이 없으면 사람을 세우지 못합니다. 직분이 높아도 사랑이 없으면 공동체를 살리지 못합니다. 봉사를 많이 해도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고린도전서 13:1-3). 사랑은 은사를 완성하는 힘이며, 모든 사역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로 만드는 원리입니다. 

2.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1)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도바울은 사랑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① 사랑은 오래참고입니다. 원어의 의미 '마크로뒤메오(μακροθυμέω)는 분노를 오래 미루다. 쉽게 화내지 않는다. 상대를 끝까지 기다려 준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오래 참으신 사랑입니다. 이는 베드로후서 3:9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는 사랑은 상대가 변할 시간을 주는 것입니다. 이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② 사랑은 온유입니다. 원어는 "친절하다." "선을 베푼다."라는 의미입니다. 단순히 착한 사람이 아니라, 상대에게 적극적으로 유익을 주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상대가 받을 자격이 있어서 베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③ 사랑은 시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시기는 남의 축복을 슬퍼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남의 성공을 자신의 기쁨으로 받아들입니다. 시기는 자신이 중심일 때 생깁니다. 사랑은 예수님이 중심일 때 가능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누가 더 큰 은사를 받았는가" 를 경쟁했습니다. 바울은 사랑하는 사람은 경쟁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④ 사랑은 자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랑은 자신을 높이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신보다 상대를 높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도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⑤ 사랑은 교만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만은 내가 하나님보다 높아지는 것입니다. 사랑은 겸손하게 자신을 낮춥니다. 교만은 모든 죄의 시작입니다. 사랑은 십자가처럼 자신을 비우는 것입니다.

⑥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무례히 행함은 다른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의 인격을 존중합니다. 예수님은 죄인까지도 귀하게 대하였습니다. 

⑦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여기가 사랑의 핵심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나"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상대를 먼저 살렸습니다. 마가복음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 하고..." 사랑은 자기중심에서 그리스도 중심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⑧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화를 내지 않는 것이 아니라 화를 오래 품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성전을 깨끗하게 하실 때는 진노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진노에는 자기 욕심이 없었습니다.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이는 회계장부에 기록한다는 뜻입니다. 상대의 잘못을 계속 적어 두지 않습니다. 용서는 기억을 삭제하는 것이 아니라 빚을 탕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더 이상 계산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우리도 기억하지 말아야 합니다. 

⑨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죄를 묵인하지 않습니다. 잘못된 것을 "괜찮다." 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감정보다 진리를 선택합니다.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셨습니다.

⑩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머지 사랑은 ‘모든 것’입니다. 모든 것에서 예수를 발견하고 예수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래서 참음도 믿음도 바람도 견딤도 가능한 것입니다. 

3.
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사랑은 영원한 것입니다. 믿음고 소망도 사라지지만 영원히 천국에서 우리가 해야할 일이 사랑입니다. 때문에 사랑이 제일입니다. 

사랑이 제일인 세 가지 이유?
① 사랑은 하나님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4:8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은 사랑을 가지신 분이 아니라,사랑 자체이십니다.
② 사랑은 모든 계명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2:37-40 예수님은 율법 전체를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으로 요약하셨습니다. 사랑이 없는 순종은 형식이 되지만, 사랑에서 나오는 순종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가 됩니다.
③ 사랑은 영원히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은사는 이 세상에서 교회를 세우기 위해 필요하지만, 사랑은 하나님 나라에서도 계속됩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일시적인 은사보다 본질적이고 영원한 가치를 지닙니다.

고린도 교회는 "어떤 은사가 가장 큰가?"를 묻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어떤 성품이 가장 큰가?"를 가르쳤습니다. 교회의 성숙함은 은사의 화려함으로 측정되지 않습니다.
사랑 없는 방언은 소음이 됩니다. 사랑 없는 지식은 교만이 됩니다.
사랑 없는 봉사는 의무가 됩니다. 사랑 없는 믿음은 사람을 세우지 못합니다.
반대로 사랑이 있으면 모든 은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교회를 세우는 도구가 됩니다. 사랑은 모든 은사의 토양이며, 모든 사역의 동기이며, 하나님의 백성이 영원한 나라에서도 간직할 가장 큰 덕목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주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채우시고, 채우신 사랑으로 교회를 세우는 믿음의 종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린도전서 14:1-19

1.
1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14장은 사랑으로 덕을 세우는 은사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성령의 은사가 풍성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은사를 공동체를 세우기보다 자신의 영적 우월성을 드러내는 데 사용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특히 방언을 가장 뛰어난 은사로 여기며 자랑하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는 은사의 다양성을, 13장에서는 사랑의 중요성을 설명한 후, 14장에서는 교회 안에서 은사가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칩니다. 핵심 원리는 단 하나입니다. "은사의 목적은 나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바울은 은사를 설명하면서 먼저 "사랑을 따르라"고 말합니다. 고린도교회는 은사는 많았지만 사랑이 부족했습니다. 사랑 없는 은사는 교만을 만들고, 분쟁을 만들고 사람을 상하게 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은사를 다스리면 교회를 세우고 사람을 살립니다. 사랑은 은사보다 높은 가치입니다.

2.
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3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5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6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7 혹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8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
9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10 이같이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많으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11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외국인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외국인이 되리니
12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그래서 3절 사도바울은 방언보다는 교회의 덕을 세우는 예언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4절 방언은 자기의 덕과 유익을 위한 것이요, 예언은 교회와 공동체의 덕을 위한 것입니다. 5절 방언을 말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나, 방언보다는 예언을 힘쓰라고 권면합니다. 

6-12절 방언의 문제점은? 알아 들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교회안에서 하는 방언을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와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3.
13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14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15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16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17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18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9 그러나 교회에서 내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그렇다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13절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즉 방언을 알아 들고 전할 수 있는 은사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통역을 예언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통역에는 자신의 방언 통역이 있고, 다른 사람의 방언을 통역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필요에 따라 이것을 주실 것이며 할 수만 있다면 통역을 구하여 통역의 은사를 받을수 있길 소망합니다.

14-15절 방언을 말하는 자의 기도의 방법입니다. 방언으로 기도하는 자는 영으로 기도하고, 마음으로 함께 기도하여 영과 마음이 함께 기도하고 찬송하라는 것입니다. 18절 사도바울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방언을 말함을 감사하다고 고백합니다. 방언의 무익론이 아니라 유익함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방언은 자신을 덕을 세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9절 그리고 교회안에서는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낫다라고 정의합니다. 이말의 핵심은? 교회의 덕과 유익입니다. 즉 모든 은사와 사역의 원리는? 교회와 사람을 세움입니다. 설교도 사람을 세워야 합니다. 찬양도 사람을 세워야 합니다. 기도도 사람을 세워야 합니다. 봉사도 사람을 세워야 합니다. 리더십도 사람을 세워야 합니다. 아무리 뛰어난 은사라도 공동체를 세우지 못하면 본래 목적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때문에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 다섯 마디의 깨달은 말이 좋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사랑안에서 발견된 은사를 통하여 교회와 공동체의 덕과 유익을 세우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린도전서 14:20-40

1.
20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21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22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
23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24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25 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

고린도교회는 성령의 은사가 매우 풍성했습니다. 방언 예언 병 고침 등등 그러나 문제는 은사가 많았지만 질서가 없었습니다. 예배시간마다 여러 사람이 동시에 방언하고 통역도 없고, 서로 경쟁하듯 말하고 예언도 차례 없이 하고 예배가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사람들은 "내 은사가 더 크다." "내가 더 영적이다." 주장하면서 무질서한 예배의 모습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이에 사도바울은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교회의 품위와 질서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20절에서 사도바울은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이 아니라 지혜있는 장성한 믿음의 분량을 이룰 것을 당부합니다. 장성한 믿음의 사람은? 교회의 덕과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신앙인입니다. 때문에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방언과 예언을 잘 활용하여 사용할 것을 권면합니다. 

22절 방언은 믿지 않는 자의 심판의 표적입니다. 이는 알아듣지 못함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들을 귀가 없는 백성은 23절 방언을 말하는 자들을 ’미쳤다‘말하여 거부하는 것입니다. 

반면 22절 예언은 믿는 자를 위한 것입니다. 이는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선포입니다. 그래서 24절 이미 믿는 성도는 말씀으로 성장하고 위로받고 책망받고 교훈을 받습니다. 25절 회개하며 하나님을 경배하빈다. 즉 말씀을 통하여 믿는 성도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2.
26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27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28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29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30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31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32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33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함과 같이

구체적 은사의 활용법입니다. 은사에 있어서 27절 방언은 차례를 따라 순서대로하고, 29절 예언은 분별해야 합니다. 이는 33절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요. 질서의하나님 화평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26절 모든 것은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할 것입니다.

우리가 세워야할 3가지 덕은? 교회를 세우는 것, 성도의 믿음을 성장시키는 것, 공동체의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3.
36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37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은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는 이 글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38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
39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40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을 높이지(은사와 직분과 능력)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36절 말씀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냐?라고 묻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자기 경험을 말씀보다 높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리석고 무지한 것입니다. 만약 너희로 참 선지자 신령하여 하나님께 속한 자로 생각하거든 겸손하여 이 모든 것들을 받아 들이며 순종하고 따를 것을 요청합니다. 오늘날도 체험 환상 음성 보다 오직 성경이 최종 권위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모든 은사를 사모하되, 품위 있게 질서 있게 하기를 당부하고 있습니다. ① 품위 있게란?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고 합당하게 드려져야 합니다. ② 질서 있게는? 각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세워지도록 해야 합니다. 은사는 말씀의 권위 아래 있어야 합니다. 은사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 사용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는 혼란이 아니라 질서와 화평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사랑의 아버지!!
장성한 믿음의 분량을 이루어, 품위있게 질서 있게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내는 주의 자녀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린도전서 15:1-11

1.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2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장이라고 불립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 안에는 예수님의 부활은 믿으면서도 장차 성도들의 육체의 부활은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는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육체는 악하고 영혼만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11절에서 바울은 먼저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지 다시 확인시킨 후, 그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즉, 복음을 바로 붙들어야 부활 신앙도 바로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2절 복음은 구원의 능력입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① 1, 3절 복음은 받은 것입니다. 바울은 "내가 만든 사상이 아니라 너희가 받은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은 사람이 만들어낸 철학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입니다. 갈라디아서 1:11-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우리는 복음을 창조하는 사람이 아니라 받고 전하는 사람입니다.

② 복음은 서 있는 기초입니다. 2b절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믿음은 한 번 믿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복음 위에 서는 것입니다. 건물이 기초 위에 세워지듯 성도의 삶도 복음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환경이 아니라 말씀이 아니라 감정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 위에 서는 삶입니다.

③ 복음은 굳게 지키고, 끝까지 붙들어야 한다. 2절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구원은 복음을 굳게 붙드는 믿음 안에서 나타납니다. 여기서 "굳게 지키다"는 헬라어 κατέχω(katechō) 는 꽉 붙잡다, 놓치지 않다 라는 의미입니다. 믿음은 시작보다 끝까지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2.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2번째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세 문장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첫째, 3절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순교가 아닙니다. 목적적인 죽으심입니다. 대속의 죽음입니다. 십자가는 죄인의 형벌을 대신 지신 사건입니다. 둘째, 4절 장사되셨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죽음이 실제였음을 증명합니다. 가사 상태가 아니라 완전한 죽음이었습니다. 셋째, 4절 성경대로 살아나셨다.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입니다.

5-8절 까지 이 같은 죽으심과 장사됨과 부활의 증인으로서 제자들입니다. 게바, 열두 제자, 500여 형제, 야고보, 모든 사도, 마지막으로 바울입니다. 왜 이렇게 기록했을까요? 당시 살아있는 증인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부활은 신화가 아니라 증인들이 확인한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의 중심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를 위한 대속이며, 부활은 죄와 사망을 이기신 승리입니다. 십자가 없는 복음도 없고, 부활 없는 기독교도 없습니다.

3.
9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11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결국 죽으시고 장사되시고 부활하신 우리주님의 은혜가 결국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을 9절 가장 작은 자라고 고백합니다. 즉 가장 부족하고 연약한 자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에게 은혜를 주셔서 변화시키시니 이것을 10절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은혜를 고백합니다. 바울은 "10절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은혜 때문이다." 라고 말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은혜는 게으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 충성하게 만드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다." 그러나 곧바로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 라고 고백합니다.

은혜는 교만하지 않게 하고, 낙심하지 않게 하며 끝까지 충성하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은혜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바울을 사도로 만든 것은 능력이 아니라 은혜였습니다. 오늘도 우리를 붙들고 사명을 감당하게 하는 힘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역시 주님이 주신 은혜를 헛되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받은 은혜는 더 깊은 순종과 충성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바울처럼 "내가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삶이 성도의 모습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받은 것으로 증거하며 전하는 참 은혜의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린도전서 15:12-19

1.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15장은 부활장입니다. 사도바울은 부활에 대하여 증거합니다. 부활을 부정하는 자들에 대하여 논리적 반박을 합니다. 

12-13절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는 다시 살아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은 훌륭한 분, 도덕적인 스승, 위대한 성인이라고는 인정합니다. 그러나 부활은 상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부활이 실제 역사적 사건이라는 믿음 위에 세워진 종교입니다.

14절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것입니다. 여기서 "헛것"은 비어 있다. 내용이 없다. 가치가 없다. 라는 뜻입니다. 때문에 세 가지가 모두 무너집니다. ① 설교도 헛됩니다. 복음의 핵심이 사라집니다. ② 믿음도 헛됩니다. 믿음의 대상이 죽은 채 있기 때문입니다. ③ 교회도 존재 이유가 없어집니다. 부활이 없는 교회는 단순한 종교 단체일 뿐입니다. 우리가 믿는 분은 무덤 속에 계신 분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주님입니다. 그래서 기도에도 응답하십니다. 지금도 성령으로 일하십니다.

15절 부활이 없다면 사도들은 거짓 증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사도들은 목숨을 걸고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했습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그들은 모두 거짓말쟁이가 됩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순교하면서까지 부활을 증거했을까요? 거짓을 위해 십자가에 죽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도들이 끝까지 부활을 증언했다는 것은 그들이 실제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사람이 만들어 낸 신화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역사 가운데 행하신 사실입니다.

2.
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16-17절 부활이 없다면 죄 사함도 없습니다. 이 말이 가장 중요합니다. 십자가는 죄값을 지불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하나님께서 그 희생을 받아들이셨다는 증거입니다. 왜 부활이 중요한가? 로마서 4:25 "예수는 우리의 범죄함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부활은 하나님의 의의 선언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죄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죄책감 속에 살아갑니다. 그러나 부활은 죄가 끝났음을 선포합니다. 예수님은 죄를 이기셨고 사망을 이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자유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18절 부활이 없다면 죽은 성도들도 멸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잠자는 자는 믿는 성도의 죽음을 말합니다. 성도에게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잠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시 깨어날 날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장례는 영원한 이별이 아니라 부활을 기다리는 안식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납니다. 이것이 교회의 소망입니다.

19절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부활을 믿었기에 핍박을 견뎠습니다. 재산도 잃었습니다. 감옥에도 갔습니다. 순교도 했습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그들의 삶은 가장 비참한 삶이 됩니다. 그러나 부활이 사실이기 때문에 그들의 희생은 영원한 상급으로 이어졌습니다. 우리도 부활을 믿기에 헌신합니다. 기도합니다. 예배합니다. 선교합니다. 사랑합니다. 부활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이 헛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살아나셨기 우리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입니다. 부활 신앙은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능력(절망, 죄, 두려움, 죽음)입니다. 부활신앙은 우리 미래의 소망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예수 부활 나의 부활, 부활 신앙으로 충만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린도전서 15:20-34

1.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1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사도바울은 부활을 더 이상 가정이나 상상이나 허구가 아닌 진실이며 역사적인 사실임을 선포합니다. 그 선포의 중심에 20절의 선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절망에서 희망으로 탈바꿈되는 복음의 전환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이제 부활의 첫열매됨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의 첫열매가 되어서 이후로 예수 안에서 죽는 모든 자를 부활로 견인하며 이끌어 내는 것입니다. 

21-22절 여기서 바울은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조합니다. 첫째 아담은 죄 사망 저주의 시작이었다면, 둘째 아담(그리스도)은 의 생명 부활로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로마서 5장의 내용을 다시 요약한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는 모두 죽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두 살아납니다. 여기서 "모두"는 모든 사람이 자동으로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2.
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24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25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26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27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에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그의 아래에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28 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하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23절 부활에도 질서가 있습니다. 각각 자기 차례대로 부활을 이룬다고 말씀하십니다. ① 23절a 그리스도 ② 23절b 그리스도의 성도 ③ 24-26절 마지막 심판 ④ 28절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①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이미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의 부활, 승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성도의 부활을 보증하는 첫 열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 사망은 이미 결정적으로 패배했습니다.

②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성도들의 부활입니다. 이를 요한계시록에서는 첫째 부활이라고 부릅니다. 순교자/믿는 성도/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여기에 속합니다. 이들이 부활하여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합니다.

③ 마지막 원수인 사망의 멸망과 최후 심판입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미 죽음을 이기셨지만, 모든 성도가 아직 죽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사망은 최종 심판 때 완전히 제거됩니다. 백보좌 심판입니다. 여기서 믿지 않는 자들의 부활, 심판, 둘째 사망이 이루어집니다.

④ 28절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21-22장입니다. 새 하늘/ 새 땅/ 새 예루살렘/ 사망 없음/ 눈물 없음/ 죄 없음/ 성전도 필요 없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함께하십니다. 이것이 창조의 완성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미 시작된 승리입니다. 성도의 부활은 그 승리의 완성입니다. 사탄과 모든 악의 세력은 결국 완전히 패배합니다. 사망은 마지막 원수로 제거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전히 성취됩니다. 따라서 성도는 현재의 고난이나 죽음 때문에 낙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이미 시작된 승리라면, 우리의 부활은 반드시 이루어질 약속이며,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만유를 새롭게 하시는 영원한 나라가 완성될 것입니다.

3.
29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
30 또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
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32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33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34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결국 부활 신앙은 현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여기부터는 "부활을 믿는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를 설명합니다.

30-32절 바울은 자신의 삶을 예로 듭니다. "우리가 어찌하여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 부활이 없다면 바울은 가장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바울은 부활의 신앙을 바탕으로 복음을 전하며 모든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 것입니다. 32절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만약 부활이 없다면 인생은 쾌락주의밖에 남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기 때문에 바울은 고난을 선택합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현재의 손해보다 영원한 상급을 바라봅니다.

33절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힌다." 부활을 부정하는 거짓 교사들이 교회를 오염시키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오늘만 살기 때문입니다. 

34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부활은 단순한 교리가 아니라 거룩한 삶의 원동력입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죄 가운데 계속 머물 수 없습니다.

부활 신앙은 오늘의 삶을 바꿉니다. 바울은 부활을 믿었기에 위험과 핍박을 감수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도 부활을 믿는다면 삶의 기준은 세상의 성공이나 안락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됩니다. 희생과 헌신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부활 신앙은 미래의 소망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거룩함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죄에 안주하지 않고, 말씀과 기도로 깨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과거의 기적이 아니라 성도의 미래를 보증하는 사건이며, 그 소망은 오늘의 삶을 거룩함과 담대한 헌신으로 이끄는 능력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부활의 신앙을 마음에 품고 부활로 열매맺는 인생을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린도전서 15:35-49

1.
35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36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37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38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39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40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41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15장 고린도 교인들안에 잘못된 신앙이 들어왔습니다. 부활을 부정하는 일입니다. 부활이 부정되면 그리스도의 살아나심이 부정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살아남이 없이는 성경에서 말하는 모든 증거와 증인의 삶이 부정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부활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핵심입니다. 

불신의 사람들은 교회안에서 성도를 속이고 성도의 선한 행실을 더렵혔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를 경계하면서 34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권면하면서 계속 성경의 말씀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36절 부활을 믿지 못하는 자를 어리석은 자라고 말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부활을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함을 알아야 합니다. 38절 살아난 모든 것은 각 종자를 따라서 형체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39절 사람은 사람의 형체로, 짐승은 짐승의 형체로, 새와 물고기는 새와 물고기의 형체를 나타냅니다. 이렇게 각 형체대로 모든 것이 드러나듯이, 40절 하나님의 나라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자는 하늘의 영광을 땅에 속한 자는 당의 영광이 있습니다.  

41절 이것은 부활의 때에 우리에게 나타내신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해의 영광, 달의 영광, 별의 영광과 별과 별의 영광입니다. 이는 부활의 때에 성도가 받은 영광입니다. 해/달/별/별과별은 차등입니다. 우리가 부활의 날에 받게될 영광의 정도입니다. 부활을 믿고 살아가는 자에게 부활의 영광이 충만하길 소망합니다. 

2.
42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우리가 부활의 영광을 얻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42-44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썩을 것은 부패하고 소멸하는 것입니다. 욕된 것, 약한 것, 육의 몸으로 심어야 합니다. 이는 우리의 몸으로서 늙고 병들고 약한 것으로서 병들지 않고 늙지 않고 죽지 않을 것을 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하여 충성하며 육신을 투자할 때 주어지는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땅의 것으로 하늘의 가치를 사야 합니다. 현재의 삶으로 하나님 나라에 심어야 합니다. 죄를 심으면 죄의 열매를 거둡니다. 믿음을 심으면 영생의 열매를 거둡니다. 헌신을 심으면 영광을 거둡니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도 씨 뿌림의 원리를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6:8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결국 부활의 영광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약속된 은혜이며, 그 은혜를 소망하는 성도는 오늘도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기꺼이 "심는" 삶을 살아갑니다.

3.
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
47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48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45절 첫사람 아담은 생령 즉 생명의 받은 사람에 지나지 않으며, 마지막 아담 예수는 생명을 살려 주는 공급자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를 둘째 아담이라고 하지 않고 마지막 아담이라 함은? 사람안에서 이뤄지는 모든 죄 사망 저주를 끝낸다는 의미입니다. 부활을 이야기 할대 첫 열매는 이어지는 의미이고, 사망을 이야기 할대 마지막 아담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49절 결국 성경은 부활의 최고의 약속을 우리에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예수그리스도의 형상을 입게될 것입니다. 과거 우리는 아담의 형상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눈물 질병 죄와의 싸움 죽음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의 형상을 입습니다. 때문에 죄가 없습니다. 죽음이 없습니다. 썩음이 없습니다. 완전한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의 형상을 닮아가고 있는가?" 아담의 형상은 자기중심 교만 죄 죽음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형상은 사랑 순종 거룩 생명입니다. 성도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받았고, 성령의 역사 가운데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날에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형상을 입게 될 것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약속하신 하늘의 영광을 갖고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린도전서 15:50-58

1.
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53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15장 부활장을 정리합니다. 마지막으로 성도들이 마지막 날 어떻게 변화될 것인가와 그 부활이 현재의 삶에 어떤 의미를 주는가를 가르칩니다.

50절 혈과 육이란? 단순히 육체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죄로 인해 타락한 현재의 인간, 죽을 수밖에 없는 몸, 썩어가는 육체를 말합니다. 즉 현재의 몸으로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몸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몸을 변화시키십니다. 예수님도 부활 후 몸을 가지셨지만 썩지 않고 죽지 않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되셨습니다.


51절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비밀은 모든 사람이 죽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성도가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나팔은 재림의 나팔입니다. 나팔의 소리를 들을 때 순식간에 눈 깜박할 사이도 없이 홀연히 변화될 것입니다. 53절 변화의 핵심은? 입는 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에 덮혀지듯이 입혀지는 상태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부활은 몸이 썩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변화입니다. 하나님께서 순식간에 우리를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시키시다는 것입니다. 

2.
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4절은 이사야 25:8절의 말씀입니다. 죽음이 우리를 삼킨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죽음을 삼켜버리셨습니다. 십자가에서는 죽음이 승리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부활에서 죽음이 패배했습니다. 55절 이는 호세아 13:14를 인용한 말씀입니다. 바울은 죽음을 조롱합니다. 마치 패배한 원수에게 "이제 네 무기가 어디 있느냐?" 라고 외치는 승리의 선언입니다.

56절 매우 중요한 복음의 핵심입니다. 순서를 보면 율법 → 죄를 깨닫게 함, 죄 → 사망을 가져옴, 사망 → 인간을 지배함. 그러므로 죄가 해결되어야 죽음도 해결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죄를 해결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망도 무너졌습니다. 57절 여기서 승리는 우리가 싸워 얻은 승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미 이루신 승리입니다. 성도는 그 승리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십자가에서 죄를 이기셨고 부활로 죽음을 이기셨으며 재림 때 그 승리가 완성됩니다.

3.
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그러므로 결론입니다. "그러므로"는 앞의 부활 신앙을 근거로 합니다. 부활이 있기 때문에
현재를 살아가는 태도가 달라져야 합니다.

① 견실하라. 굳게 서라. 세상의 가치관에 흔들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② 흔들리지 말라. 고린도교회는 거짓 교사/ 철학/ 음행/ 우상숭배/ 부활 부인 등으로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부활을 믿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③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라. 부활 신앙은 현실을 회피하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열심히 복음 전하고, 봉사하고, 사랑하고 헌신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수고가 영원히 남기 때문입니다. "너희 수고가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세상 일은 언젠가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흘린 눈물 기도 헌신 섬김 전도 사랑 은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며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부활이 있기 때문에 현재의 모든 믿음의 수고는 영원한 가치가 있습니다.

사랑의 아버지!!
부활 신앙으로 승리하며 견실하며 흔들리지 않으며 주의 일에 힘쓰는 신앙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이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린도전서 16:1-12

1.
1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2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3 내가 이를 때에 너희가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4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그들이 나와 함께 가리라

16장을 통하여 사도바울은 편지를 마무리 합니다. 마지막 당부는 연보입니다. 연보는 헌금입니다. 특별히 예루살렘교회를 위한 연보를 부탁합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모든 교회의 중심된 교회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지역의 극심한 가뭄과 박해를 통하여 예루살렘 교회가 어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이에 사도바울은 자신의 개척한 교회를 중심으로 예루살렘 교회를 도울 수 있도록 연보하며 헌금할 것을 요구합니다. 

2절 연보 헌금은 ‘매주 첫날에’이는 주일마다입니다. 각 사람이 모든 사람이, 수입에 따라서 형편대로 입니다. 억지로가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기억하여 은혜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갈때가 아닌 미리 준비된 연보를 올리라 명합니다. 이는 즉흥적인 감정이 아니라 계획된 믿음과 생활속에서 올려 드리는 연보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억지로도 말고 자발적으로 깊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연보를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입니다. 3-4절 연보된 헌금은 투명하게 관리 되고 전달될 수있도록 지정된 사람과 더불어 원하면 사도바울도 직접 참여하여 투명하고 공정하게 연보된 헌금을 전달하겠다는 것입니다. 

물질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것으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물질로 시험들지 않길 바라며, 온전한 신앙의 고백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2.
5 내가 마게도냐를 지날 터이니 마게도냐를 지난 후에 너희에게 가서
6 혹 너희와 함께 머물며 겨울을 지낼 듯도 하니 이는 너희가 나를 내가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이라
7 이제는 지나는 길에 너희 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만일 주께서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 머물기를 바람이라
8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려 함은
9 내게 광대하고 유효한 문이 열렸으나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라

사도바울은 현재 에베소 지역에서 3년 동안 머물면서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때가 되면 5절 마게도냐를 지나서 고린도 교회에 가고자 하였습니다. 6절 고린도교회에서 겨울을 머물면서 함께 신앙을 교육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8절 오순절 까지는 에베소에 머물면서 끝까지 사명을 감당한 후에 들어가겠다는 것입니다. 9절 광대하고 유효한 문은-하나님이 허락하신 복음의 기회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대적자가 많음으로 어려움이 예견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사사로이 움직이거나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행동에 복음을 증거하기 위한 계산이 들어가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기회와 대적의 도전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려움과 대적속에서 여전히 최선을 다하며 복음의 증거과 사명을 위하여 살아가야 할 줄 믿습니다. 

3.
10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그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그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라
11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를 멸시하지 말고 평안히 보내어 내게로 오게 하라 나는 그가 형제들과 함께 오기를 기다리노라
12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그에게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 가라고 내가 많이 권하였으되 지금은 갈 뜻이 전혀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디모데를 잘 맞아 줄 것을 부탁하고, 아울러 아볼로가 지금은 방문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디모데는 젊고 온유한 성품을 가진 사역자였기 때문에, 분쟁이 많았던 고린도교회에서 그의 권위가 무시당하거나 상처를 받을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두려움이 없이"(10절), "멸시하지 말고"(11절) 그를 존중하며 영접하라고 권면합니다. 그 이유는 디모데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자신의 제자가 아니라 동등한 복음의 동역자로 인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 아볼로에 대해서는, 바울이 여러 차례 고린도 방문을 권했지만 "지금은 갈 뜻이 전혀 없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직접 밝히지 않지만, 가장 자연스러운 이해는 당시 고린도교회 안에 아직도 "나는 아볼로에게"(고린도전서 1:12)라는 분파 의식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볼로가 방문할 경우 자신을 중심으로 또 다른 분열이 생길 수 있음을 염려하여,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기로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든 주의 종들에게 맡겨진 사명과 사역대로 서로를 존중하고 힘을 보태며 주의 교회를 세워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자신의 권리보다 공동체의 유익을 앞세울 때 하나님의 나라가 더욱 견고하게 세워집니다.

사랑의 아버지!!
복음을 증거하는 사명자로 부르심에 따라 사역을 감당하는 은혜와 복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린도전서 16:13-24

1.
13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14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오늘 본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마지막 부분입니다. 고린도전서 전체를 요약하는 결론입니다. 고린도교회는 분쟁, 음행, 우상제물, 성만찬의 문제, 은사의 혼란, 부활 부정 등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모든 문제를 교정한 후 마지막으로 성도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으로 굳게 서라 말씀하십니다. 믿음의 사람을 이루기 위하여 다섯 가지 명령이 주어집니다. ① 깨어 있으라. 영적으로 잠들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26:41 깨어 있으라." 말씀하셨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세상의 문화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영적으로 무감각해지면 죄가 죄처럼 보이지 않고 거짓이 진리처럼 보이고 세상 가치관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항상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② 믿음에 굳게 서라입니다. 세상의 생각이 아니라 복음 위에 서라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철학 웅변 지혜 인간의 지도자를 의지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직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서라고 말합니다. ③ 남자답게 하라입니다. 원어는 "용기를 가져라."라는 뜻입니다. 육체적인 남성다움이 아니라 영적인 담대함입니다. ④ 강건하라. 우리 힘으로가 아니라 성령 안에서 강해지라는 것입니다. ⑤ 사랑으로 행하라 명령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13절의 모든 명령을 14절이 하나로 묶습니다.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왜 사랑인가? 고린도교회의 모든 문제는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2.
15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16 이같은 사람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사람에게 순종하라
17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온 것을 기뻐하노니 그들이 너희의 부족한 것을 채웠음이라
18 그들이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사람들을 알아 주라

15절 스데바나 가족은 고린도의 첫 열매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처음 전도하여 얻은 가정입니다. 그들은 "성도를 섬기는 일에 힘썼다."라고 기록됩니다. 여기서 "힘썼다"는 말은 스스로 헌신했다는 뜻입니다. 억지로 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직분보다 섬김을 칭찬합니다. 참된 지도자는 명령하는 사람이 아니라 섬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큰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스데바나의 가족의 섬김과 희생을 통하여 사도바울은 18절 시원함 매우 만족함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모든 고린도교회로부터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도 섬김의 희생으로 사람들의 인정과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는 섬김과 봉사와 희생이 있길 소망합니다. 

3.
19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20 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21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
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2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24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

사도바울은 교회를 향하여 서로 문안하라 말씀하십니다. 문안함은 당시 문화속에서 사랑과 형제애를 나타내는 인사입니다. 오늘날 악수하며 포옹하며 진심으로 환영하는 것처럼 공동체로서의 사랑의 관계를 이루는 것입니다. 문안은 관심이며 문안은 사랑이며 관계입니다. 주안에서 같은 공동체 안에서 절대적인 관심과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22절 가장 엄중한 경고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 저주(아나테마)는 하나님께 버림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왜 이렇게 강력하게 말하는 것입니까? 교회의 가장 근본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생활을 오래 했어도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헛되기 때문입니다. 

마라나타,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믿음입니다.

23-24절 바울은 세 가지로 편지를 마칩니다. ① 주 예수의 은혜 ② 바울의 사랑 ③ 예수 안에서의 사랑. 고린도교회는 문제 많은 교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끝까지 사랑으로 축복합니다. 징계보다 회복을 원했던 것입니다. 문제를 해결하고 극복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4.
16장 마지막에서 바울은 모든 권면을 다섯 가지로 요약합니다.
①깨어 있으십시오. 영적 나태와 세상의 가치관을 경계하십시오. ②믿음에 굳게 서십시오. 십자가 복음을 신앙의 기초로 삼으십시오. ③용기 있게 강건하십시오. 성령의 능력 안에서 담대하게 살아가십시오. ④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십시오. 사랑은 모든 은사와 봉사의 완성입니다. ⑤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십시오. "마라나타"는 초대교회의 소망이었고 오늘 우리의 소망이기도 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세상의 가치관이 아니라 복음 위에 굳게 서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서로를 사랑으로 섬기고, 맡겨진 사명에는 담대하게 헌신하며, 모든 삶 속에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깨어 있는 신앙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고린도전서를 마무리하는 바울의 마지막 권면이며, 오늘날 교회와 성도에게도 변함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고린도 전서를 통하여 사랑과 부활의 은혜를 알게 하시고, 문제 가운데 해결점을 주시며 고린도 교회로 회복을 축복을 허락하심처럼, 오늘 이 말씀을 읽고 듣는 모든 자에게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이뤄지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description>
			<author><![CDATA[정음교회]]></author>
			<pubDate>Tue, 04 Aug 2026 22:09:0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jungumch.com/?kboard_redirect=5"><![CDATA[성경묵상코너]]></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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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2026년 08월 02일]]></title>
			<link><![CDATA[https://www.jungumch.com/?kboard_content_redirect=1449]]></link>
			<description><![CDATA[1. 환영합니다.
* 예배로 함께 하신 성도님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 새롭게 교회를 방문하신 성도님들은 ‘새신자 카드’ 작성하시고 등록해 주시길 바랍니다. 
* 새 가족모임: 매 주일 1시~1시 30분 본당입니다.

2. 성찬예배
* 이번 주(8/2일) 성찬예배로 드립니다.   * 경건한 마음으로 참여 바랍니다.

3. 토요전도
* 이번 토요일(8일) 오후 4시에 토요전도로 모입니다.
* 전도하기를 원하는 성도님은 4시까지 교회로 오시길 바랍니다. 

4. 선교후원
* 7월 한 달 모아진 선교비 2,944,000원입니다.
* 필요에 따라 차등적으로 지역교회에 선교 후원하도록 하겠습니다.

5. 주일성수
* 매 주일 주일성수에 힘쓰시길 바랍니다. 
* 주일 예배 불참시에는 밴드로 설교를 들으시길 바랍니다. 

6. 교회사역일정
*구역예배: 8/16일    * 구역장세미나:8/22일      * 담임목사휴가:8월24-28일]]></description>
			<author><![CDATA[정음교회]]></author>
			<pubDate>Tue, 04 Aug 2026 22:05:1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jungumch.com/?kboard_redirect=4"><![CDATA[교회소식]]></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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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2026년 07월 26일]]></title>
			<link><![CDATA[https://www.jungumch.com/?kboard_content_redirect=1448]]></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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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교후원의 달
* 7월 한 달은 선교후원의 달로 지킵니다.
* 선교헌금 해 주시면 우리가 섬기는 농촌교회 및 선교지에 특별선교하겠습니다.

3. 수요달란트예배
* 이번 주 수요일(29일) 달란트 잔치가 있습니다. 
* 점심식사 12:30분까지 오세요. 

4. 성찬예배
* 다음 주(8/2일) 성찬예배로 드립니다.   * 성찬 위원은 준비바랍니다.

5. 주일성수
* 매 주일 주일성수에 힘쓰시길 바랍니다. 
* 주일 예배 불참시에는 밴드로 설교를 들으시길 바랍니다. 

6. 교회사역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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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CDATA[정음교회]]></author>
			<pubDate>Tue, 04 Aug 2026 22:04:11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jungumch.com/?kboard_redirect=4"><![CDATA[교회소식]]></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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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2026년 07월 19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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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배로 함께 하신 성도님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 새롭게 교회를 방문하신 성도님들은 ‘새신자 카드’ 작성하시고 등록해 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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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교후원의 달
* 7월 한 달은 선교후원의 달로 지킵니다.
* 선교헌금 해 주시면 우리가 섬기는 농촌교회 및 선교지에 특별선교하겠습니다.

3. 오후구역예배
* 이번 주(19일) 오후 구역예배로 드립니다.
* 구역 공과는 90페이지 ‘거룩한 하나님, 거룩하지 못한 백성’입니다. 

4. 토요전도
* 이번 주(25일) 토요일 오후 3시에 전도로 모입니다. 

5. 교회사역일정
* 성찬주일:8/2일       * 구역장세미나:8/22일      * 담임목사휴가:8월 중]]></description>
			<author><![CDATA[정음교회]]></author>
			<pubDate>Tue, 04 Aug 2026 22:03:0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jungumch.com/?kboard_redirect=4"><![CDATA[교회소식]]></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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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2026년 07월 12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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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1. 환영합니다.
* 예배로 함께 하신 성도님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 새롭게 교회를 방문하신 성도님들은 ‘새신자 카드’ 작성하시고 등록해 주시길 바랍니다. 
* 새 가족모임: 매 주일 1시~1시 30분 본당입니다.

2. 선교후원의 달
* 7월 한 달은 선교후원의 달로 지킵니다.
* 선교헌금 해 주시면 우리가 섬기는 농촌교회 및 선교지에 특별선교하겠습니다.

3. 선교보고예배
* 이번 주(12일) 오후 찬양 예배 중 파키스탄 선교사 김정민 목사님 오십니다.
* 예배참석 바랍니다. 

4. 오후구역예배
* 다음 주(19일) 오후 구역예배로 드립니다.
* 구역 공과는 90페이지 ‘거룩한 하나님, 거룩하지 못한 백성’입니다. 

5. 교회사역일정
* 토요전도:25일          * 오후구역예배:19일]]></description>
			<author><![CDATA[정음교회]]></author>
			<pubDate>Tue, 04 Aug 2026 21:59:5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jungumch.com/?kboard_redirect=4"><![CDATA[교회소식]]></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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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2026년 07월 05일]]></title>
			<link><![CDATA[https://www.jungumch.com/?kboard_content_redirect=1445]]></link>
			<description><![CDATA[1. 환영합니다.
* 예배로 함께 하신 성도님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 새롭게 교회를 방문하신 성도님들은 ‘새신자 카드’ 작성하시고 등록해 주시길 바랍니다. 
* 새 가족모임: 매 주일 1시~1시 30분 본당입니다.

2. 선교후원의 달
* 7월 한 달은 선교후원의 달로 지킵니다.
* 선교헌금 해 주시면 우리가 섬기는 농촌교회 및 선교지에 특별선교하겠습니다.

3. 토요전도
* 이번 주(11일) 토요전도로 오후 3시에 전도합니다.

4. 선교보고예배
* 다음 주(12일) 오후 찬양 예배 중 파키스탄 선교사 김정민 목사님 오십니다.
* 모두 참석 바랍니다. 

5. 교회사역일정
* 토요전도:11일 25일          * 오후구역예배:19일]]></description>
			<author><![CDATA[정음교회]]></author>
			<pubDate>Tue, 04 Aug 2026 21:58:3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jungumch.com/?kboard_redirect=4"><![CDATA[교회소식]]></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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