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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정음교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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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고린도전서 1장 - 16장]]></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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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고린도전서 1:1-31

1.
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고린도전서는 사도 바울이 약 AD 55년경 에베소에서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신약성경의 7번째 책으로, 교회 안에 발생한 여러 문제(분열, 음행, 소송, 예배 질서 등)를 바로잡고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지도하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고린도는 상업과 문화가 발달한 도시였지만, 우상숭배와 성적 타락이 만연했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교회도 세속적 영향에 흔들리고 있었기에 바울은 교회의 문제들을 교정하고 복음의 본질을 가르쳤습니다. 고린도전서는 "복음 안에서 거룩하고 질서 있는 공동체를 이루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교회의 연합, 성결한 삶, 사랑의 실천, 그리고 부활의 소망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입니다.

2.
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11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12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14 나는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15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16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그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 교회에 나타난 첫 번째 문제는 분열입니다. 분열은 교회의 가장 큰 위기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뒤로 줄을 세우기 위해서 노력을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사람을 만들며 추종자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주 예수와 주의 종들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한 교회는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을 품어야 합니다. 

같은 말이란? 세상의 말이 아니라 복음을 주제로 한 예수 그리스도의 말이며, 같은 마음이란? 그리스도를 머리로 인정하는 믿음이며, 같은 뜻이란?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공동의 목표입니다. 교회는 다른 사람이 모인 공동체이지만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로 하나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나눠지는 자들을 향하여 3가지로 질문합니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즉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입니다. 몸이 절대로 나누어질 수 없음입니다. 교회가 여러 파벌로 나뉘는 것은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찢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두 번째.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느냐? 즉 구원자는 예수입니다. 오직 예수만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러니 예수 외에는 중요한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을 지나치게 높이는 순간 교회는 무너지고 이단과 사이비에 빠지게 됩니다. 

세 번째.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느냐? 세례는 측정 지도자가 행하는 것이지만,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결국 연합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목사의 교회도 장로의 교회도 아닌 오직 주님의 교회입니다. 주님과 연합된 것만이 교회입니다. 

교회가 분열되는 이유는 그리스도보다 사람을 앞세우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교회가 하나 되는 길은 사람보다 그리스도를 높이고, 지도자보다 복음을 붙들고, 나의 주장보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교회의 중심은 사람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3.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입니다. 예수가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를 해결하는 능력, 사탄을 무너뜨리는 능력, 죽음을 이기는 능력, 사람을 새롭게 하는 능력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죄를 이길 수 없지만 십자가의 복음은 죄인을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와 방법입니다.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인간을 구원할 방법이 없습니다. 어떤 인간으로도 죄를 속량할 수 없습니다. 이는 모든 인간의 가진 원죄 때문입니다. 그러니 한분 온전하고 죄없는 자로만 인간의 죄를 벗겨 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없으신 하나님이 인간의 형상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사단은 권능은 율법이요 죄입니다. 그런데 사단은 죄 없으신 예수를 십자가에서 죽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단은 십자가에 속박되고 십자가에 법에 파괴되고 무너질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권능과 지혜를 유능하고 똑똑하고 유력한 자에게 비밀로 하시고, 어리석고 미련하고 약하고 천하고 멸시받는 자에게 오픈하셨습니다. 이것은 29절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인간의 지혜와 능력과 공로를 의지하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자에게 십자가의 비밀을 알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인간의 자랑이 될 수 없습니다. 구원은 학벌의 결과도 아니고, 재물의 결과도 아니고, 능력의 결과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은혜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자랑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십자가이며, 자신의 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주의 십자가의 능력과 지혜로 충만한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린도전서 2:1-16

1.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사도바울의 설교 철학과 복음 전도의 자세를 잘 보여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증거?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만을 증거합니다. 자신의 어떤 말이나 지혜를 의지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고린도는 철학과 수사학이 매우 발달된 도시입니다. 사람들은 화려하고 논리적인 말들을 쏟아내었지만 사도바울은 화려함과 논리보다 더 위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만을 증거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세상의 논리와 화려함보다 아름답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입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3절 ‘심히 떨었노라’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을 떨게한 것이 무엇입니까? 내 말과 내 전도로서 즉 내 능력으로 나타나는 복음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성령의 나타나심’을 간절히 사모하였습니다. 성령의 나타나심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증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에게 있어 심히 떨리는 그 마음이야 말로 성령께서 붙들고 쓰시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복음에 핵심 예수그리스도와 십자가를 붙들 때, 주의 성령이 우리를 붙들어 사용하실 줄 믿습니다. 성령의 나타나심이 이루어 질 줄 믿습니다. 

2.
6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7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9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복음은 세상의 지혜, 통치자들의 지혜가 아닌 성령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지혜로만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것은 영적인 일로만 분별하고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공부만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철학이나 논리로 완전히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께서 마음을 열어 주실 때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의 지혜를 의지하기보다 성령의 조명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복음은 세상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인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것은 성령께서 열어 주실 때에만 바르게 보고 바르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3.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사도바울의 구분은 단순히 똑똑한 사람과 무식한 사람,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의 구분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성령의 지배를 받는가, 받지 않는가의 차이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프쉬키코스(psychikos)로,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을 의미합니다. 즉, 자신의 이성에 의존하는 사람, 자신의 경험에 의존하는 사람, 세상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십자가의 복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죽은 사람이 살아나느냐?" "어떻게 십자가 처형당한 사람이 구원자냐?" "어떻게 예수만이 구원의 길이냐?" 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이 어리석게 보이는 이유는 영적인 눈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령한 자는 원어로 프뉴마티코스(pneumatikos)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모든 것을 판단한다"는 것은 모든 분야의 전문가라는 뜻이 아닙니다. 영적인 진리를 분별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무엇이 죄인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무엇이 참된 가치인지 분별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육에 속한 사람? "패배다" "범죄자의 죽음이다" 라고 봅니다. 반면 신령한 사람? "나를 위한 구속이다" "하나님의 사랑이다" 라고 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세상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신령한 사람은 성령의 눈으로 세상을 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십자가를 실패로 보지만, 신령한 사람은 십자가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봅니다. 신령한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하루 하루 주의 성령으로 살아가는 떨리는 심정으로 살아가게 하시고, 오직 신령한 사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품고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린도전서 3:1-23

1.
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3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4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영적 수준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를 육에 속한 자, 어린 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육신에 속한 자란 불신자를 의미하기 보다는 구원은 받았지만 육적인 가치와 욕심의 지배를 받는 성도를 의미합니다. 어린 아이는 시기 다툼 분열이 특징입니다. 신앙의 성숙이란? 성경적 지식이나 은사적인 특징을 초워라여 겸손과 사랑과 하나 됨을 특징으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성숙해야 합니다. 육에 속한 어린아이의 신앙을 벗어버리고 믿음으로 굳건하게 세워지며 성령의 열매로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선 온유 절재의 삶을 살아가는 성숙함이 있어야 합니다. 

2.
5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8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그런즉 모든 분열과 자랑을 멈추어야 합니다. 우리의 노력과 수고는 아무것도 아니며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심는 이와 물주는 이는 하나입니다. 사역의 방식은 달라도 목적은 하나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경쟁적인 관계가 아닌 협력적 관계로 관계를 정리해야 합니다. 이것이 연합을 위한 성도의 마음가짐입니다. 

가치 있는 재료 금 은 보석으로 건축해야 합니다. 금·은·보석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삶, 믿음, 사랑, 충성, 복음 중심의 사역을 의미합니다. 반면 나무·풀·짚은 인간적 자랑 세속적 방법
자기 영광 육신적 동기를 의미합니다. 이 모든 것은 그날에 판단됩니다. 그 날은 주님의 심판대를 의미합니다. 성도의 구원을 심판하는 자리가 아니라, 성도의 삶과 사역을 평가하는 자리입니다. 중요한 원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얼마나 많이 했는가보다, 어떤 동기로 했는가? 무엇을 위해 했는가? 를 보십니다. 사람 앞에서 화려했던 것도 불 앞에서는 모두 드러납니다. 예수 그리스도 위에 금·은·보석으로 세워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과 사역은 언젠가 주님 앞에서 평가받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칭찬보다 하나님의 인정을 구하며, 믿음으로 사랑으로 충성으로 교회를 세워 가야 합니다.

3.
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18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19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20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21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22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23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16절 여기서 "너희"는 복수형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개인 성도의 몸을 가리키는 고린도전서 6:19과는 조금 다릅니다. 여기서는 한 사람의 성도보다 교회 공동체 전체 를 의미합니다. 즉,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구약시대에는 성막에 하나님이 임재하셨고 솔로몬 성전에 하나님이 임재하셨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공동체 안에 성령께서 거하십니다. 교회가 성전인 이유 교회 건물이 거룩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임재하시는 공동체가 곧 교회입니다.

17절 성전을 더럽히면 멸망 당합니다. "더럽히다"는 말은 파괴하다 무너뜨리다 손상시키다라는 의미입니다. 문맥상 가장 큰 의미는 교회의 분열과 파괴입니다. 고린도교회는 파벌 시기 다툼으로 교회를 무너뜨리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매우 강하게 경고합니다. 교회는 사람의 모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세우는 사람은 하나님께 상을 받지만 교회를 무너뜨리는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①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성령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② 교회를 무너뜨리는 죄를 경계해야 합니다. 시기, 분쟁, 파벌은 성전을 훼손하는 행위입니다. ③ 세상 지혜보다 십자가의 지혜를 붙들어야 합니다.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야 합니다. ④ 사람을 자랑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자랑해야 합니다. 목회자도, 직분자도, 모든 사역도 결국 교회를 섬기기 위한 도구입니다. ⑤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교회는 성령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므로 분열과 인간 자랑을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께 속한 공동체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주의 몸 된 교회의 성도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교회를 세우며 교회의 참 된 일꾼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린도전서 4:1-21

1.
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3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4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바울은 교회 안의 분쟁과 파벌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4장에서는 "그리스도의 일꾼은 어떤 사람인가?" 설명하며, 교회의 지도자와 성도들이 가져야 할 바른 자세를 가르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일꾼입니다. 일꾼은? 배 밑창에서 노를 젓는 하급 선원입니다. 드러남도 없고 주장도 없고 묵묵히 노만을 저어 나아가게 하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교회의 주인이냐 영웅이나 지도자가 아닌 그리스도의 종, 일꾼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일꾼은 청지기입니다. 청지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충성입니다. 충성의 가늠은? 맡겨진 일을 감당하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교회와 가정 직분의 청지기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맡겨진 일에 대한 열매를 물으십니다. 

교회로 아무 것도 판단 할 것없이 하나님의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판단해 주실 것입니다. 사람의 인정이 아닌 하나님의 칭찬이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럼으로 묵묵히 소리 없이 나에게 주어진 청지기의 사역과 사명을 감당해 내시길 기도합니다. 

2.
6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7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8 너희가 이미 배 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
9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10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11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13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6절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하십니다. 말씀 밖은? 대적과 교만한 마음입니다. 7절 모든 것이 주께로 왔으니 우리의 자랑도 교만도 무의미한 것입니다. 사도들은 10절 굶주리고 목마르고 매맞고 핍박받고 비방을 받았습니다. 왜 이런 삶을 살았습니까? 이 길이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죽음 없이는 영광의 부활을 경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9절 사형 선고 받은 자처럼입니다. 당시 로마의 개선 행렬에서는 패배한 포로들이 맨 끝에 끌려와 공개적으로 수치를 당하고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들의 사도적 삶을 그 이미지에 비유합니다. 사도직은 명예의 왕좌가 아니라 희생의 행렬이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받은 모든 것은 은혜로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참된 길은 십자가의 길이어야 합니다. 이 것이 사도바울의 삶의 고백입니다. 나아가서 우리의 신앙에 고백이어야 합니다. 

3.
14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17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18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19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
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21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14절 사도바울의 권면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책망은 파괴가 아닌 회복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꾸짖는 것은 미워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없는 책망은 상처가 되지만 사랑으로 하는 책망은 회복의 통로가 됩니다. 15절 바울은 영적 아버지입니다. 교회는 단순히 지식을 가르치는 곳이 아닙니다. 영혼을 낳고 돌보고 눈물로 기도하는 영적 가족 공동체입니다. 목회자와 교사도 영적 아버지와 어머니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16절 나를 본 받으라, 왜 본받으라고 했는가? 당시에는 신약성경이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성도들은 복음을 삶으로 보여주는 모델이 필요했습니다. 바울은 겸손 희생 충성 사랑을 실제로 보여주었습니다.

20절 말이냐 능력이냐? 이 말씀은 고린도전서 전체의 핵심 중 하나입니다. 고린도는 수사학과 철학이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말 잘하는 사람은 존경받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합니다. 복음은 말솜씨 경쟁이 아니다. 여기서 능력이란? 성령의 역사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죄인이 회개하는 것 사람이 변화되는 것 거룩해지는 것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짜 능력은 병 고침보다, 먼저 사람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교회의 일꾼 되게 하여 주옵소서. 교만하지 않으며 순종하게 하시고 모든 것 위에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사역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린도전서 5:1-13

1.
1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2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3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런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4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5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전서 5장은 교회 안에 있는 심각한 죄와 교회의 거룩성에 대한 말씀입니다. 바울은 분쟁과 파벌 문제(1-4장)를 다룬 후, 이제 교회 내부의 도덕적 타락 음행의 문제를 다룹니다.

고린도 교회는 음행의 문제에 빠져있습니다. 단순한 음행이 아니라 ‘아버지의 아내’ 즉 계모와의 관계를 맺은 사건입니다. 이는 도덕적으로나 율법적으로 금지된 행위입니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죄 자체보다도 이 문제를 대하는 교회의 태도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죄를 슬퍼하기 보다는 관용과 자유를 자랑하고 이 문제를 묵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죄를 범한 사람보다도 죄를 용납하는 교회와 공동체의 태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죄를 범한 사람을 5절 사탄에게 내어 주라 말하고 있습니다. 사탄에게 내어 주라는 것은? 저주의 뜻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 밖으로 내 보내어서 세상의 고통을 경험하게 함으로서 회개하도록 하라는 의미입니다. 목적은 영혼을 살리는데 있는 것입니다. ‘이는 육신으로 멸하지만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징계의 목적은 회복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십니다. 교회의 권징은 처벌이 아니라 치료입니다.

2.
6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8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

6절 사도 바울은 두 번째로 누룩의 비유를 사용하여 죄의 파급력을 경고합니다. 누룩은 아주 적은 양이지만 결국 반죽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의 죄를 가볍게 여기고 방치하면 그 영향은 개인에게만 머물지 않고 공동체 전체로 퍼져 나갑니다.

그래서 교회는 죄를 묵인하거나 감싸 주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죄를 덮어 버리는 것은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교회는 죄를 드러내어 정죄하기 위한 공동체가 아니라, 죄를 깨닫게 하여 회개에 이르게 하는 공동체입니다. 만일 공동체가 죄를 방치하고 용납한다면 죄를 지은 사람은 담대함을 얻게 됩니다. 더 나아가 다른 성도들에게도 잘못된 영향을 미쳐 "이 정도는 괜찮다"는 생각을 심어 줄 수 있습니다. 결국 죄의 씨앗이 공동체 안에 퍼져 더 큰 타락을 가져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고 권면합니다. 이는 죄인을 버리라는 뜻이 아니라 죄를 제거하라는 뜻입니다. 죄를 뿌리 뽑아 회개하게 하고, 하나님 앞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라는 것입니다. 권징의 목적은 정죄가 아니라 회복이며, 배제가 아니라 구원입니다. 특별히 7절 유월절에 누룩을 제거하였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옛 죄악의 삶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교회의 거룩성은 인간의 노력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희생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억할 때 지켜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죄를 숨기는 공동체가 아니라 회개를 돕는 공동체이며, 죄인을 정죄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죄인들을 그리스도께로 다시 돌아오게 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권면한 목적입니다.

3.
9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10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11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12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13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권면을 오해한 것 같습니다. 바울이 "음행하는 자를 사귀지 말라"고 하자,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까지 끊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9-13절에서 세상 사람의 죄와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의 죄를 구별하여 설명합니다.

10절 세상의 음행하는 자입니다. 바울은 세상 사람들에게 죄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불신자는 예수님을 모릅니다. 복음을 알지 못합니다. 성령의 다스림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음행과 탐욕과 우상숭배가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세리와 함께 식사하셨고 죄인들과 함께하셨으며 창녀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교회가 세상과 완전히 단절한다면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만일 그리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성도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며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문제는 11절 형제라 일컫는 자의 음행입니다. 즉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말하고 교회에 속해 있으며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음행과 탐욕과 우상숭배를 지속하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세상 사람은 아직 복음을 모르는 상태이지만, 교회 안의 사람은
복음을 들었고 진리를 알며 하나님의 백성이라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죄를 고집한다면 공동체 전체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바울이 문제 삼는 것이 무엇입니까? 죄 자체보다 회개 없는 지속성, 본문은 죄를 한 번 지은 사람을 내쫓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의 모든 인물들도 죄를 범했습니다. 다윗도 범죄했고, 베드로도 예수님을 부인했고 바울도 자신을 죄인 중 괴수라고 했습니다. 차이는 무엇입니까? 회개입니다. 고린도전서 5장의 사람은 죄를 짓고 있으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돌이키지 않고 교회도 그것을 묵인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강하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의도는 "죄인을 버리라"가 아니라 "교회를 거룩하게 하여 죄인을 회개시키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 죄인을 향해서는 복음의 문을 열어야 하고, 교회 안의 죄에 대해서는 거룩함을 지켜 회개와 회복을 이루어야 합니다.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고 각종 죄와 어둠이 틈타지 못하는 성결함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회개의 삶으로만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린도전서 6:1-20

1.
1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2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3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4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5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6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7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8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

고린도전서 5장에서 교회 안의 음행 문제를 다룬 바울은, 6장에서는 성도들 사이의 분쟁과 송사 문제를 다룹니다. 고린도 교회는 세상 법정에 서로를 고소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것이 복음과 교회의 본질에 맞지 않는다고 강하게 책망합니다.

당시 재판관들은 대부분 불신자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형제 간의 문제를 세상 사람들에게 맡기고 있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깁니다. 바울이 말하는 핵심은 단순히 "법정에 가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인데 형제를 원수처럼 대하고 세상 앞에 교회의 수치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로서 수치스럽게 살지 말고 6-8절 말씀처럼,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내 권리를 끝까지 주장하라고 말하지만, 복음은 형제를 잃어버릴 만큼 권리를 주장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5:39 누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 하셨습니다. 교회 안의 사랑과 화목이 개인의 권리보다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교회와 성도가 세상으로 판단 받지 않도록 살아야겠습니다. 인간의 권리보다는 복음적 관계가 중요합니다. 

2.
12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13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하나님은 이것 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
14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15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6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ㄱ)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17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18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지금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헬라주의적인 이원론을 이해해야 합니다. 당시 교회는 방종주의가 만행되고 있었습니다. 몸은 어차피 악하고 사라질 것이니 마음대로 사용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영혼만 깨끗하면 되지 육체로 무엇을 하든 무슨 상관인가?" 그래서 음행도 가볍게 여겼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자주 사용하던 구호입니다. "우리는 은혜 아래 있다." "율법에서 자유하다." 이를 핑계로 육체적 욕망을 정당화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배가 음식을 위해 존재하듯 몸도 성욕을 위해 존재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먹는 것 성관계를 같은 수준의 본능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전혀 다르게 말합니다.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이것이 바울의 핵심 선언입니다. 몸은 욕망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주님을 위한 존재입니다.

14절 헬라 철학은 영혼은 영원함, 육체는 버려질 껍데기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님의 육체 부활을 믿습니다. 그리고 성도도 육체로 부활합니다. 이것은 헬라 철학과 정면 충돌합니다. 복음의 선언은 몸은 버려질 것이 아니다. 몸도 구속받고 몸도 부활하고 몸도 영광을 입는다. 그러므로 몸을 함부로 사용할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19절 여기서 바울은 이원론을 완전히 무너뜨립니다. 헬라 철학에서 주장한 영혼만 중요하다가 아니라 바울이 말하는 몸도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에 임했고 성전에 임했습니다. 이제는 성도의 몸이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바울의 결론은 매우 분명합니다. 몸은 욕망의 도구가 아니라 성령의 전이며 그리스도의 지체이며 장차 부활할 몸이며 주님의 소유입니다. 그러므로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몸은 중요하지 않다"가 아니라 "몸은 주님의 것이다."
"영혼만 구원받는다"가 아니라 "몸도 구원받고 부활한다."
"몸은 욕망을 위해 존재한다"가 아니라 "몸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존재한다."
따라서 성도의 삶은 영적인 영역만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먹고, 말하고, 일하고, 섬기고, 결혼하고, 살아가는 모든 육체의 삶까지도 하나님께 드려진 예배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성도로서 세상으로 판단 받지 않게 하시고, 온 영과 혼과 육이 그리스도 예수에 오실 그날에 흠 없이 보존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린도전서 7:1-24

1.
1 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 말하면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2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3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4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5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6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허락이요 명령은 아니니라
7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
8 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9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라 정욕이 불 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

7장은 결혼, 독신, 이혼,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음란한 문화 속에 있었는데,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결혼 자체가 영적으로 좋지 않다"고 생각하며 극단적인 금욕주의를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균형 잡힌 답변을 제시합니다.

결혼 2절 음란을 피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 합니다. 5절 결혼을 하였으면 의무를 다하며 분방하거나 떨어져 지내지 말 것을 요청합니다. 이는 9절 절제 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정욕 가운데 죄를 짓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나아가 부부의 관계는 단순히 육적인 음욕을 피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라. 부부의 관계는영적인 관계 그리스도와 신부된 우리의 연합을 보여주기 위한 비밀입니다. 부부는 한몸이며 한 지체입니다. 이처럼 예수그리스도와 우리는 한 몸이며 한 지체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몸입니다. 연합되어서 사는 것이 신앙이고, 믿음입니다. 부부의 관계를 통하여 연합을 깨달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때문에 부부의 관계는?
하나님이 주신 연합의 관계이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을 보여주는 모형이다.
함께 동행하는 복음의 실습장이다. 
이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2.
10 결혼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고
11 (만일 갈라섰으면 그대로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12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를 버리지 말며
13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14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15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사도바울은 이혼에 대한 말씀을 증거합니다. 먼저 10-11절 대전제 원칙은 이혼하지 말라입니다. 12-13절에서 특별히 한 쪽(불신자)에서 이혼을 원치 아니할 때 버리지 말고 참고 품으며 살 것을 명령합니다. 그러나 15절 이혼이 가능한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불신자 배우자가 이혼을 원할 경우는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12-15절 내용을 사도 바울이 말하면서, 12절에서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는 말에 걸려서 우리가 생각하길 이것은 사도 바울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라고 판단한다면 이것을 또한 잘못된 것입니다.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는 것은 주님이 공생애 가운데 이것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지, 지금 12-15절의 내용의 주장이 자신의 생각에서 나온 주관적인 판단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성경에 기록되는 순간 ‘성경은 성경의 권위를 가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딤후 3:16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3.
17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18 할례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19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20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21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22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24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예수를 믿고 나서
결혼했으면 독신이 되어야 하나? 독신이면 결혼해야 하나? 할례를 받아야 하나? 종이면 자유인이 되어야 하나? 끊임없이 자신의 외적 상태를 바꾸려 했습니다.

이에 바울은 세 번이나 반복해서 말합니다. "17절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지내라" "20절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24절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즉 외적인 어떤 상태를 바꾸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부르신 대로 살아가는 삶 즉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찾아 행하는 삶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나의 상태가 환경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어떻게 살까?를 고민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23절 이를 위하여 우리 주님이 우리를 사셨으니 우리는 사람의 종이 되지 말고 주님의 종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영적 부부의 관계를 통하여 연합을 이루며, 우리를 피 값으로 사신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린도전서 7:25-40

1.
25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스러운 자가 된 내가 의견을 말하노니
26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27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28 그러나 장가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본문은 결혼과 독신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 중 마지막 부분입니다. 이 본문은 단순히 결혼 여부를 결정하는 지침이 아니라, 종말을 바라보며 어떻게 하나님께 집중하여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25절 여기서 "처녀"는 미혼 남녀 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계명은 없지만, 사도로서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권면합니다. 26절 "임박한 환난 때문에" 당시 교회는 박해와 어려움 가운데 있었습니다. 바울은 결혼이 죄라는 뜻이 아니라, 환난의 시대에는 독신이 유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27절 아내가 있으면 이혼하려 하지 말라. 독신이면 굳이 결혼을 강요받을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28절 "장가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결혼과 독신 모두 하나님의 뜻 안에 있습니다. 바울은 결혼을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결혼하면 세상적 염려와 책임이 늘어난다는 현실을 말합니다.

결혼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바울은 결혼을 높이거나 독신을 높이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얼마나 집중할 수 있는가를 중요하게 봅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2.
29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0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1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29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즉 때가 가까워진즉 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재림의 때를 기다리는 자입니다. 그 때가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에 성도는 영원에 대한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29-30절 아내있는 자는 없는 듯이, 우는 자는 울지 않는 듯이, 기쁜 자는 기쁘지 않은 듯이, 매매하는 자는 없는 자 같이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 말의 핵심은? 삶의 책임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것에 가치를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31절 세상의 외형(스케마)는 일시적인 배경이며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은 영원하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 나라만이 영원한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붙들고 있는 재산 직업 인간관계 명예 모두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삶은 영원히 남습니다.

3.
32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 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 하되
33 장가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까 하여
34 마음이 갈라지며 시집 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까 하느니라
35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당하게 하여 흐트러짐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독신자 주의 일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힘쓰지만,  기혼자 배우자를 돌보고 가정을 책임지기 때문에, 35절 주를 섬기는 일에 흐트러짐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독신은 하나님께 더욱 집중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성도의 삶은 35절 주를 섬기기 위한 최상의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은? "결혼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닙니다. "남은 인생을 누구를 위해 살 것인가?"입니다. 결혼한 사람은 가정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고, 독신자는 자유함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모든 성도는 세상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에 살되 세상에 매이지 말고, 결혼했어도 하나님을 위해 살고, 독신이어도 하나님을 위해 살며, 모든 삶의 중심에 그리스도를 두라."입니다. 이 같은 은혜와 결단이 이루어지길 소망합니다. 

사랑의 아버지!!
모든 것이 주를 위한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신 것으로 주를 섬기며 세상으로가 아닌 하나님이 나라를 목표로 경주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이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린도전서 8:1-13

1.
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2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3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고린도 교회는 우상숭배가 만연한 도시 가운데 있었습니다. 시장에서 판매되는 고기의 상당수 가 우상에게 제사한 후 나온 고기였기 때문에 성도들 사이에 논쟁이 생겼습니다. 한쪽은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니 먹어도 된다." 라고 주장했고, 다른 쪽은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것은 우상숭배와 관련된 일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단순히 "먹어도 된다", "먹으면 안 된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보다 사랑이 중요하다"는 원리를 가르칩니다.

신앙은 지식이 아닌 관계가 중요합니다. 지식적인 부분이 지나치게 강조되는 것을 율법주의라고 합니다. 반면에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를 통하여 진리를 추구하는 것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무엇이 중요합니까? 당연히 관계적인 복음입니다. 지식의 필요는 관계를 이루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성경 본문 3절은 지식이 아닌 사랑을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 사랑을 하나님이 알아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지식적으로 아는가보다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 주시는가? 이것이 핵심입니다.

2.
4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5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6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세상에는 많은 우상이 있지만 하나님은 한 분뿐입니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반드시 섬깁니다. 문제는 "무엇을 섬기고 있는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존재합니다. 세상은 "네 인생은 네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너는 하나님을 위해 존재한다" 고 말합니다.

우상의 섬기는 일이나 제물의 먹는 일이 아무것도 아닌 것은? 우리가 한 하나님, 한 주 예수그리스도를 섬기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영적본질이며 관계의 본질입니다. 

3.
7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8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
9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10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12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13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그래서 어찌하는 말입니까? 우상의 제물로 인하여 형제가 실족한다면,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고 마신다고 해서 더 잘 사는 것도 아니요, 못 사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먹고 마시는 일따위로 고민하고 말아야 합니다. 

먹고 마시는 일을 초월하여 하나님과 관계를 생각하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생각해야 합니다. 관계란 사랑이며, 관계란 복음입니다. 바울은 형제를 살리기 위해서 평생 우상에게 제사드린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증거를 위하여, 성도의 신앙과 성숙을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것이 믿음이며 결단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신앙적 지식이 아닌 사랑이라는 관계로 복음을 이룰 수 있는 성도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린도전서 9:1-27

1.
1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2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 됨을 1)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3 나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변명할 것이 이것이니
4 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
5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6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
7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8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9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사도바울은 1-2절에서 자신의 사도됨을 선포합니다. 고린도 교회안에서 사도 바울의 권위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을 보았고, 고린도 교회를 개척하였으며, 교인들이 자신이 사도임을 증명할 열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이 있으며, 교회를 세운 사명이 있고, 성도라는 열매가 있는 참 사도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누가 사도이며 주의 종입니까? 예수를 품고, 교회를 세우며, 성도로 열매를 맺는 것이 사도이며 주의 종입니다. 

3-14절 사도들에게 주어지는 정당한 권리를 언급합니다. 4절 교회의 지원을 받을 권리, 5절 결혼할 권리, 6절 생계 걱정 없이 사역할 권리입니다. 이같은 권리는 당연한 것이며, 구약 시대에 신명기 25:4절을 인용하여 9절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는 말씀을 예를 들었습니다. 

2.
15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17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18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 모든 권리를 자발적으로 포기할 것을 선언합니다. 이상의 것들을 누리는 것이 당연하지만 사도바울은 이 사도적 권리를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무엇때문입니까? 15절 복음 전파에 조금이라도 방해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는 돈 문제에 민감한 도시였습니다. 바울이 사례비를 받으면 사람들이 "저 사람도 돈 벌려고 복음 전한다" 고 오해할 수 있었습니다. 때문에 오해의 소지를 피하기 위함입니다. 16-17절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바울은 복음 전파를 자신의 사명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예레미야처럼 전하지 않을 수 없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습니다. 18절 그의 상급은 돈이 아닙니다. 복음을 값없이 전하는 기쁨 자체가 상급입니다. 복음으로부터 받는 기쁨을 큰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3.
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6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이 부분은 선교와 전도의 핵심원리입니다. 눈높이 선교와 전도입니다. 유대인에게 유대인처럼, 율법 없는 자에게는 없는 자처럼, 약한 자에게 약한 자처럼입니다. 이 모든 원칙은 하나 22절 여러 사람, 몇 사람이라고 구원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전달 방법을 달리하는 것입니다. 

24절 우리는 운동장에서 달음질 하는 사람입니다. 이는 오직 하나님 나라의 상급을 받기 위한 달음질입니다. 25절 때문에 사도바울처럼 모든 것에 절제해야 합니다. 권리라도 자유라도 절제하며 자제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신앙은 절제와 훈련의 경주입니다. 구원은 은혜로 받지만 성화와 거룩의 삶은 끊임없는 훈련과 순종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27절 마지막 복음을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리라. 무슨 말씀입니까? 분명히 버림을 받는 자가 있다는 전제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

사랑의 아버지!!
권리와 자유를 포기하고 살아감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자기 절제임을 고백합니다. 우리의 생명과 구원받지 못한 자의 생명을 끝까지 보존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린도전서 10:1-33

1.
1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3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5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이스라엘은 특별한 민족입니다. 이스라엘의 특별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택에 있습니다. 이를 우리는 선민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선민으로 특별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민족입니다. 구름은 불기둥입니다. 바다는 홍해의 사건입니다. 세례는 영적 할례와 연합입니다. 이들은 신령한 음식인 하늘의 만나를 먹고, 신령한 음료 반석에서 솟아나는 물을 마셨습니다. 즉 이같이 은혜를 받은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4절에서 이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다 구름 아래 있었고, 다 바다를 건넜고, 다 세례를 받고, 다 만나를 먹고, 다 물을 마셨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다 받았음에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2.
6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7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ㄱ)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8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9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10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11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무엇때문입니까? 6절 악을 즐겨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 세대가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순종으로 멸망한 이유를 네 가지 죄로 설명합니다. 7절 우상숭배, 8절 음행, 9절 하나님을 시험, 10절 하나님을 원망함입니다. 

*우상숭배의 본질은? 단순히 절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이 우상입니다. 돈 성공 쾌락 명예 자기 자신입니다. 우상의 신전에서 식사하며 "나는 자유하다"고 말하던 성도들에게 "금송아지 사건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음행입니다. 배경은 민수기 25장 바알브올 사건입니다. 모압 여인들과 음행하며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습니다. 이사건으로 죽은 자가 24,000명입니다. 바울은 "23,000명"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하루 동안 죽은 숫자를 말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성경에서 음행은 육체적 죄, 하나님에 대한 영적 간음 두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님보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도 영적 음행입니다.

*주를 시험한다는 뜻은 하나님의 능력을 확인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신앙으로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면 해보시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면 증명해 보라? 와 같은 태도입니다. 믿음은 이해 후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원망입니다.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현실을 원망했습니다. 그 결과 심판이 임했습니다. 원망의 본질은 단순한 불평이 아닙니다. 사실상 "하나님이 나를 잘못 인도하고 계신다" 는 불신앙입니다. 감사는 믿음의 언어이고, 원망은 불신앙의 언어입니다.

광야에서 망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아니라, 은혜를 받고도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상숭배, 음행, 하나님을 시험하는 태도, 원망을 멀리하고 끝까지 믿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과거 이스라엘의 실패는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3.
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
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32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그런즉 결론입니다. 그런즉 우리는 선 줄로 생각하며 교만하지 말고 늘 넘어질까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또한 시험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의 유익을 구하며, 많은 사람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충성된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10장이 우리에게 주는 결론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믿음의 경륜과 직분을 자랑하지 않으며, 겸손으로 경주하며, 겸비함으로 주님의 나라를 이룰수 있는 주의 백성이 되게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린도전서 11:1-34

1.
2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전통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3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4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5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라
6 만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가릴지니라
7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를 마땅히 가리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8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9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10 그러므로 여자는 천사들로 말미암아 권세 아래에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11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12 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고린도전서 11장을 한마디로 정리하라면? 예배에 대한 질서입니다. 당시 교회안에는 예배적인 질서과 규례가 존재했습니다. 예를 든다면, 4절 남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한다든지, 5절 반대로 여자가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하는 것은 당시의 시대에 있어서 예배의 질서를 무너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형태의 질서를 가지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중요한 것임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배 가운데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와 권위를 존중하라는 원리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요즘 식 질서로 표현하고 나타낸다면? 예배중 너무 짧은 치마를 입고 온다든지, 또는 슬리퍼나 다른 사람의 시선을 거슬리는 옷을 입고 예배드리는 모습은 좋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예배중 핸드폰을 본다든지, 울린다든지 등 모든 것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질서에서 벗어난 행위입니다. 

이같이 예배의 질서를 지킨다는 것의 핵심은? 하나님 중심의 마음가짐입니다. 내가 편한 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높이고, 공동체에 덕을 세우며, 예배 가운데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는 태도가 참된 예배의 질서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 아래에서 드려져야 합니다. 예배는 내 자유를 드러내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존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리이다.

2.
17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18 먼저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어느 정도 믿거니와
19 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20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21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22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1-16절이 예배의 외적인 질서라면, 17-34절은 예배의 본질적인 질서, 즉 성도들 사이에 사랑과 연합에 관한 말씀입니다. 

특별히 17-22절은 성만찬이 오히려 분열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가정집에 모여 성만찬을 했는데, 먼저 온 부유한 사람들은 음식을 많이 먹고 심지어 술에 취하기까지 했습니다. 반면 늦게 오는 가난한 성도들은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성만찬은 하나 됨을 나타내야 하는데, 오히려 빈부격차와 차별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교회안에 내적 질서인 사랑이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3.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27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28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29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30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31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32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33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34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밖의 일들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바로잡으리라

이에 사도바울은 성만찬의 의미를 다시 새기며, 고린도 성도들에게 깨우침을 주고 있습니다. 
깨우침을 통하여 예배의 질서와 하나님의 관계를 이루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먼저 23-26절 성만찬의 3가지 의미입니다. 
① 24-25절 과거를 돌아봄 - 십자가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성만찬의 첫 번째 의미는 기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하시면서 떡과 잔을 자신의 몸과 피에 비유하셨습니다. 떡은 찢기신 그리스도의 몸, 잔은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성만찬을 할 때마다 "내 죄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셨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내가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다시 기억합니다. 성만찬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를 현재 내 삶에 새롭게 적용하는 시간입니다. 교회는 성만찬을 통해 십자가를 기억합니다.

② 28절 현재를 돌아봄 -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성만찬은 자기 성찰의 시간입니다. 바울은 성찬에 참여하기 전에 자신을 살피라고 권면합니다. 이것은 "나는 죄가 없나?" "나는 완전한가?" 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지금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가? 나는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살고 있는가? 나는 형제와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가? 나는 십자가의 은혜를 잊고 살고 있지는 않은가? 를 점검하는 것입니다. 성만찬은 거울과 같습니다. 거울을 보면 얼굴 상태를 확인하듯이, 성만찬은 영혼의 상태를 점검하는 시간입니다.

③ 26절 미래를 바라봄 -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성만찬은 과거만 바라보는 의식이 아닙니다. 앞으로 오실 주님을 바라보는 소망의 예식입니다 
성만찬은 장차 이루어질 천국 잔치의 예고편입니다. 성도는 성찬에 참여하면서 "주님은 다시 오실 것이다."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라는 소망을 붙잡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박해와 고난 속에서도 성만찬을 행하며 재림의 소망을 확인했습니다.

즉 성만찬은 뒤를 돌아보며 십자가를 기억하고, 안을 돌아보며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고, 앞을 바라보며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는 예식입니다. 즉 성만찬은 십자가의 은혜를 기억하며, 현재의 믿음을 점검하고, 장차 오실 주님을 소망하는 복음의 예식인 것입니다.

질서의 회복을 통하여 성도들 사이의 사랑과 연합의 질서를 교회안에서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교회안에서 예배의 질서를 이루고 하나님과의 관계와 성도간의 온전한 관계를 이루는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린도전서 12:1-31

1.
1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2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4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5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6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7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전서 12장을 우리는 은사장이라고 합니다. 고린도교회는 각종 은사를 받은 성도들입니다. 그런데 은사를 받았지만, 그 은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은사가 자신의 자랑이 되고 교만이 되는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이에 사도바울은 12장을 통하여 은사를 정리하고 교회를 질서를 바로 잡고자 성경의 본장을 기록하게 됩니다. 

먼저, 모든 은사는 4절 같은 성령, 5절 같은 주, 6절 같은 하나님안에서 주어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은사의 출발점이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목적은 7절 사람으로 신앙과 믿음에 유익을 주기 하기 위함에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은사를 가지고 자신을 자랑할 것도 드러낼 것도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세움에 필요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2.
7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8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9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0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
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22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23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24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하나님은 7-11절 9가지 은사와, 27-28절 8가지 직분의 일을 한 성령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같은 은사와 직분을 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① 7절 공동체의 유익를 주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유익"은 개인의 유익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 전체의 유익을 말합니다. 지혜의 말씀은 교회를 바르게 인도하기 위해 지식의 말씀은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믿음의 은사는 공동체를 격려하기 위해, 병 고치는 은사는 하나님의 긍휼을 나타내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은사는 "나를 위해"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주신 선물입니다.

② 11절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주셨습니다.
은사는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왜 나는 저 은사가 없을까?" 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은사를 어떻게 사용할까?" 를 고민해야 합니다.

③ 25절 서로를 섬기게 하시기 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일부러 다양한 은사를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서로 필요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예를 들어 교사는 가르치고, 리더는 다스리고, 봉사자는 섬기고, 기도자는 중보하고, 위로의 은사가 있는 사람은 격려합니다. 그래서 누구도 혼자 신앙생활 할 수 없도록 만드셨습니다.

④ 27절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주셨습니다.
교회는 몸이고 성도는 지체입니다. 눈만 있어서도 안 되고, 손만 있어서도 안 되고, 발만 있어 도 안 됩니다. 각각의 은사와 직분은 몸을 건강하게 세우기 위해 존재합니다. 은사는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몸을 위한 기능입니다. 직분은 개인의 지위가 아니라 몸을 위한 섬김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나를 높이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직분도 나의 명예를 위한 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다른 은사와 직분을 주신 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고, 서로를 섬기며,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사를 자랑할 것이 아니라 사용해야 하고, 직분을 누릴 것이 아니라 섬겨야 합니다. 그때 교회는 건강한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가진 은사와 직분으로 교만하지 않게 하시며, 부르신대로 주신대로의 사명을 감당하며 하나님의 교회와 나라를 세우는 협력자 참된 지체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린도전서 13:1-13

1.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13장을 우리는 사랑장이라고 합니다. 12장에서 7-11절 9가지 은사와, 27-28절 8가지 직분을 살펴보았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은사는 풍부했지만 사랑은 부족했습니다. 사랑이 결여된 채로 심각한 분열이 있었고, 사랑보다 지식을 앞세웠습니다. 성만찬 역시 사랑없이 행하여졌습니다. 

우리는 많은 은사와 능력을 하나님께 구해야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모든 은사와 직분은 보여지고 드러나는 결과라고 한다면, 사랑은 모든 은사와 직분의 내적 동기 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무엇을 했는가? 그 결과과 어떠한가? 많은 열매를 맺었는가?를 물어보시는 하나님이기 전에 우리가 어떤 동기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때문에 즉 하나님은 사람의 외적 모습 보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때문에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오늘날 교회에도 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성경 지식이 많아도 사랑이 없으면 사람을 세우지 못합니다. 직분이 높아도 사랑이 없으면 공동체를 살리지 못합니다. 봉사를 많이 해도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고린도전서 13:1-3). 사랑은 은사를 완성하는 힘이며, 모든 사역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로 만드는 원리입니다. 

2.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1)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도바울은 사랑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① 사랑은 오래참고입니다. 원어의 의미 '마크로뒤메오(μακροθυμέω)는 분노를 오래 미루다. 쉽게 화내지 않는다. 상대를 끝까지 기다려 준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오래 참으신 사랑입니다. 이는 베드로후서 3:9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는 사랑은 상대가 변할 시간을 주는 것입니다. 이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② 사랑은 온유입니다. 원어는 "친절하다." "선을 베푼다."라는 의미입니다. 단순히 착한 사람이 아니라, 상대에게 적극적으로 유익을 주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상대가 받을 자격이 있어서 베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③ 사랑은 시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시기는 남의 축복을 슬퍼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남의 성공을 자신의 기쁨으로 받아들입니다. 시기는 자신이 중심일 때 생깁니다. 사랑은 예수님이 중심일 때 가능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누가 더 큰 은사를 받았는가" 를 경쟁했습니다. 바울은 사랑하는 사람은 경쟁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④ 사랑은 자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랑은 자신을 높이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신보다 상대를 높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도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⑤ 사랑은 교만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만은 내가 하나님보다 높아지는 것입니다. 사랑은 겸손하게 자신을 낮춥니다. 교만은 모든 죄의 시작입니다. 사랑은 십자가처럼 자신을 비우는 것입니다.

⑥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무례히 행함은 다른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의 인격을 존중합니다. 예수님은 죄인까지도 귀하게 대하였습니다. 

⑦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여기가 사랑의 핵심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나"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상대를 먼저 살렸습니다. 마가복음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 하고..." 사랑은 자기중심에서 그리스도 중심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⑧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화를 내지 않는 것이 아니라 화를 오래 품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성전을 깨끗하게 하실 때는 진노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진노에는 자기 욕심이 없었습니다.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이는 회계장부에 기록한다는 뜻입니다. 상대의 잘못을 계속 적어 두지 않습니다. 용서는 기억을 삭제하는 것이 아니라 빚을 탕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더 이상 계산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우리도 기억하지 말아야 합니다. 

⑨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죄를 묵인하지 않습니다. 잘못된 것을 "괜찮다." 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감정보다 진리를 선택합니다.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셨습니다.

⑩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머지 사랑은 ‘모든 것’입니다. 모든 것에서 예수를 발견하고 예수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래서 참음도 믿음도 바람도 견딤도 가능한 것입니다. 

3.
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사랑은 영원한 것입니다. 믿음고 소망도 사라지지만 영원히 천국에서 우리가 해야할 일이 사랑입니다. 때문에 사랑이 제일입니다. 

사랑이 제일인 세 가지 이유?
① 사랑은 하나님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4:8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은 사랑을 가지신 분이 아니라,사랑 자체이십니다.
② 사랑은 모든 계명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2:37-40 예수님은 율법 전체를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으로 요약하셨습니다. 사랑이 없는 순종은 형식이 되지만, 사랑에서 나오는 순종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가 됩니다.
③ 사랑은 영원히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은사는 이 세상에서 교회를 세우기 위해 필요하지만, 사랑은 하나님 나라에서도 계속됩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일시적인 은사보다 본질적이고 영원한 가치를 지닙니다.

고린도 교회는 "어떤 은사가 가장 큰가?"를 묻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어떤 성품이 가장 큰가?"를 가르쳤습니다. 교회의 성숙함은 은사의 화려함으로 측정되지 않습니다.
사랑 없는 방언은 소음이 됩니다. 사랑 없는 지식은 교만이 됩니다.
사랑 없는 봉사는 의무가 됩니다. 사랑 없는 믿음은 사람을 세우지 못합니다.
반대로 사랑이 있으면 모든 은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교회를 세우는 도구가 됩니다. 사랑은 모든 은사의 토양이며, 모든 사역의 동기이며, 하나님의 백성이 영원한 나라에서도 간직할 가장 큰 덕목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주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채우시고, 채우신 사랑으로 교회를 세우는 믿음의 종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린도전서 14:1-19

1.
1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14장은 사랑으로 덕을 세우는 은사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성령의 은사가 풍성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은사를 공동체를 세우기보다 자신의 영적 우월성을 드러내는 데 사용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특히 방언을 가장 뛰어난 은사로 여기며 자랑하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는 은사의 다양성을, 13장에서는 사랑의 중요성을 설명한 후, 14장에서는 교회 안에서 은사가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칩니다. 핵심 원리는 단 하나입니다. "은사의 목적은 나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바울은 은사를 설명하면서 먼저 "사랑을 따르라"고 말합니다. 고린도교회는 은사는 많았지만 사랑이 부족했습니다. 사랑 없는 은사는 교만을 만들고, 분쟁을 만들고 사람을 상하게 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은사를 다스리면 교회를 세우고 사람을 살립니다. 사랑은 은사보다 높은 가치입니다.

2.
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3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5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6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7 혹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8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
9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10 이같이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많으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11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외국인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외국인이 되리니
12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그래서 3절 사도바울은 방언보다는 교회의 덕을 세우는 예언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4절 방언은 자기의 덕과 유익을 위한 것이요, 예언은 교회와 공동체의 덕을 위한 것입니다. 5절 방언을 말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나, 방언보다는 예언을 힘쓰라고 권면합니다. 

6-12절 방언의 문제점은? 알아 들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교회안에서 하는 방언을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와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3.
13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14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15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16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17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18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9 그러나 교회에서 내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그렇다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13절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즉 방언을 알아 들고 전할 수 있는 은사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통역을 예언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통역에는 자신의 방언 통역이 있고, 다른 사람의 방언을 통역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필요에 따라 이것을 주실 것이며 할 수만 있다면 통역을 구하여 통역의 은사를 받을수 있길 소망합니다.

14-15절 방언을 말하는 자의 기도의 방법입니다. 방언으로 기도하는 자는 영으로 기도하고, 마음으로 함께 기도하여 영과 마음이 함께 기도하고 찬송하라는 것입니다. 18절 사도바울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방언을 말함을 감사하다고 고백합니다. 방언의 무익론이 아니라 유익함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방언은 자신을 덕을 세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9절 그리고 교회안에서는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낫다라고 정의합니다. 이말의 핵심은? 교회의 덕과 유익입니다. 즉 모든 은사와 사역의 원리는? 교회와 사람을 세움입니다. 설교도 사람을 세워야 합니다. 찬양도 사람을 세워야 합니다. 기도도 사람을 세워야 합니다. 봉사도 사람을 세워야 합니다. 리더십도 사람을 세워야 합니다. 아무리 뛰어난 은사라도 공동체를 세우지 못하면 본래 목적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때문에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 다섯 마디의 깨달은 말이 좋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사랑안에서 발견된 은사를 통하여 교회와 공동체의 덕과 유익을 세우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린도전서 14:20-40

1.
20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21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22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
23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24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25 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

고린도교회는 성령의 은사가 매우 풍성했습니다. 방언 예언 병 고침 등등 그러나 문제는 은사가 많았지만 질서가 없었습니다. 예배시간마다 여러 사람이 동시에 방언하고 통역도 없고, 서로 경쟁하듯 말하고 예언도 차례 없이 하고 예배가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사람들은 "내 은사가 더 크다." "내가 더 영적이다." 주장하면서 무질서한 예배의 모습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이에 사도바울은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교회의 품위와 질서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20절에서 사도바울은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이 아니라 지혜있는 장성한 믿음의 분량을 이룰 것을 당부합니다. 장성한 믿음의 사람은? 교회의 덕과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신앙인입니다. 때문에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방언과 예언을 잘 활용하여 사용할 것을 권면합니다. 

22절 방언은 믿지 않는 자의 심판의 표적입니다. 이는 알아듣지 못함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들을 귀가 없는 백성은 23절 방언을 말하는 자들을 ’미쳤다‘말하여 거부하는 것입니다. 

반면 22절 예언은 믿는 자를 위한 것입니다. 이는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선포입니다. 그래서 24절 이미 믿는 성도는 말씀으로 성장하고 위로받고 책망받고 교훈을 받습니다. 25절 회개하며 하나님을 경배하빈다. 즉 말씀을 통하여 믿는 성도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2.
26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27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28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29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30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31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32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33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함과 같이

구체적 은사의 활용법입니다. 은사에 있어서 27절 방언은 차례를 따라 순서대로하고, 29절 예언은 분별해야 합니다. 이는 33절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요. 질서의하나님 화평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26절 모든 것은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할 것입니다.

우리가 세워야할 3가지 덕은? 교회를 세우는 것, 성도의 믿음을 성장시키는 것, 공동체의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3.
36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37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은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는 이 글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38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
39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40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을 높이지(은사와 직분과 능력)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36절 말씀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냐?라고 묻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자기 경험을 말씀보다 높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리석고 무지한 것입니다. 만약 너희로 참 선지자 신령하여 하나님께 속한 자로 생각하거든 겸손하여 이 모든 것들을 받아 들이며 순종하고 따를 것을 요청합니다. 오늘날도 체험 환상 음성 보다 오직 성경이 최종 권위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모든 은사를 사모하되, 품위 있게 질서 있게 하기를 당부하고 있습니다. ① 품위 있게란?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고 합당하게 드려져야 합니다. ② 질서 있게는? 각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세워지도록 해야 합니다. 은사는 말씀의 권위 아래 있어야 합니다. 은사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 사용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는 혼란이 아니라 질서와 화평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사랑의 아버지!!
장성한 믿음의 분량을 이루어, 품위있게 질서 있게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내는 주의 자녀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린도전서 15:1-11

1.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2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장이라고 불립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 안에는 예수님의 부활은 믿으면서도 장차 성도들의 육체의 부활은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는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육체는 악하고 영혼만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11절에서 바울은 먼저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지 다시 확인시킨 후, 그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즉, 복음을 바로 붙들어야 부활 신앙도 바로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2절 복음은 구원의 능력입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① 1, 3절 복음은 받은 것입니다. 바울은 "내가 만든 사상이 아니라 너희가 받은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은 사람이 만들어낸 철학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입니다. 갈라디아서 1:11-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우리는 복음을 창조하는 사람이 아니라 받고 전하는 사람입니다.

② 복음은 서 있는 기초입니다. 2b절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믿음은 한 번 믿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복음 위에 서는 것입니다. 건물이 기초 위에 세워지듯 성도의 삶도 복음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환경이 아니라 말씀이 아니라 감정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 위에 서는 삶입니다.

③ 복음은 굳게 지키고, 끝까지 붙들어야 한다. 2절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구원은 복음을 굳게 붙드는 믿음 안에서 나타납니다. 여기서 "굳게 지키다"는 헬라어 κατέχω(katechō) 는 꽉 붙잡다, 놓치지 않다 라는 의미입니다. 믿음은 시작보다 끝까지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2.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2번째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세 문장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첫째, 3절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순교가 아닙니다. 목적적인 죽으심입니다. 대속의 죽음입니다. 십자가는 죄인의 형벌을 대신 지신 사건입니다. 둘째, 4절 장사되셨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죽음이 실제였음을 증명합니다. 가사 상태가 아니라 완전한 죽음이었습니다. 셋째, 4절 성경대로 살아나셨다.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입니다.

5-8절 까지 이 같은 죽으심과 장사됨과 부활의 증인으로서 제자들입니다. 게바, 열두 제자, 500여 형제, 야고보, 모든 사도, 마지막으로 바울입니다. 왜 이렇게 기록했을까요? 당시 살아있는 증인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부활은 신화가 아니라 증인들이 확인한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의 중심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를 위한 대속이며, 부활은 죄와 사망을 이기신 승리입니다. 십자가 없는 복음도 없고, 부활 없는 기독교도 없습니다.

3.
9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11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결국 죽으시고 장사되시고 부활하신 우리주님의 은혜가 결국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을 9절 가장 작은 자라고 고백합니다. 즉 가장 부족하고 연약한 자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에게 은혜를 주셔서 변화시키시니 이것을 10절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은혜를 고백합니다. 바울은 "10절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은혜 때문이다." 라고 말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은혜는 게으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 충성하게 만드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다." 그러나 곧바로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 라고 고백합니다.

은혜는 교만하지 않게 하고, 낙심하지 않게 하며 끝까지 충성하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은혜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바울을 사도로 만든 것은 능력이 아니라 은혜였습니다. 오늘도 우리를 붙들고 사명을 감당하게 하는 힘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역시 주님이 주신 은혜를 헛되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받은 은혜는 더 깊은 순종과 충성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바울처럼 "내가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삶이 성도의 모습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받은 것으로 증거하며 전하는 참 은혜의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린도전서 15:12-19

1.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15장은 부활장입니다. 사도바울은 부활에 대하여 증거합니다. 부활을 부정하는 자들에 대하여 논리적 반박을 합니다. 

12-13절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는 다시 살아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은 훌륭한 분, 도덕적인 스승, 위대한 성인이라고는 인정합니다. 그러나 부활은 상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부활이 실제 역사적 사건이라는 믿음 위에 세워진 종교입니다.

14절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것입니다. 여기서 "헛것"은 비어 있다. 내용이 없다. 가치가 없다. 라는 뜻입니다. 때문에 세 가지가 모두 무너집니다. ① 설교도 헛됩니다. 복음의 핵심이 사라집니다. ② 믿음도 헛됩니다. 믿음의 대상이 죽은 채 있기 때문입니다. ③ 교회도 존재 이유가 없어집니다. 부활이 없는 교회는 단순한 종교 단체일 뿐입니다. 우리가 믿는 분은 무덤 속에 계신 분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주님입니다. 그래서 기도에도 응답하십니다. 지금도 성령으로 일하십니다.

15절 부활이 없다면 사도들은 거짓 증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사도들은 목숨을 걸고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했습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그들은 모두 거짓말쟁이가 됩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순교하면서까지 부활을 증거했을까요? 거짓을 위해 십자가에 죽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도들이 끝까지 부활을 증언했다는 것은 그들이 실제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사람이 만들어 낸 신화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역사 가운데 행하신 사실입니다.

2.
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16-17절 부활이 없다면 죄 사함도 없습니다. 이 말이 가장 중요합니다. 십자가는 죄값을 지불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하나님께서 그 희생을 받아들이셨다는 증거입니다. 왜 부활이 중요한가? 로마서 4:25 "예수는 우리의 범죄함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부활은 하나님의 의의 선언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죄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죄책감 속에 살아갑니다. 그러나 부활은 죄가 끝났음을 선포합니다. 예수님은 죄를 이기셨고 사망을 이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자유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18절 부활이 없다면 죽은 성도들도 멸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잠자는 자는 믿는 성도의 죽음을 말합니다. 성도에게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잠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시 깨어날 날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장례는 영원한 이별이 아니라 부활을 기다리는 안식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납니다. 이것이 교회의 소망입니다.

19절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부활을 믿었기에 핍박을 견뎠습니다. 재산도 잃었습니다. 감옥에도 갔습니다. 순교도 했습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그들의 삶은 가장 비참한 삶이 됩니다. 그러나 부활이 사실이기 때문에 그들의 희생은 영원한 상급으로 이어졌습니다. 우리도 부활을 믿기에 헌신합니다. 기도합니다. 예배합니다. 선교합니다. 사랑합니다. 부활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이 헛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살아나셨기 우리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입니다. 부활 신앙은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능력(절망, 죄, 두려움, 죽음)입니다. 부활신앙은 우리 미래의 소망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예수 부활 나의 부활, 부활 신앙으로 충만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린도전서 15:20-34

1.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1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사도바울은 부활을 더 이상 가정이나 상상이나 허구가 아닌 진실이며 역사적인 사실임을 선포합니다. 그 선포의 중심에 20절의 선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절망에서 희망으로 탈바꿈되는 복음의 전환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이제 부활의 첫열매됨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의 첫열매가 되어서 이후로 예수 안에서 죽는 모든 자를 부활로 견인하며 이끌어 내는 것입니다. 

21-22절 여기서 바울은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조합니다. 첫째 아담은 죄 사망 저주의 시작이었다면, 둘째 아담(그리스도)은 의 생명 부활로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로마서 5장의 내용을 다시 요약한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는 모두 죽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두 살아납니다. 여기서 "모두"는 모든 사람이 자동으로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2.
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24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25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26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27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에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그의 아래에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28 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하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23절 부활에도 질서가 있습니다. 각각 자기 차례대로 부활을 이룬다고 말씀하십니다. ① 23절a 그리스도 ② 23절b 그리스도의 성도 ③ 24-26절 마지막 심판 ④ 28절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①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이미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의 부활, 승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성도의 부활을 보증하는 첫 열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 사망은 이미 결정적으로 패배했습니다.

②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성도들의 부활입니다. 이를 요한계시록에서는 첫째 부활이라고 부릅니다. 순교자/믿는 성도/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여기에 속합니다. 이들이 부활하여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합니다.

③ 마지막 원수인 사망의 멸망과 최후 심판입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미 죽음을 이기셨지만, 모든 성도가 아직 죽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사망은 최종 심판 때 완전히 제거됩니다. 백보좌 심판입니다. 여기서 믿지 않는 자들의 부활, 심판, 둘째 사망이 이루어집니다.

④ 28절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21-22장입니다. 새 하늘/ 새 땅/ 새 예루살렘/ 사망 없음/ 눈물 없음/ 죄 없음/ 성전도 필요 없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함께하십니다. 이것이 창조의 완성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미 시작된 승리입니다. 성도의 부활은 그 승리의 완성입니다. 사탄과 모든 악의 세력은 결국 완전히 패배합니다. 사망은 마지막 원수로 제거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전히 성취됩니다. 따라서 성도는 현재의 고난이나 죽음 때문에 낙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이미 시작된 승리라면, 우리의 부활은 반드시 이루어질 약속이며,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만유를 새롭게 하시는 영원한 나라가 완성될 것입니다.

3.
29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
30 또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
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32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33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34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결국 부활 신앙은 현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여기부터는 "부활을 믿는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를 설명합니다.

30-32절 바울은 자신의 삶을 예로 듭니다. "우리가 어찌하여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 부활이 없다면 바울은 가장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바울은 부활의 신앙을 바탕으로 복음을 전하며 모든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 것입니다. 32절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만약 부활이 없다면 인생은 쾌락주의밖에 남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기 때문에 바울은 고난을 선택합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현재의 손해보다 영원한 상급을 바라봅니다.

33절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힌다." 부활을 부정하는 거짓 교사들이 교회를 오염시키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오늘만 살기 때문입니다. 

34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부활은 단순한 교리가 아니라 거룩한 삶의 원동력입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죄 가운데 계속 머물 수 없습니다.

부활 신앙은 오늘의 삶을 바꿉니다. 바울은 부활을 믿었기에 위험과 핍박을 감수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도 부활을 믿는다면 삶의 기준은 세상의 성공이나 안락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됩니다. 희생과 헌신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부활 신앙은 미래의 소망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거룩함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죄에 안주하지 않고, 말씀과 기도로 깨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과거의 기적이 아니라 성도의 미래를 보증하는 사건이며, 그 소망은 오늘의 삶을 거룩함과 담대한 헌신으로 이끄는 능력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부활의 신앙을 마음에 품고 부활로 열매맺는 인생을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린도전서 15:35-49

1.
35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36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37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38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39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40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41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15장 고린도 교인들안에 잘못된 신앙이 들어왔습니다. 부활을 부정하는 일입니다. 부활이 부정되면 그리스도의 살아나심이 부정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살아남이 없이는 성경에서 말하는 모든 증거와 증인의 삶이 부정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부활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핵심입니다. 

불신의 사람들은 교회안에서 성도를 속이고 성도의 선한 행실을 더렵혔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를 경계하면서 34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권면하면서 계속 성경의 말씀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36절 부활을 믿지 못하는 자를 어리석은 자라고 말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부활을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함을 알아야 합니다. 38절 살아난 모든 것은 각 종자를 따라서 형체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39절 사람은 사람의 형체로, 짐승은 짐승의 형체로, 새와 물고기는 새와 물고기의 형체를 나타냅니다. 이렇게 각 형체대로 모든 것이 드러나듯이, 40절 하나님의 나라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자는 하늘의 영광을 땅에 속한 자는 당의 영광이 있습니다.  

41절 이것은 부활의 때에 우리에게 나타내신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해의 영광, 달의 영광, 별의 영광과 별과 별의 영광입니다. 이는 부활의 때에 성도가 받은 영광입니다. 해/달/별/별과별은 차등입니다. 우리가 부활의 날에 받게될 영광의 정도입니다. 부활을 믿고 살아가는 자에게 부활의 영광이 충만하길 소망합니다. 

2.
42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우리가 부활의 영광을 얻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42-44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썩을 것은 부패하고 소멸하는 것입니다. 욕된 것, 약한 것, 육의 몸으로 심어야 합니다. 이는 우리의 몸으로서 늙고 병들고 약한 것으로서 병들지 않고 늙지 않고 죽지 않을 것을 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하여 충성하며 육신을 투자할 때 주어지는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땅의 것으로 하늘의 가치를 사야 합니다. 현재의 삶으로 하나님 나라에 심어야 합니다. 죄를 심으면 죄의 열매를 거둡니다. 믿음을 심으면 영생의 열매를 거둡니다. 헌신을 심으면 영광을 거둡니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도 씨 뿌림의 원리를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6:8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결국 부활의 영광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약속된 은혜이며, 그 은혜를 소망하는 성도는 오늘도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기꺼이 "심는" 삶을 살아갑니다.

3.
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
47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48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45절 첫사람 아담은 생령 즉 생명의 받은 사람에 지나지 않으며, 마지막 아담 예수는 생명을 살려 주는 공급자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를 둘째 아담이라고 하지 않고 마지막 아담이라 함은? 사람안에서 이뤄지는 모든 죄 사망 저주를 끝낸다는 의미입니다. 부활을 이야기 할대 첫 열매는 이어지는 의미이고, 사망을 이야기 할대 마지막 아담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49절 결국 성경은 부활의 최고의 약속을 우리에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예수그리스도의 형상을 입게될 것입니다. 과거 우리는 아담의 형상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눈물 질병 죄와의 싸움 죽음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의 형상을 입습니다. 때문에 죄가 없습니다. 죽음이 없습니다. 썩음이 없습니다. 완전한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의 형상을 닮아가고 있는가?" 아담의 형상은 자기중심 교만 죄 죽음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형상은 사랑 순종 거룩 생명입니다. 성도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받았고, 성령의 역사 가운데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날에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형상을 입게 될 것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약속하신 하늘의 영광을 갖고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린도전서 15:50-58

1.
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53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15장 부활장을 정리합니다. 마지막으로 성도들이 마지막 날 어떻게 변화될 것인가와 그 부활이 현재의 삶에 어떤 의미를 주는가를 가르칩니다.

50절 혈과 육이란? 단순히 육체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죄로 인해 타락한 현재의 인간, 죽을 수밖에 없는 몸, 썩어가는 육체를 말합니다. 즉 현재의 몸으로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몸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몸을 변화시키십니다. 예수님도 부활 후 몸을 가지셨지만 썩지 않고 죽지 않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되셨습니다.


51절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비밀은 모든 사람이 죽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성도가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나팔은 재림의 나팔입니다. 나팔의 소리를 들을 때 순식간에 눈 깜박할 사이도 없이 홀연히 변화될 것입니다. 53절 변화의 핵심은? 입는 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에 덮혀지듯이 입혀지는 상태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부활은 몸이 썩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변화입니다. 하나님께서 순식간에 우리를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시키시다는 것입니다. 

2.
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4절은 이사야 25:8절의 말씀입니다. 죽음이 우리를 삼킨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죽음을 삼켜버리셨습니다. 십자가에서는 죽음이 승리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부활에서 죽음이 패배했습니다. 55절 이는 호세아 13:14를 인용한 말씀입니다. 바울은 죽음을 조롱합니다. 마치 패배한 원수에게 "이제 네 무기가 어디 있느냐?" 라고 외치는 승리의 선언입니다.

56절 매우 중요한 복음의 핵심입니다. 순서를 보면 율법 → 죄를 깨닫게 함, 죄 → 사망을 가져옴, 사망 → 인간을 지배함. 그러므로 죄가 해결되어야 죽음도 해결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죄를 해결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망도 무너졌습니다. 57절 여기서 승리는 우리가 싸워 얻은 승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미 이루신 승리입니다. 성도는 그 승리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십자가에서 죄를 이기셨고 부활로 죽음을 이기셨으며 재림 때 그 승리가 완성됩니다.

3.
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그러므로 결론입니다. "그러므로"는 앞의 부활 신앙을 근거로 합니다. 부활이 있기 때문에
현재를 살아가는 태도가 달라져야 합니다.

① 견실하라. 굳게 서라. 세상의 가치관에 흔들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② 흔들리지 말라. 고린도교회는 거짓 교사/ 철학/ 음행/ 우상숭배/ 부활 부인 등으로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부활을 믿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③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라. 부활 신앙은 현실을 회피하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열심히 복음 전하고, 봉사하고, 사랑하고 헌신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수고가 영원히 남기 때문입니다. "너희 수고가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세상 일은 언젠가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흘린 눈물 기도 헌신 섬김 전도 사랑 은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며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부활이 있기 때문에 현재의 모든 믿음의 수고는 영원한 가치가 있습니다.

사랑의 아버지!!
부활 신앙으로 승리하며 견실하며 흔들리지 않으며 주의 일에 힘쓰는 신앙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이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린도전서 16:1-12

1.
1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2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3 내가 이를 때에 너희가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4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그들이 나와 함께 가리라

16장을 통하여 사도바울은 편지를 마무리 합니다. 마지막 당부는 연보입니다. 연보는 헌금입니다. 특별히 예루살렘교회를 위한 연보를 부탁합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모든 교회의 중심된 교회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지역의 극심한 가뭄과 박해를 통하여 예루살렘 교회가 어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이에 사도바울은 자신의 개척한 교회를 중심으로 예루살렘 교회를 도울 수 있도록 연보하며 헌금할 것을 요구합니다. 

2절 연보 헌금은 ‘매주 첫날에’이는 주일마다입니다. 각 사람이 모든 사람이, 수입에 따라서 형편대로 입니다. 억지로가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기억하여 은혜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갈때가 아닌 미리 준비된 연보를 올리라 명합니다. 이는 즉흥적인 감정이 아니라 계획된 믿음과 생활속에서 올려 드리는 연보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억지로도 말고 자발적으로 깊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연보를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입니다. 3-4절 연보된 헌금은 투명하게 관리 되고 전달될 수있도록 지정된 사람과 더불어 원하면 사도바울도 직접 참여하여 투명하고 공정하게 연보된 헌금을 전달하겠다는 것입니다. 

물질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것으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물질로 시험들지 않길 바라며, 온전한 신앙의 고백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2.
5 내가 마게도냐를 지날 터이니 마게도냐를 지난 후에 너희에게 가서
6 혹 너희와 함께 머물며 겨울을 지낼 듯도 하니 이는 너희가 나를 내가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이라
7 이제는 지나는 길에 너희 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만일 주께서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 머물기를 바람이라
8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려 함은
9 내게 광대하고 유효한 문이 열렸으나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라

사도바울은 현재 에베소 지역에서 3년 동안 머물면서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때가 되면 5절 마게도냐를 지나서 고린도 교회에 가고자 하였습니다. 6절 고린도교회에서 겨울을 머물면서 함께 신앙을 교육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8절 오순절 까지는 에베소에 머물면서 끝까지 사명을 감당한 후에 들어가겠다는 것입니다. 9절 광대하고 유효한 문은-하나님이 허락하신 복음의 기회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대적자가 많음으로 어려움이 예견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사사로이 움직이거나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행동에 복음을 증거하기 위한 계산이 들어가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기회와 대적의 도전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려움과 대적속에서 여전히 최선을 다하며 복음의 증거과 사명을 위하여 살아가야 할 줄 믿습니다. 

3.
10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그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그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라
11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를 멸시하지 말고 평안히 보내어 내게로 오게 하라 나는 그가 형제들과 함께 오기를 기다리노라
12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그에게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 가라고 내가 많이 권하였으되 지금은 갈 뜻이 전혀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디모데를 잘 맞아 줄 것을 부탁하고, 아울러 아볼로가 지금은 방문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디모데는 젊고 온유한 성품을 가진 사역자였기 때문에, 분쟁이 많았던 고린도교회에서 그의 권위가 무시당하거나 상처를 받을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두려움이 없이"(10절), "멸시하지 말고"(11절) 그를 존중하며 영접하라고 권면합니다. 그 이유는 디모데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자신의 제자가 아니라 동등한 복음의 동역자로 인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 아볼로에 대해서는, 바울이 여러 차례 고린도 방문을 권했지만 "지금은 갈 뜻이 전혀 없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직접 밝히지 않지만, 가장 자연스러운 이해는 당시 고린도교회 안에 아직도 "나는 아볼로에게"(고린도전서 1:12)라는 분파 의식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볼로가 방문할 경우 자신을 중심으로 또 다른 분열이 생길 수 있음을 염려하여,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기로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든 주의 종들에게 맡겨진 사명과 사역대로 서로를 존중하고 힘을 보태며 주의 교회를 세워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자신의 권리보다 공동체의 유익을 앞세울 때 하나님의 나라가 더욱 견고하게 세워집니다.

사랑의 아버지!!
복음을 증거하는 사명자로 부르심에 따라 사역을 감당하는 은혜와 복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린도전서 16:13-24

1.
13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14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오늘 본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마지막 부분입니다. 고린도전서 전체를 요약하는 결론입니다. 고린도교회는 분쟁, 음행, 우상제물, 성만찬의 문제, 은사의 혼란, 부활 부정 등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모든 문제를 교정한 후 마지막으로 성도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으로 굳게 서라 말씀하십니다. 믿음의 사람을 이루기 위하여 다섯 가지 명령이 주어집니다. ① 깨어 있으라. 영적으로 잠들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26:41 깨어 있으라." 말씀하셨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세상의 문화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영적으로 무감각해지면 죄가 죄처럼 보이지 않고 거짓이 진리처럼 보이고 세상 가치관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항상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② 믿음에 굳게 서라입니다. 세상의 생각이 아니라 복음 위에 서라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철학 웅변 지혜 인간의 지도자를 의지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직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서라고 말합니다. ③ 남자답게 하라입니다. 원어는 "용기를 가져라."라는 뜻입니다. 육체적인 남성다움이 아니라 영적인 담대함입니다. ④ 강건하라. 우리 힘으로가 아니라 성령 안에서 강해지라는 것입니다. ⑤ 사랑으로 행하라 명령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13절의 모든 명령을 14절이 하나로 묶습니다.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왜 사랑인가? 고린도교회의 모든 문제는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2.
15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16 이같은 사람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사람에게 순종하라
17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온 것을 기뻐하노니 그들이 너희의 부족한 것을 채웠음이라
18 그들이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사람들을 알아 주라

15절 스데바나 가족은 고린도의 첫 열매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처음 전도하여 얻은 가정입니다. 그들은 "성도를 섬기는 일에 힘썼다."라고 기록됩니다. 여기서 "힘썼다"는 말은 스스로 헌신했다는 뜻입니다. 억지로 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직분보다 섬김을 칭찬합니다. 참된 지도자는 명령하는 사람이 아니라 섬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큰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스데바나의 가족의 섬김과 희생을 통하여 사도바울은 18절 시원함 매우 만족함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모든 고린도교회로부터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도 섬김의 희생으로 사람들의 인정과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는 섬김과 봉사와 희생이 있길 소망합니다. 

3.
19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20 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21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
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2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24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

사도바울은 교회를 향하여 서로 문안하라 말씀하십니다. 문안함은 당시 문화속에서 사랑과 형제애를 나타내는 인사입니다. 오늘날 악수하며 포옹하며 진심으로 환영하는 것처럼 공동체로서의 사랑의 관계를 이루는 것입니다. 문안은 관심이며 문안은 사랑이며 관계입니다. 주안에서 같은 공동체 안에서 절대적인 관심과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22절 가장 엄중한 경고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 저주(아나테마)는 하나님께 버림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왜 이렇게 강력하게 말하는 것입니까? 교회의 가장 근본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생활을 오래 했어도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헛되기 때문입니다. 

마라나타,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믿음입니다.

23-24절 바울은 세 가지로 편지를 마칩니다. ① 주 예수의 은혜 ② 바울의 사랑 ③ 예수 안에서의 사랑. 고린도교회는 문제 많은 교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끝까지 사랑으로 축복합니다. 징계보다 회복을 원했던 것입니다. 문제를 해결하고 극복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4.
16장 마지막에서 바울은 모든 권면을 다섯 가지로 요약합니다.
①깨어 있으십시오. 영적 나태와 세상의 가치관을 경계하십시오. ②믿음에 굳게 서십시오. 십자가 복음을 신앙의 기초로 삼으십시오. ③용기 있게 강건하십시오. 성령의 능력 안에서 담대하게 살아가십시오. ④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십시오. 사랑은 모든 은사와 봉사의 완성입니다. ⑤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십시오. "마라나타"는 초대교회의 소망이었고 오늘 우리의 소망이기도 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세상의 가치관이 아니라 복음 위에 굳게 서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서로를 사랑으로 섬기고, 맡겨진 사명에는 담대하게 헌신하며, 모든 삶 속에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깨어 있는 신앙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고린도전서를 마무리하는 바울의 마지막 권면이며, 오늘날 교회와 성도에게도 변함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고린도 전서를 통하여 사랑과 부활의 은혜를 알게 하시고, 문제 가운데 해결점을 주시며 고린도 교회로 회복을 축복을 허락하심처럼, 오늘 이 말씀을 읽고 듣는 모든 자에게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이뤄지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description>
			<author><![CDATA[정음교회]]></author>
			<pubDate>Tue, 04 Aug 2026 22:09:0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jungumch.com/?kboard_redirect=5"><![CDATA[성경묵상코너]]></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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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2026년 08월 02일]]></title>
			<link><![CDATA[https://www.jungumch.com/?kboard_content_redirect=1449]]></link>
			<description><![CDATA[1. 환영합니다.
* 예배로 함께 하신 성도님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 새롭게 교회를 방문하신 성도님들은 ‘새신자 카드’ 작성하시고 등록해 주시길 바랍니다. 
* 새 가족모임: 매 주일 1시~1시 30분 본당입니다.

2. 성찬예배
* 이번 주(8/2일) 성찬예배로 드립니다.   * 경건한 마음으로 참여 바랍니다.

3. 토요전도
* 이번 토요일(8일) 오후 4시에 토요전도로 모입니다.
* 전도하기를 원하는 성도님은 4시까지 교회로 오시길 바랍니다. 

4. 선교후원
* 7월 한 달 모아진 선교비 2,944,000원입니다.
* 필요에 따라 차등적으로 지역교회에 선교 후원하도록 하겠습니다.

5. 주일성수
* 매 주일 주일성수에 힘쓰시길 바랍니다. 
* 주일 예배 불참시에는 밴드로 설교를 들으시길 바랍니다. 

6. 교회사역일정
*구역예배: 8/16일    * 구역장세미나:8/22일      * 담임목사휴가:8월24-28일]]></description>
			<author><![CDATA[정음교회]]></author>
			<pubDate>Tue, 04 Aug 2026 22:05:1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jungumch.com/?kboard_redirect=4"><![CDATA[교회소식]]></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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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2026년 07월 26일]]></title>
			<link><![CDATA[https://www.jungumch.com/?kboard_content_redirect=1448]]></link>
			<description><![CDATA[1. 환영합니다.
* 예배로 함께 하신 성도님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 새롭게 교회를 방문하신 성도님들은 ‘새신자 카드’ 작성하시고 등록해 주시길 바랍니다. 
* 새 가족모임: 매 주일 1시~1시 30분 본당입니다.

2. 선교후원의 달
* 7월 한 달은 선교후원의 달로 지킵니다.
* 선교헌금 해 주시면 우리가 섬기는 농촌교회 및 선교지에 특별선교하겠습니다.

3. 수요달란트예배
* 이번 주 수요일(29일) 달란트 잔치가 있습니다. 
* 점심식사 12:30분까지 오세요. 

4. 성찬예배
* 다음 주(8/2일) 성찬예배로 드립니다.   * 성찬 위원은 준비바랍니다.

5. 주일성수
* 매 주일 주일성수에 힘쓰시길 바랍니다. 
* 주일 예배 불참시에는 밴드로 설교를 들으시길 바랍니다. 

6. 교회사역일정
* 성찬주일:8/2일       * 구역장세미나:8/22일      * 담임목사휴가:8월 중]]></description>
			<author><![CDATA[정음교회]]></author>
			<pubDate>Tue, 04 Aug 2026 22:04:11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jungumch.com/?kboard_redirect=4"><![CDATA[교회소식]]></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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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2026년 07월 19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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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1. 환영합니다.
* 예배로 함께 하신 성도님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 새롭게 교회를 방문하신 성도님들은 ‘새신자 카드’ 작성하시고 등록해 주시길 바랍니다. 
* 새 가족모임: 매 주일 1시~1시 30분 본당입니다.

2. 선교후원의 달
* 7월 한 달은 선교후원의 달로 지킵니다.
* 선교헌금 해 주시면 우리가 섬기는 농촌교회 및 선교지에 특별선교하겠습니다.

3. 오후구역예배
* 이번 주(19일) 오후 구역예배로 드립니다.
* 구역 공과는 90페이지 ‘거룩한 하나님, 거룩하지 못한 백성’입니다. 

4. 토요전도
* 이번 주(25일) 토요일 오후 3시에 전도로 모입니다. 

5. 교회사역일정
* 성찬주일:8/2일       * 구역장세미나:8/22일      * 담임목사휴가:8월 중]]></description>
			<author><![CDATA[정음교회]]></author>
			<pubDate>Tue, 04 Aug 2026 22:03:0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jungumch.com/?kboard_redirect=4"><![CDATA[교회소식]]></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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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2026년 07월 12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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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1. 환영합니다.
* 예배로 함께 하신 성도님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 새롭게 교회를 방문하신 성도님들은 ‘새신자 카드’ 작성하시고 등록해 주시길 바랍니다. 
* 새 가족모임: 매 주일 1시~1시 30분 본당입니다.

2. 선교후원의 달
* 7월 한 달은 선교후원의 달로 지킵니다.
* 선교헌금 해 주시면 우리가 섬기는 농촌교회 및 선교지에 특별선교하겠습니다.

3. 선교보고예배
* 이번 주(12일) 오후 찬양 예배 중 파키스탄 선교사 김정민 목사님 오십니다.
* 예배참석 바랍니다. 

4. 오후구역예배
* 다음 주(19일) 오후 구역예배로 드립니다.
* 구역 공과는 90페이지 ‘거룩한 하나님, 거룩하지 못한 백성’입니다. 

5. 교회사역일정
* 토요전도:25일          * 오후구역예배:19일]]></description>
			<author><![CDATA[정음교회]]></author>
			<pubDate>Tue, 04 Aug 2026 21:59:5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jungumch.com/?kboard_redirect=4"><![CDATA[교회소식]]></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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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2026년 07월 05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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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1. 환영합니다.
* 예배로 함께 하신 성도님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 새롭게 교회를 방문하신 성도님들은 ‘새신자 카드’ 작성하시고 등록해 주시길 바랍니다. 
* 새 가족모임: 매 주일 1시~1시 30분 본당입니다.

2. 선교후원의 달
* 7월 한 달은 선교후원의 달로 지킵니다.
* 선교헌금 해 주시면 우리가 섬기는 농촌교회 및 선교지에 특별선교하겠습니다.

3. 토요전도
* 이번 주(11일) 토요전도로 오후 3시에 전도합니다.

4. 선교보고예배
* 다음 주(12일) 오후 찬양 예배 중 파키스탄 선교사 김정민 목사님 오십니다.
* 모두 참석 바랍니다. 

5. 교회사역일정
* 토요전도:11일 25일          * 오후구역예배:19일]]></description>
			<author><![CDATA[정음교회]]></author>
			<pubDate>Tue, 04 Aug 2026 21:58:3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jungumch.com/?kboard_redirect=4"><![CDATA[교회소식]]></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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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2026년 06월 28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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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1. 환영합니다.
* 예배로 함께 하신 성도님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 새롭게 교회를 방문하신 성도님들은 ‘새신자 카드’ 작성하시고 등록해 주시길 바랍니다. 
* 새 가족모임: 매 주일 1시~1시 30분 본당입니다.

2. 2분기 재정보고
* 이번 주일(28일) 오후 찬양예배 중 2분기 재정보고 드립니다.

3. 수요달란트잔치
* 이번 주 수요일(7/1일)은 달란트 시장이 있습니다. 
* 차량운행은 12시부터입니다. 
* 점심: 삼계탕(이상희권사), 12시 30분까지 오시면 됩니다.

4. 선교후원의 달
* 7월 한 달은 선교후원의 달로 지킵니다.
* 선교헌금 해 주시면 우리가 섬기는 농촌교회 및 선교지에 특별선교하겠습니다.

5. 교회사역일정
* 6월 28일: 2분기 재정보고        * 7월 12일:선교보고예배(김정민목사)]]></description>
			<author><![CDATA[정음교회]]></author>
			<pubDate>Tue, 04 Aug 2026 21:57:56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jungumch.com/?kboard_redirect=4"><![CDATA[교회소식]]></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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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2026년 06월 21일]]></title>
			<link><![CDATA[https://www.jungumch.com/?kboard_content_redirect=1443]]></link>
			<description><![CDATA[1. 환영합니다.
* 예배로 함께 하신 성도님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 새롭게 교회를 방문하신 성도님들은 ‘새신자 카드’ 작성하시고 등록해 주시길 바랍니다. 
* 새 가족모임: 매 주일 1시~1시 30분 본당입니다.

2. 구역예배
* 이번 주(21일) 오후 구역예배로 드립니다. 
* 모두 참석 바랍니다. 

3. 2분기 재정보고
* 다음 주일(28일) 오후 찬양예배 중 2분기 재정보고 드립니다.

4. 토요전도모임
* 이번 토요일(27일) 토요전도로 오후 3시에 모입니다. 

5. 교회사역일정
* 6월 27일: 토요전도              * 6월 28일: 2분기 재정보고]]></description>
			<author><![CDATA[정음교회]]></author>
			<pubDate>Tue, 04 Aug 2026 21:57:0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jungumch.com/?kboard_redirect=4"><![CDATA[교회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2026년 06월 14일]]></title>
			<link><![CDATA[https://www.jungumch.com/?kboard_content_redirect=1442]]></link>
			<description><![CDATA[1. 환영합니다.
* 예배로 함께 하신 성도님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 새롭게 교회를 방문하신 성도님들은 ‘새신자 카드’ 작성하시고 등록해 주시길 바랍니다. 
* 새 가족모임: 매 주일 1시~1시 30분 본당입니다.

2. 구역예배
* 다음 주(21일) 오후 구역예배로 드립니다. 
* 구역 공과는 142페이지 ‘성령의 전’입니다. 

3. 새가족정착
* 등록하신 새 가족 정착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 계속 전도해서 100명 출석과 10명 등록을 위해서 힘써 주시길 바랍니다.
  
4. 교회사역일정
* 6월 20일: 토요전도              * 6월 21일: 오후구역예배
* 6월 28일: 2분기 재정보고]]></description>
			<author><![CDATA[정음교회]]></author>
			<pubDate>Mon, 15 Jun 2026 12:17:5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jungumch.com/?kboard_redirect=4"><![CDATA[교회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2026년 06월 07일]]></title>
			<link><![CDATA[https://www.jungumch.com/?kboard_content_redirect=1441]]></link>
			<description><![CDATA[1. 환영합니다.
* 예배로 함께 하신 성도님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 새롭게 교회를 방문하신 성도님들은 ‘새신자 카드’ 작성하시고 등록해 주시길 바랍니다. 
* 새 가족모임: 매 주일 1시~1시 30분 본당입니다.

2. 성찬예배 
* 이번 주(07일)는 성찬 예배로 드립니다. 
* 경건한 마음으로 참여 바랍니다. 

3. 토요전도
* 이번 주 토요일(13일) 오후 3시에 전도로 모입니다.
  
4. 교회사역일정
* 6월 07일: 성찬예배           * 6월 20일: 토요전도
* 6월 21일: 오후구역예배       * 6월 28일: 2분기 재정보고]]></description>
			<author><![CDATA[정음교회]]></author>
			<pubDate>Mon, 15 Jun 2026 12:17:06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jungumch.com/?kboard_redirect=4"><![CDATA[교회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거듭나야 합니다. (요한복음 3:1-8)]]></title>
			<link><![CDATA[https://www.jungumch.com/?kboard_content_redirect=1440]]></link>
			<description><![CDATA[<iframe width="1071" height="602" src="https://www.youtube.com/embed/fhYJYNPEnto" title="거듭나야 합니다. (요 3:1-8)"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description>
			<author><![CDATA[정음교회]]></author>
			<pubDate>Sat, 06 Jun 2026 19:04:1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jungumch.com/?kboard_redirect=1"><![CDATA[설교동영상]]></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창세기 22장 - 50장]]></title>
			<link><![CDATA[https://www.jungumch.com/?kboard_content_redirect=1439]]></link>
			<description><![CDATA[창세기 22:1-24

1.
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4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5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7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1절 그 일 후에입니다. 그 일 후란? 아브라함이 이삭을 얻고 오랜 세월이 흘러서 이삭이 10대 후반-20대 초반이 되었을 때입니다. 그 일 후란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오랜 동행 후에 믿음이 자라고 신앙이 더 굳건해진 이후의 어느때입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할때가 아니라 충만하고 안정될 때 즉 시험을 받을 만한 자격과 조건이 갖추어진 때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나 시험하지 않으십니다. 시험도 받을 만한 자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시험은 영광과 한 층 더 업그레이든 된 신앙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시험을 받을만한 때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기도 전에 다음날 순종하며 시행하고 삼일째에 모리아산 하나님의 명령하신 곳에 당도하며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이삭을 번제로 드리기로 작정합니다. 어떤 면에서 아브라함에 주어진 것은 시험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떨어진 말씀입니다. 즉 아브라함은 고민할 것도 없이 생각할 것도 없이 기도할 것도 없이 말씀이 떨어진 그 자리에서 행함의 자리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부딪칠 것이 없으니 시험이라고 할 말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같은 믿음과 순종과 결단이 이뤄지길 소망합니다. 

2.
9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여호와 이레입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하나님의 준비이십니다. 이미 모든 것으로 준비하심입니다. 하나님은 요구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반드시 준비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순종의 끝에는 항상 하나님의 공급이 준비되고 기다림을 믿습니다. 이 사건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예표입니다. 이삭은 독자요, 대신 죽은 숫양은 대속 제물이요, 하나님이 양으로 친히 준비하심은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의 핵심입니다. 

예수는 여호와 이레의 준비이십니다. 인생은 시험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절대적 순종과 결단입니다. 순종과 결단의 삶을 살아가는 자는 여호와 이레의 은혜를 경험하고 살 것이요. 모든 것이 시험이 되는 자는 정말로 시험에 빠져서 평생 허덕이면서 인생을 허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해 보지 못하고 살다가 시험 가운데 죽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음성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주님의 복된 음성을 듣는 축복자가 되시길 소망합니다. 

3.
15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16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19 이에 아브라함이 그의 종들에게로 돌아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주하였더라

시험 후에 주어지는 확증과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맹세로 다시 약속하십니다.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이전에도 약속은 있었지만 이제는 ‘검증된 믿음’ 위에 약속이 확증됩니다. 순종은 약속을 더 깊이 경험하게 만듭니다. 믿음은 시험을 통과하면서 “확신”으로 변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우리를 믿음 가운데로 이끌며 더욱더 견고한 믿음의 나라로 우리를 세우시는 은혜임을 믿습니다. 17-18절 더 큰 은혜의 복이 아브라함에게 이뤄진 것 같이 우리 가운데도 이뤄지시길 소망합니다. 

사랑의 아버지!!
시험을 통하여 더 큰 믿음을 이루게 하시고,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경험하고 우리 믿음이 더 견고하고 강해지는 복이 있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창세기 23:1-24:67

1.
23:1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가 누린 햇수라
2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3 그 시신 앞에서 일어나 나가서 헷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4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
....
9 그가 그의 밭머리에 있는 그의 막벨라 굴을 내게 주도록 하되 충분한 대가를 받고 그 굴을 내게 주어 당신들 중에서 매장할 소유지가 되게 하기를 원하노라 하매
....
11 내 주여 그리 마시고 내 말을 들으소서 내가 그 밭을 당신에게 드리고 그 속의 굴도 내가 당신에게 드리되 내가 내 동족 앞에서 당신에게 드리오니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
16 아브라함이 에브론의 말을 따라 에브론이 헷 족속이 듣는 데서 말한 대로 상인이 통용하는 은 사백 세겔을 달아 에브론에게 주었더니
17 마므레 앞 막벨라에 있는 에브론의 밭 곧 그 밭과 거기에 속한 굴과 그 밭과 그 주위에 둘린 모든 나무가
18 성 문에 들어온 모든 헷 족속이 보는 데서 아브라함의 소유로 확정된지라

사라의 죽음과 무덤인 막벨라 굴의 의미입니다. 사라는 127세를 살고 죽어 장사되었습니다. 이때 까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했지만, 아브라함은 가나안땅에 나그네로 살며 땅을 전혀 소유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사라를 매장하기 위해서 헤브론 땅에 있는 막벨라굴을 매입하게 됩니다. 

헤브론 막벨라굴은 예루살렘 30키로 남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도보로는 6-8시간 거리, 짐승으로는 4시간 전후 일일 생활권에 있는 지역입니다. 헤브론은 다윗이 통일왕국을 이루기 전에 다스렸던 7년 6개월을 통치한 매우 중요한 곳입니다. 그리고 이 곳은 장래에 아브라함-사라. 이삭-리브가, 야곱-레아의 무덤이 되는 이스라엘 신앙의 중심지가 터전 중심이 되는 매우 중요한 곳이 됩니다. 때문에 아브라함은 이를 간파하고 당시에 이 땅을 돈으로 매매하며 법적으로도 전혀 문제가 없도록 힘을 쓴 것입니다. 약속의 땅에 첫 소유가 확보된 샘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해도 아브라함은 댓가를 지불하고 그 하나님의 약속을 상속받은 것입니다. 공짜가 아닌 댓가를 지불한 믿음의 유산입니다. 믿음은 댓가를 지불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2.
24:1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
2 아브라함이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 허벅지 밑에 네 손을 넣으라
3 내가 너에게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너는 내가 거주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4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
10 이에 종이 그 주인의 낙타 중 열 필을 끌고 떠났는데 곧 그의 주인의 모든 좋은 것을 가지고 떠나 메소보다미아로 가서 나홀의 성에 이르러
11 그 낙타를 성 밖 우물 곁에 꿇렸으니 저녁 때라 여인들이 물을 길으러 나올 때였더라
12 그가 이르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오늘 나에게 순조롭게 만나게 하사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13 성 중 사람의 딸들이 물 길으러 나오겠사오니 내가 우물 곁에 서 있다가
14 한 소녀에게 이르기를 청하건대 너는 물동이를 기울여 나로 마시게 하라 하리니 그의 대답이 마시라 내가 당신의 낙타에게도 마시게 하리라 하면 그는 주께서 주의 종 이삭을 위하여 정하신 자라 이로 말미암아 주께서 내 주인에게 은혜 베푸심을 내가 알겠나이다

사라의 죽음 이후에 아들 이삭이 상심에 빠졌습니다. 이에 아버지 아브라함은 아들을 위하여 결혼을 준비해 줍니다.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을 시켜서 고향으로 급파를 하고 엘리에셀은 10절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이삭의 아내를 준비합니다. 하나님은 순전함으로 엘리에셀이 기도한 내용대로 역사해 주셨습니다. 브두엘의 딸 리브가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이삭과 리브가는 사촌지간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브라함으로 순탄하게 인도하십니다. 순탄함의 시작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아브라함은 늙었지만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약속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순탄함의 출발점은 내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뜻입니다. 순탄함은 맹목이 아니라 구체적 기도로 준비됩니다. 아브라함이 기도하고 엘리에셀이 기도했습니다. 기도없이 움직이는 것은 실패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그 만큰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적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정확하고 확실한 길을 준비해 주시는 것입니다. 

3.
24:52 아브라함의 종이 그들의 말을 듣고 땅에 엎드려 여호와께 절하고
53 은금 패물과 의복을 꺼내어 리브가에게 주고 그의 오라버니와 어머니에게도 보물을 주니라
54 이에 그들 곧 종과 동행자들이 먹고 마시고 유숙하고 아침에 일어나서 그가 이르되 나를 보내어 내 주인에게로 돌아가게 하소서
55 리브가의 오라버니와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이 아이로 하여금 며칠 또는 열흘을 우리와 함께 머물게 하라 그 후에 그가 갈 것이니라
56 그 사람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만류하지 마소서 여호와께서 내게 형통한 길을 주셨으니 나를 보내어 내 주인에게로 돌아가게 하소서
57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소녀를 불러 그에게 물으리라 하고
58 리브가를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가 이 사람과 함께 가려느냐 그가 대답하되 가겠나이다
59 그들이 그 누이 리브가와 그의 유모와 아브라함의 종과 그 동행자들을 보내며
60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머니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 문을 얻게 할지어다
61 리브가가 일어나 여자 종들과 함께 낙타를 타고 그 사람을 따라가니 그 종이 리브가를 데리고 가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최종 응답, 곧 결단의 순간을 보여줍니다. 핵심 한 문장은 이것입니다. ‘가겠나이다’ 믿음은 결국 ‘떠나는 결단’이다

52-54절 응답 앞에서 먼저 드리는 것은 “예배”입니다. 종은 모든 일이 이루어지자, “여호와께 몸을 굽혀 경배”합니다. 아직 모든 과정이 끝난 것도 아닌데 결과를 손에 쥔 것도 아닌데 먼저 하나님께 예배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응답 “후에” 감사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응답의 “과정 속에서도” 먼더 감사하며 예배해야 합니다. 순탄함의 핵심은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 중심적인 삶이기 때문입니다. 

55-56절 하나님의 일은 지체하지 않습니다. 리브가의 가족은 말합니다. “며칠, 적어도 열흘은 더 있다가 가게 하라” 하지만 종의 반응은 분명합니다. “나를 만류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내 길을 형통하게 하셨으니 보내라” 인간은 시간을 붙잡으려 하고, 하나님은 때를 따라 움직이게 하십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57-58절 믿음은 결국 타인의 확신이 아니라 “자기 결단”입니다. 결정적인 장면입니다. “그를 불러 그의 입을 묻자” 그리고 리브가의 대답 “가겠나이다”입니다. 리브가는 믿음의 결단을 통하여 천만인의 어미가 되는 약속과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이는 단순한 결혼을 넘어서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가는 사명입니다. 하나님이 길을 여시지만, 마지막 한 걸음은 우리가 결단하고 내 딛어야 합니다. 

사랑의 아버지!!
주님의 부르시는 그 곳에서 발을 디디며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의 결단과 순종이 있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창세기 25:1-34

1.
1 아브라함이 후처를 맞이하였으니 그의 이름은 그두라라
2 그가 시므란과 욕산과 므단과 미디안과 이스박과 수아를 낳고
3 욕산은 스바와 드단을 낳았으며 드단의 자손은 앗수르 족속과 르두시 족속과 르움미 족속이며
4 미디안의 아들은 에바와 에벨과 하녹과 아비다와 엘다아이니 다 그두라의 자손이었더라
5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자기의 모든 소유를 주었고
6 자기 서자들에게도 재산을 주어 자기 생전에 그들로 하여금 자기 아들 이삭을 떠나 동방 곧 동쪽 땅으로 가게 하였더라

아브라함은 평생 사라, 하갈, 그두라 3아내를 거두게 됩니다. 거기에서 모두 8명의 자녀를 두게 되고, 오늘 마지막 그두라를 통하여 6자녀를 하나님께 주십니다. 오늘날로 따지면 모두가 귀한 자녀로서 공평하고 공정하게 상속이 이뤄지겠지만, 아브라함의 시대에는 이삭으로 모든 것이 집중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별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과 집중은 언약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자녀를 사랑하지만 특별한 은총과 은혜는 이삭에게 있습니다. 이는 이삭이 언약의 자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총이 아니라 특별한 은총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특별 은총은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고 있는 자에게 내립니다.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의 붙들고 살 때에 비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경험하고 누리게 됩니다. 특별한 언약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속에 모시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예수는 새언약의 중보이시며 약속의 성취입니다. 갑남을녀의 인생이 아니라 영적 이스라엘 하나님이 관심과 사랑을 간직한 자녀로 살아가는 복이 있길 소망합니다. 

2.
7 아브라함의 향년이 백칠십오 세라
8 그의 나이가 높고 늙어서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9 그의 아들들인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를 마므레 앞 헷 족속 소할의 아들 에브론의 밭에 있는 막벨라 굴에 장사하였으니
10 이것은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서 산 밭이라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니라
11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이 그의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고 이삭은 브엘라해로이 근처에 거주하였더라 

아브라함이 향년 175세로 늙고 기력이 다하여 죽음을 맞게 됩니다. 인생의 복은 기력이 다하여 죽는 것입니다. 즉 몸의 기능이 다하여 죽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복입니다. 영어 NIV 번역에서 ‘full of years’ 그의 삶을 ‘만족, 충만’한 삶을 살다가 죽었다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삶은 만족, 다 이룬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을 만족으로 이끌고 충만하게 하신 이는 우리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믿음으로 이끄시고 결국 삶의 만족과 충만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만족과 채워짐은? 예수 안에 있습니다. 예수로 충만하고 예수로 내 삶이 채워질 때 우리는 비로서 아브라함의 만족과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처럼 ‘늙어’ ‘기운이 다하여’ ‘만족하여’ 즉 좋은 나이에 만족하게 죽음에 이르는 복이 있길 소망합니다. 

3.
19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고
20 이삭은 사십 세에 리브가를 맞이하여 아내를 삼았으니 리브가는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 중 브두엘의 딸이요 아람 족속 중 라반의 누이였더라
21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
22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24 그 해산 기한이 찬즉 태에 쌍둥이가 있었는데
25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털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26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1)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였더라 

하나님의 절대적 관심과 사랑은 언약의 족보로 흘러 갑니다. 이삭이 40세에 결혼하여, 60세에 야곱과 에서를 출생하게 됩니다. 본문은 우리들에게 중요한 구속사적인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먼저, 인간의 불가능 속에서 시작되는 구속사입니다. 리브가는 임신하지 못하는 상태(불임)였습니다. 그러나 이삭이 하나님께 간구함으로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흐름이 있습니다. 아브라함 때도 사라가 불임, 이삭 때도 리브가가 불임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구속사적 의미에서, 약속의 계보는 인간 능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것입니다. 즉 오직 하나님의 개입으로만 이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구원은 인간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 은혜로 시작된다는 교훈입니다. 

두 번째, 태중에서부터 시작되는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리브가의 태중에서 두 아이가 싸웁니다. “두 민족이 네 태중에 있구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이것의 구속사적 의미는 장자가 축복 받는 것이 당연한 시대에서 하나님은 그 질서를 뒤집으시며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으로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속사는 인간의 질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으로 진행된는 사실입니다. 

세 번째, 육과 영의 대비 구조입니다. 에서: 먼저 태어남 (붉고 털 많은 사람), 야곱: 뒤에서 발꿈치를 잡고 나옴 즉 에서는 육적, 본능적사람이고, 야곱은 붙잡는 자, 뒤집는 자로서 언약을 붙들고 쟁취하는 자입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형제 이야기가 아니라 두 계열의 시작입니다. 에서는 육, 세상, 자기 중심적 삶이며, 야곱은 언약, 선택, 하나님 중심삶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야곱과 에서를 통하여 구속사는 인간 능력으로 이어지지 않으며, 하나님의 선택적 주권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구속사의 길은 반드시 육의 길과 언약의 길에서 나눠지고 결국 언약과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임을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이 예수를 믿은 우리 안에서 오늘도 성취되고 완성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창세기 26:1-33

1.
1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2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3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4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5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하시니라

이삭에게도 시험이 찾아옵니다. 이삭도 아브라함과 마찬 가지로 현실의 시험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이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에 머물라 말씀하십니다. 이삭은 그 말씀에 순종하여 블레셋 땅에 거하게 되고, 하나님은 이삭에게 복을 주어서 3절 동행과 언약의 계승을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복에 근거는? 5절 아브라함을 통하여 이뤄지는 것임을 분명하게 상기 시켜 주십니다. 

본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정리하면? 복은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이며, 복은 개인이 아닌 언약의 흐름 가운데 주어지는 것이고, 복은 순종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삭의 복이 우리 가운데 온전히 이뤄지길 소망합니다. 

2. 
6 이삭이 그랄에 거주하였더니
7 그 곳 사람들이 그의 아내에 대하여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내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 곳 백성이 리브가로 말미암아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내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
8 이삭이 거기 오래 거주하였더니 이삭이 그 아내 리브가를 껴안은 것을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창으로 내다본지라
9 이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이르되 그가 분명히 네 아내거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생각에 그로 말미암아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로라
10 아비멜렉이 이르되 네가 어찌 우리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백성 중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할 뻔하였도다 네가 죄를 우리에게 입혔으리라
11 아비멜렉이 이에 모든 백성에게 명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나 그의 아내를 범하는 자는 죽이리라 하였더라

앞장에서 복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면, 저주는 인간의 불신앙과 죄의 저주에 대한 반복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7절 이삭의 선택은 두려움에서 나오는 거짓입니다. 때문에 저주의 본질은 외부가 아닌 내면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또한 저주는 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삭에게 이어지는 패턴적 반복으로 성경은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인간의 실패가 결코 하나님의 언약을 무너뜨리거나 깨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실패했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고 계십니다. 그 일하심으로 인하여 아브라함을 건지시고 오늘 성경에서 이삭을 건져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복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지만, 저주는 인간의 불신앙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속된 자녀로 언약을 새롭게 하시며 인간의 실패에서 건져 주님으로 다시 성공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3.  
12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13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14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15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그 아버지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
16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라
17 이삭이 그 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거류하며
18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의 아버지가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
19 이삭의 종들이 골짜기를 파서 샘 근원을 얻었더니
20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이르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으로 말미암아 그 우물 이름을 1)에섹이라 하였으며
21 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므로 그 이름을 2)싯나라 하였으며
22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3)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23 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
24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신지라
25 이삭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거기 장막을 쳤더니 이삭의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

하나님은 그랄 블레셋에서 이삭에게 복을 주어서 농사로 100배를 얻게하십니다.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하여 이삭의 우물을 메우며 괴롭게 합니다. 이삭은 에섹-싯나-르호봇으로 장소를 옮기며, 드디어 다시 23절 가나안 브엘세바로 올라갔을 때 24절 이삭에게 나타나 말씀해 주시길 시작하였습니다. 25절 이삭은 거기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의 예배하는 원래의 본분을 감당하는 삶이 되었습니다.  

이삭이 블레셋에서 복을 받았지만
갈등을 지나
결국 예배의 자리로 돌아오는 여정을 잘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결국 복을 뛰어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복을 뛰어넘는 사람이 바로 은혜의 사람입니다. 복은 육신 가운데 임하는 축복이지만 은혜는 영혼에 부어지는 축복입니다. 은혜로 사모하는 사람은 르호봇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르호봇의 사람은 다투지 않고 은혜의 자리로 떠나는 사람입니다. 르호봇을 넘어갈 때 브엘세바 그 곳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시험을 넘어 주님과 동행하며, 결국 믿음의 자리 예배하는 신앙의 자리로 이룰 수 있는 은혜의 사람이 되게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창세기 27:1-29

1.
1 이삭이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맏아들 에서를 불러 이르되 내 아들아 하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2 이삭이 이르되 내가 이제 늙어 어느 날 죽을는지 알지 못하니
3 그런즉 네 기구 곧 화살통과 활을 가지고 들에 가서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4 내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와서 먹게 하여 내가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5 이삭이 그의 아들 에서에게 말할 때에 리브가가 들었더니 에서가 사냥하여 오려고 들로 나가매
6 리브가가 그의 아들 야곱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아버지가 네 형 에서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내가 들으니 이르시기를
7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가져다가 별미를 만들어 내가 먹게 하여 죽기 전에 여호와 앞에서 네게 축복하게 하라 하셨으니
8 그런즉 내 아들아 내 말을 따라 내가 네게 명하는 대로
9 염소 떼에 가서 거기서 좋은 염소 새끼 두 마리를 내게로 가져오면 내가 그것으로 네 아버지를 위하여 그가 즐기시는 별미를 만들리니
10 네가 그것을 네 아버지께 가져다 드려서 그가 죽기 전에 네게 축복하기 위하여 잡수시게 하라
11 야곱이 그 어머니 리브가에게 이르되 내 형 에서는 털이 많은 사람이요 나는 매끈매끈한 사람인즉
12 아버지께서 나를 만지실진대 내가 아버지의 눈에 속이는 자로 보일지라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하나이다
13 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따르고 가서 가져오라
14 그가 가서 끌어다가 어머니에게로 가져왔더니 그의 어머니가 그의 아버지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었더라

늙고 눈이 어두워진 이삭은 장자 에서를 불러 축복하려 합니다. 하지만 리브가는 이 사실을 듣고 야곱에게 계략을 지시합니다. 야곱은 두려워하지만 결국 어머니의 말대로 속이려는 길을 선택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리브가에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창 25:2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리브가는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 불안 조급함 속임수 자신의 방법으로 성취하려 합니다. 믿음이 흔들릴 때 인간은 ‘하나님의 때’ 대신 ‘자기 방법’을 선택합니다.

가정 안에 들어온 “불신앙의 연쇄”입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개인 문제가 아니라 가정 전체의 왜곡입니다. 이삭 → 편애, 리브가 → 조작, 야곱 → 거짓, 에서 → 세속성입니다. 한 사람의 불신앙이 아니라 가정 전체가 균열된 모습입니다. 신앙은 개인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 문제입니다. 특히 가정에서의 신앙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왜곡됩니다.

이 모든 문제의 시작점은 바로 아버지 이삭의 영적 무분별로 인하여 시작되었습니다. 한 집안의 제사장인 가장이 바로 서지 못하면 모든 가족이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 중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타락함으로 인하여 피조물이 고통을 당하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의 영적 제사장으로서 맡겨진 사명과 파수꾼으로서 역할을 잘 감당할 때 가정안에 평안과 기쁨이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2.
18 야곱이 아버지에게 나아가서 내 아버지여 하고 부르니 이르되 내가 여기 있노라 내 아들아 네가 누구냐
19 야곱이 아버지에게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내가 하였사오니 원하건대 일어나 앉아서 내가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아버지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20 이삭이 그의 아들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네가 어떻게 이같이 속히 잡았느냐 그가 이르되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로 순조롭게 만나게 하셨음이니이다

죄가 거짓이라는 세력을 얻어서 더욱 담대하게 뻣어나가고 있습니다. 잠시 전만해도 아버지를 속임에 대하여 두려워떨던 야곱은 담대함으로 거짓을 행하게 됩니다. 거짓이 세력을 얻어 더 가감해지는 과정입니다.  

죄는 멈추지 않고 “확장된다” 처음에는 망설였습니다. 하지만 행동에 들어가자, 정체성 거짓 (나는 에서입니다), 상황 조작 (사냥한 것처럼 꾸밈), 영적 왜곡 (하나님을 끌어들임)으로 이어집니다. 죄는 한 번 시작되면 작게 끝나지 않고 계속 커집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가 결국 더 큰 죄로 이어집니다.  

죄는 점점 “담대함”을 가장합니다. 야곱의 변화가 중요합니다. 처음에는 두려움 (들킬까 봐) 겁을 내지만, 지금 확신 있는 말투로 변화됩니다. 죄가 반복되면 양심의 떨림이 사라지고, 오히려 담대해집니다. 이것은 믿음의 담대함이 아니라 죄에 익숙해진 담대함입니다. 

결국 가장 위험한 단계 “하나님을 이용하는 죄”에 빠지게 됩니다. 20절은 매우 심각합니다.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짓말을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끌어옵니다. 이것은 단순한 거짓이 아니라 영적 타락의 정점입니다. 죄를 숨기는 단계 → 위험, 죄를 합리화 → 더 위험, 하나님을 이용 → 가장 위험한 단계입니다. 

3.
26 그의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와서 내게 입맞추라
27 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맞추니 아버지가 그의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께서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28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29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경과가 어떻게 되었든지 결국 말씀대로 야곱에게로 하나님의 복이 돌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주신 복은 물지과 권세와 언약의 전방위적인 복입니다. 

하늘의 이슬 → 하나님의 은혜
땅의 기름짐 → 현실의 공급
민족의 섬김 → 사회적 영향력
축복과 저주 → 영적 권위
하나님의 축복은 단순히 “물질”이 아니라 삶 전체를 덮는 총체적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사모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심을 믿습니다.

사랑의 아버지!!
언약의 말씀과 예수 안에서 주어지는 영적인 복의 흐름 가운데 있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창세기 27:30-28:22

1.
27:30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기를 마치매 야곱이 그의 아버지 이삭 앞에서 나가자 곧 그의 형 에서가 사냥하여 돌아온지라
31 그가 별미를 만들어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 이르되 아버지여 일어나서 아들이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32 그의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누구냐 그가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아들 곧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33 이삭이 심히 크게 떨며 이르되 그러면 사냥한 고기를 내게 가져온 자가 누구냐 네가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반드시 복을 받을 것이니라
34 에서가 그의 아버지의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슬피 울며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35 이삭이 이르되 네 아우가 와서 속여 네 복을 빼앗았도다
36 에서가 이르되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합당하지 아니하니이까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 번째니이다 전에는 나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 또 이르되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빌 복을 남기지 아니하셨나이까
37 이삭이 에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그를 너의 주로 세우고 그의 모든 형제를 내가 그에게 종으로 주었으며 곡식과 포도주를 그에게 주었으니 내 아들아 내가 네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38 에서가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가 빌 복이 이 하나 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하고 소리를 높여 우니

30-33절 돌이킬 수 없는 순간, 이미 지나간 축복의 기도입니다. 에서가 돌아왔을 때 이미 모든 것이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시간적으로는 간발의 차이지만 심적으로는 이미 수십년을 준비하고 바라던 대로의 결과입니다. 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하나님이 주시는 복으로부터 멀어져 있었습니다. 장자의 명분을 팥죽으로 가벼이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향한 소망과 기대를 버리고 살아간지 오래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결과가 한 순간에 이뤄진 것이라고 생각함다면 큰 오산입니다. 오랜 기간동안 복을 받을 준비를 하였기에 복을 받는 것이요, 오랜 기간동안 죄로 살아온 결과로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고 인내하시는 ᄒᆞ님이십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때에 열매로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나의 삶의 결과를 뒤집어야 합니다. 지금부터 천천히 하나씩 믿음으로 경주하는 삶을 준비하여야 합니다. 

34-38절 에서는 크게 울며 자신에게도 복을 달라고 눈을 흘리며 때를 쓰지만 에서가 흘러야 할 눈물은 결과에 대한 안타까움과 분함의 눈물이 아니라 진정 회개의 눈물을 흘렸어야 합니다. 인간적인 슬픔과 억울함의 눈물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명분을 가볍게 여겼던 죄, 영적인 것을 우선하고 살아가지 않은 죄를 통회하고 자복해야 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12:17절 말씀처럼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는 처지가 되고 만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안타까움과 아쉬운 후회의 눈물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흘리는 통회 자복의 회개에 눈물임을 믿습니다. 

2.
41 그의 아버지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으로 말미암아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
42 맏아들 에서의 이 말이 리브가에게 들리매 이에 사람을 보내어 작은 아들 야곱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 형 에서가 너를 죽여 그 한을 풀려 하니
43 내 아들아 내 말을 따라 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로 피신하여
44 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 그와 함께 거주하라
45 네 형의 분노가 풀려 네가 자기에게 행한 것을 잊어버리거든 내가 곧 사람을 보내어 너를 거기서 불러오리라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으랴

가정안에 폭풍이 몰아칩니다. 두 아들이 원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야곱은 도망자가 되고, 형 에서는 동생 야곱을 미워하는 원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가정이 한 순간에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이삭의 어리석음 때문이었습니다. 이삭은 이미 오래전부터 리브가의 복중에서부터 선포한 말씀을 알고도 듣지 않았습니다. 이는 전통적인 장자 우선의 관습과 개인적인 편애의 결과입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앞서게 되면 화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잘한다고 판단하고 올바르고 합리적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결단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 아니면 결과는 실패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모든 학문과 지혜와 지식으로도 하나님의 한 말씀을 이길 수 없는 것이 영적인 세계이며 하나님 나라의 법입니다. 인간의 후회는 늦은 것이며,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3.
28:10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11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16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17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18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9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
20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21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22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본문은 언약을 성취자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축복, 동행의 삶에 대한 말씀입니다. 야곱은 이 때로부터 20년 동안 도망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야곱이 도망하는 자리에 주님은 찾아오셨습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함께 하심을 약속해 주십니다. 

야곱이 잠든 그 곳에 가장 낮고 천한 자리, 위급한 인생의 자리에 주님은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언약해 주셨습니다. 야곱은 다시한번 하나님의 축복을 깨닫게 됩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이 임하심으로 하나님의 집입니다. 언약을 이어 받은 자에게 하나님은 임하십니다. 그리고 그 곳을 벧엘, 하나님의 집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가 언제나 붙들고 가야 할 것은 하나님의 언약 하나뿐입니다. 하나님의 동행과 축복은 내가 만든 결과나 자격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주신 말씀과 약속된 언약의 결과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세상에 임할 때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동행의 복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창세기 29:1-35

1.
1 야곱이 길을 떠나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러
2 본즉 들에 우물이 있고 그 곁에 양 세 떼가 누워 있으니 이는 목자들이 그 우물에서 양 떼에게 물을 먹임이라 큰 돌로 우물 아귀를 덮었다가
3 모든 떼가 모이면 그들이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기고 그 양 떼에게 물을 먹이고는 우물 아귀 그 자리에 다시 그 돌을 덮더라
4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형제여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이르되 하란에서 왔노라
5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홀의 손자 라반을 아느냐 그들이 이르되 아노라
6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가 평안하냐 이르되 평안하니라 그의 딸 라헬이 지금 양을 몰고 오느니라
7 야곱이 이르되 해가 아직 높은즉 가축 모일 때가 아니니 양에게 물을 먹이고 가서 풀을 뜯게 하라
8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그리하지 못하겠노라 떼가 다 모이고 목자들이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겨야 우리가 양에게 물을 먹이느니라

하나님은 인생의 방향을 인도하십니다. 눈에 보이기에는 야곱은 도망자이지만 그의 걸음을 하나님은 인도하십니다. 우물가에 정확히 도착하게 하시고, 목자들을 만나게 하십니다. 그리고 외삼촌 라반의 정보를 듣게 하십니다. 우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세밀한 인도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막막하고 쫓기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정확한 장소와 사람으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주를 믿는 자의 목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길을 인도하신다. 보이지 않아도 정확하게 이끌어 주신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믿음은 절대적 동행을 통하여 확신할 수 있습니다. 내 안에서 나를 인도하시고 이끌어 결국 언약과 약속을 이루어 주님의 자녀로 우리를 살게 하실줄 믿습니다. 

2.
15 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비록 내 생질이나 어찌 그저 내 일을 하겠느냐 네 품삯을 어떻게 할지 내게 말하라
16 라반에게 두 딸이 있으니 언니의 이름은 레아요 아우의 이름은 라헬이라
17 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18 야곱이 라헬을 더 사랑하므로 대답하되 내가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 년을 섬기리이다
19 라반이 이르되 그를 네게 주는 것이 타인에게 주는 것보다 나으니 나와 함께 있으라
20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
21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내 기한이 찼으니 내 아내를 내게 주소서 내가 그에게 들어가겠나이다
22 라반이 그 곳 사람을 다 모아 잔치하고
23 저녁에 그의 딸 레아를 야곱에게로 데려가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가니라
24 라반이 또 그의 여종 실바를 그의 딸 레아에게 시녀로 주었더라
25 야곱이 아침에 보니 레아라 라반에게 이르되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을 섬기지 아니하였나이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찌됨이니이까
26 라반이 이르되 언니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
27 이를 위하여 칠 일을 채우라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니 네가 또 나를 칠 년 동안 섬길지니라

본문은 단순히 “라헬 대신 레아를 맞이한 사건”이 아니라, 야곱을 ‘이스라엘’로 빚어 가시는 하나님의 깊은 연단의 시작입니다. 야곱은 지금까지 “속이는 자”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그를 연단을 통해 변화된 사람, 곧 이스라엘로 만들어 가십니다.

15-20, 23절 하나님은 속이는 자를 ‘당하게’ 하신다. 야곱은 라헬을 위해 7년을 기쁨으로 일합니다.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 라반은 라헬 대신 레아를 들여보냅니다. 이것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야곱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거울 사건입니다. 야곱이 과거에 했던 일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형 에서를 속였던 야곱입니다. 이제 똑같이 당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그냥 넘기지 않으시고 삶 속에서 깨닫게 하십니다. 내가 했던 것을 경험하게 하시고 그 아픔을 통해 변화시키십니다.

25절 하나님은 분노가 아닌 ‘자각’을 원하신다. 야곱이 아침이 되어 외칩니다. “라반이여 어찌하여 나를 속였나이까?” 이 질문은 사실 야곱 자신에게 돌아가야 할 질문입니다. “내가 왜 속임을 당했는가?” “나는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가?” 하나님은 야곱에게 벌을 주기보다 깨닫게 하시고 자신을 보게 하십니다. 연단의 핵심은 고통이 아니라 자기 인식의 변화입니다. 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났는가? 하나님이 무엇을 깨닫게 하시는가? 깨달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26-27절 하나님은 ‘지연’을 통해 성품을 빚으십니다. 라반은 말합니다. “이곳에서는 작은 자를 먼저 주지 아니한다” 그리고 또 7년을 요구합니다. 야곱은 원하던 것을 즉시 얻지 못하고
14년을 기다려야 하는 인생이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연단입니다. 야곱은 원래 빨리 얻고 속여서라도 취하고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다리는 사람으로 바꾸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지연, 기다림, 예상 밖의 시간을 허락하십니다. 그 이유는? 결과보다 사람을 바꾸기 위해서입니다.

3.
31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
32 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33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 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34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35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

사람으로 사랑받지 못했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여인 레아입니다. 본문은 단순한 출산 기록이 아니라, 하나님이 한 여인의 상처를 어떻게 믿음으로 변화시키시는지를 보여주는 매우 깊은 본문입니다. 레아의 마음의 흐름을 따라가면, 신앙의 성장 과정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31절 레아는 사랑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녀를 사랑하였습니다. 결국 레아는 막벨라굴에 묻히고, 사라-리브가-레아로 그리스도의 계보를 잊는 여인으로 선택을 받게 됩니다. 참 승리자는 라헬이 아니라 레아입니다. 

*32절 르우벤: 보라 아들이라-이제는 아들을 낳았으니 사랑과 인정을 받겠지? 사람의 인정에 묶인 신앙입니다. 
*33절 시므온: 들으심-하나님의 나의 애통함을 들으시고 돌보셨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야곱에게 묶인 삶을 살아갑니다. 
*34절 레위: 연합-이제는 남편이 나와 연합하리로다. 인간적인 소망을 품어보았으나 여전히 남편의 마음은 먼 곳에 있습니다. 
*35절 유다: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이제는 되었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남편으로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삶을 살아가겠다는 신앙의 고백이요, 인생의 전환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결국 레아는 사람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그의 삶과 신앙이 이동되고 성장하는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처를 통해, 사람을 바라보던 인생을 하나님을 찬양하는 인생으로 바꾸시는 것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각각의 연단을 통하여 하나님의 중심의 삶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창세기 30:1-43

1.
1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의 언니를 시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2 야곱이 라헬에게 성을 내어 이르되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3 라헬이 이르되 내 여종 빌하에게로 들어가라 그가 아들을 낳아 내 무릎에 두리니 그러면 나도 그로 말미암아 자식을 얻겠노라 하고
4 그의 시녀 빌하를 남편에게 아내로 주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5 빌하가 임신하여 야곱에게 아들을 낳은지라
6 라헬이 이르되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호소를 들으사 내게 아들을 주셨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을 단이라 하였으며
7 라헬의 시녀 빌하가 다시 임신하여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으매
8 라헬이 이르되 내가 언니와 크게 경쟁하여 이겼다 하고 그의 이름을 납달리라 하였더라
9 레아가 자기의 출산이 멈춤을 보고 그의 시녀 실바를 데려다가 야곱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더니
10 레아의 시녀 실바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으매
11 레아가 이르되 복되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갓이라 하였으며
12 레아의 시녀 실바가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으매
13 레아가 이르되 기쁘도다 모든 딸들이 나를 기쁜 자라 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아셀이라 하였더라
....
17 하나님이 레아의 소원을 들으셨으므로 그가 임신하여 다섯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은지라
18 레아가 이르되 내가 내 시녀를 내 남편에게 주었으므로 하나님이 내게 그 값을 주셨다 하고 그의 이름을 잇사갈이라 하였으며
19 레아가 다시 임신하여 여섯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은지라
20 레아가 이르되 하나님이 내게 후한 선물을 주시도다 내가 남편에게 여섯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는 그가 나와 함께 살리라 하고 그의 이름을 스불론이라 하였으며
21 그 후에 그가 딸을 낳고 그의 이름을 디나라 하였더라
22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
23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24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본문은 한 인간의 가계와 단순한 “출산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언약의 백성을 세워 가시는 과정, 곧 이스라엘 12지파 형성의 과정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간섭과 개입을 잘알 수 있습니다. 

비로서 이스라엘의 12지파가 완성됩니다. 
레아(6남 1녀):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스불론 디나
실바: 갓. 아셀
라헬: 요셉과 베냐민
빌하: 단, 납달리

하나님은 아브라함때로부터 약속하신 언약을 완성해 나가십니다. 12지파를 세우심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도 진행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질투, 경쟁, 조급함 속에서도 하나님의 언약은 멈추지 않습니다.
2)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의 방법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여종, 거래, 합환채가 인간의 노력과 시도인 듯 보이지만 결국 “하나님이 기억하실 때” 이루어지는 산물입니다.
3) 결국 12지파는 인간의 작품이 아니라 하나님 은혜의 결과입니다. 이스라엘의 시작 자체가 완벽이 아니라 은혜 위에 세워진 공동체입니다.

2.
25 라헬이 요셉을 낳았을 때에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나를 보내어 내 고향 나의 땅으로 가게 하시되
26 내가 외삼촌에게서 일하고 얻은 처자를 내게 주시어 나로 가게 하소서 내가 외삼촌에게 한 일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27 라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로 말미암아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 네가 나를 사랑스럽게 여기거든 그대로 있으라
28 또 이르되 네 품삯을 정하라 내가 그것을 주리라
29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가 어떻게 외삼촌을 섬겼는지, 어떻게 외삼촌의 가축을 쳤는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30 내가 오기 전에는 외삼촌의 소유가 적더니 번성하여 떼를 이루었으니 내 발이 이르는 곳마다 여호와께서 외삼촌에게 복을 주셨나이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내 집을 세우리이까

야곱은 삼촌 라반의 집에서 많은 것을 얻고 이루게 되었습니다. 아내를 얻고 자식을 얻고 많은 연단을 통하여 경험을 쌓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내 집’입니다. 야곱이 말하는 내 집은 더 이상 남의 집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기 책임으로서 삶입니다. 

내 집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워주시는 것입니다. 야곱은 긴 시간 노력했지만 아직 완전한 자기의 것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때가 되었습니다. 준비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요셉의 태어난 후에 이삭은 떠날 결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단순한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알리는 신호와도 같은 것입니다. 

세상으로만 종노릇하는 삶에서 떠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시는 집을 지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요. 사명입니다. 떠나야할 때를 알고 결심을 이루는 지혜가 있길 소망합니다. 

3.
35 그 날에 그가 숫염소 중 얼룩무늬 있는 것과 점 있는 것을 가리고 암염소 중 흰 바탕에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을 가리고 양 중의 검은 것들을 가려 자기 아들들의 손에 맡기고
36 자기와 야곱의 사이를 사흘 길이 뜨게 하였고 야곱은 라반의 남은 양 떼를 치니라
37 야곱이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를 가져다가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 흰 무늬를 내고
38 그 껍질 벗긴 가지를 양 떼가 와서 먹는 개천의 물 구유에 세워 양 떼를 향하게 하매 그 떼가 물을 먹으러 올 때에 새끼를 배니
39 가지 앞에서 새끼를 배므로 얼룩얼룩한 것과 점이 있고 아롱진 것을 낳은지라
40 야곱이 새끼 양을 구분하고 그 얼룩무늬와 검은 빛 있는 것을 라반의 양과 서로 마주보게 하며 자기 양을 따로 두어 라반의 양과 섞이지 않게 하며
41 튼튼한 양이 새끼 밸 때에는 야곱이 개천에다가 양 떼의 눈 앞에 그 가지를 두어 양이 그 가지 곁에서 새끼를 배게 하고
42 약한 양이면 그 가지를 두지 아니하니 그렇게 함으로 약한 것은 라반의 것이 되고 튼튼한 것은 야곱의 것이 된지라
43 이에 그 사람이 매우 번창하여 양 떼와 노비와 낙타와 나귀가 많았더라

35-36절 라반의 계산입니다. 축복을 가로채려는 라반의 술수입니다. 라반은 야곱과 계약을 맺자마자 곧바로 행동합니다. 점 있는 것, 얼룩 있는 것들을 다 빼버리고 자기 아들들에게 맡기고 야곱과 3일 길을 떨어뜨림으로서 결코 야곱이 절대 재산을 늘리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라반은 하나님의 복을 인정했지만 여전히 야곱을 붙들어 두고 통제하려 합였습니다. 라반은 하나님의 역사보다 내 계산을 더 믿는 철저하게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37-40절 야곱의 방법입니다. 인간적인 지혜와 한계입니다. 야곱은 꾀를 냅니다. 버드나무, 살구나무, 플라타너스 가지 껍질을 벗겨 물가에 두어 짐승들이 볼 때 교미하게 하였습니다. 야곱도 여전히 자기 방법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과연 “이 방법 때문에 번성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야곱의 기술처럼 보이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31:9-12절 ‘하나님이 라반의 가축을 빼앗아 네게 주셨느니라’ 야곱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은 인간의 방법으로는 막을 수 없으며, 인간의 방법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라반이 막고, 야곱이 방법을 동원했지만 결국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주님께 생사화복을 맡겨드립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시고 역사하심으로 연약하고 부족한 종을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창세기 31:1-55

1.
1 야곱이 라반의 아들들이 하는 말을 들은즉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말미암아 이 모든 재물을 모았다 하는지라
2 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본즉 자기에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더라
3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지라
....
9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가축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
10 그 양 떼가 새끼 밸 때에 내가 꿈에 눈을 들어 보니 양 떼를 탄 숫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과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이었더라
11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내게 말씀하시기를 야곱아 하기로 내가 대답하기를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이르시되 네 눈을 들어 보라 양 떼를 탄 숫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이니라 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
13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 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

30장 야곱의 번성함을 보고 라반과 그의 아들들은 시기 질투합니다. 안색이 변하고 잘못된 생각을 갖게 됩니다. 이제 때가 되었습니다. 라반의 집에서 20년 동안의 삶을 청산하고 돌아갈 날이 임박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심으로 야곱을 라반의 집에서 이끌어내십니다. 

1-2절 하나님은 환경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사람과 환경을 통하여 떠날 수 밖에 없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좋아하던 사람들이 싫어하기 시작하고, 말 잘듣던 사람들이 적대적으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사람의 행동, 말, 관계의 변화, 분위기의 흐름 등 이 모든 환경이 이제 떠날때가 되었다는 하나님의 사인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말씀만을 찾지만 하나님은 상황을 통해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혹시 지금 관계가 바뀌고 환경이 흔들리고 마음이 불편하다면
하나님이 말씀하고 계실 수 있습니다. 13절 특별히 벧엘의 하나님은 과거 야곱이 도망가던 그 때를 상기 시키시며, 그 때를 기억하게 하십니다. 변화의 때가 된 것입니다. 

2.
17 야곱이 일어나 자식들과 아내들을 낙타들에게 태우고
18 그 모은 바 모든 가축과 모든 소유물 곧 그가 밧단아람에서 모은 가축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있는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로 가려 할새
19 그 때에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갔으므로 라헬은 그의 아버지의 드라빔을 도둑질하고
20 야곱은 그 거취를 아람 사람 라반에게 말하지 아니하고 가만히 떠났더라
21 그가 그의 모든 소유를 이끌고 강을 건너 길르앗 산을 향하여 도망한 지
22 삼 일 만에 야곱이 도망한 것이 라반에게 들린지라
23 라반이 그의 형제를 거느리고 칠 일 길을 쫓아가 길르앗 산에서 그에게 이르렀더니
24 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이르시되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더라
....
30 이제 네가 네 아버지 집을 사모하여 돌아가려는 것은 옳거니와 어찌 내 신을 도둑질하였느냐
32 외삼촌의 신을 누구에게서 찾든지 그는 살지 못할 것이요 우리 형제들 앞에서 무엇이든지 외삼촌의 것이 발견되거든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소서 하니 야곱은 라헬이 그것을 도둑질한 줄을 알지 못함이었더라
33 라반이 야곱의 장막에 들어가고 레아의 장막에 들어가고 두 여종의 장막에 들어갔으나 찾지 못하고 레아의 장막에서 나와 라헬의 장막에 들어가매
34 라헬이 그 드라빔을 가져 낙타 안장 아래에 넣고 그 위에 앉은지라 라반이 그 장막에서 찾다가 찾아내지 못하매
35 라헬이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마침 생리가 있어 일어나서 영접할 수 없사오니 내 주는 노하지 마소서 하니라 라반이 그 드라빔을 두루 찾다가 찾아내지 못한지라

야곱은 삼촌의 반대와 저항을 예상하고 라반의 집을 비운 사이에 도망을 선택합니다. 이 사실을 알게된 라반은 칠 일 길을 따라 야곱을 추격해 왔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이 라반에게 임하여 절대 그를 헤치거나 선악간에 말하거나 판단하지 말라고 엄중 경고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30절 이하에 기록된 라반의 신, 드라빔입니다. 드라빔은 작은 가정의 신상입니다. 집안을 보호하고, 재산과 번영을 가져다 준다고 믿었으며, 부적과 우상의 역할을 한 가정의 수호신과 같은 존재입니다. 드라빔은 가문 대대로 전수되어지는 유품으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신상입니다. 이것을 도적질 당하였기 때문에 라반은 화가 난 것입니다.

왜 성경은 의도적으로 드라빔을 기록하고 있습니까? 이는 하나님의 신과 거짓 우상인 드라빔을 비교하기 위함에 있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심으로 야곱을 인도하고 이끌어 보호하시고 지켜 주시고 있지만. 라반의 신 드라빔은 라헬 여인의 엉덩이에 깔려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그저 허무하고 무능하고 무가치한 존재의 우상임을 명백하게 드려내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것이 영적인 전쟁이라면 하나님의 지키시는 야곱과 우상을 섬기는 라반의 싸움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과는 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찾아오시고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라반은 잃어버린 드라빔을 찾아 헤메이는 어리석은 사람인 것입니다. 

3.
43 라반이 야곱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딸들은 내 딸이요 자식들은 내 자식이요 양 떼는 내 양 떼요 네가 보는 것은 다 내 것이라 내가 오늘 내 딸들과 그들이 낳은 자식들에게 무엇을 하겠느냐
44 이제 오라 나와 네가 언약을 맺고 그것으로 너와 나 사이에 증거를 삼을 것이니라
45 이에 야곱이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46 또 그 형제들에게 돌을 모으라 하니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무더기를 이루매 무리가 거기 무더기 곁에서 먹고
47 라반은 그것을 여갈사하두다라 불렀고 야곱은 그것을 2)갈르엣이라 불렀으니
48 라반의 말에 오늘 이 무더기가 너와 나 사이에 증거가 된다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갈르엣이라 불렀으며
49 또 미스바라 하였으니 이는 그의 말에 우리가 서로 떠나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나와 너 사이를 살피시옵소서 함이라
50 만일 네가 내 딸을 박대하거나 내 딸들 외에 다른 아내들을 맞이하면 우리와 함께 할 사람은 없어도 보라 하나님이 나와 너 사이에 증인이 되시느니라 함이었더라
51 라반이 또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나와 너 사이에 둔 이 무더기를 보라 또 이 기둥을 보라
52 이 무더기가 증거가 되고 이 기둥이 증거가 되나니 내가 이 무더기를 넘어 네게로 가서 해하지 않을 것이요 네가 이 무더기, 이 기둥을 넘어 내게로 와서 해하지 아니할 것이라

하나님의 세워주시는 평화의 언약입니다. 라반은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더 이상 소유권을 주장하지 못하고 싸우지 못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라반에게 경고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개입하시면 갈등의 방향이 바뀌게 됩니다. 돌무더기를 놓고 경계를 세우게 됩니다. 평화는 거리를 통해서 유지되는 것입니다. 건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까운 사이라도 허물없는 사이라도 ‘선’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갈사하두다-갈르엣-미스바’ 라는 선의 경계를 세우심으로 평화의 조약을 맺게 하십니다. 

경계의 신앙입니다. 반드시 하나님-인간 사이의 경계를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의 경계를 우리는 겸손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피조물로서 하나님은 창조주로서의 경계입니다. 경계의 선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호이며 생명을 지키려는 절대적 울타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시는 경계의 은혜를 생각하며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경계의 신앙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도 이루어집니다. 평화는 감정이 아니라 질서이며, 사랑은 무질서가 아니라 경계를 지키는 것입니다. 관계를 침범하지 말아야 하며, 상처를 건드리지 말아야 하며, 지배와 통제의 관계를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경계없는 사랑른 결국 상처를 만드는 관계가 됩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경계는 거룩을 지키는 질서이며, 인간과 인간의 경계는 관계를 지키는 울타리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환경을 통하여 말씀하실 때 순종하게 하시고, 신앙의 경계를 살피고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 선한 경계를 이루며 살아가는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창세기 32:1-32

1.
1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2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하나님의 함께 하심입니다. 마하나임은 두 진영입니다. 하나는 자기 가족과 재산으로 이루어진 자기 진영이고, 하나는 하나님의 사자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군대 진영입니다. 보이는 현실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보호입니다.

야곱은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군대를 보내어서 야곱과 함께 하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동행은 이미 진행중입니다. 과거 어머니 리브가의 복중에서부터 지금 까지 하나님은 한 번도 야곱을 떠나지 아니하시며 함께 하셨습니다. 야곱은 벧엘에서 강력한 체험을 하고 오늘 얍복강에서 다시 그 은혜를 뜨겁게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움의 순간에 우리는 마하나임의 은혜를 믿어야 합니다. 두려움의 순간에 나의 진영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진영에 들어가야 합니다. 결국 싸움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군대 안에 있는 존재입니다. 마하나임은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 함께하는 하나님의 군대가 우리 인생을 둘러싸고 있다는 믿음의 선언입니다.

2.
3 야곱이 세일 땅 에돔 들에 있는 형 에서에게로 자기보다 앞서 사자들을 보내며
4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 주 에서에게 이같이 말하라 주의 종 야곱이 이같이 말하기를 내가 라반과 함께 거류하며 지금까지 머물러 있었사오며
5 내게 소와 나귀와 양 떼와 노비가 있으므로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알리고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 하라 하였더니
6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이르되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
7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 한 동행자와 양과 소와 낙타를 두 떼로 나누고
8 이르되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 하고
9 야곱이 또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형 에서의 반응과 야곱의 대처입니다. 6절 야곱은 사자들을 보내 형의 반응을 알아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에서의 “말”은 없고, “행동 정보”만 전달됩니다. 환영한다는 말도 없고, 용서한다는 표현도 없고, 오직 “400명과 함께 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문화에서 군사적 위협으로 해석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긴장과 위기가 몰려오게 됩니다. 이에 야곱은 자신의 준비할 것으로 준비합니다. 무리를 두 떼로 나누고 피할 길을 도모합니다. 

믿음이 있어도 두려움은 옵니다. 야곱은 마하나임을 경험했지만 야곱은 여전히 두려워합니다. 중요한 것은? “두려움이 없느냐 있느냐”가 아니라 그 두려움 속에서 어떻게 반응하느냐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400명”을 만나는 예상치 못한 위기가 생기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상황을 믿음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리고 두려움 속에서도 기도하며 지혜를 구하고 구조를 세워야 합니다. 야곱처럼 감정을 인정하고 상황을 분석하고 지혜롭게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최종 의지는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야곱처럼 9절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준비는 내가 하지만,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3.
22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23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최종 승부는 하나님과입니다. 야곱은 모두를 보냅니다. 그리고 홀로 남아서 하나님과 마지막 씨름을 합니다. 하나님과 씨름하는 자리에서 야곱은 응답을 받게 됩니다. 축복은 붙잡는 자에게 온는 것입니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야곱의 태도가 바뀝니다. 하나님을 붙잡고 구하는 사람 야곱입니다. 신앙은 지식이 아니라 집요한 붙듦입니다. 포기하지 않는 믿음이 결국 축복을 만드는 것입니다.

홀로 남아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홀로’는? 모든 의지를 끊어낸 상태입니다. 홀로의 시간에 비로서 우리는 하나님을 붙들게 됩니다. 홀로의 시간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통찰하게 됩니다. 홀로의 시간에 우리는 인생의 사명과 나아갈 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홀로의 시간 사람은 떠났지만 하나님은 더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기도 말씀 예배의 자리 홀로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홀로되는 시간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 자리에서 주님을 더욱 붙드시길 소망합니다. 

사랑의 아버지!!
위기의 순간 마하나임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믿고, 홀로 남겨진 자리에서 더욱 주님을 가까이 할 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창세기 33:1-34:31

1.
33:1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오고 있는지라 그의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2 종들과 그들의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의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3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
4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

긴장과 두려움 속에 살던 야곱이 마침내 형 에서를 만나 하나님이 이루시는 화해와 용서를 경험하는 장면입니다. 단순한 형제 상봉이 아니라, 하나님의 개입으로 관계가 회복되는 구속사의 한 장면입니다.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던 야곱을 하나님은 축복해 주십니다. 형 에서의 마음을 만지시고 형제지정을 주셔서 에서로 동생 야곱을 만날 때 화해와 사랑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야곱이 가졌던 지금 까지의 근심과 걱정이 눈 녹듯이 모두 녹아버렸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풀어질 때 땅의 문제가 풀어짐을 믿습니다. 모든 삶의 열쇠는 우리가 믿는 주안에 있음을 다시한번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과의 철저한 관계를 이루시길 소망합니다. 물질도 인간의 관계도 모두 주안에 있음을 믿습니다. 

2.
33:18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읍에 이르러 그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
19 그가 장막을 친 밭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백 크시타에 샀으며
20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더라

34:1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 디나가 그 땅의 딸들을 보러 나갔더니
2 히위 족속 중 하몰의 아들 그 땅의 추장 세겜이 그를 보고 끌어들여 강간하여 욕되게 하고
3 그 마음이 깊이 야곱의 딸 디나에게 연연하며 그 소녀를 사랑하여 그의 마음을 말로 위로하고
4 그의 아버지 하몰에게 청하여 이르되 이 소녀를 내 아내로 얻게 하여 주소서 하였더라
....
8 하몰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아들 세겜이 마음으로 너희 딸을 연연하여 하니 원하건대 그를 세겜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라
9 너희가 우리와 통혼하여 너희 딸을 우리에게 주며 우리 딸을 너희가 데려가고
10 너희가 우리와 함께 거주하되 땅이 너희 앞에 있으니 여기 머물러 매매하며 여기서 기업을 얻으라 하고
....
14 야곱의 아들들이 그들에게 말하되 우리는 그리하지 못하겠노라 할례 받지 아니한 사람에게 우리 누이를 줄 수 없노니 이는 우리의 수치가 됨이니라
15 그런즉 이같이 하면 너희에게 허락하리라 만일 너희 중 남자가 다 할례를 받고 우리 같이 되면
16 우리 딸을 너희에게 주며 너희 딸을 우리가 데려오며 너희와 함께 거주하여 한 민족이 되려니와
17 너희가 만일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우리는 곧 우리 딸을 데리고 가리라

산 넘어 산입니다. 야곱이 형 에서와의 문제를 해결하고 난 후에 또 다른 시험이 찾아왔습니다. 이는 야곱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벧엘로 올라가지(31:13) 않은 까닭입니다. 

야곱은 현실적인 안주를 선택하였습니다. 세겜은 교통과 상업이 발단한 지역으로 가축을 목축하기 좋은 지역입니다. 경제적으로 매우 안정된 곳이기에 야곱은 이 곳에 정착을 마음먹었습니다. 장막을 치고, 밭을 사고, 제단을 쌓았습니다. 야곱은 세겜에서 5-10년 동안 머무는 것입니다. 

머물려 안주하고 있는 야곱에게 하나님은 무남독녀 외동딸 디나를 통하여 움직이게 하십니다. 디나가 장성한 이후에 동내에 나갔다가 세겜성 추장의 아들 세겜에게 강간을 당하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약곱의 아들들은 분노하게 되고 통혼, 결혼을 제안하는 세겜에게 야곱의 아들들이 할례를 권장하게 됩니다. 

야곱은 당장 벧엘로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순종의 지연은 불순종입니다. 불순종의 댓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잘못된 신앙의 자리는 반드시 문제를 불러일으킵니다. 환경은 영적 상태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거룩한 자녀는 구별된 곳에서 성결을 이루어야 합니다. 

3.
24 성문으로 출입하는 모든 자가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의 말을 듣고 성문으로 출입하는 그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으니라
25 제삼일에 아직 그들이 아파할 때에 야곱의 두 아들 디나의 오라버니 시므온과 레위가 각기 칼을 가지고 가서 몰래 그 성읍을 기습하여 그 모든 남자를 죽이고
26 칼로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을 죽이고 디나를 세겜의 집에서 데려오고
27 야곱의 여러 아들이 그 시체 있는 성읍으로 가서 노략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그들의 누이를 더럽힌 까닭이라
28 그들이 양과 소와 나귀와 그 성읍에 있는 것과 들에 있는 것과
29 그들의 모든 재물을 빼앗으며 그들의 자녀와 그들의 아내들을 사로잡고 집 속의 물건을 다 노략한지라

할례의 조건을 걸어서 할례를 시킨 후에 야곱의 두 아들 시므온과 레위가 칼을 가지고 가서 모든 세겜 성의 남자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세겜에서의 삶은 결국 디나의 강간과 세겜성에 집단 살인으로 끝이 났습니다. 

불순종이 가져다준 연쇄적 죄의 반응입니다. ‘야곱의 불순종-디나의 일탈-세겜의 강간-야곱의자녀들의 속임-집단학살-약탈’

하나님의 자리 벧엘을 떠나면 세겜의 비극이 반드시 오는 것입니다. 벧엘은 하나님 중심, 세겜은 인간 중심의 자리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만났지만, 그 자리로 돌아가지 않았고 결국 공동체 전체가 무너집니다. 문제는 디나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 살아간 시간과 자리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의 원하시는 신앙과 믿음의 자리를 지키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아멘. 



창세기 35:1-36:43

1.
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2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3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4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5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6 야곱과 그와 함께 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7 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 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
8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으매 그를 벧엘 아래에 있는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 불렀더라
9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10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11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12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
13 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 올라가시는지라
14 야곱이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기둥 곧 돌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5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더라

야곱은 세겜에서 낭패를 당합니다. 이후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서 벧엘로 돌아갑니다. 먼저 하나님은 야곱에게 1절 벧엘로 올라가서 제단을 쌓으라 말씀하십니다. 이에 야곱은 2절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한 후에 벧엘로 올라갑니다. 거기에서 7절 제단을 쌓으며 엘벧엘, 벧엘의 하나님을 부릅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10절 새 이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시고 12-14절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의 축복을 다시 선포하십니다. 

벧엘의 하나님, 우리는 신앙의 원점을 회복해야 합니다. 벧엘은 야곱이 도망자였던 때 하나님을 처음 인격적으로 만난 곳입니다(창 28장). 그곳에서 하나님은 언약(땅, 자손, 보호)을 약속하셨습니다. 지금 하나님이 다시 부르시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세겜에서 머물며 타협했던 삶을 정리하고 언약의 자리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앞으로만 가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처음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상제거와 정결, 회복의 조건입니다. 야곱은 가족들에게 명령합니다. 이방 신상 버리라. 자신을 정결하게 하라. 의복을 바꾸라. 그리고 세겜에서 가져온 우상들을 상수리나무 아래 묻습니다. 벧엘로 가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은 정리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겉모습이 아니라 삶의 방향이 바뀌어야 합니다. “묻었다”는 것은? 다시 꺼내지 않겠다는 결단입니다.

언약의 재확인 (9-15절) 정체성 회복입니다. 하나님은 다시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이름을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재확인 하십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의 약속 재선언하십니다. 이 장면은 단순 반복이 아닙니다. 실패 이후에도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태가 아니라 언약을 기준으로 일하십니다.

2.
35:16 그들이 벧엘에서 길을 떠나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간 거리를 둔 곳에서 라헬이 해산하게 되어 심히 고생하여
17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지금 네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18 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3)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베냐민이라 불렀더라
19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20 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더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일컫더라
21 이스라엘이 다시 길을 떠나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쳤더라
22 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주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질투와 시기의 여인 라헬이 가족 묘지에 들어가지 못하고 길에서 죽어 장사를 지내게 됩니다. 반면 레아는 막벨라 굴에 들어가는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라헬은 사랑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하였고, 레아는 사랑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하나님으로 사랑을 받은 여인입니다. 이 모든 것에 결정적인 차이는 어디서부터 온 것입니까? 신앙의 방향에서 온 것입니다. 라헬은 드라빔을 훔쳐 나올 정도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온전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레아는 인생의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찬양하는 인생으로 변화게 됩니다. 

결국, 레아가 삶의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레아를 통하여 메시아 계보가 이어지고 막벨라의 굴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삶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처음이 아니라 “끝”이 중요하고, 조건이 아니라 “방향”이 중요합니다.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3.
35:23 레아의 아들들은 야곱의 장자 르우벤과 그 다음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이요
24 라헬의 아들들은 요셉과 베냐민이며
25 라헬의 여종 빌하의 아들들은 단과 납달리요
26 레아의 여종 실바의 아들들은 갓과 아셀이니 이들은 야곱의 아들들이요 밧단아람에서 그에게 낳은 자더라
27 야곱이 기럇아르바의 마므레로 가서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 이르렀으니 기럇아르바는 곧 아브라함과 이삭이 거류하던 헤브론이더라
28 이삭의 나이가 백팔십 세라
29 이삭이 나이가 많고 늙어 기운이 다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

36:1 에서 곧 에돔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2 에서가 가나안 여인 중 헷 족속 엘론의 딸 아다와 히위 족속 시브온의 딸인 아나의 딸 오홀리바마를 자기 아내로 맞이하고
3 또 이스마엘의 딸 느바욧의 누이 바스맛을 맞이하였더니
4 아다는 엘리바스를 에서에게 낳았고 바스맛은 르우엘을 낳았고
5 오홀리바마는 여우스와 얄람과 고라를 낳았으니 이들은 에서의 아들들이요 가나안 땅에서 그에게 태어난 자들이더라
6 에서가 자기 아내들과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의 모든 사람과 자기의 가축과 자기의 모든 짐승과 자기가 가나안 땅에서 모은 모든 재물을 이끌고 그의 동생 야곱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으니
7 두 사람의 소유가 풍부하여 함께 거주할 수 없음이러라 그들이 거주하는 땅이 그들의 가축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용납할 수 없었더라
8 이에 에서 곧 에돔이 세일 산에 거주하니라

이삭의 죽음 이후에 본격적으로 야곱와 에서는 다른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특별히 에서의 떠남은 신앙의 결정적인 분기점이 됩니다. 

에서는 이렇게 행동합니다. 재산이 많아지면서 야곱과 함께 살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세일 산”으로 떠나게 됩니다. 에서의 떠남의 표면적인 이유는 재산 문제이지만, 실제 이유는? 언약에서의 이탈입니다. 이 사건은 마치 아브라함과 롯(롯이 떠남)의 사건과 동일한 패턴입니다. 에서는 “함께 있을 수 없다” 이유로 떠났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떠남이며 언약의 중심을 떠난 것입니다. 에서는 세일산에 거하며 에돔의 시작을 알리며 세상적으로 부유하고 풍성한 삶을 누리지만 하나님을 잊어버린 민족으로, 언약의 말씀 밖에 사람들로 끝나버리고 맙니다. 

결국 말씀 안에 머무는 자와 떠나는 자입니다. 인생은 “잘 사는 것”보다 “어디에 머무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머무는 자 →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사람, 떠나는 자 →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입니다. 이 차이는 인생 전반에 참 성공과 실패의 가름이 되는 열쇠가 됩니다. 언약 안에 머무는 인생이 진짜 성공이고, 언약을 떠난 번성은 결국 다른 길 실패의 길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하신 곳 벧엘로 올라가 머물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창세기 37:1-17

1.
1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의 아버지가 거류하던 땅에 거주하였으니
2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3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4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야곱은 요셉을 특별히 사랑하며 편애하였습니다. 요셉은 야곱이 가장 사랑하였던 아내 라헬의 사이에서 노년에 얻은 자식이었습니다. 때문에 요셉에 대한 사랑이 크게 작용하였습니다. 야곱은 이미 편애라는 죄의 문제를 경험하였습니다. 그의 아버지 이삭은 에서를 사랑하였고,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습니다. 결과 가정 안에 거짓과 경쟁과 분열과 도피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 것을 경험하고도 야곱은 자신도 모르게 같은 일을 반복하게 됩니다. 채색옷을 입히고 요셉은 미성숙하게 행동합니다. 모든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게 됩니다. 

어떤 면에서 하나님은 인간 모두를 사랑하지만 특별한 사랑으로 선택한 자녀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편애와 사랑을 받은 독생 아들입니다. 독생 아들 예수를 향한 인간의 미움과 시기는 폭력적이고 살인적인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예정과 선택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고 선택입니다. 왜 하나님이 그렇게 예정하시고 선택하시는지는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렇게 예정되고 선택된 자녀는 예외 없이 목숨을 바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오늘 우리 가운데 주님의 특별한 은총이 임하길 기도합니다. 주님의 나를 사랑하심처럼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충만하여 살아도 죽어도 주님만을 위한 삶이 되길 기도합니다. 

2.
5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6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꾼 꿈을 들으시오
7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8 그의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의 꿈과 그의 말로 말미암아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9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10 그가 그의 꿈을 아버지와 형들에게 말하매 아버지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네가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11 그의 형들은 시기하되 그의 아버지는 그 말을 간직해 두었더라

하나님은 그렇게 사랑하시는 자녀에게 꿈을 주십니다. 꿈은 사명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꿈은 단순한 상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과 미래, 그리고 사명을 담은 통로입니다. 이 꿈은 훗날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꿈은 선택이 아니라 부르심입니다. 요셉은 스스로 큰 사람이 되겠다고 계획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꿈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꿈은? 인간의 야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요셉은 훗날 애굽의 총리가 되고 온 세계의 기근을 준비하며 야곱의 가문을 살리는 통로가 됩니다. 즉 요셉의 꿈은 “높아지는 꿈”이 아니라, “살리는 사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높이시는 이유는 자기를 위해 살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많은 생명을 살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꿈은 반드시 훈련의 시간을 통과합니다. 요셉은 꿈을 꾸었지만, 곧바로 총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형제들의 미움을 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은 꿈보다 먼저 사람을 준비시키시기 때문입니다. 큰 꿈에는 큰 연단이 필요합니다. 만약 어린 요셉이 바로 권세를 얻었다면 교만했을 수도 있고 사람을 살리는 지도자가 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난 속에서 요셉의 교만을 깎고 믿음을 훈련시키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꿈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꿈은 반드시 광야와 기다림을 통과합니다.

꿈을 받은 사람은 끝까지 하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형들은 꿈을 미워했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꿈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끝까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노예가 되어도 감옥에 갇혀도 잊혀져도 하나님을 놓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꿈보다 더 중요한 것은 꿈을 주신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꿈을 붙들면 실망하지만, 하나님을 붙들면 결국 때가 되면 이루십니다.

3.
12 그의 형들이 세겜에 가서 아버지의 양 떼를 칠 때에
13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이 세겜에서 양을 치지 아니하느냐 너를 그들에게로 보내리라 요셉이 아버지에게 대답하되 내가 그리하겠나이다
14 이스라엘이 그에게 이르되 가서 네 형들과 양 떼가 다 잘 있는지를 보고 돌아와 내게 말하라 하고 그를 헤브론 골짜기에서 보내니 그가 세겜으로 가니라
15 어떤 사람이 그를 만난즉 그가 들에서 방황하는지라 그 사람이 그에게 물어 이르되 네가 무엇을 찾느냐
16 그가 이르되 내가 내 형들을 찾으오니 청하건대 그들이 양치는 곳을 내게 가르쳐 주소서
17 그 사람이 이르되 그들이 여기서 떠났느니라 내가 그들의 말을 들으니 도단으로 가자 하더라 하니라 요셉이 그의 형들의 뒤를 따라 가서 도단에서 그들을 만나니라

요셉은 꿈을 이루기 위한 여정이 시작됩니다. 헤브론-세겜-도단-애굽으로 긴 여정을 떠나게 됩니다. 헤브론은 언약의 땅입니다. 세겜은 갈등과 위험의 땅, 도단은 배신의 자리이며 애굽은 하나님 섭리의 무대입니다. 

요셉의 꿈의 시작은 순종으로 부터입니다. 헤브론에서 세겜까지의 거리는 3일길입니다. 쉽지 않은 힘든 여정입니다. ‘내가 그리하겠나이다’ 그 길을 순종하며 따릅니다. 

꿈은 목적지가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과정입니다. 요셉은 아직 모릅니다. 하나님이 왜 자신을 이 길로 보내시는지, 하지만 하나님은 이미 애굽의 기근, 야곱 가문의 보존, 이스라엘 민족의 형성 까지 보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오늘만 보지만, 하나님은 미래의 세대를 보십니다. 그래서 꿈은 단순히 “이루어질 미래”가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 배우는 여정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특별한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를 삼으시고 우리 안에 사명을 발견케 하시는 하나님, 그 사명을 이루는 그날까지 동행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창세기 38:1-30

1.
1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하니라
2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데리고 동침하니
3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유다가 그의 이름을 엘이라 하니라
4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오난이라 하고
5 그가 또 다시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셀라라 하니라 그가 셀라를 낳을 때에 유다는 거십에 있었더라

창세기 37-50장은 요셉의 이야기로 중심을 이룹니다. 그런데 38장은 유다의 이야기가 성경에 깍두기로 끼워져 있습니다.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생명의 보존이라는 측면이라면, 유다는 메시아 계보이기 때문입니다. 즉 요셉은 고난을 통해 백성을 살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자적 모형이며, 유다는 메시아 계보를 잇는 보존의 장입니다.

37장에서 형제들은 요셉을 팔아버립니다. 이후에 유다는 어떠한 이유에서 형제들은 떠나 타락하며 성경적인 금기인 가나안 여자를 선택하여 가정을 꾸리게 됩니다. 이후에 세 아들 엘, 오난, 셀라를 얻게 됩니다. 

2.
6 유다가 장자 엘을 위하여 아내를 데려오니 그의 이름은 다말이더라
7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8 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 된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
9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그의 형에게 씨를 주지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
10 그 일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11 유다가 그의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버지 집에 있어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다말이 가서 그의 아버지 집에 있으니라

고향과 형제를 떠나서 가정을 꾸린 유다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게 됩니다. 7절 엘이 죄악가운데 죽고, 9-10절 오난 역시 죄악가운데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엘의 죄목에 대하여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 보시기에 악함으로’입니다. 이는 한 마디로 하나님 없는 삶을 이야기 합니다.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가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악입니다. 오난의 죄는 구체적입니다. 오난은 하나님의 법을 무시 멸시하고 지키지 않은 것입니다. 자신의 쾌락은 추구했지만 마지막 언약은 버리는 죄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유다 가문은 총체적인 죄입니다. 이는 가나안 문화와 혼합되고, 성적 타락과 책임의 회피, 자기 중심적인 삶이 파멸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유다는 모든 책임을 여인에게 돌립니다. 남자 잡아먹는 여인으로서 다말 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에 유다는 아직 막내 아들이 미성숙하다는 핑계로 다말을 친정으로 돌려 보내고 말았습니다. 

3.
13 어떤 사람이 다말에게 말하되 네 시아버지가 자기의 양털을 깎으려고 딤나에 올라왔다 한지라
14 그가 그 과부의 의복을 벗고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휩싸고 딤나 길 곁 에나임 문에 앉으니 이는 셀라가 장성함을 보았어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음으로 말미암음이라
15 그가 얼굴을 가리었으므로 유다가 그를 보고 창녀로 여겨
16 길 곁으로 그에게 나아가 이르되 청하건대 나로 네게 들어가게 하라 하니 그의 며느리인 줄을 알지 못하였음이라 그가 이르되 당신이 무엇을 주고 내게 들어오려느냐
17 유다가 이르되 내가 내 떼에서 염소 새끼를 주리라 그가 이르되 당신이 그것을 줄 때까지 담보물을 주겠느냐
18 유다가 이르되 무슨 담보물을 네게 주랴 그가 이르되 당신의 도장과 그 끈과 당신의 손에 있는 지팡이로 하라 유다가 그것들을 그에게 주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그가 유다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더라
....
24 석 달쯤 후에 어떤 사람이 유다에게 일러 말하되 네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였고 그 행음함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느니라 유다가 이르되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
25 여인이 끌려나갈 때에 사람을 보내어 시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나이다 청하건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이니이까 한지라
26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하나님은 유다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를 놀라운 방법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유다를 통하여 며느리 다말을 취하게 하십니다. 다말이 고향 집에서 오랜 시간을 기다려도 유다가 소식을 주지 않았습니다. 이에 유다가 딤나로 올라오는 기회를 봐서 다말은 창녀로 변신하여 유다의 씨를 받게 임신하게 된 것입니다. 다말의 임신 소식을 전해들은 유다는 노발 대발하지만 그 자식이 자신의 씨인줄 알게 됩니다. 그리고 26절 스스로 이 모든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본문의 교훈이 무엇입니까?
메시아 계보는 인간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유다도 다말도 완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실패한 인간 속에서도 역사하심으로 구속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하나님은 무너진 가문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무너진 가문을 세우셔서 사용하십니다. 음란으로 기짓으로 책임회피로 죽음으로 가득한 가문 위에 하나님은 소망을 주시고 희망을 주셔서 다윗과 예수그리스도의 계보를 이어 가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38장은 “더러운 인간 이야기”가 아니라, “더러운 인간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은혜 이야기”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더러운 인간의 죄 가운데서도 찾아와 주님의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 우리 가운데도 임하여 주님의 뜻만을 이루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창세기 39:1-23

1.
1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
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3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4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5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6 주인이 그의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하고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

창세기 39장은 하나님의 충만한 요셉의 삶입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한 자는 형통의 복을 받습니다. 요셉은 애굽으로 팔려 끌려내려 갔지만, 그 곳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요셉을 버리지 않으시며 동행하셨습니다. 

39장에 무려 4번에 걸쳐서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2절)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 (3절)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5절)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이라” (21절)
요셉의 형통은 자리 때문이 아니라 임재 때문입니다. 노예였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시니 형통했고, 감옥에 갇혔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시니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환경이 형통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광야도 형통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성도의 가장 큰 축복은 소유가 아니라 동행입니다. 하나님으로 함께 하는 은혜가 있길 소망합니다. 

2.
7 그 후에 그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8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아내에게 이르되 내 주인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탁하였으니
9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10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자는 죄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지속적으로 요셉을 유혹합니다. 얼마나 집요하고 끈질긴지 유혹이 10절 날마다 게속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혹 앞에서 요셉이 보여준 모습은? 타협하지 않았고, 반복되는 유혹을 피했고. 결국 옷을 버리고라도 도망했습니다. 죄를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가까이 가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은 욕망을 따라 사는 것을 자유라고 말하지만, 성경은 거룩을 지키는 자가 진짜 자유인이라고 말합니다. 요셉은 순간의 쾌락보다 하나님의 뜻을 선택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것은? 믿음뿐입니다. 
하나님으로 함께 한다는 믿음.
하나님이 거룩함으로 우리도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믿음.
모든 것이 지나가고 영원한 것은 심판과 상급이라는 믿음만이 우리를 세상의 유혹에서 지킬 수 있는 힘이 됨을 믿습니다. 

3.
12 그 여인이 그의 옷을 잡고 이르되 나와 동침하자 그러나 요셉이 자기의 옷을 그 여인의 손에 버려두고 밖으로 나가매
13 그 여인이 요셉이 그의 옷을 자기 손에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감을 보고
14 그 여인의 집 사람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보라 주인이 히브리 사람을 우리에게 데려다가 우리를 희롱하게 하는도다 그가 나와 동침하고자 내게로 들어오므로 내가 크게 소리 질렀더니
15 그가 나의 소리 질러 부름을 듣고 그의 옷을 내게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갔느니라 하고
16 그의 옷을 곁에 두고 자기 주인이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려
17 이 말로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데려온 히브리 종이 나를 희롱하려고 내게로 들어왔으므로
18 내가 소리 질러 불렀더니 그가 그의 옷을 내게 버려두고 밖으로 도망하여 나갔나이다
19 그의 주인이 자기 아내가 자기에게 이르기를 당신의 종이 내게 이같이 행하였다 하는 말을 듣고 심히 노한지라
20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21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22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23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요셉은 죄를 거절했는데 오히려 감옥에 갇힙니다. 세상 기준으로 보면 손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거룩한 선택이 결코 손해가 아닙니다. 요셉은 변명하지 않았고, 분노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감옥에서도 요셉과 함께하셨습니다. 때로 성도의 삶에도 이해되지 않는 억울함 오해 손해 침묵의 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감옥 같은 시간도 섭리 안에서 사용하십니다. 요셉의 감옥은 실패의 장소가 아니라 총리로 가는 훈련장이었습니다.

감옥에서도 형통한 사람 요셉입니다. 놀라운 것은 장소가 바뀌어도 요셉의 삶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노예로 있어도 충성했고 감옥에서도 신뢰를 얻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이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진짜 형통은? 상황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속에 거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성공을 형통이라 말하지만 성경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형통이라 말합니다.

사랑의 아버지!!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걸어가며 거룩함을 이루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님을 신뢰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창세기 40:1-41:36

1.
40:1 그 후에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그들의 주인 애굽 왕에게 범죄한지라
2 바로가 그 두 관원장 곧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3 그들을 친위대장의 집 안에 있는 옥에 가두니 곧 요셉이 갇힌 곳이라
4 친위대장이 요셉에게 그들을 수종들게 하매 요셉이 그들을 섬겼더라 그들이 갇힌 지 여러 날이라
5 옥에 갇힌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 두 사람이 하룻밤에 꿈을 꾸니 각기 그 내용이 다르더라
6 아침에 요셉이 들어가 보니 그들에게 근심의 빛이 있는지라
7 요셉이 그 주인의 집에 자기와 함께 갇힌 바로의 신하들에게 묻되 어찌하여 오늘 당신들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나이까
8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

가장 깊은 절망속에 있을 때 거기서 소망이 피어나는 것입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무고로 인하여 왕의 감옥에 감금되었습니다. 그 곳에서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바로의 두 관원장 술 맡은자와 떡 맡은자가 요셉의 감옥에 오게 되었고, 이들로 꿈을 꾸게 하십니다. 요셉은 이 두 사람의 꿈을 알게 하심으로 술 맡은 관원장은 전직이 회복되고, 떡 맡은 관원장은 죽음을 당하게 하십니다. 

감옥은 끝이 아니라 역시 하나님이 일 하시는 과정입니다. 요셉의 감옥은 하나님의 약속이 사라진 장소가 아니라 약속이 성숙해지는 장소였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일하십니다. 사람은 감옥을 보았지만 하나님은 그 곳에서 애굽의 총리 자리를 보고 계셨습니다. 사람은 잊어도 하나님은 절대 잊지 않으십니다. 인간의 기억보다 더 확실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지금의 기다림이 길어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억울함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십니다. 사람에게 기대가 끊어질 때 하나님만 의지하게 됩니다. 감옥 같은 시간은 하나님이 가장 깊게 역사하시는 시간일 수 있습니다.

2.
41:1 만 이 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꾼즉 자기가 나일 강 가에 서 있는데
2 보니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강 가에서 올라와 갈밭에서 뜯어먹고
3 그 뒤에 또 흉하고 파리한 다른 일곱 암소가 나일 강 가에서 올라와 그 소와 함께 나일 강 가에 서 있더니
4 그 흉하고 파리한 소가 그 아름답고 살진 일곱 소를 먹은지라 바로가 곧 깨었다가
5 다시 잠이 들어 꿈을 꾸니 한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6 그 후에 또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오더니
7 그 가는 일곱 이삭이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킨지라 바로가 깬즉 꿈이라
....
14 이에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요셉을 부르매 그들이 급히 그를 옥에서 내 놓은지라 요셉이 곧 수염을 깎고 그의 옷을 갈아 입고 바로에게 들어가니
15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한 꿈을 꾸었으나 그것을 해석하는 자가 없더니 들은즉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 하더라
16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이 년 후에 하나님은 바로로도 꿈을 꾸게 하시고, 요셉으로 그 꿈에 대한 해석을 주심으로 애굽의 총리로 그 자리를 격상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은 절대 잊지 않으시고 만 이년의 기다림, 침묵, 하나님의 때를 준비하십니다.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때는 반드시 옵니다. 그리고 그 기다림의 시간은 헛된 시간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때가 오면 그 어떤 것도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버리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으시는 것 같아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때는 인간의 시간보다 정확합니다. 너무 빠르지도 늦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좋은 때를 아십니다. 기다림 속에서 사람이 만들어집니다. 하나님은 환경보다 사람을 먼저 빚으십니다. 응답이 늦어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지금의 감옥 같은 시간도 하나님 손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침묵 속에서도 준비하고 계십니다. 중요한 것은 “언제 되느냐”보다 “어떤 사람으로 준비되느냐”입니다.

3.
41:33 이제 바로께서는 명철하고 지혜 있는 사람을 택하여 애굽 땅을 다스리게 하시고
34 바로께서는 또 이같이 행하사 나라 안에 감독관들을 두어 그 일곱 해 풍년에 애굽 땅의 오분의 일을 거두되
35 그들로 장차 올 풍년의 모든 곡물을 거두고 그 곡물을 바로의 손에 돌려 양식을 위하여 각 성읍에 쌓아 두게 하소서
36 이와 같이 그 곡물을 이 땅에 저장하여 애굽 땅에 임할 일곱 해 흉년에 대비하시면 땅이 이 흉년으로 말미암아 망하지 아니하리이다

요셉은 바로 앞에서 막힘없이 장래의 되어질 일들을 풀이 설명해 줍니다. 그리고 미래의 대책까지 설명을 합니다. 이 말에 감동을 받은 바로는 요셉을 택하고 애굽 환난을 대비할 적임자로 정하고 대비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준비하였습니다. 이미 형들로부터 팔려 보디발의 집에 거하며, 왕의 감옥에 있을 동안에도 요셉은 13년이라는 시간 동안 종으로서 겸손함으로서 철저하게 준비된 사람이 됩니다. 원망하지 않았으며 비관하며 낙심하지 않았으며 신앙으로 성장 발전하여 나 중심의 채색옷을 입은 사람에서 하나님의 중심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지금 훈련의 시간을 헛되게 보내지 마십시오. 작은 자리에서도 성실함을 배우십시오. 기회보다 준비됨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를 다듬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하여 준비된 일꾼이 되길 소망합니다. 

사랑의 아버지!!
13년의 시간 동안 준비된 요셉처럼, 우리로 실력 있는 삶을 살게 하시고 어려운 일과 환란이 닥쳐올 때 이 모든 것을 이겨내며 굳건히 세워지는 신앙인의 길을 걸어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창세기 41:37-57

1.
37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가 이 일을 좋게 여긴지라
38 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하고
39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40 너는 내 집을 다스리라 내 백성이 다 네 명령에 복종하리니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니라
41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의 총리가 되게 하노라 하고
42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목에 걸고
43 자기에게 있는 버금 수레에 그를 태우매 무리가 그의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엎드리라 하더라 바로가 그에게 애굽 전국을 총리로 다스리게 하였더라
44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나는 바로라 애굽 온 땅에서 네 허락이 없이는 수족을 놀릴 자가 없으리라 하고
45 그가 요셉의 이름을 사브낫바네아라 하고 또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그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니라 요셉이 나가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라

바로는 요셉의 해석과 제안을 듣고 놀랍니다. 단순히 꿈을 잘 풀이한 것이 아니라, 다가올 위기를 준비하는 지혜와 하나님의 영이 요셉 안에 있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높이시는 사람 요셉입니다. 바로는 말합니다. “38절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요셉은 감옥에 갇힌 히브리 노예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순간에 그를 애굽의 총리로 세우십니다. 인간의 조건과 배경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이 결국 높아집니다. 반면 요셉은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41:16절에서 이미 말했습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하나님을 높인 사람이, 하나님께 높임을 받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겸손하게 행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나님은 준비된 때에 하나님의 방법대로 준비된 사람을 세우십니다.

2.
46 요셉이 애굽 왕 바로 앞에 설 때에 삼십 세라 그가 바로 앞을 떠나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
47 일곱 해 풍년에 토지 소출이 심히 많은지라
48 요셉이 애굽 땅에 있는 그 칠 년 곡물을 거두어 각 성에 저장하되 각 성읍 주위의 밭의 곡물을 그 성읍 중에 쌓아 두매
49 쌓아 둔 곡식이 바다 모래 같이 심히 많아 세기를 그쳤으니 그 수가 한이 없음이었더라

요셉은 7년 풍년 동안 곡식을 저장합니다. 사람들은 풍년 속에서 안일해질 수 있었지만, 요셉은 다가올 흉년을 준비했습니다. 믿음은 현재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미래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 받을 수 있을 때 말씀과 기도로 자신을 채워야 합니다. 시험은 갑자기 오지만, 준비된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건강도 물질도 영적인 모든 상황도 반드시 흉년의 때를 지나기 마련입니다. 때문에 준비 된 자만이 물질도 건강도 믿음도 지켜 낼수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올려드리고 쌓아논 기도는 곳감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 말인 즉 기도로 은혜를 비축하지 않으면 곤고함이 이를 때 이겨낼 수 없다는 말입니다. 모든 것을 준비하고 계획하고 하루 하루 살아가는 지혜가 충만하길 늘 소망합니다. 

3.
50 흉년이 들기 전에 요셉에게 두 아들이 나되 곧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이 그에게서 낳은지라
51 요셉이 그의 장남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52 차남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

요셉의 2아들입니다. 두 아들의 이름 가운데는 요셉의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므낫세-하나님이 잊게 하셨다. 요셉은 형들에게 미움받았고, 구덩이에 던져졌고, 노예로 팔렸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말하지 않습니다. “세월이 나를 잊게 했다.” “성공이 상처를 덮었다.” 아니라, “하나님이 잊게 하셨다.” 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상처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상처보다 커진 것입니다. 요셉은 과거의 상처에 붙들린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과거를 해석한 사람입니다. 므낫세의 은혜입니다. 상처를 붙들고 살지 않는 것, 하나님 안에서 치유되는 것입니다. 

에브라임 — “고난의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하나님이 나를 내 고난의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41:52). 에브라임은 “두 배의 결실”, “풍성함”이라는 뜻입니다. 중요한 표현은 “고난의 땅에서”입니다. 애굽은 요셉에게 편안한 땅이 아니었습니다. 눈물의 땅이고, 억울함의 땅이며, 외로움의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땅에서 열매 맺게 하셨습니다. 요셉은 환경을 바라보지 않고, 환경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신앙은 환경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에브라임의 은혜입니다. 눈물의 자리에서도 열매 맺는 것. 광야에서도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은혜로 결국 2아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2지파를 차지하게 됩니다. 원래 야곱의 아들은 12명이지만, 후에 레위 지파는 하나님께 구별되어 기업 분배에서 제외되고, 대신 요셉의 두 아들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각각 독립된 지파로 세워집니다. 즉, 요셉 1지파가 아니라 므낫세 + 에브라임 = 2지파가 된 것입니다. 이는 요셉에게 주어진 특별한 축복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주님이 높이시며 주님으로 복을 누리는 요셉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창세기 42:1-38

1.
1 그 때에 야곱이 애굽에 곡식이 있음을 보고 아들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바라보고만 있느냐
2 야곱이 또 이르되 내가 들은즉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다 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 그러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하매
3 요셉의 형 열 사람이 애굽에서 곡식을 사려고 내려갔으나
4 야곱이 요셉의 아우 베냐민은 그의 형들과 함께 보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의 생각에 재난이 그에게 미칠까 두려워함이었더라
5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양식 사러 간 자 중에 있으니 가나안 땅에 기근이 있음이라

기근속에서 시작된 회복입니다. 창세기 42장은 단순한 “곡식을 사러 간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깨어진 야곱의 가정을 회복시키기 위해 움직이시는 장면입니다. 야곱의 가정은 겉으로는 살아 있었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무너져 있었습니다. 형제들은 요셉을 팔아버린 죄책감을 숨기고 살았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요셉을 잃은 상처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형제들 사이에는 시기와 미움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기근”이라는 환경을 통해 이 가족을 움직이십니다. 기근은 고통이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깨우시는 도구입니다.
풍요 속에서는 움직이지 않던 사람들이 부족함 속에서 하나님 앞으로 나오게 됩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실패 결핍, 관계의 아픔. 인생의 막힘. 이런 기근 같은 시간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회복을 시작하시는 자리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편안함보다 회복을 더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2.
9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
10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아니니이다 당신의 종들은 곡물을 사러 왔나이다
11 우리는 다 한 사람의 아들들로서 확실한 자들이니 당신의 종들은 정탐꾼이 아니니이다
12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아니라 너희가 이 나라의 틈을 엿보러 왔느니라
13 그들이 이르되 당신의 종 우리들은 열두 형제로서 가나안 땅 한 사람의 아들들이라 막내 아들은 오늘 아버지와 함께 있고 또 하나는 없어졌나이다
14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한 말이 이것이니라
15 너희는 이같이 하여 너희 진실함을 증명할 것이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너희 막내 아우가 여기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여기서 나가지 못하리라
16 너희 중 하나를 보내어 너희 아우를 데려오게 하고 너희는 갇히어 있으라 내가 너희의 말을 시험하여 너희 중에 진실이 있는지 보리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는 과연 정탐꾼이니라 하고
17 그들을 다 함께 삼 일을 가두었더라

지금까지 요셉이 하나님께 시험을 받았다면, 지금 부터는 그의 형들의 차례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통하여 형들을 시험합니다. 요셉은 먼저 용서하지 않고 시험합니다. 왜입니까? 용서도 받을 자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용서를 구할 때 용서하는 것입니다. 용서를 구하지 않는데 어떻게 용서할 수 있습니까? 요셉은 형들이 용서를 받을 자격이 있는지에 대하여 시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때로 우리를 불편한 자리로 몰아가십니다. 숨겨둔 죄를 보게 하시고 오래된 상처를 드러내시고 그리고 결국 회개하게 하십니다.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은 용서하십니다. 회개의 과정은 아프지만 하나님을 결국 용서를 통하여 위로해 주십니다. 오늘 우리 안에 감춰진 죄의 문제를 드러내시는 것은 정죄가 아닌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손길임을 깨달으시길 소망합니다. 

3.
21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22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그 아이에 대하여 죄를 짓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더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핏값을 치르게 되었도다 하니
23 그들 사이에 통역을 세웠으므로 그들은 요셉이 듣는 줄을 알지 못하였더라
....
36 그들의 아버지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에게 내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
38 야곱이 이르되 내 아들은 너희와 함께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의 형은 죽고 그만 남았음이라 만일 너희가 가는 길에서 재난이 그에게 미치면 너희가 내 흰 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

회복을 위한 조건? 감정과 죄가 드러나야 합니다. 형들은 과거의 일을 괴로워 합니다. 아버지는 잃어버린 아들로 역시 고통스러워합니다. 20년 동안 아무도 말하지 않고 쉬쉬했던 과거의 일이 이번 사건을 통하여 모두 드러나게 됩니다. 과거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감춰놓았던 것입니다. 단지 아무런 일이 없는 듯 살았을 뿐입니다. 아버지를 속인죄, 동생을 죽었다는 죄책감. 형들은 죄를 덮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죄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기근과 두려움과 환경을 통해 그 죄를 끌어올리십니다. 왜입니까? 죄를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회복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상처도 곪으면 터져야 치료가 시작됩니다. 죄도 드러나야 회개가 시작됩니다.
감추어진 죄는 영혼을 병들게 하지만, 고백 된 죄는 회복의 시작이 됩니다.

형제들은 기근 속에서 곡식만 구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감추어진 죄와 눌려 있던 감정을 마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회복이 시작되었습니다. 회복의 조건은 강함이 아닙니다. 정직함입니다. 감정과 죄가 하나님 앞에 드러날 때, 하나님은 그 무너진 삶을 다시 세우기 시작하십니다.

사랑의 아버지!!
우리안에 숨겨지고 잊혀진 죄의 상처가 예수 안에서 드러나게 하시고 회개와 용서로서 모두 치유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창세기 43:1-34

1.
1 그 땅에 기근이 심하고
2 그들이 애굽에서 가져온 곡식을 다 먹으매 그 아버지가 그들에게 이르되 다시 가서 우리를 위하여 양식을 조금 사오라
3 유다가 아버지에게 말하여 이르되 그 사람이 우리에게 엄히 경고하여 이르되 너희 아우가 너희와 함께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
8 유다가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아이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
9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서 그를 찾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10 우리가 지체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벌써 두 번 갔다 왔으리이다

1차로 애굽에서 받아온 양식이 바닥이 낳습니다. 다시 애굽에 가서 2차로 곡식을 받아와야만 합니다. 그러나 선 듯 갈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이는 베냐민을 데리고 가야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야곱은 베냐민에 대한 애정이 요셉만큼이나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요셉을 잃어버린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기에 베냐민을 떠날 보낼 생각이 없었습니다. 이는 요셉처럼 베냐민을 잃어버릴까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르우벤은 실바의 사건으로 장자로서 권위를 잃어버렸고, 시므온은 애굽에 잡혀 있습니다. 때문에 유다가 책임을 가지고 나서서 아버지 야곱을 설득합니다. 9절 자신이 담보가 되어서 즉 책임을 지고 반드시 베냐민을 돌보겠다는 다짐입니다. 과거 집나가서 속을 썩이던 유다가 아니라 책임있는 자로 변화된 것입니다. 인생의 시험을 사람을 분명 성숙시킵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유다는 책임지고 희생하려는 자가되었습니다. 

2.
11 그들의 아버지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러할진대 이렇게 하라 너희는 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그릇에 담아가지고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예물로 드릴지니 곧 유향 조금과 꿀 조금과 향품과 몰약과 유향나무 열매와 감복숭아이니라
12 너희 손에 갑절의 돈을 가지고 너희 자루 아귀에 도로 넣어져 있던 그 돈을 다시 가지고 가라 혹 잘못이 있었을까 두렵도다
13 네 아우도 데리고 떠나 다시 그 사람에게로 가라
14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15 그 형제들이 예물을 마련하고 갑절의 돈을 자기들의 손에 가지고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요셉 앞에 서니라

야곱의 심정이 변화된 까닭은? 창세기 42장까지의 야곱은 두려움에 붙잡혀 있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내게 화를 끼쳤느냐” “베냐민은 내려가지 못하리라” 그는 상실의 아픔 때문에 베냐민을 끝까지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43:11-15에서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야곱은 마침내 베냐민을 보내기로 결단합니다. 왜 그의 마음이 변화되었을까요?

먼저, 현실의 한계를 인정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 땅에 기근이 심하고” 양식은 다 떨어졌고, 이제 내려가지 않으면 모두 죽게 되는 상황입니다. 야곱은 깨닫습니다. 내가 붙든다고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구나 인간의 힘에는 한계가 있구나. 사람은 끝까지 자기 힘으로 버티려 하지만, 하나님은 때때로 환경의 한계를 통해 우리의 손을 내려놓게 하십니다. 야곱은 기근 앞에서 자신의 통제력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두 번째, 유다의 책임 있는 모습 때문입니다. 르우벤의 말은 야곱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달랐습니다. 유다는 감정적으로 말하지 않았고 현실을 직시했고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나섰습니다. 야곱은 유다 안에서 변화를 본 것입니다. 과거에는 형제를 팔던 유다였지만, 이제는 형제를 살리려는 유다가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진실한 책임감은 굳어진 마음도 움직입니다.

세 번째, 더 이상 붙들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평생 붙드는 삶을 살았습니다. 장자의 축복 재물 사랑 자녀 특별히 요셉을 잃은 후에는 베냐민을 지나치게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에게 가르치십니다. “네가 붙든다고 안전한 것이 아니다.” 신앙은 내가 붙드는 힘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말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기를 원하노라” (14절) 드디어 야곱의 시선이 베냐민에게서 하나님께로 옮겨집니다.

네 번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유명한 고백이 나옵니다.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14절) 이 말은 절망의 말이 아닙니다. 체념도 아닙니다. “결과는 하나님 손에 있습니다”라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야곱은 이제 계산보다 신뢰를 배우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속임수로 살았고 자기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했지만 이제는 하나님께 맡기기 시작합니다.

3.
23 그가 이르되 너희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너희 돈은 내가 이미 받았느니라 하고 시므온을 그들에게로 이끌어내고
24 그들을 요셉의 집으로 인도하고 물을 주어 발을 씻게 하며 그들의 나귀에게 먹이를 주더라
25 그들이 거기서 음식을 먹겠다 함을 들었으므로 예물을 정돈하고 요셉이 정오에 오기를 기다리더니
26 요셉이 집으로 오매 그들이 집으로 들어가서 예물을 그에게 드리고 땅에 엎드려 절하니
27 요셉이 그들의 안부를 물으며 이르되 너희 아버지 너희가 말하던 그 노인이 안녕하시냐 아직도 생존해 계시느냐
28 그들이 대답하되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평안하고 지금까지 생존하였나이다 하고 머리 숙여 절하더라
29 요셉이 눈을 들어 자기 어머니의 아들 자기 동생 베냐민을 보고 이르되 너희가 내게 말하던 너희 작은 동생이 이 아이냐 그가 또 이르되 소자여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

동생 베냐민을 본 요셉은 마음이 풀어집니다. 이는 과거에 요셉을 팔았던 형제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형제들을 환대하며 지극한 마음으로 대접합니다. 이미 요셉의 과거의 미움의 마음은 사라지고 사랑과 긍휼로 채워지게 되었습니다. 

상처를 준 사람들 속에서는 마음이 굳어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도 베냐민 같은 존재를 주십니다. 다시 사랑을 믿게 하는 사람, 다시 마음을 열게 하는 사람, 은혜를 회복하게 하는 사람. 그리고 결국 하나님은 요셉의 마음을 녹이셔서 복수의 사람 대신 회복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용서와 사랑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새 마음이 임하고 주님의 은혜만이 채워지는 축복의 사람이 되길 소망합니다. 

사랑의 아버지!!
시험과 환난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킴을 믿습니다. 더 강한 믿음의 사람으로 용서의 사람으로 세워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창세기 44:1-34

1.
1 요셉이 그의 집 청지기에게 명하여 이르되 양식을 각자의 자루에 운반할 수 있을 만큼 채우고 각자의 돈을 그 자루에 넣고
2 또 내 잔 곧 은잔을 그 청년의 자루 아귀에 넣고 그 양식 값 돈도 함께 넣으라 하매 그가 요셉의 명령대로 하고
3 아침이 밝을 때에 사람들과 그들의 나귀들을 보내니라
4 그들이 성읍에서 나가 멀리 가기 전에 요셉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일어나 그 사람들의 뒤를 따라 가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선을 악으로 갚느냐
5 이것은 내 주인이 가지고 마시며 늘 점치는 데에 쓰는 것이 아니냐 너희가 이같이 하니 악하도다 하라
6 청지기가 그들에게 따라 가서 그대로 말하니
7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주여 어찌 이렇게 말씀하시나이까 당신의 종들이 이런 일은 결단코 아니하나이다
8 우리 자루에 있던 돈도 우리가 가나안 땅에서부터 당신에게로 가져왔거늘 우리가 어찌 당신의 주인의 집에서 은 금을 도둑질하리이까
9 당신의 종들 중 누구에게서 발견되든지 그는 죽을 것이요 우리는 내 주의 종들이 되리이다
10 그가 이르되 그러면 너희의 말과 같이 하리라 그것이 누구에게서든지 발견되면 그는 내게 종이 될 것이요 너희는 죄가 없으리라
11 그들이 각각 급히 자루를 땅에 내려놓고 자루를 각기 푸니
12 그가 나이 많은 자에게서부터 시작하여 나이 적은 자에게까지 조사하매 그 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된지라
13 그들이 옷을 찢고 각기 짐을 나귀에 싣고 성으로 돌아 가니라

과연 형들이 예전과 같은 사람들인가? 아니면 변화된 사람들인가? 
요셉은 마지막 시험을 준비합니다.
“형들이 베냐민도 버릴 것인가?” 이것이 시험의 핵심입니다.

요셉은 형들을 용서하기 위해서 마지막 시험을 합니다. 형들의 변화된 삶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변화되지 않은 자에게 용서는 무의미합니다. 왜냐하면? 변화되지 않는 자는 잘못된 죄를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더 큰 범죄를 저지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요셉은 형들의 변화된 삶을 시험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도 때로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넘어뜨리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 안에 무엇이 있는지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내가 손해 보더라도 사랑할 수 있는가?”를 물으십니다. 형들은 마침내 변했습니다. 자신을 위해 동생을 버리던 사람들이 이제는 동생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만든 변화입니다. 과거의 죄책감에 머무는 사람이 아니라 희생과 사랑으로 변화된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변화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 우리도 모르게 우리안에 변화가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를 주장하고 다스리는 운전자가 죄에서 우리 주님으로 바뀐 까닭입니다. 우리 주님은 결국은 우리를 선한 곳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선한 곳이란 주님의 마음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주시고 우리로 그렇게 살아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조금씩 존재가 변화되어지고 바뀌어가는 것입니다. 우리안에 예수가 있다면 우리는 분명히 이 같은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변화는 회복이고 변화는 은총입니다. 

2.
14 유다와 그의 형제들이 요셉의 집에 이르니 요셉이 아직 그 곳에 있는지라 그의 앞에서 땅에 엎드리니
15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행하였느냐 나 같은 사람이 점을 잘 치는 줄을 너희는 알지 못하였느냐
16 유다가 말하되 우리가 내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무슨 설명을 하오리이까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정직함을 나타내리이까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노예가 되겠나이다 
....
32 주의 종이 내 아버지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짐을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33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34 그 아이가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내가 어찌 내 아버지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버지에게 미침을 보리이다

이 장면은 유다 인생의 전환점이며, 형제 공동체 회복의 절정입니다. 지금까지 침묵하던 유다가 앞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요셉 앞에서 가장 길고 간절한 말을 쏟아냅니다. 과거의 유다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요셉을 팔자고 제안했던 사람, 형제를 희생시켜 자신의 이익을 얻으려 했던 사람, 창세기 38장에서 책임 없는 삶으로 무너졌던 사람. 그런데 이제 그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은 실패한 사람도 변화시키십니다.

유다는 대신 종이 되겠다고 요청합니다. “아이 대신 나를 머물게 하소서” 이 장면은 성경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장면입니다. 왜냐하면 유다가 “대신 희생되는 사람”의 모습으로 서 있기 때문입니다. 훗날 유다 지파에서 누가 오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십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대신하여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유다의 모습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희생을 미리 보여주는 그림과 같습니다.

유다는 변했습니다. 형제를 팔던 사람이 형제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이 변화는 인간의 결심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긴 연단과 다루심 속에서 이루어진 변화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도 책임지는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도망치는 사람이 아니라 감당하는 사람, 남을 희생시키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는 사람, 상처 주는 사람이 아니라 살리는 사람, 참된 신앙은 책임을 회피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반드시 책임을 동반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책임지는 한 사람을 통해 가정도, 공동체도, 역사를도 회복시키십니다.

사랑의 아버지!!
믿음과 신앙으로 변화된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유다처럼 책임을 다하게 하시고 충성으로 나가는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창세기 45:1-15

1.
1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리니 그 때에 그와 함께 한 다른 사람이 없었더라
2 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3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
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6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45장은 요셉이야기의 절정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뜻으로 보는 역사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형들의 시기와 배신, 억울한 누명, 긴 고난과 고통의 삶이었지만 이 모든 것을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로 해석합니다. 

형들은 분명 죄를 지었습니다. 요셉을 죽이려 했고, 결국 노예로 팔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말합니다. 8절 당신들이 나를 보낸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나이다. 이 말은 형들의 죄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죄는 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악과 실패까지도 사용하셔서 더 크신 뜻을 이루십니다.

요셉의 인생을 보면, 
형들의 미움 → 애굽으로 가는 통로
보디발 집의 종살이 → 훈련의 시간
감옥 → 바로를 만나는 준비
총리 자리 → 많은 생명을 살리는 자리 가 됩니다.

성경은 인간의 역사를 우연의 결과로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고, 인도하시고, 사용하시며, 완성하시는 과정 으로 봅니다. 로마서 8:28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요셉은 그 사실을 자신의 삶으로 증명한 사람입니다.

2.
9 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아뢰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지체 말고 내게로 내려오사
10 아버지의 아들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고센 땅에 머물며 나와 가깝게 하소서
11 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족과 아버지께 속한 모든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나이다 하더라고 전하소서
12 당신들의 눈과 내 아우 베냐민의 눈이 보는 바 당신들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은 내 입이라
13 당신들은 내가 애굽에서 누리는 영화와 당신들이 본 모든 것을 다 내 아버지께 아뢰고 속히 모시고 내려오소서 하며
14 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우니 베냐민도 요셉의 목을 안고 우니라
15 요셉이 또 형들과 입맞추며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서야 요셉과 말하니라

요셉은 형들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울며 안고 위로하며 가족을 초청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섭리를 아는 사람은 사람보다 하나님을 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요셉이 “형들 때문에 내 인생 망했다” 라고 생각했다면 복수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 라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 섭리를 믿는 순간, 상처는 사명이 되고, 고난은 준비가 되며, 눈물은 은혜의 통로가 됩니다. 그래서 용서가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보는 사람은 과거에 묶이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인간은 악을 행하지만, 하나님은 그 악까지 사용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가장 큰 예가 십자가입니다. 인간의 최악의 죄가 하나님의 최고의 구원이 되었습니다.

3.
25 그들이 애굽에서 올라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아버지 야곱에게 이르러
26 알리어 이르되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어 애굽 땅 총리가 되었더이다 야곱이 그들의 말을 믿지 못하여 어리둥절 하더니
27 그들이 또 요셉이 자기들에게 부탁한 모든 말로 그에게 말하매 그들의 아버지 야곱은 요셉이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서야 기운이 소생한지라
28 이스라엘이 이르되 족하도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 하니라

하나님을 믿는 야곱의 삶이 행복합니다. 야곱이 요셉이 살아있다는 말에 과거의 상처가 회복되고 소망 가운데 기운이 살아납니다. 

형들은 가나안으로 돌아가 외칩니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어 애굽 온 땅의 총리가 되었더이다.” 그러나 야곱은 처음에 믿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야곱은 이미 오래전에 요셉이 죽었다고 생각하며 마음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야곱의 마음이 어리둥절하여 그들을 믿지 아니하더니” 하지만 요셉이 보낸 수레를 보고, 그의 마음이 살아납니다. “27절 그들의 아버지 야곱의 기운이 살아난지라.” 여기서 “기운이 살아나다”는 말은 단순히 기분이 좋아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꺼졌던 삶의 소망이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절망 속에서도 끝나지 않는 하나님 역사입니다. 

야곱은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다고 생각했고 베냐민마저 잃을까 두려워했으며 인생이 끝났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미 회복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야곱이 모르는 동안 요셉은 살아 있었고 총리가 되었으며 가족을 위한 자리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십니다.

신앙은 상황이 좋아져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살아계신 역사를 볼 때 회복됩니다.
야곱처럼 우리도 말하게 됩니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도다.” 절망이 끝이라고 생각했던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이미 회복의 수레를 보내고 계십니다.

사랑의 아버지!!
그 소망을 믿고 바라고 의지하는 모든 자에게 전화위복, 해피엔딩의 삶이 주 안에서 이루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창세기 46:1-47:12

1.
1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니
2 그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4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
5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날새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바로가 그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에 자기들의 아버지 야곱과 자기들의 처자들을 태우고
6 그들의 가축과 가나안 땅에서 얻은 재물을 이끌었으며 야곱과 그의 자손들이 다함께 애굽으로 갔더라
7 이와 같이 야곱이 그 아들들과 손자들과 딸들과 손녀들 곧 그의 모든 자손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

야곱은 마지막 중요한 결단을 내려야 했습니다. 바로 애굽으로 내려 가는 것입니다. 야곱은 과거의 때와 달리 ‘브엘세바’에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의 명령과 응답을 기다립니다. 때에 하나님의 이상에 야곱에게 임하여 망설이지 말고 애굽 요셉이 있는 곳으로 내려 가라 명령하십니다. 

1-4절 중요한 순간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① 명령 —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야곱은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애굽은 이방 땅이며 조상들에게 약속된 땅 밖으로 나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아브라함 때에는 애굽 내려감이 실패의 경험이었고, 이삭에게는 하나님께서 애굽으로 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망설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믿음은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움직이는 것입니다.

② 약속 —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나님은 단지 이동을 허락하시는 것이 아니라, 애굽에서도 언약이 계속될 것을 약속하십니다. 가나안을 떠난다고 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애굽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성장시키시고 출애굽을 준비하시며 구속사의 다음 장을 열어가십니다. 중요한 것은 장소보다 하나님의 함께하심입니다.

2.
46:31 요셉이 그의 형들과 아버지의 가족에게 이르되 내가 올라가서 바로에게 아뢰어 이르기를 가나안 땅에 있던 내 형들과 내 아버지의 가족이 내게로 왔는데
32 그들은 목자들이라 목축하는 사람들이므로 그들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를 이끌고 왔나이다 하리니
33 바로가 당신들을 불러서 너희의 직업이 무엇이냐 묻거든
34 당신들은 이르기를 주의 종들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목축하는 자들이온데 우리와 우리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소서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나니 당신들이 고센 땅에 살게 되리이다

47:1 요셉이 바로에게 가서 고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와 내 형들과 그들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가나안 땅에서 와서 고센 땅에 있나이다 하고
2 그의 형들 중 다섯 명을 택하여 바로에게 보이니
3 바로가 요셉의 형들에게 묻되 너희 생업이 무엇이냐 그들이 바로에게 대답하되 종들은 목자이온데 우리와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고
4 그들이 또 바로에게 고하되 가나안 땅에 기근이 심하여 종들의 양 떼를 칠 곳이 없기로 종들이 이 곳에 거류하고자 왔사오니 원하건대 종들로 고센 땅에 살게 하소서
5 바로가 요셉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아버지와 형들이 네게 왔은즉
6 애굽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땅의 좋은 곳에 네 아버지와 네 형들이 거주하게 하되 그들이 고센 땅에 거주하고 그들 중에 능력 있는 자가 있거든 그들로 내 가축을 관리하게 하라

고센땅의 영적인 의미입니다. 요셉의 조언대로 이스라엘은 애굽의 고센땅을 요구하고 차지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 놀라운 은혜의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바로 고센땅은 애굽 가운데 독립된 지역이며 애굽의 문화와 환경으로부터 벗어난 지역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애굽의 문화, 우상, 동화 섞임에 대한 구별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래서 고센의 중요한 의미는? “구별”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 안에 살지만, 애굽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정체성입니다. 성도는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은 아닙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고…” 고센은 세상 한가운데 있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된 자리였습니다.

교회의 모습이 이와 같아야 할 줄 믿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영적인 고센이어야 합니다. 세상 속에 존재하지만 세상의 가치관에 흡수되지 않고 하나님의 통치를 따라 살아가는 공동체 말입니다. 고센은 도피처가 아니라, 거룩을 지키는 자리입니다.

3.
7 요셉이 자기 아버지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앞에 서게 하니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
8 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나이가 얼마냐
9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10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

초라해 보이지만 가장 존귀한 사람 야곱입니다. 본문에는 매우 놀라운 장면이 나옵니다. 애굽의 절대 권력자 바로 늙고 지친 유목민 야곱입니다. 두 사람이 마주 섭니다. 세상 기준으로 보면 바로는 최고 권력자 야곱은 기근을 피해 내려온 노인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반복해서 말합니다.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축복하는 사람이 더 높은 자리입니다. 히브리서에서도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축복을 받느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세상 권세보다 더 큰 것은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야곱은 가진 것은 없어 보여도, 하나님의 약속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세상을 축복하도록 부름받았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주신 약속은 이것이었습니다. “너는 복이 될지라.” 믿음의 사람은 단지 복 받는 사람이 아니라, 복을 흘려보내는 사람입니다. 야곱은 도움을 받으러 애굽에 왔지만, 실제로는 애굽을 축복하는 사람으로 섭니다. 이것이 성도의 정체성입니다. 교회는 세상에게 이용당하는 존재가 아니라 축복을 흘려보내는 존재입니다. 성도는 직장에서 가정에서 공동체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결국 세상을 축복하는 힘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야곱이 바로를 축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세상의 힘 때문이 아닙니다. 재산 때문도 아니고 권력 때문도 아니며 건강 때문도 아닙니다. 하나님과 언약 관계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짜 축복은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옵니다. 세상은 돈, 권력, 성공이 사람을 높인다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진짜 세상을 살리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세상의 고센이 되어야 합니다. 야곱 한 사람으로 인해 바로가 축복을 받고 애굽이 은혜를 경험합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세상을 정죄만 하는 곳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고 위로하고 축복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가 있는 곳마다 평안이 있고 은혜가 흐르며 생명이 살아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 빛은 숨어있지 않습니다. 세상 가운데 들어가 비춥니다. 성도는 복의 종착지가 아니라, 복의 통로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철저한 구별과 성결과 거룩이 우리의 힘임을 고백합니다. 성결한 교회가 되어서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게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창세기 47:13-48:7

1.
13 기근이 더욱 심하여 사방에 먹을 것이 없고 애굽 땅과 가나안 땅이 기근으로 황폐하니
14 요셉이 곡식을 팔아 애굽 땅과 가나안 땅에 있는 돈을 모두 거두어들이고 그 돈을 바로의 궁으로 가져가니
.....
16 요셉이 이르되 너희의 가축을 내라 돈이 떨어졌은즉 내가 너희의 가축과 바꾸어 주리라
....
18 그 해가 다 가고 새 해가 되매 무리가 요셉에게 와서 그에게 말하되 우리가 주께 숨기지 아니하나이다 우리의 돈이 다하였고 우리의 가축 떼가 주께로 돌아갔사오니 주께 낼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아니하고 우리의 몸과 토지뿐이라
....
23 요셉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늘 내가 바로를 위하여 너희 몸과 너희 토지를 샀노라 여기 종자가 있으니 너희는 그 땅에 뿌리라
24 추수의 오분의 일을 바로에게 상납하고 오분의 사는 너희가 가져서 토지의 종자로도 삼고 너희의 양식으로도 삼고 너희 가족과 어린 아이의 양식으로도 삼으라
25 그들이 이르되 주께서 우리를 살리셨사오니 우리가 주께 은혜를 입고 바로의 종이 되겠나이다
26 요셉이 애굽 토지법을 세우매 그 오분의 일이 바로에게 상납되나 제사장의 토지는 바로의 소유가 되지 아니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니라

오늘 성경의 본문은 단순히 기근 때 일어난 일이 아니라. 궁극 우리의 소유와 생명이 누구의 것인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인생의 기근의 때가 닥치면, 우리가 가진 돈도 토지도 심지어 생명도 소용이 없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은 결국 누구의 소유인가? 문제입니다. 본문의 핵심은 “누가 주인인가”입니다. 기근 전에는 내 돈, 내 땅, 내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기근 후에는 바로의 소유가 됩니다. 영적으로 보면, 인간은 결국 죄의 지배 아래 살든지, 하나님 나라의 통치 아래 살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베드로는 말합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신앙은 단순히 도움받는 수준이 아니라, 주권 이전입니다.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소유권 이전이 필요합니다. 애굽 백성은 살아남기 위해 돈도, 가축도, 땅도, 자기 자신도 내려놓았습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가져야 할 태도를 보여줍니다. 우리도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내 인생의 주권, 소유권, 자아 중심성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내 것”을 붙드는 삶에서 “주님의 것” 되는 삶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2.
27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 고센 땅에 거주하며 거기서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였더라
28 야곱이 애굽 땅에 십칠 년을 거주하였으니 그의 나이가 백사십칠 세라
29 이스라엘이 죽을 날이 가까우매 그의 아들 요셉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 청하노니 네 손을 내 허벅지 아래에 넣고 인애와 성실함으로 내게 행하여 애굽에 나를 장사하지 아니하도록 하라
30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라 요셉이 이르되 내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31 야곱이 또 이르되 내게 맹세하라 하매 그가 맹세하니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하니라

야곱이 고센 땅에 정착한 지 17년, 그의 나이 147세에 죽음을 준비합니다. 야곱은 자신을 애굽에 묻지 말고, 그의 조상들이 묻혀있는 곳 헤브론의 막벨라 굴에 자신을 묻어 장사지낼 것을 맹세하여 약속하게 합니다. 

이는 성도의 정체성에 대한 말씀입니다. 성도는 어디에 살든지 언약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환경은 애굽이지만 정체성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세상 속에 살아도 세상 사람처럼 살다가 망하지 말고 하나님의 언약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가나안 땅은 단순히 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며 영원히 얻을 기업이며, 인생의 최종 목적지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삶에서든지 죽음에서든지 신앙과 믿음의 정체성으로 방향을 잡아야 합니다. 

3.
48:5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가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
6 이들 후의 네 소생은 네 것이 될 것이며 그들의 유산은 그들의 형의 이름으로 함께 받으리라
7 내게 대하여는 내가 이전에 밧단에서 올 때에 라헬이 나를 따르는 도중 가나안 땅에서 죽었는데 그 곳은 에브랏까지 길이 아직도 먼 곳이라 내가 거기서 그를 에브랏 길에 장사하였느니라 (에브랏은 곧 베들레헴이라)

장자의 축복이 요셉의 두 아들에게 넘어갑니다. 야곱은 임종 직전에 매우 중요한 선언을 합니다. “5절 애굽 땅에서 네게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이 말은 단순한 손자 축복이 아닙니다.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자신의 아들로 입양하여 지파의 위치를 부여하는 장면입니다. 즉 므낫세 지파, 에브라임 지파가 독립된 지파가 됩니다. 결국 요셉은 한 지파가 아니라 두 지파의 몫을 받게 됩니다.

왜 이것이 중요한가? 원래 장자의 권리는 르우벤에게 있었습니다. 장자권에는 가문의 대표성
영적 계승 두 배의 기업이 포함됩니다. 그런데 르우벤은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함으로 장자권을 잃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마지막 축복에서 르우벤에게 말합니다. “탁월하지 못하리니…”

장자권은 어디로 갔는가? 성경은 장자권이 요셉에게 넘어갔다고 설명합니다. “장자의 명분은 요셉의 아들들에게로 돌아갔으며” 즉 르우벤은 혈통상 장자였지만, 실제 장자권의 두 몫은 요셉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에브라임, 므낫세 두 지파를 통해 “두 배의 기업”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은 시작보다 끝을 보시고, 혈통보다 믿음을 보시며, 특권보다 순종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요셉처럼 억울함 속에서도, 유혹 속에서도, 성공 속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다음 세대까지 이어지는 축복을 맡기십니다.

사랑의 아버지!!
환난과 기근의 때를 준비하며, 성도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으며 오직 주의 축복을 사모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창세기 48:8-22

1.
8 이스라엘이 요셉의 아들들을 보고 이르되 이들은 누구냐
9 요셉이 그의 아버지에게 아뢰되 이는 하나님이 여기서 내게 주신 아들들이니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그들을 데리고 내 앞으로 나아오라 내가 그들에게 축복하리라
10 이스라엘의 눈이 나이로 말미암아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요셉이 두 아들을 이끌어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니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입맞추고 그들을 안고
11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네 얼굴을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더니 하나님이 내게 네 자손까지도 보게 하셨도다

창세기 48장은 야곱의 마지막 축복 장면입니다. 요셉은 자신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데리고 아버지 야곱에게 나아갑니다. 당시 장자는 오른손의 축복을 받고, 차자는 왼손의 축복을 받는 것이 당연한 질서였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의도적으로 손을 엇갈려 얹어 오른손을 차자인 에브라임의 머리에, 왼손을 장자인 므낫세의 머리에 얹습니다. 요셉은 이를 바로잡으려 하지만 야곱은 거절합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구원이 인간의 질서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11절에서 야곱은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를 고백합니다. 요셉을 잃어버린지 20년 만에 요셉을 다시 만나게 되면서 놀랍고도 놀라운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고 고백하게 됩니다. 야곱은 포기 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계속 섭리하고 계셨습니다. 형들의 악한 계획도 보디발의 누명도 억울한 감옥살이도 결국 하나님의 섭리안에서 성취와 열매를 이루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계획보다 더 크고 선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지금은 이해되지 않는 일도 하나님은 약속을 향해 사용하십니다. 야곱처럼 우리의 인생 마지막에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생각하지 못하였더니 하나님이 여기까지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의 실패와 환경의 한계를 넘어 반드시 성취됩니다. 이것이 야곱의 생애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입니다.

2.
12 요셉이 아버지의 무릎 사이에서 두 아들을 물러나게 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고
13 오른손으로는 에브라임을 이스라엘의 왼손을 향하게 하고 왼손으로는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오른손을 향하게 하여 이끌어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매
14 이스라엘이 오른손을 펴서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엇바꾸어 얹었더라
15 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16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14절 요셉은 장자인 므낫세가 더 큰 축복을 받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는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야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인이 아니라 아벨,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 에서가 아니라 야곱, 르우벤이 아니라 유다, 므낫세가 아니라 에브라임
하나님은 반복해서 인간의 기대와 계산을 뒤집으셨습니다.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에베소서 2:8-9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우리는 자격이 있어서 선택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받았습니다. 은혜는 인간의 순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서 시작됩니다.

3.
17 요셉이 그 아버지가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여 아버지의 손을 들어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고자 하여
18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이니 오른손을 그의 머리에 얹으소서 하였으나
19 그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아니하며 이르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20 그 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너로 말미암아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네게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 하며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더라
21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또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
22 내가 네게 네 형제보다 세겜 땅을 더 주었나니 이는 내가 내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니라

19절 야곱은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보았습니다. 지금은 므낫세가 장자이지만 하나님께서 장차 에브라임을 더 크게 사용하실 것을 알았습니다. 실제로 후에 에브라임 지파는 북이스라엘의 대표 지파가 되었고, 종종 에브라임이라는 이름이 북왕국 전체를 가리키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현재의 모습이 아니라 장차 이루실 일을 보십니다. 아브람을 열국의 아비로 보셨고 다윗을 왕으로 보셨고 베드로를 교회의 반석 같은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사람은 현재를 보지만 하나님은 미래를 보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과거보다 크고 현재보다 멀리 갑니다.

야곱의 엇갈린 손길은 우연한 실수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를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기준을 뛰어넘어 은혜를 베푸시고 현재보다 미래를 바라보시며 잃어버린 것을 회복시키십니다. 십자가도 어찌 보면 엇갈린 손길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죄인의 자리에 서시고, 죄인인 우리가 의인의 자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받을 심판을 그리스도께서 받으셨고, 그분의 의와 생명을 우리가 받았습니다. 이것이 복음이며,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의 가장 위대한 모습입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니라"(이사야 55:8) 하나님의 엇갈린 손길 속에는 언제나 더 크고 선한 뜻이 있습니다. 오늘도 그 은혜를 신뢰하며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의 선택적 주권이 옳음을 믿습니다. 인간의 엇갈린 선택 위에 주님의 온전한 정의와 공의가 이뤄지길 소망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창세기 49:1-28

1.
1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가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2 너희는 모여 들으라 야곱의 아들들아 너희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들을지어다
3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
4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믿음의 조상들로 기름부으심을 받은 선지자이며 예언자입니다. 창세기 49장은 야곱의 마지막 유언이자 예언입니다. 죽음을 앞둔 야곱은 열두 아들을 불러 그들의 미래와 각 지파의 장래를 예언합니다. "너희는 모이라 너희가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여기서 "후일"은 단순히 가까운 미래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역사와 더 나아가 메시아의 오심까지 내다보는 예언적 말씀입니다. 야곱은 아들들에게 축복을 말하지만, 사실은 각 사람의 삶과 신앙의 모습을 평가하며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중요 지파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맏아들 르우벤입니다. 르우벤은 장자였지만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한 죄로 인해 장자의 권리를 잃었습니다. 후에 변화된 모습을 보이려고 많은 노력을 하지만 한 번 지은죄와 실망감으로부터 크게 회복되지 못하였습니다. 인생의 오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해 주시지만 인간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인생의 오점과 허물을 평생기억하고 되내이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때문에 실수할 일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언제나 주님앞에서 사람앞에서 영적 긴장감을 가지고 신중하고 조심있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2.
5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
6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7 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창세기 34장 세겜사건이 배경입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분노와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였습니다. 때문에 살인과 파괴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에 야곱은 이들을 향하여 ‘흩어지리로다’ 예언합니다. 과언 시므온 지파는 가나안 정복 후 독립된 영토를 크게 받지 못했습니다. 유다 지파 영토 안에 흩어져 살게 됩니다. 결국 역사 속에서 점점 약화되어 사실상 유다 지파에 흡수됩니다. 이는 "흩어질 것이다"라는 예언의 성취입니다.

반면 레위지파도 독립된 영토를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시므온과 달랐습니다. 출애굽기 32장에서 금송아지 사건이 일어났을 때 레위 자손들은 하나님 편에 섰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레위 지파를 제사장 지파로 삼으셨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전역 48개 성읍에 흩어져 살며 성막과 성전을 섬기게 됩니다. 시므온도 흩어졌고 레위도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레위는 회개와 헌신을 통해 저주의 자리가 축복의 자리로 바뀌었습니다.

3.
8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9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10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11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12 그의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의 이는 우유로 말미암아 희리로다

창세기 49장의 핵심은 유다지파입니다. 야곱은 열두 아들을 축복하지만 가장 길고 중요한 예언을 유다에게 선포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유다 지파를 통해 왕국을 세우시고, 마침내 메시아를 보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거 유다는 실패자였습니다. 그러나 회개와 변화 속에서 하나님의 구속사에 쓰임받았습니다. 유다는 변화된 사람, 유다는 승리하는 사자, 유다는 왕권의 지파, 유다는 메시아의 통로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뛰어난 사람을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붙들린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유다의 이야기는 결국 우리에게도 소망이 됩니다. 실패한 유다를 메시아의 조상으로 삼으신 하나님은 오늘도 변화된 사람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4.
22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23 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24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25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26 네 아버지의 축복이 내 선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 없음 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

요셉은 열두 형제 가운데 가장 긴 축복을 받습니다.
① 샘 곁의 무성한 가지: 요셉은 환경이 아니라 뿌리 때문에 열매 맺는 사람입니다. 애굽의 노예가 되어도, 감옥에 갇혀도, 총리가 되어도, 그의 뿌리는 하나님께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디서나 열매를 맺었습니다. 시편 1편의 시냇가에 심은 나무를 떠올리게 합니다.
② 공격받았으나 무너지지 않았다: "활 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형들의 미움, 보디발 아내의 유혹, 억울한 감옥생활, 끊임없이 공격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하나님이 붙드셨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형통은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의 동행에서 나왔습니다.
③ 전능자의 축복: 24-25절에는 하나님을 묘사하는 이름들이 쏟아집니다.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 목자, 전능하신 하나님 야곱은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며 깨달았습니다. "요셉을 여기까지 인도한 분은 하나님이시다."

요셉의 성공 비결은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였습니다. 성도의 형통도 환경의 유리함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데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언약을 이루시고 성취하시는 하나님, 오늘 주님 주신 교회와 우리 가운데 모든 약속을 이루시고 주님의 뜻대로 성취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창세기 49:29-50:26

1.
49:29 그가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되 내가 내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선조와 함께 장사하라
30 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의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31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 곳에 장사하였노라
32 이 밭과 거기 있는 굴은 헷 사람에게서 산 것이니라
33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모으고 숨을 거두니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갔더라

야곱이 147세에 조상에게로 돌아갑니다. 야곱은 자신의 죽음을 당부하며 막벨라 굴에 장사 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이는 본향을 잃지 않는 마음입니다. 야곱은 죽음의 순간에도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였습니다. 성도는 세상에 살지만 하늘에 속한 사람입니다. 죽음의 순간에 무엇을 붙드는가 이것에 의해서 성도의 수준이 결정됩니다. 

세상을 살아도 본향을 사모하고, 세상에 살아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죽어서 끝나는 인생이 아니라 33절 돌아가는 인생에 발판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죽음은 돌아가는 것, 실패가 아니며 끝이 아니며 하나님 나라로 회귀 귀향하는 것입니다. 

2.
50:12 야곱의 아들들이 아버지가 그들에게 명령한 대로 그를 위해 따라 행하여
13 그를 가나안 땅으로 메어다가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헷 족속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사서 매장지를 삼은 곳이더라
14 요셉이 아버지를 장사한 후에 자기 형제와 호상꾼과 함께 애굽으로 돌아왔더라

요셉은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아버지 야곱을 가나안 땅 막벨라 굴에 장사합니다. 이는 훗날 출애굽의 예고편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때가 되어 야곱이 출애굽하여 가나안땅에 들어갔듯이 이스라엘에게 때가 이르러 출애굽하여 가나안땅에 들어가는 날이 올 것입니다. 아버지 야곱이 육체가 죽어 가나안 땅을 밟게 되듯이, 이스라엘 백성도 1세대 육체의 세대가 죽은 후에 2세대 영의 세대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육체가 살아서는 들어갈 수 없는 땅이 가나안 땅입니다.

야곱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언약의 완성 과정입니다. 그는 평생 "붙드는 사람"으로 살았지만 마지막에는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야곱의 마지막 고백은 이것입니다. "내 인생은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었다." 성도의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마지막 소망은 건강이나 재산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입니다. "빌 3:20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야곱은 가나안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고, 성도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인생을 마무리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의 가장 아름다운 죽음입니다.

3.
창세기 50:15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16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17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18 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21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성경은 다시 형제들의 삶에 관점에 초첨을 맞추고 있습니다. 형들은 죄로 인하여 불안에 떨며, 이것을 잘알고 있는 요셉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형제들을 위로 합니다. 

그의 형제들은 야곱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안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죽자 형제들의 마음속 깊이 숨겨져 있던 죄책감이 다시 올라왔습니다. 20여 년이 지났고, 요셉은 이미 여러 번 용서한다고 말했으며, 형제들을 극진히 돌보았습니다. 그런데도 형제들은 불안합니다. 왜일까요? 용서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죄는 용서받아도 죄책감은 오래 남을 수 있습니다. 사단은 이미 용서받은 죄를 계속 들추어내며 정죄합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신 죄를 붙들고 계속 살아가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롬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형제들의 말을 들은 요셉은 눈물을 보였습니다. 왜입니까? ① 형제들이 아직도 자신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미 용서했습니다. 그런데 형제들은 여전히 의심합니다. ② 형제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을 인도하셨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형제들은 여전히 보복과 복수의 틀 안에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③ 사랑하는 가족이 아직도 두려움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의 두려움을 보면 마음 아파합니다.

형들에 대한 질문에 대답합니다. 19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이 한 문장이 요셉 신앙의 절정입니다. 요셉은 복수할 수 있는 힘이 있었습니다. 애굽의 총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심판의 자리에 앉지 않았습니다. 심판은 하나님의 영역임을 알았습니다. 많은 갈등은 내가 하나님 자리에 앉으려 하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내가 심판하려 하고 내가 갚아주려 하고 내가 결론을 내리려 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의 자리를 인정해야 합니다.

이 본문은 두 사람의 모습을 대조합니다.
형제들: 과거를 바라봄, 죄책감에 묶임, 두려움 속에 삶.
요셉: 하나님을 바라봄, 용서함, 미래의 약속을 붙듦.
형제들은 과거의 죄 때문에 떨었지만,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기에 평안했습니다.

이제 창세기는 요셉의 죽음으로 출애굽을 준비합니다. 새로운 하나님의 섭리를 준비하며 기다리며 새로운 인도와 약속의 성취를 준비하고 기다립니다. 이것이 성도의 소망이며 기대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적인 역사를 우리는 늘 소망하여 기다리며 기대해야 할 줄 믿습니다.

사랑의 아버지!!
창세기를 은혜 가운데 묵상하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으로 이어지는 하나님 언약의 약속이 오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가운데서도 온전히 이루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description>
			<author><![CDATA[정음교회]]></author>
			<pubDate>Thu, 04 Jun 2026 16:59:21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jungumch.com/?kboard_redirect=5"><![CDATA[성경묵상코너]]></category>
		</item>
				<item>
			<title><![CDATA[2026년 05월 31일]]></title>
			<link><![CDATA[https://www.jungumch.com/?kboard_content_redirect=1438]]></link>
			<description><![CDATA[1. 환영합니다.
* 예배로 함께 하신 성도님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 새롭게 교회를 방문하신 성도님들은 ‘새신자 카드’ 작성하시고 등록해 주시길 바랍니다. 
* 새 가족모임: 매 주일 1시~1시 30분 본당입니다.

2. 이웃초청예배 
* 오늘 교회행사로 참석하신 모든 분들게 감사드립니다.
* 다음 주에도 계속 뵐 수 있길 소망합니다.
* 오신 분들은 교회에서 준비한 선물(1인 1개)을 받아 가시길 바랍니다.
* 식당이용: 교회식당은 방문성도, 나머지 성도님은 본당을 이용 바랍니다.
* 남자 화장실은 교회사무실을 이용해 주세요. 
* 오늘 오후 찬양 예배는 없습니다. 방문 성도님과 함께하시길 바랍니다.
* 초청 예배로 준비하신 모든 성도님들께 감사드립니다.

3. 성찬예배
* 다음 주(6/7일) 성찬 예배로 드립니다. 성찬 위원은 준비 바랍니다.
  
4. 교회사역일정
* 6월 7일: 성찬예배      *6월 13.20일: 토요전도]]></description>
			<author><![CDATA[정음교회]]></author>
			<pubDate>Sat, 30 May 2026 21:23:02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jungumch.com/?kboard_redirect=4"><![CDATA[교회소식]]></category>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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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2026년 05월 24일]]></title>
			<link><![CDATA[https://www.jungumch.com/?kboard_content_redirect=1437]]></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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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롭게 교회를 방문하신 성도님들은 ‘새신자 카드’ 작성하시고 등록해 주시길 바랍니다. 
* 새 가족모임: 매 주일 1시~1시 30분 본당입니다.

2. 이웃초청예배 태신자 작성
* 일시: 5월 31일, ‘100명 출석-10명 등록’ 위해서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3. 이웃초청잔치 준비
* 계속해서 전도대상자를 위해서 기도 바랍니다. 
* 이번 주 화요일(26일) ~ 금요일(29일)까지 오후 3시 30분에 모여서 기도하고 전도합니다.
* 이번 주 이웃초청 저녁기도회가 화(26일)-금요일(29일) 저녁 7시에 있습니다.
* 저녁기도회를 참석하지 못하는 성도님들은 기도시간 맞춰서 함께 기도부탁드립니다.
* 30일 토요일 오후 1시에 이웃초청 준비모임이 있습니다. 모두 참석 바랍니다.
  
4. 수요달란트 잔치
* 이번 주 27일 수요일은 달란트 잔치가 있습니다. 12시 30분까지 오세요.

5. 교회사역일정
* 5월 31일:이웃초청예배      * 6월 7일: 성찬예배]]></description>
			<author><![CDATA[정음교회]]></author>
			<pubDate>Sat, 30 May 2026 21:22:3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jungumch.com/?kboard_redirect=4"><![CDATA[교회소식]]></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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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2026년 05월 17일]]></title>
			<link><![CDATA[https://www.jungumch.com/?kboard_content_redirect=1436]]></link>
			<description><![CDATA[1. 환영합니다.
* 예배로 함께 하신 성도님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 새롭게 교회를 방문하신 성도님들은 ‘새신자 카드’ 작성하시고 등록해 주시길 바랍니다. 
* 새 가족모임: 매 주일 1시~1시 30분 본당입니다.

2. 이웃초청예배 태신자 작성
* 일시: 5월 31일, ‘100명 출석-10명 등록’ 위해서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3. 이웃초청잔치 준비
* 이번 주일(17일) 예배 중 태신자 작성해서 써주시길 바랍니다. 
* 1인 2사람 이상 작성해 주시고 위해서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 이번 주 화요일(19일) ~ 토요일(23일)까지 오후 3시 30분에 모여서 기도하고 전도합니다.
* 5월달 화요성경 모임은 전도모임과 기도로 대신합니다. 
  
4. 구역예배
* 이번 주(17일) 오후 구역예배로 모입니다. 
* 구역 공과는 46페이지 ‘피로 적신 채색옷’입니다. 

5. 교회사역일정
* 구역예배: 5월 17일     * 이웃초청예배:5월 31일]]></description>
			<author><![CDATA[정음교회]]></author>
			<pubDate>Sat, 30 May 2026 21:21:4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jungumch.com/?kboard_redirect=4"><![CDATA[교회소식]]></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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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CDATA[2026년 05월 10일]]></title>
			<link><![CDATA[https://www.jungumch.com/?kboard_content_redirect=1435]]></link>
			<description><![CDATA[1. 환영합니다.
* 예배로 함께 하신 성도님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 새롭게 교회를 방문하신 성도님들은 ‘새신자 카드’ 작성하시고 등록해 주시길 바랍니다. 
* 새 가족모임: 매 주일 1시~1시 30분 본당입니다.

2. 이웃초청예배 태신자 작성
* 일시: 5월 31일, ‘100명 출석-10명 등록’ 위해서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3. 이웃초청잔치 준비
* 이번 주일(10일) 예배 중 태신자 작성해서 써주시길 바랍니다. 
* 1인 2사람 이상 작성해 주시고 위해서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 이번 주 화요일(12일) ~ 토요일(16일)까지 오후 3시에 모여서 기도하고 전도합니다.
* 5월달 화요성경 모임은 전도모임과 기도로 대신합니다. 
  
4. 어버이 주일
* 이번 주(10일) 어버이 주일로 지킵니다. 
* 작은 선물이 준비되어 있으니 1인 1개씩 모두 받아 가시길 바랍니다. 

5. 구역예배
* 다음 주(17일) 오후 구역예배로 모입니다. 
* 구역 공과는 46페이지 ‘피로 적신 채색옷’입니다. 

6. 교회사역일정
*구역예배: 5월 17일     *봄 이웃초청예배:5월 31일]]></description>
			<author><![CDATA[정음교회]]></author>
			<pubDate>Sat, 30 May 2026 21:20:4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jungumch.com/?kboard_redirect=4"><![CDATA[교회소식]]></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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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2026년 05월 03일]]></title>
			<link><![CDATA[https://www.jungumch.com/?kboard_content_redirect=1434]]></link>
			<description><![CDATA[1.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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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가족모임: 매 주일 1시~1시 30분 본당입니다.

2. 이웃초청예배 태신자 작성
* 일시: 5월 31일, ‘100명 출석-10명 등록’ 위해서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 다음 주일(10일) 예배 중 태신자 작성해서 써주시길 바랍니다. 
* 1인 2사람 이상 작성해 주시고 위해서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3. 토요전도
* 이번 토요일(9일) 토요전도로 오후 3시에 모입니다.

4. 어버이 주일
* 다음 주(10일) 어버이 주일로 지킵니다. 
* 작은 선물이 준비되어 있으니 꼭 참석해 주시길 바랍니다. 

5. 신천지 이단주의
* 교회 외부에서 성경공부는 무조건 금지합니다.

6. 교회사역일정
*어버이 주일: 5월 10일    *구역예배: 5월 17일     *봄 이웃초청예배:5월 31일]]></description>
			<author><![CDATA[정음교회]]></author>
			<pubDate>Sun, 03 May 2026 22:07:32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jungumch.com/?kboard_redirect=4"><![CDATA[교회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2026년 04월 26일]]></title>
			<link><![CDATA[https://www.jungumch.com/?kboard_content_redirect=1433]]></link>
			<description><![CDATA[1. 환영합니다.
* 예배로 함께 하신 성도님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 새롭게 교회를 방문하신 성도님들은 ‘새신자 카드’ 작성하시고 등록해 주시길 바랍니다. 
* 새 가족모임: 매 주일 1시~1시 30분 본당입니다.

2. 교회 봄 야유회
* 오늘(26일) 예배 후 남선교회주체 야유회가 있습니다.
* 예배 후 출장 뷔페로 점심 식사는 교회에서 합니다.
* 점심 식사 후 오후 1:30분 출발-5:00분 도착합니다. 구역별로 차량이동하세요.
* 차량 이동시 제2경인고속도로 방향 시흥을 지나서 ‘부천’에서 빠지세요. 
* 장소: 인천대공원정문 제1, 2주차장, 집결지- 꽃 전시관. 
* 어르신들의 안전을 위해서 이동시 반드시 1인-1도우미를 부탁드립니다.

3. 수요예배 달란트잔치
* 이번 주 수요일(29일) 오후 12:30분 식사 후 달란트잔치가 있습니다. 

4. 이웃초청예배
* 일시: 5월 31일입니다. 기도로 준비하시길 바랍니다. 

5. 교회사역일정
*토요전도: 5월 9일     *봄 이웃초청예배:5월 31일]]></description>
			<author><![CDATA[정음교회]]></author>
			<pubDate>Sun, 03 May 2026 22:06:5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jungumch.com/?kboard_redirect=4"><![CDATA[교회소식]]></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요한복음 1장 - 21장]]></title>
			<link><![CDATA[https://www.jungumch.com/?kboard_content_redirect=1432]]></link>
			<description><![CDATA[요한복음 1:1-18

1.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한복음을 신약의 창세기라고 합니다. 이는 신학적 구조적 유사성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의 시작처럼 요한복음 역시 태초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창조로 이어지며, 빛과 어둠을 대비하며, 에덴의 타락을 염두에 두고 십자가의 회복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창세기는 잃어버린 생명의 이야기이고, 요한복음은 회복된 생명의 이야기입니다. 창세기가 태호의 하나님을 말한다면, 요한복음은 태초의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먼저 1-18절의 구조입니다. 예수는 말씀입니다. 말씀안에 생명이 있음으로 말씀이 임하는 곳에 빛이 들어나게 됩니다. 말씀으로 모든 만물이 살아나듯이 우리가 예수를 영접하면 살아나고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됩니다. 말씀이신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입니다. 나아가 독생하신 하나님 즉 나타나신 하나님이십니다. 

1-18절에서 하나님은 말씀이요, 빛이고, 생명입니다. 하나님은 은혜와 진리입니다. 그 하나님이 바로 독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2.
19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20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21 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23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
27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
28 이 일은 요한이 세례 베풀던 곳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니라
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
34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누가 그리스도이냐? 라는 질문입니다. 세례요한 앞에서 사람들이 말하길 네가 누구냐? 그리스도냐? 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당연히 예수앞에서 우리는 절대 그리스도 일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가 어떤 사람이든지? 어떤 위대한 일을 행한 사람이든지? 누구든지 그리스도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오직 예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이어야 합니까? 21-34절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증언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광야의 소리이어야 합니다. 외치고 사라지는 존재입니다. 듣던지 듣지 않든지 전하고 나타내야 하는 존재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 위해서 그의 앞에 무릎 끓고 엎드려야 하는 존재입니다. 

‘나는 아니요, 그러나 그분이십니다’
주님 앞에서 우리 자신은 부정되고 주님만이 빛나는 존재이길 소망합니다. 

3.
35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36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43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6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
5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51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주를 따르라, 더 큰 일을 보리라 입니다. 세례요한의 일 후에 그의 제자들이 예수를 따릅니다. 세례요한의 자신의 두 제자를 붙들어 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께 보냅니다. 참된 스승은 진리를 가두지 않습니다. 참 진리 앞에서 겸손하며 참 진리를 보도록 인도하는 자입니다.

42절 주를 따를 때 정체성이 변화됩니다. 시몬-게바(베드로)입니다. 예수님의 시선은 현재의 모습이 아닌 미래의 가능성을 보십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은 미래의 삶이 바뀌고 변화되는 것입니다. 50-51절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창 28장 야곱의 사닥다리를 언급하십니다. 이는 예수님 자신이 하늘과 땅을 잇는 유일한 길이 되심을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따르는 삶의 끝은 열린 하늘인 것입니다. 그곳으로 우리가 들어가는 것 더 큰 일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영원한 하나님 예수그리스도 말씀을 따라 더 큰 기적의 주인공으로 주님을 쫓아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요한복음 2:1-25

1.
1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3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5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6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요한복음 2장에 가나안 혼인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기적은 예수님 사역 가운데 첫 번째 사역입니다. 1절 가나안 혼인잔치에 초청을 받으셨습니다. 3절 그런데 잔치집에 위기가 닥치게 되었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4절 이 일은 즉 세상의 일은 주님과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5-7절 주님께 아뢰이고 주님의 말씀이 떨어지면 주님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물이 포도주로 바뀌듯이 삶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처음보다 더 좋은 포도주가 생성되고, 예수안에서 새 시대가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9절 복음의 시대가 도래하고 변하는 것은? 그것을 경험하고 순종하는 자들만이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첫 표적은 어떤 문제의 해결이 목적이 아니라 변화와 새롭게 됨을 통한 영광과 예수 복음의 새 시대를 알리는 서막인 것입니다. 

2.
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14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당시 유대 공동체 특별히 성전 예루살렘은 경제의 중심이 었습니다. 어마어마한 이권과 이익의 집합처 였습니다. 성전안에 제사장들의 직분이 매관 매직되고 제사장은 이권을 챙기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을 시장바닥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주님은 불의한 경제 공동체를 무너트리시고, 성전의 본질을 회복시키십니다. 주님은 16절 성전의 본질 ‘장사하는 집이 아닌’ ‘기도하는 집으로서 성전’을 이루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교회를 세우고 이루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친히 교회의 머리가 되셨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지체된 몸으로서 온전한 교회를 이루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야 합니다.

17절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주의 전을 사랑하는 열심이불같이 일어나야 합니다.
거룩한 분노의 채찍으로 악한 역사를 몰아내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맡겨진 사역의 현장, 즉 몸 된 교회를 사랑하고 책임 있게 직분을 감당할 수 있길 소망합니다. 

3.
18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참 성전 되신 예수님 십자가로 무너지고 부활로 세우십니다. 성전을 뒤엎으신 주님은 이제 성전을 대체하시는 주님으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이 본문은 예수님의 정체를 가장 급진적으로 선언하는 대목이며, 결국 십자가로만 이해되는 말씀입니다.

18,20절 유대인의 질문
19,21절 예수님의 대답
동문서답하듯이 주고받는 말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알지 못한채 말하지만 주님은 이 모든 것을 아시고 정확하게 말씀하십니다. 결국 이 모든 말의 진실은 22절 부활 후에 온전하게 드러나게 되고 당시의 일을 제자들이 회상하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고 기억하지도 못했으며 십자가 이후에야 말씀과 성경을 함께 믿게 되었습니다. 참 성전은 부활을 통과해야만 알아보는 비밀입니다. 십자가 없는 믿음은 언제나 오해로 끝납니다. 제자로 이루어진 ‘나중 믿음’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오늘 성경을 통하여 주시는 모든 말씀이 오늘 나에게 이루어지는 참된 믿음, 지금 믿음이 되게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요한복음 3:1-36

1.
1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1)지도자라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2)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3)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밤에 속한 사람 니고데모가 빛이신 예수님을 찾아오십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를 향하여 거듭남을 말씀하십니다. 거듭남은 니고데모의 문제만이 아니라 신앙을 가지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문제입니다. 주님은 니고데모를 향하여 물과 성령으로 거듭날 것을 요청하십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영에 속한 것이며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인생은 두 번 태어나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태에서 10달을 채우고 육신으로 태어남이 첫 번째 육체의 탄생이며, 육체 가운데서 살다가 하나님을 발견하고 천국을 알게 됨을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거듭남의 일입니다. 우리가 육체에서 영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천국으로 영생할 수 없는 구조입니다. 때문에 거듭남은 신앙의 절대 조건이며 천국 영생의 절대 필요입니다. 

주님은 거듭남을 물과 성령으로 말씀하십니다. 물과 성령에 대한 일반 보편적인 신학적 판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물은 회개의 씻음(에스엘 36:25-27), 말씀의 씻음(에베소서 5:26), 성령의 정결케 하심입니다. 즉 물은 죄 씻음의 사건입니다. 정결함을 이루는 것입니다. 정결함으로 우리가 새로워질 때 우리 안에 성령의 임재 즉 새마음과 새 영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거듭남의 사건은 회개를 통한 죄사함+성령의 임재, 새 생명의 탄생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알면 쉽고 모르면 평생 먹통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축복이 있길 기도합니다. 

2.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앞장이 거듭남 생명의 시작이라면, 본문 16-18절은 그 결과 즉 영생입니다. 거듭남이 씨앗이라면 영생은 열매입니다. 거듭남은 위로부터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고, 영생은 하나님과 함게 하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거듭남이 출발이라면 영생은 생명으로 이어지는 열매입니다. 

16절 영생의 동기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이처럼’ 사랑입니다. 이처럼은 후토스입니다. 이는 방법론적인 사랑입니다. 즉 독생자를 보내심으로 사랑하심입니다. 이처럼의 사랑은 독생자의 사랑, 십자가의 사랑, 죽으심의 사랑 즉 모든 사랑의 방법론이 들어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은 적극적이고 실천적인 사랑입니다. 이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심입니다.

17절 하나님의 사랑은 구원을 위한 사랑입니다. 이는 사랑의 방향입니다. 심판이 아닌 구원으로 나아가십니다. 구원적 사랑은 찾아오시는 사랑입니다. 구원적 사랑은 댓가를 치르는 사랑입니다. 구원적 사랑은 실제로 살려내는 사랑입니다. 오늘 이처럼 사랑하시는 주님의 놀라운 사랑의 은혜가 임하길 기도합니다. 

3.
22 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베푸시더라
23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음이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24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25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예식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26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27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28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
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
3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한복음 3:22-36은 거듭남과 구원(1-21절) 이야기를 마친 후, 그 복음 앞에서 한 사람의 태도를 보여줍니다. 그 사람이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이 본문은 단순한 겸손 이야기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절대성과 사역자의 자리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세례요한은 그리스도 메시아의 길을 열기 위하여 광양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입니다. 때문에 자신의 신앙과 정체성을 확실하게 선언하며 보여주고 있습니다. 28절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30절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이는 체념과 패배 자기포기의 선포가 아닙니다. 이는 사명의 완성이며 완전한 복음의 증거입니다. 세례요한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35-36절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그 안에 영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교회는 예수의 이름이 드러나는 교회입니다. 참된 사역자는 자신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높이는 사역자입니다. 오직 교회는 예수 이외에 어떤 것도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같은 교회가 되고 우리 삶이 이 같은 삶이 되길 소망하고 기도합니다. 

사랑의 아버지!!
예수안에서 거듭남으로 영생을 발견하고 오직 예수로만 길을 찾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요한복음 4:1-54

1.
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7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9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1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한복음 3장의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과 4장의 “생수”는 서로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구원 계시가 점점 선명해지는 흐름입니다. 요한복음은 의도적으로 두 사람을 대비합니다. 종교적으로 높아도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고, 도덕적으로 낮아도 생수를 마시면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3장 물과 성령=4장 생수는=명확하게 ‘성령’을 가르키는 말씀입니다. 

우물의 물은 과거의 전통, 조상의 유산, 반복해서 길어야 하는 물, 다시 목마름
예수의 생수는 하늘에서 오는 것, 은혜, 속에서 솟아나는 것, 영원한 만족입니다.

여인의 인생의 시간은 정오 낮 12시입니다. 가장 혹독하고 가혹한 인생의 터널을 지내고 있습니다. 주님은 여인의 가장 혹독한 인생의 시간에 사마리아 여인에게 찾아 오신 것입니다. 목적은? 생수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14절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영생의 물을 선사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여인으로 물을 요청하시지만 실은 그 물을 주시는 것입니다. 생수는 파는 것이지만 영생은 주시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이렇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찾아오는 것입니다. 

2.
15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25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사마리아 여인에게 필요한 것은? 생수입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 즉 성령의 은혜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께 생수를 요청합니다. 이에 주님은 예배를 소개합니다. 즉 우리에게 부어 주시는 은혜의 생수는 예배를 통하여 공급되는 것입니다. 이에 주님은 24절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하라 말씀하십니다. 영과 진리로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 우리 가운데 생수가 부어진다는 것입니다. 

참된 생수는 안에서 솟아나는 것입니다. 
참된 예배는 안에서 드려지는 것입니다. 
모두가 외적인 의식이 아니라 내적 생명입니다. 
거듭남이 없는 예배는 형식이고 생수가 있는 예배는 생명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 하나님이 우리 안에 생수를 주실 줄 믿습니다. 
생수가 없는 예배는 만족이 없습니다. 변화가 없습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생수가 있는 예배는 감사가 있습니다. 연합이 있습니다. 만족과 변화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 가운데 생수가 터지는 은혜가 있길 소망합니다.

3.
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35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36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37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38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
39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예배를 통하여 공급된 생수는 넘침이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 증거의 삶입니다. 28절 물동이를 버려두고 사마리아 여인은 복음 증거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랜 시간 걸려서 변화되는 수도 있지만, 급격하게 변화되는 은혜도 있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지금 즉시로 29절 복음 증거자로 변화된 삶을 살았습니다. 예배자의 삶에서 복음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참된 예배는 반드시 선교로 이어지게 됩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고 하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1단계 생수를 받았는가?
2단계 예배를 드렸는가?
3단계 흘러가고 있는가?

짧은 본문이지만 성도로서 모든 것을 말해주는 본문입니다. 
오늘 이 복음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온전히 이뤄지길 소망합니다. 

사랑의 아버지!!
성령을 기름 부으시고, 예배 가운데 결단하며, 순종과 실천으로 이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요한복음 5:1-15

1.
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요한복음 5:1-15절은 베데스다 연못가 38년 된 병자 치유 사건입니다. 이 본문은 단순한 치유 기사가 아니라, 율법 아래 묶인 인간과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을 대조하는 매우 중요한 장면입니다.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말의 뜻과는 상관없이 어떤 자비도 없는 치열한 경쟁과 약육강식의 자리입니다. 베데스다의 다섯 행각은 모세 오경을 상징적으로 떠오르게 하는 말씀입니다. 즉 율법의 테두리에 붙잡혀 평생을 병자로 살아가는 절망적인 사람의 모습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환경에 붙들려 사는 존재입니다. 오늘 성경에 기록된 베데스다의 38년 된 병자는 이것을 상징하는 말씀입니다. 

2.
5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베데스다의 병자를 보시고 주님이 찾아오십니다. 구원은 인간의 시도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6절 네가 낫고자 하느냐? 직접적인 핵심을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병자는 환경을 핑계합니다. 세상을 향한 구원의 손길에는 어떤 도움도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병자입니다. 누구가 누구를 도울 수 있는 입장이 없습니다. 스스로 살아가기도 바쁜 삶입니다. 그러니 환경을 탓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입니다. 그 분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삶을 아시고 지적하시는 말씀 즉 주님의 음성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음성은 우리를 걸어가게 하는 원동력이며 힘입니다. 우리는 세상으로 걸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말씀으로 걷는 존재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임할 때 세상의 어떤 베데스다도 우리를 가둘 수 없습니다. 앞장에서 살펴본 세상의 시선과 편견에 눌려 있는 사마리아의 여인도 주님의 음성을 듣을 때 살아나고 소생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음성이 들려지길 소망합니다. 

3.
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11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하니
12 그들이 묻되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13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주님은 병고침을 받은 병자에게 매우 중요한 말씀을 주십니다. 바로 14절 말씀입니다. 이 한 절은 육체 치유 사건의 결론이 아니라, 영적 치유의 시작 선언입니다. 겉으로는 병 고침의 마무리 같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의 구원의 핵심을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14절 그 후에 주님은 성전으로 다시 그 병자를 찾아오셨습니다. 이 장면은 매우 중요합니다. 병자는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몰랐습니다. 감사 인사도 없었습니다. 믿음 고백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먼저 다시 찾아오십니다. 이것은 육체 회복보다 영혼 구원을 더 중요하게 여기시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치유는 끝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병”이 아니라 “그의 영혼”이었습니다.

‘보라 네가 나았으니’ 은혜의 확인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그의 회복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이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① 네가 받은 은혜를 잊지 말라, 치유는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은혜입니다. ② 네가 새 출발선에 섰다. 이제 이전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은혜는 과거 정리가 아니라 미래 책임을 동반합니다.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무엇이 더 심한가? 38년 병보다 더 심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관점은 분명합니다. 육체의 병보다, 인생의 고통보다, 환경의 실패보다, 더 심한 것은 죄의 결과, 곧 영원한 심판입니다. 예수님은 육체 회복을 넘어서 영원한 형벌을 경고하십니다. 이 말씀은 사랑의 경고입니다.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이 말씀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완전 무죄를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죄의 길로 돌아가지 말라는 방향 전환의 촉구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죄가 그의 병과 직접적 연관이 있었는가? 반드시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죄 문제를 짚으십니다. 왜입니까? 인간의 근본 문제는 질병이 아니라 죄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세 가지를 정리할 수 있습니다. 
① 병 고침보다 중요한 것은 삶의 방향입니다. 우리는 종종 문제 해결만 구합니다. 사업 문제 해결, 건강 문제 해결, 자녀 문제 해결. 그러나 예수님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 후에 너는 어떻게 살 것인가?” ② 은혜를 경험한 사람의 책임입니다. 구원은 면허가 아니라 새 삶의 시작입니다. “이미 나았으니, 이제 거룩하게 살아라.”입니다. ③ 죄는 다시 눕게 만듭니다. 38년 동안 누워 있었던 인생처럼 죄는 우리를 다시 영적으로 눕게 만듭니다. 은혜를 잃으면 다시 베데스다로 돌아갑니다.

사랑의 아버지!!
육체의 치유보다 영혼의 구원이 우선되게 하시고, 받은 은혜로 책임 있는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다시는 죄의 자리로 돌아가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요한복음 5:16-47

1.
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
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1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8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베데스가의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이 유대인들에 의해 또 다른 공격을 받게 됩니다. 바로 안식일에 병자를 고쳤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본 성경을 중심으로 유대인들은 본격적으로 예수를 공격하고 문제를 삼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안식일 논쟁의 이면에는 예수님의 말씀 18절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신성모독입니다. 예수님을 결국 신성모독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라 말하는 죄목으로 결국 후에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2.
19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
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예수님은 삼위의 질서를 설명하십니다.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고 그대로 행하신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모든 것을 보이신다. 죽은 자를 살리는 권세도 아들에게 주셨다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생명을 주는 권세는 하나님만의 권세입니다. 또한 23절 “아들을 공경함이 곧 아버지를 공경함” 예수님을 존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모순입니다.

우리 주님은 아무것도 스스로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나라의 교회로 살았습니다. 때문에 교회의 머리 되신 아버지의 뜻대로 사시며, 행하시며, 일하셨습니다. 우리 또한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사는 인생이라면 예수로 살아야 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스스로가 아니라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의 방법이요, 삶의 태도가 되어야 합니다.

3.
32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 증언이 참인 줄 아노라
33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였느니라
34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언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35 요한은 켜서 비추이는 등불이라 너희가 한때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36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
37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38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41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42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44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예수 그리스도가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 됨에 대한 증거 3가지와 사람들이 믿지 않는 이유입니다. 먼저 세례요한의 증거입니다. 세례요한은 켜서 비추는 등불입니다. 구약에서 말씀하신 엘리야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세례요한입니다. 두 번째 증거는 예수님의 표적 행하시는 일입니다. 표적은 열매입니다. 메시아적 표징으로 증거하셨습니다. 마지막 아버지와 성경의 증거입니다. 구약 전체는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모세오경, 선지서, 시편 모두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은 연구했지만 성경이 증거하는 분은 거절했습니다. 말씀 지식은 있었지만 말씀의 실체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이같은 증거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믿지 않습니까? ① 40절 생명보다 자기 의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믿음은 지적 문제 이전에 의지의 문제입니다. 그들은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예수께 오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② 42절 하나님의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신앙의 핵심은 율법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입니다. 종교 열심은 있었지만 하나님과 관계는 없었습니다. ③ 43-44절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기 문입니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여기서 불신의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나옵니다. 사람의 인정, 종교적 체면 , 자기 의. 이것이 믿음을 가로막습니다. 믿음은 자기 영광을 내려놓는 행위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신앙의 무의미한 논쟁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성경의 증거를 따라 믿을 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요한복음 6:1-29

1.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2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1)표적을 보았음이러라
3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4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8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입니다. 오병이어는 4복음서 모두에게 기록된 유일한 기적의 사건입니다. 그 만큼 오병이어는 의미있는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오병이어는 유월절 즈음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유월절은 출애굽 사건 곧 모세를 통해 만나를 먹이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때문에 오병이어의 사건을 단순히 무엇을 먹이는 사건이 아니라 출애굽 사건과 연결된 새로운 모세의 표적과 같은 내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의 참된 양식입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6:35) 말씀처럼 육신의 배부름을 넘어서 이스라엘로 생명을 주시는 분이 그리스도 예수심을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제자들은 계산합니다. 인간은 계산하고 하나님의 창조하십니다. 계산적 생각은 믿음이 아니라 과학이며 인과적 현실 관계입니다. 계산으로는 믿음을 따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로 성인남성 오천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는 오병이어의 기적 앞에서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인간의 절대적 한계를 배워야 합니다. 오병이어와 오천명이라는 현실 계산 앞에서 우리는 주님을 의지하고 믿음을 의지하고 주님의 능력 앞에서 주께서 이끌고 하실 일을 기대하고 소망해야 합니다. 우리는 문제를 보는 시야를 바꾸어야 합니다. 할 수 없다. 안된다. 계산이 안 나온다 에서 하나님이 하시면 하실 수 있다는 생각과 방향을 전환해야 합니다. 주님은 오병이어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의 믿음의 능력을 키우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동일한 오병이어 주님의 기적과 능력이 믿음 안에서 일어나는 은혜를 경험하길 소망합니다. 

2.
14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15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16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17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18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19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20 이르시되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대
21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예수님을 찾아오는 무리와 예수님이 찾아가시는 제자입니다. 이 단순한 차이가 결국 무리와 제자를 결정짓는 중요한 차이가 되는 것입니다.

무리들은 기적을 보고 말합니다.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적 인물로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배부름 현실 문제 해결, 정치적 해방 (로마로부터의 독립 기대). 그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자리를 피하여 산으로 물러가십니다. 무리는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그들이 찾은 것은 예수님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 해결을 위해, 사업 축복을 위해, 병 고침을 위해, 예수님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용의 대상이 아니라, 경배의 대상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찾아가시는 제자들입니다. 바다가 흉흉해지고 큰 바람이 붑니다. 그들은 약 25~30 스타디온(약 5~6km)을 노 저었습니다. 지쳐 있습니다. 두렵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바다 위로 걸어오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이 말씀은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 (I AM)” —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의 자기 계시와 연결됩니다. 즉,
폭풍 가운데 오신 분은 단순한 기적 행위자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진짜 제자는 ‘찾는 사람’이 아니라 ‘찾아오심을 경험하는 사람’ 무리는 예수님을 붙들려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는 예수님께 붙들렸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찾는 무리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찾아오시는 제자입니까?
기적을 경험하는 신앙이 아니라 폭풍 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신앙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3.
22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서 있던 무리가 배 한 척 외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더니
23 (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께서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 곳에 가까이 왔더라)
24 무리가 거기에 예수도 안 계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25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2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28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무리들은 예수님이 배에 타지 않으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계신 것을 보고 묻습니다.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겉으로 보면 열심히 찾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동기를 정확히 꿰뚫어 보십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그들은 기적을 보았지만 표적(sign) 의 의미는 보지 못했습니다. 표적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화살표인데 그들은 화살표를 붙들고 있었습니다. 배부름은 경험했지만 생명의 주님은 보지 못했습니다.

27절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여기서 ‘썩는 양식’은 단순히 음식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물질 명예 성공 건강 세상적 안정 이것들은 필요하지만 영원하지 않습니다. 반면 영생의 양식은 인자가 주는 것, 즉 예수님 자신입니다. 28절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인간은 항상 “행위”를 찾습니다. 얼마나 해야 합니까? 무엇을 지켜야 합니까? 어떤 공로가 필요합니까? 그러자 예수님의 “하나님의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충격적인 대답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입니다. 여기서 ‘믿는다’는 단순 지적 동의가 아닙니다. 자신을 맡기는 것, 의지하는 것, 생명의 근거로 삼는 것입니다. 주안에서 믿음의 사역이 감당 되어지길 소망합니다. 

사랑의 아버지!!
주님 우리로 먹을 양식으로 목적 삼지 않게 하시고, 영생하도록 하시는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살도록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요한복음 6:30-71

1.
30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1)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31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34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36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30-31절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본문이 기복신앙과 인본 주의신앙의 뿌리입니다. 자신들의 필요와 실리가 하나님입니다. 필요와 실리를 위해서 하나님이 존재해야 합니다. 오직 인생의 목표가 ‘떡’입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만나를 주었는데 당신은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그들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물질을 섬기는 것입니다. 

32-33절에서 예수님은 그 떡을 준 자가 ‘하나님’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떡입니다. 하나님의 떡은 본질상 생명의 떡입니다. 생명의 떡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설명하십니다. 36절 이 말씀은 이해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는 말입니다. 육신에 묶인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37절 아버지께로부터 온 자는 이 사실을 믿고 따를 수 있습니다. 구원은 은혜로 시작해 은혜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주시고, 아들이 붙드시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십니다. 성도의 안전과 구원은 우리의 결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붙드심에 달려있습니다. 

무리는 기적과 표적을 구하며 떡을 구하지만, 우리 주님은 결국 자신을 내어 주십니다. 이 때 까지 이 진리의 사실을 누구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즉 진리의 성령이 임하는 자에게 놀라운 깨달음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주의 성령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비밀이 발견되는 복이 있길 소망합니다.

2.
41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42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
4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
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52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하늘의 떡을 둘러싼 두 생각입니다. 유대인은 오해하고 예수님은 계시하십니다. 이 단락은 “나는 생명의 떡이다”(35절) 선언 이후의 갈등 장면입니다. 유대인들은 이해하지 못했고, 예수님은 더 깊이 말씀하십니다. 대화는 이어지지만, 생각의 차원은 완전히 다릅니다.

예수님의 선포는 믿음이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을 선포하시고 유대인들은 땅에서 일을 수용하려 합니다. 
유대인의 관점과 예수님의 관점은 서로 다른 평행선을 그리며 진행되고 있습니다. 

결국 신앙은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계시와 선포된 말씀에 대한 믿음의 일입니다. 유대인들은 논리로 접근했지만 예수님은 믿음으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설명 가능한 분이 아니라 우리가 받아들여야할 분이십니다. 예수를 분석하려면 막히고 예수를 믿으면 영생이 옵니다. 우리안에서 공존하는 두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이해하려는 나와 믿으라는 주님, 나를 신뢰하고 의지하면 이해의 폭을 넓힐 것이요, 주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면 믿음의 폭이 커질 것입니다. 

문제는 다시 믿음입니다. 주 예수를 믿고 신뢰하고 그 분을 따르는 것이 결국 나를 이기는 방법이고 승리하는 인생의 비결입니다. 

3.
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62 그러면 너희는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64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65 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66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본문의 말씀은 갈릴리 사역의 분수령이 됩니다. 생명의 떡 사건 이후에 많은 제자들이 예수께로 등을 돌립니다. 

떠나는 자의 특징입니다. 
*60절 말씀이 불편하면 떠납니다. 불편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받아들이기 거북하기 때문입니다. 떠나는 자는 이해가 아니라 순종을 거부합니다. 말씀이 자기를 깨트리면 불편해합니다. 말씀이 위로가 될 때는 좋지만 자기를 부인하라 할때는 떠나는 것입니다. 말씀은 언제나 입에는 달지만 속에는 쓴 것입니다. 

*61-63절 영보다 육신을 기준 삼을 때 떠납니다.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는냐? 떠나는 자는 영적 의미보다는 육적이해에 머물려 있습니다. 살을 먹는다? 피를 마신다? 이들은 십자가의 영적 의미를 보지 못했습니다. 떠나는 자는 영적 분별력이 없습니다. 말씀을 문자적 감정적으로 판단합니다.

*64절 끝까지 믿지 않을 때 떠납니다. 모두가 예수를 따르던 제자입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제자이지만 이면적으로는 믿지 않았습니다. 관계는 있었지만 믿음은 없었습니다. 기적은 따랐지만 십자가는 거부했습니다. 

교회 안에도 두 부류가 있습니다. 기적까지는 따라오는 자와 십자가까지는 따라가지 않는 자입니다. 떠남은 갑자기 일어나지 않습니다. 말씀 앞에서 불편함을 방치할 때 조금씩 뒤로 물러납니다. 신앙은 감동으로 유지되지 않고 믿음으로 유지됩니다. 떠나는 자는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받아들이지 않아서 떠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말씀 앞에서 불편해도 붙드는 자가 끝까지 남는 자입니다. 오늘 나는 판단하는 제자입니까? 붙드는 제자입니까?

사랑의 아버지!! 
말씀 앞에서 우리의 믿음의 폭을 넓혀 주옵소서. 영의 말씀을 깨달아 주님의 편에 서는 천국의 제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요한복음 7:1-36

1.
1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2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3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4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5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7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
8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나는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9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
10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에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은밀히 가시니라

7장은 초막절 즉 앞장 6장의 유월절 이후에 6개월 뒤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려는 유대인과 사람의 위협속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아니하시고 은밀히 행하시며 예수님의 때를 준비하십니다. 

성경에 기록됨처럼, 우리 주님이 드러내고 사역하지 않으심은? 1절 유대인의 살해 위협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어떤 죽음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말씀처럼 아직 십자가의 때가 아니였기 때문입니다. 적절한 타이밍과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때를 아는 것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영적 지혜와 분별력입니다. 때와 시간을 따라서 하나님도 천지를 창조하셨듯이 우리도 영적지혜와 분별이 필요합니다. 이는 깨어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능력입니다. 시대를 분별하고 사역을 분별하는 깨어있는 지혜와 영성이 이뤄지길 소망합니다. 

우리 주님이 드러내지 않고 은밀히 행하신 두 번째 이유는? 사람들의 잘못된 선택과 판단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초막절은 민족적인 열기가 가득한 명절입니다. 때문에 애국 민족성이 분출되면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고 폭동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세상의 정치 군사오 세워지신 왕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은밀히 조용히 자신의 일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조급함이나 도전으로 움직이니 않고 하나님의 시간표에 조용히 순종할 수 있는 신앙의 깊은 내공이 이뤄지길 기도합니다. 

2.
14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15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1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18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19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20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로 말미암아 이상히 여기는도다
22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행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행하느니라

예수님이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할 때 사람들은 그의 말씀에 놀랍니다. 그리고 예수가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 지적할 때, 예수님은 자신의 지식과 말씀이 아버지께로 온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위로 하늘 아버지를 머리고 삼고 살아가셨습니다. 온전한 교회됨으로 살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사역과 말씀과 뜻은 자신의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대로만 행하였고 아버지만을 나타내셨습니다. 

21절 주님은 이어서 자신의 오직 ‘한가지 일만’을 행하신다고 주장하셨습니다. 이 한가지 일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즉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따라서 5장에서 베데스다 38년된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베데스다의 병자는 율법주의에 묶인 자입니다. 그 묶임을 복음으로 풀어내신 것입니다. 

모세-율법-할례의 불완전함을 
예수-복음-십자가로 완전히 풀어내는 것이 복음입니다. 

율법은 죄가 없습니다. 문제는 율법주의입니다. 율법은 하나님께로 나온 것입니다. 우리 주님도 이 율법을 폐하심이 아니요 온전히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온전히 함이 완성을 위함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하나님의 복음을 경험하게 된다면?
진정한 자유와 천국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3.
25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이 말하되 이는 그들이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26 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그들이 아무 말도 아니하는도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
27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
28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29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 하시니
30 그들이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알고 있다 하나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출신도 알고 자라난 곳도 알고 가족도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셨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여기에는 당시 유대 전승이 깔려 있습니다. 메시아는 신비롭게 나타날 것이라는 기대였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는 이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지상적 출신은 알았지만 그분의 하늘적 기원은 몰랐습니다.

육신적으로 아는 것과 영적으로 아는 것의 차이입니다. 그들은 “어디서 왔는지 안다” “배경을 안다” 그러나 모른 것이 있습니다. 그분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녔어도 성경을 많이 알아도 보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적 지식은 구원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은 가장 종교 중심지에 있었지만 정작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형식과 정보는 있었지만 계시를 받지 못했습니다.

28-29절 말씀처럼 보내심을 받은 자만이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은 보내심을 받음에 있습니다.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 여기에는 두 단계가 있습니다. ① “그에게서 났고” 단순 파송이 아니라 본질적 기원을 암시합니다. 요한복음 1장의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의 흐름과 연결됩니다. ② “그가 나를 보내셨다” 성육신의 사명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자의로 온 종교 지도자가 아니며 자기 메시지를 전하는 철학자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수행하는 사명자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보내심을 받은 자 예수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나라에 복음의 우리 가운데 이뤄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요한복음 7:37-53

1.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이 장면은 요한복음 7장, 초막절의 마지막 큰 날에 일어납니다. 초막절에는 제사장이 실로암 물을 길어 성전에 붓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광야에서 물을 주신 하나님을 기념하는 예식이었습니다. 그 절정의 순간에 예수님이 외치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① 초청의 대상 – “누구든지”입니다. 예수님은 특정한 사람만이 아니라 목마른 자라면 누구든지 초청하십니다. 종교적 열심이 있는 자, 죄인, 갈급한 자, 공허한 자. 조건은 단 하나? 목마름입니다. 목마름은 은혜의 시작입니다. 자기 만족에 취한 사람은 주님께 나오지 않습니다.

② 약속 –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오리라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마시라”가 아니라 “그 속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오리라”고 하십니다. 요한은 이것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물을 받는 차원이 아니라 흘려보내는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축복의 종착지가 아니라 성령의 통로가 되는 삶입니다. 그 성령으로 인하여 우리안에 생수 강이 터저 나오게 됩니다. 

2.
40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41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42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43 예수로 말미암아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44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

예수님을 둘러싼 세 가지 반응입니다. 
① “이는 참으로 그 선지자라” - 신명기 18장의 약속된 선지자 기대
② “이는 그리스도라” - 메시아로 인정
③ “갈릴리에서 그리스도가 나오겠느냐?” - 출신을 문제 삼으며 거절

같은 말씀을 듣고도 반응이 갈라집니다. 진리는 사람을 중립 상태로 두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맞든지 틀리든지? 주님께서 전에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여기느냐?’ 우리의 반응입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고백할 것인가? 가릴리 출신으로 문제 삼고 편견을 가질 것이냐? 우리의 믿음이 주앞에서 온전히 고백되길 소망합니다. 

3.
45 아랫사람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그들이 묻되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
46 아랫사람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47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48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
49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50 그 중의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하되
51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
52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53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경비병들이 예수님을 잡으러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옵니다. “그 사람처럼 말하는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말씀의 권위 앞에 붙잡힌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은 비웃습니다.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받은 자라” 여기서 드러나는 영적 구조는? 지식은 있으나 겸손이 없는 상태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겸손입니다. 겸손은 순종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생기는 영적 질서입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은 겸손 없는 어리석은 판단으로 오히려 자신들이 영적 미혹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니고데모의 등장입니다. 3장에서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고데모가 조심스럽게 말합니다.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 신앙에 대한 완전한 고백은 아니지만 빛을 향한 작은 움직임입니다. 믿음은 이렇게 시작되기도 합니다. 조심스럽지만, 진리를 향한 한 걸음이 시작된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목마름 갈망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 목마름과 갈망이 그로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경험하게 하였습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는 종교 모임이 아니라 목마른 자가 생수를 만나고 마시는 자리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주님 우리로 목마름이 있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를 경험하게 하시고 그로 우리로 온전한 고백을 이루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요한복음 8:1-30

1.
1 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니라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요한복음 8장에서 주님은 밤에는 감람산에 가셨다가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오시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기도의 준비와 사역의 현장입니다. 감람산은 기도의 자리이고, 성전은 논쟁의 자리입니다. 기도의 자리에서 내려오신 주님은 정죄의 현장 한가운데로 들어오십니다. 이 대비는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줍니다. 기도 없는 정의는 사람을 죽이고, 하나님과 교통한 정의는 사람을 살립니다.

성전에서 음행중 잡혀온 여인을 주님앞에 세우고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모세의 율법으로 예수를 시험합니다. 만약 예수 께서 ‘돌로치라’ 말씀하시면 로마 통치 아래서 사형집행 권한이 없음으로 로마법 위반으로 고발이 가능하고, ‘놓아 주라’ 말씀하시면 모세 율법을 부정한 죄로 고발을 당할 수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이들의 관심은 여인의 죄가 아니라 예수의 제거에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는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침묵으로 그들을 대응하십니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땅에 글을 쓰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두 번 걸쳐서 땅에 어떤 내용을 쓰시고 그 내용을 보고 이들이 더 이상 어떤 질문도 공격도 할수 없는 상태가 되어서 그 자리를 떠나도록 했습니다. 혹자들은 땅에 무엇을 쓰셨는가? 대하여 많은 의문을 품지만 그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행위가 모두를 살렸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의 시험도, 간음한 여인의 죄도, 서기관 바리새인의 음모도 누구 하나도 올무에 걸리지 않고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 누구도 돌에 맞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평화의 나라 상생의 나라입니다. 주님의 복음은 천국의 복음입니다. 요한복음 8장은 본문은 죄가 사라진 장면이 아니라 정죄가 멈춘 장면입니다. 그 자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잠시 스며든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폭력이 멈추는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십자가를 통해 완성될 나라입니다.

2.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8장의 핵심적인 본문입니다. 
서기관 바리새인들의 정죄, 예수님의 용서, 간음한 여인의 회개입니다. 

이 장면은 세 단계로 읽을 수 있습니다.
1단계 — 율법의 자리 (정죄) - 사람은 죄인을 제거하려 한다.
2단계 — 은혜의 자리 (용서) - 예수님은 정죄를 멈추신다.
3단계 — 빛의 자리 (새 삶) - 이제 죄의 어둠을 떠나 빛으로 걸어가야 한다.

복음은 죄를 덮는 데서 끝나지 않고 새 길을 여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12절은 우연히 이어진 말씀이 아닙니다. 이 사건 직후 예수님은 선포하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왜 이 선언이 여기 오는가? 정죄는 어둠의 방식입니다. 어둠은 숨기고, 드러내고, 공격합니다. 빛은 다르게 작동합니다. 빛은 드러내지만 태워버리지 않습니다. 빛은 보여주지만 파괴하지 않습니다. 빛은 방향을 줍니다. 여인은 돌에 맞아 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대로 어둠에 머물 수도 없습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용서는 과거를 끊고 빛은 미래를 엽니다.

3.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25 그들이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26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 말하노라 하시되
27 그들은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
28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30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본문은 위에서 난자와 아래서 난자 그리고 내가 그니라. 메시아 예수그리스도의 증거입니다. 25절 네가 누구냐? 예수님 자신의 존재를 증거하십니다. 

25절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28절 스스로 하지 아니하고 아버지의 뜻대을 이루는 자니라
29절 아버지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자니라 

25절 —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계시된 존재입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이미 말했잖느냐”가 아닙니다. 헬라어 뉘앙스는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해온 바로 그 존재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예수님은 갑자기 등장한 인물이 아니라 구약과 역사 속에서 계속 예고되어 온 분이며 지금 말씀 자체로 자신을 드러내시는 분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말씀(로고스)”로 소개합니다 (1장). 그분은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라, 말씀이신 분입니다. 존재 자체가 계시입니다.

28절 — “나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보냄 받은 존재입니다.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말하노라.” 여기서 예수님의 정체성은 “독립적 신적 영웅”이 아닙니다. 그는 보냄을 받은 자, 아버지의 뜻을 수행하는 자, 자기 의지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 안에 거하는 자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가장 큰 특징은? 자율이 아니라 순종입니다. 이는 신성의 약함이 아니라 삼위 간 완전한 연합을 드러냅니다.

29절 —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노라” - 관계적 존재입니다. 이 말씀은 굉장히 깊습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은 능력이나 기적이 아니라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관계 안에 있음입니다. 여기서 “항상”(πάντοτε)이 중요합니다. 순간적 순종이 아니라 전 생애적 일치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보냄 받으셨고 아버지의 뜻을 말씀하시고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며 아버지와 함께 계십니다. 존재 전체가 관계적 순종입니다.

요한복음의 흐름 안에서 보면 이 정체성은 제자도의 모델이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 나도 보냄 받은 자로 사는 것
* 나도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 뜻을 구하는 것
* 나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 것
구원은 단순히 죄 사함이 아니라 존재 방식의 전환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음행한 여인을 통하여 주시는 교훈을 받고, 용서받은 인간으로 용서하는 인간으로 회개하는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요한복음 8:31-59

1.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33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31-32절 음란한 여인의 사건 이후에 주님은 모인 사람들에게 자유를 선포하십니다. 그 자유의 첫 번째 전제 조건은 31절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입니다. 여기서 대상은 불신자가 아니라 믿는 유대인입니다. 즉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자유의 출발점은? 말씀에 거함입니다. 말씀에 거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듣는 것과 거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아는 것과 순종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감동을 받는 것과 붙드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즉 거한다는 것은? 지속적인 머무름이며 삶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유는 지식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거함 즉 연합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33-34절 예수님의 말씀은 언제나 깨닫지 못하는 자들에게 메아리처럼 들리는 것입니다. 말귀를 알아 듣지 못하고 다른 말을 하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자신이 종된 적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자유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전에는 애굽의 종이었고, 바벨론의 포로였고, 현재 로마의 식민지배 아래 있으며, 무엇보다도 지금 죄의 지배 아래 있습니다. 이래 저래 자유하는 듯하나 종 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죄의 쇠사슬에 묶여 있기 때문에 언제나 죄로 반복되는 삶을 살아가고, 스스로 죄를 끊어낼 수 없으며, 모든 것을 합리화하고 지배아래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36절 참 자유의 선포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 자유입니다. 예수 안에서 주어지는 자유는? ① 죄의 형벌에서 자유- 정죄 없음 (롬 8:1) ② 죄의 권세에서 자유-이전처럼 끌려가지 않음 ③ 죄의 습관에서 점진적 자유-성화의 과정입니다. 

우리는 자유하다고 말하지만 무엇에 묶여 있는가? 인정 욕구, 물질, 습관적 죄, 사람의 시선. 자유는 외부 환경이 아니라 내부 주인 문제입니다. 누가 나를 지배하는가? 죄가 주인이면 종이고 예수가 주인이면 자유입니다. 세상은 말합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자유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죄에서 벗어나는 것이 자유다.” 세상 자유는 방종이고 예수 안의 자유는 거룩입니다.

2.
37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38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39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40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1 너희는 너희 아비가 행한 일들을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42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43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45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46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47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주님은 예수를 믿지 않는 이들의 실체를 밝혀 말씀하십니다. 37절 이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39절 아브라함의 행한 일을 할 것인데 40절 너희는 아브라함의 일을 하지 않는다. 41절 오히려 너희 아버지의 일을 따라 행하는구나. 44절 너의 아버지 마귀처럼 욕심대로 살고 살인하고 거짓을 말하니 너희가 마귀라는 것입니다. 47절 너희가 만약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살 것이지만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본문의 핵심은? 형식적인 실체와 소속이 아니라 영적인 실체와 소속입니다. 육신적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라. 영적인 자녀가 분명히 자녀라는 말씀입니다. 영적 소속의 기준은? 47절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입니다. 하나님을 들으면 하나님의 사람이고 듣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는 분명하고 확실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소속을 바꾸어야 합니다. 실체를 바꾸어야 합니다. 사람은 중립지대가 없습니다. 하나님께냐? 마귀에게냐? 입니다. 이 선택이 믿음의 선택이고 영적 분별의 역사입니다. 진리를 받아 들이고, 예수를 사랑하며, 말씀에 거하시길 바랍니다. 혈통이 살리지 못합니다. 종교가 살리지 못합니다. 지식이 살리지 못합니다. 실체가 바뀌어야 삽니다. 아담 안에 있던 사람이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져야 합니다. 마귀의 욕심을 따르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로 바뀌어야 합니다.

3.
48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4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거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
50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
51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52 유대인들이 이르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53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5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거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55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유대인의 오해와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먼저 48절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의도적으로 오해하고 매도하고 있습니다. ① “사마리아 사람” 혼합 민족, 정통 유대 신앙에서 벗어난 자, 배척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즉, “너는 정통이 아니다”라는 공격입니다. ② “귀신 들렸다”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는 예수를 오히려 마귀적 존재로 왜곡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영적 맹목의 상태입니다. 빛을 어둠이라 하고, 진리를 거짓이라 하는 상태입니다. 비뚤어진 상태입니다. 

오해하고 매도하는 자들은 어떤 상태이며 어떤 자들입니까? 말씀을 들을 준비가 안된 자들입니다. 또한 영적 소속이 다른 자들입니다. 자기적 신앙과 신념아래서 신앙을 이루는 자들입니다. 때문에 성경을 왜곡 변질 시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안에도 비뚤어진 신아의 왜곡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열심 있는 자를 광신도라고 하고, 거룩한 삶을 살길 힘쓰는자를 율법주의라고 하고, 진리를 오히려 배타적이라고 말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전이나 오늘이나 별반 다름이 없습니다. 

50절, 54절에서 우리 주님은 이들의 매도와 오해를 대응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뜻대로 살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이 이렇게 사심으로 아버지께서 예수로 영광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의 방향 — 자기 영광이 아닌 아버지의 영광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방어하지 않으십니다. 억울한 매도(사마리아 사람, 귀신 들림)를 받으셨지만 자기 명예 회복에 집중하지 않으십니다. 왜입니까? 예수님의 삶의 중심은 “자기 영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영광을 구한다”는 것은? 자기 이름을 높이는 것, 자기 뜻을 관철시키는 것, 자기 계획을 성취하는 것 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살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자기 뜻”을 내려놓은 삶을 살았습니다. 요한복음 전체를 보면 “내 뜻대로 하지 아니하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라” (요 6:38) “나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한다” (요 5:30). 예수님의 삶은 철저히 보냄 받은 자의 삶이었습니다. 자기 독립적 의지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일치된 순종입니다. 이것이 십자가까지 이어집니다.

결국 영광의 역설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무엇입니까? 아버지께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십자가는 수치의 자리였지만 하나님은 그 십자가를 영광의 자리로 바꾸셨습니다. 역광의 역설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높이면 하나님이 낮추시고, 사람이 자기를 낮추면 하나님이 높이십니다. 예수님의 삶은 자기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완전히 전환된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종의 끝에서 아버지께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사랑의 아버지!!
아버지의 영광 안에서 자유를 얻고 주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영생에 이르는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요한복음 9:1-23

1.
1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2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8장에 바로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나와서 다른 곳으로 향하십니다. 이때 맹인된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2절의 말씀은 당시 유대 사회 만연한 인과응보적인 신앙의 구조입니다. 즉 죄로 인하여 인간은 고난 받는 다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제자들의 물음에 주님은 3절 죄가 아닌 하나님의 일을 위한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성경을 통하여 우리가 먼저 정리해야 할 것은? 예수님은 “죄와 고난의 모든 연결”을 부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히 죄의 결과로 오는 고난도 있음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다윗의 범죄 이후 징계 (삼하 12장). 고린도 교회의 무질서한 성찬으로 인한 약함 (고전 11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직접적인 인과응보 공식을 부정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대답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무엇인가? 헬라어로 “하나님의 일들(ἔργα)”은 복수입니다. 단순한 치유 한 사건을 넘는 더 큰 구속적 역사입니다.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의 일”은 항상 구원과 계시와 연결됩니다. 

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
요 11:4에서도 비슷한 표현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나사로 사건 역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 맹인의 평생의 어둠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무대가 됩니다.
②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드러내는 일
8장에서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라 선언하셨습니다. 9장은 그 선언의 실현입니다. “하나님의 일” = 빛 되신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③ 영적 맹인을 드러내는 일
이 사건의 핵심은 육체의 치유가 아니라 영적 대비입니다. ‘육체적 맹인 → 보게 됨’ ‘바리새인 → 보지만 보지 못함’ 결국 9장 후반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9:39) 따라서 하나님의 일은? 단순히 눈을 고치는 일이 아니라, 참된 믿음과 불신앙을 구별하는 구속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이 맹인의 고난은 무엇이었는가? 그의 평생의 어둠은 우연도 아니고, 단순한 형벌도 아니며, 하나님의 구속 드라마 안에 있는 준비 과정이었습니다. 마치 욥기에서 욥의 고난이 하늘의 뜻을 드러내는 무대였던 것처럼, 이 맹인의 인생도 “예수님을 만나는 날”을 향해 예정된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한 사람의 인생을 통해 그리스도의 빛과 영광을 드러내고, 그를 믿음으로 이끄는 구속의 역사입니다.

2.
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6절의 말씀은 창세기 2:7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맹인은 단순히 병을 고침 받은 것이 아니라 창조주에 의해서 다시 빚어지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치유자가 아닌 창조의 권세를 가진 하나님되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7질 실로암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의 핵심 주제중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 보내심을 받은 자’입니다. 즉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또 다른 한 사람이 보내심을 받아 순종할 때 눈이 열리게 됩니다. 맹인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설명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순종하며 실로암으로 나아갔습니다. 실로암의 영적 의미는?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할 때 영적 눈이 열리는 구원의 통로라는 것입니다.

3.
8 이웃 사람들과 전에 그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이르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9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자기 말은 내가 그라 하니
10 그들이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11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12 그들이 이르되 그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10-11절 구원의 역사입니다. 10절 맹인은 자신이 어떻게 눈이 떠지게 되었는지 설명하지 못합니다. 11절 예수라 하는 사람이 시키는 대로 했더니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의 원리입니다. 우리에게 구원이 어떻게 작동되는지 우리는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로 따르고 순종할 때 그렇게 구원은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게 됩니다. 구원의 열매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는 하나님의 편에서 되어지는 일입니다. 구원은 인간이 시작하지 않습니다. 항상 하나님이 먼저 시작하십니다. 구원의 작동 원리? ‘말씀 → 순종 → 역사’입니다. 맹인은 원리를 모릅니다. 의학적 과정도 모릅니다. 기적의 메커니즘도 모릅니다. 그는 단지 말씀을 들었고
순종했고 결과를 경험했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구조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찾아오신 주님을 절대적으로 믿으며, 이해가 아닌 순종으로 역사와 기적을 경험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요한복음 9:13-41

1.
13 그들이 전에 맹인이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14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15 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가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를 물으니 이르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
16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중에 분쟁이 있었더니
17 이에 맹인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하니
18 유대인들이 그가 맹인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19 이는 너희 말에 맹인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해서 보느냐
20 그 부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인 것과 맹인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21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그에게 물어 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22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
23 이러므로 그 부모가 말하기를 그가 장성하였으니 그에게 물어 보소서 하였더라

요한복음 9:13-23절은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이 고침을 받은 후,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신앙적 태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이 본문은 단순한 기적 보고가 아니라, 빛 앞에 선 인간의 반응을 보여줍니다.

먼저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의 반응입니다. 이들은 기적보다는 율법과 관념을 붙드는 신앙입니다. 맹인을 데려간 곳은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기적의 사실보다 안식일 규례 위반 여부에 집중합니다(14절).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죄인이 어떻게 이런 표적을 행하겠느냐” 그들 안에는 분열이 있지만, 공통점은 하나입니다. 이미 결론을 정해 놓고 예수를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기적은 보았으나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사실은 확인했으나 진리는 거부했습니다. 빛이 왔으나 자신들의 신학 체계를 더 신뢰했습니다. 우리도 말씀보다 전통을, 성령의 역사보다 기존의 틀을 더 붙들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게 됩니다. 은혜를 평가하는 신앙은 결국 은혜를 놓치게 됩니다.

두 번째, 고침음 받은 맹인입니다. 경험에서 시작되는 고백입니다. 그는 아직 예수를 그리스도로 완전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이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경험한 은혜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압박 속에서도 사실을 왜곡하지 않습니다. 아는 만큼 고백합니다. 그의 신앙은 완전하지 않지만 정직합니다. 우리는 모든 성경과 신학을 다 알지 못해도 됩니다. 그러나 주님이 내 삶에 행하신 일을 부인하지 않는 용기는 있어야 합니다. 신앙은 완벽한 이해가 아니라, 은혜에 대한 정직한 반응에서 시작됩니다.

세 번째, 부모의 반응입니다. 두려움에 묶인 침묵의 신앙입니다. 부모의 대답은 신중합니다. “이가 우리 아들인 것과 맹인으로 난 것은 아나이다.” “그러나 어떻게 지금 보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그에게 물으소서.” 본문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한 이유는 출교가 두려웠기 때문입니다(22절). 여기서 가장 안타까운 인물은 부모입니다. 사실은 압니다.  은혜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대가를 치를 용기는 없습니다. 신앙이 사회적 손해를 동반할 때 우리는 어디까지 설 수 있습니까? 침묵은 중립이 아니라, 때로는 두려움의 선택입니다.

빛이 오면 반드시 반응이 드러납니다. 빛은 중립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오늘 나는 체계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두려움에 머무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은혜를 붙드는 사람입니까?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2.
24 이에 그들이 맹인이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25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26 그들이 이르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27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28 그들이 욕하여 이르되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29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30 그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31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32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33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34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바리새인이 듣고 싶은 말과 맹인이 하고 싶은 말입니다. 이 둘 사이에는 엄청난 영적인 충돌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 – 듣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24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이 말은 겉으로는 경건해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 의도는 이것입니다. “예수는 죄인이라고 말해라.” 그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기적의 사실? 중요하지 않습니다. 맹인의 변화? 관심 없습니다. 하나님의 역사? 받아들일 준비가 없습니다. 그들은 진실이 아니라 확증을 원합니다.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거기에 맞는 증언만 요구합니다. 진리를 찾는 질문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강화하는 질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도 점검해야 합니다.

맹인 – 하고 싶은 말입니다. 25절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그는 신학 논쟁을 하지 않습니다. 철학적 변증도 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가 아는 것만 말합니다. 과장하지 않습니다. 꾸미지 않습니다. 그러나 물러서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산 증인의 힘입니다. 맹인의 신앙은 점점 자라나고 있습니다. 17절 선지자, 33절 하나님께로부터 온자입니다. 맹인의 믿음은 점점 더 분명해 집니다. 은혜가 자라고 있습니다. 신앙은 한 번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실하게 붙들 때 신앙은 분명히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3.
35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36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38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4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요한복음 9장의 완성, 결국 완성되는 신앙입니다. 39절 보는 자는 맹인이되고 보지 못하는 자는 보게되는 역설적인 신앙이 열매입니다. 

35절 쫓겨난 그 자리에 주님이 친히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질문하십니다. ‘내가 인자를 믿느냐?’ 맹인은 대답하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하나이다’ 진리를 갈망하고 어두운 인생에 빛을 선물하신 그리스도를 고백합니다. 38절 ‘내가 믿나이다’ 이제 맹인의 신앙이 완성되었습니다. 기적에서 아는 사람으로, 아는 사람에서 믿는 사람으로, 믿는 사람에서 경배하는 사람으로 맹인의 인생이 변화되었습니다. 

진리를 눈 뜨고 보게 된 자와 스스로 눈 먼자입니다. 나는 기적만 원하는가, 주님을 원하는가? 나는 예수를 아는가, 아니면 경배하는가? 나는 본다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요한복음 9장은 한 맹인의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결국 누가 진짜 보게 되었는가로 끝납니다. 신앙은 지식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경험으로도 완성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고, 엎드려 경배할 때 비로소 완성됩니다.

사랑의 아버지!!
우리의 눈을 멀어 보게 하시고 귀를 열어 듣게 하여 주옵소서. 메시아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경배하는 신앙으로 눈을 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요한복음 10:1-21

1.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 9장의 해석입니다. 우리 주님은 먼저 ‘문’을 강조하십니다. 문은 무엇입니까? 정당한 통로이며, 새 언약의 약속된 통로입니다. 문은 구약의 예언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문지기로서 새 언약을 경영하시고, 그 아들을 예수를 문 가운데로 보내셨습니다. 때문에 우리 주님은 참목자입니다. 때문에 4절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들음과 같이 맹인이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목자이며, 우리가 주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것은 주님의 양이기 때문입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압니다. 목자는 자기 양을 부르고, 양은 그 음성을 알아듣고 따라갑니다. 이것은 단순한 목축의 이야기가 아니라 영적인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듣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 9장의 맹인에게서 나타난 모습입니다. 그는 처음에는 예수님을 단지 “예수라 하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점점 예수님이 누구신지 깨닫게 되었고, 결국 주님 앞에 나아와 그를 믿고 경배하게 됩니다. 그는 종교 지도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참 목자의 음성을 듣고 그 목자를 따르는 양이 된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의 참 목자이십니다. 그리고 성도는 그 목자의 음성을 듣는 양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이 열리고, 그 말씀을 따라가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는 이유는 우리가 주님의 양이기 때문입니다.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것처럼, 성도는 말씀 속에서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 길을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신앙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언제나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2.
6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본문은 요한복음 10:6–10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선언하시며, 왜 사람들이 자신을 믿고 따라야 하는지를 설명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라야 할 이유입니다. 

먼저, 주님만이 구원의 문이기 때문입니다 (7–9절).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양의 문이라” 문은 들어가는 통로입니다. 양이 우리에 들어가거나 나올 때 반드시 문을 통과해야 하듯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 역시 정해진 통로가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성전과 제사가 그 통로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길을 여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나 종교적인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라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주님만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문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주님은 우리를 살리지만, 거짓된 길은 우리를 멸망시키기 때문입니다 (8,10절). 예수님은 또 말씀하십니다.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여기서 말하는 절도와 강도는 하나님의 백성을 바르게 인도하지 못하는 거짓 지도자들과 잘못된 길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양을 보호하지 못하고 오히려 양을 해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거짓된 가르침과 잘못된 길은 결국 사람의 영혼을 살리지 못하고 혼란과 파괴로 이끌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르십니다. 주님은 양을 이용하거나 해치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 양을 살리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라야 하는 이유는 주님만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주님은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을 주시는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10절).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단순히 육신의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단지 생명을 주시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풍성한 생명을 주십니다. 풍성한 생명은 다음과 같은 삶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누리는 평안 목자의 인도하심 속에서 얻는 안전 말씀을 통해 공급받는 영적 양식 그래서 예수님은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목자의 보호와 공급 속에서 안전하고 만족된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3.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13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선한 목자와 삯꾼 목장의 차이는? 생명을 바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있습니다. 목자가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 있는 것은 그 양을 사랑하기 때문이며, 양을 자신의 양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삯꾼은 양과 관계가 없으며 목양을 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 주는 사역을 합니다. 이는 결국 후에 십자가로 증명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방향은 처음부터 자기희생과 구원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권력도 아니요, 명예도 아니요, 물질도 아닌 오직 양의 생명을 위한 사역이었습니다. 

16절 주님의 선한 사역은 확장되어 나갑니다. ‘이 우리에 들이 아니한 다른 양들을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다른 양”은 당시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이방인들을 포함한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단지 한 민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향한 구원의 사역입니다. 그래서 결과는 이렇게 됩니다.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즉 예수님의 사역의 방향은 흩어진 양을 모으고 서로 다른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 한 목자 아래 있는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를 만드는 것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양의 문이요 선한목자 되신 예수의 참 음성을 듣고 영원히 따르며 꼴을 얻게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요한복음 10:22-42

1.
22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23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거니시니
24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이르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하니

9장 –10:21절 실로암 물가의 맹인이 치료된 이후 2-3개월이 흘렸습니다. 때는 수전절입니다. 수전절은 구약의 전통적인 절기가 아니라 유대 역사속에 새롭게 생긴 절기입니다. 기원전 167-164년경 이스라엘이 헬라의 지배를 받았을 때 예루살렘 성전이 더렵혀지고 우상숭배를 강요받게 되었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유다 마카비라는 사람이 혁명을 일으켜 독립하고 성전을 새롭게 재봉헌 하였는데 이것을 기념하여 수전절이라고 합니다. 

이때에 주님은 성전 동편에 솔로몬 행각에 거닐 때 유대인들이 예수에게 몰려들어서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더 이상 사람들을 의혹하지 말고 그리스도이면 밝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전에 벌써 여러차례 걸쳐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었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요, 나는 세상의 빛이요, 나는 양의 문이요, 나는 선한 목자요’ 그런데 믿지 않고 듣지 않은 사람은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2.
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그렇다면 우리안에 의혹과 불신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의혹은 말의 부족이 아니라, 믿음의 부족에서 생기는 문제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말하지 않아서 문제 된 것이 아니라, 믿지 않아서 문제가 되었습니다. 의혹과 불신은 듣는 사람들의 몫입니다. 

*의혹은 예수님의 일을 통하여 즉 열매를 통하여 말끔하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25절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라‘ 우리는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알수 있게 됩니다. 

*의혹은 우리가 양이 될 때 해결됩니다. 예수님은 문제의 핵심을 더 깊이 말씀하십니다. 26절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여기서 놀라운 역전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믿으면 양이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양이기 때문에 믿는다 그래서 이어지는 말씀이 있습니다. 요 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즉 의혹은 지적 토론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해결됩니다.

*의혹의 최종 해결은 “예수님의 정체성”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마지막에 가장 분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30절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의 신성 선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바로 돌을 들어 치려 합니다. 즉 예수님은 의혹을 풀기 위해 모호하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가장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의혹과 불신을 몰아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양이기 때문에 그렇게 선택되고 예정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3.
33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35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36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37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38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

예수님은 자신을 신성모독이라고 돌로 치려는 자들로 변증하십니다. 

먼저, 시편 82:6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인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를 신이라 칭하십니다. 나아가 하나님이 친히 보낸자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말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인가를 물었습니다. 즉 35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지도자 대리인도 신이라 불리거늘, 36절 아버지께서 직접 보내신 아들이라 말하는 것은 신성모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37절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 철저하게 아버지의 일을 대행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아버지의 일을 보고 일하심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일은? 하나님의 복음과 구원의 사역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주신 많은 기적의 표적들입니다. 아버지의 일은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일입니다. 우리 주님은 38절 아버지가 나를 통하여 하신 그 일을 믿으라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안에 모든 미혹과 의심을 물리쳐야 합니다. 우리 주님의 하나님 되심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사랑의 아버지!!
우리안에 모든 의혹과 불신이 사라지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하신 모든 일의 열매와 기록 가운데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요한복음 11:1-37

1.
1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4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7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8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예수님의 첫 번째 사역이 요한복음 2장 가나의 혼인잔치 사건이라면, 예수님의 마지막 기적의 사역은 오늘 본문 11장 나사로를 살리시는 사건입니다. 이는 나사로의 부활은 주님의 부활을 예표하는 부활적 사건입니다. 우리 주님은 오늘 나사로의 부활 사건 이후 2-4주 후에 십자가에 죽음을 당하게 되십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당시 예수님은 요단강 동편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지역에서 거하시며 생활하셨습니다. 이때 감란산 동편 언덕 베다니(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서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거리상으로 예루살렘-베다니(3키로, 1시간 이내의 거리), 베다니-요단강동편(30키로, 1-2일 거리)입니다. 

6절 주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말을 듣고 어찌된 일인지? 금방 반응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거기에서 2일을 더 머물러계셨습니다. 이는 우리 주님은 나사로의 완전한 죽음을 기다렸습니다. 무엇때문입니까? 먼저, 4절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입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만약 예수님이 바로 가셨다면 단순 병 고침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틀을 지체하심으로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이 됩니다. 2번째 15절 제자들의 믿음을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5절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즉지체의 목적 제자들의 믿음 성장입니다. 세 번째 17절 완전한 죽음을 확증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도착했을 때 요 11:17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 당시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은 후 3일까지는 소생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4일째는 완전한 죽음으로 여겼습니다. 즉 예수님은 의심할 수 없는 죽음을 만든 후 부활의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2.
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20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본문에서 주님은 마르다의 연약한 믿음을 가르치시며 참 믿음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마리아는 짧은 대화에서 몇 가지의 믿음의 단계로 발전해 나갑니다. 

1단계, 17-21절 현실 속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베다니에 도착했을 때 ‘요 11:17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마르다가 먼저 예수님께 나옵니다’ ‘요 11:21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이 말에는 두 가지 마음이 있습니다. ① 믿음- 예수님이 계셨다면 병을 고칠 수 있었다는 믿음 ② 아쉬움과 탄식-“왜 늦게 오셨습니까?” 즉 마르다의 믿음은 “병은 고치시지만 죽음은 이미 늦었다”는 수준입니다.

2단계, 22절 희망의 믿음입니다. 마르다는 계속 말합니다. ‘요 11:22 그러나 지금이라도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여기서 믿음이 조금 더 올라갑니다. 완전한 확신은 아니지만 예수님께 가능성이 있다는 믿음입니다. 

3단계, 23-24절 교리적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요 11:23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마르다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요 11:24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이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믿던 종말론적 부활 신앙입니다. 즉 “언젠가 부활한다” 그러나 아직 지금 여기서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보지 못합니다.

4단계, 27절 개인적 믿음의 고백입니다. 예수님이 질문하십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마르다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요 11:27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여기서 마르다의 믿음이 완성됩니다. 처음에는 병 고치는 예수님 이었지만 마지막에는 메시아이신 예수님 으로 고백합니다. 

마르다는 부활이라는 교리를 믿었지만 예수님은 부활이신 자신을 믿게 하십니다. 그래서 신앙의 핵심은 부활을 믿는 것이 아니라, 부활이신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3.
28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29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30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
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3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34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37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마르다와 달리 마리아는 아마 깊은 상심과 슬픔에 빠져서 예수님의 오신 것을 알지 못한 듯합니다. 마르다와의 대화를 마치시고 주님이 마리아를 찾았을 때 마리아는 29절 급히 일어나 예수님께로 나아옵니다. 마리아는 32절 그 발 앞에 엎드리며 33절 애통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립니다. 이에 우리 주님도 함께 인간의 아픔을 공감하시며 35절 눈물을 흘리십니다. 

마리아의 신앙은? 주님의 발 앞에 머무는 신앙입니다. 마리아의 특징은 항상 예수님의 발 앞에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세 번 등장하는데 모두 같은 모습입니다. 눅 10장 말씀을 들을 때 발 앞에 앉음, 요한복음 11:32 슬픔 속에서 발 앞에 엎드려 울음, 요한복음 12:3 예배할 때 향유를 부음. 즉 마리아의 신앙은 항상 주님의 발 앞에 있는 신앙입니다.

마리아의 신앙은? 눈물의 신앙입니다. 눈물의 신앙은 진정하고 진실한 신앙입니다. 마리아는 신학적 논쟁보다 눈물로 주님께 나아갑니다. 요한복음 11:33–35 마리아가 울자 예수님도 우십니다. 즉 마리아의 신앙은 마음을 열고 주님 앞에 나오는 신앙입니다. 눈물의 신앙은 언니 마르다처럼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통하고 전해지는 신앙입니다. 

주님의 발 앞에 엎드러 눈물로 고백하는 진정한 신앙을 이루시길 소망합니다. 

사랑의 아버지!!
인생의 생사화복이 모든 것이 주님의 영광을 이루기 위함임을 믿습니다. 삶을 통하여 주님을 알아가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요한복음 11:38-46

1.

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주님은 나사로가 묻힌 무덤 앞에서 38절 돌을 옮겨놓으라 말씀하십니다. 이 말에 39절 마르다는 역시 이성적인 판단을 하며 장사되어 죽은 지가 4흘이라 냄개가 난다고 말합니다. 즉 모든 것이 불가하고 끝났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40절 믿으면 영광을 보리라, 끝난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다면 다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41절 이 말씀으로 돌을 옮겨놓으니 기도하신 후에 주님은 43절 죽은 나사로를 불러 나오게 하심으로 44절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39절 주님은 언제나 인간의 절망 앞에 서서 건져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심으로 우리를 절망 가운데서 끌어내 주십니다.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돌을 옮기는 믿음입니다. 돌은 현재의 한계를 상징합니다. 불신앙의 돌, 두려움의 돌, 죄의 돌, 고집과 아집의 돌, 인간적인 지정의 돌입니다. 우리가 주의 영광을 보기 위해서는 돌을 옮겨 놓아야 합니다. 이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이요, 돌을 옮기는 것은 우리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우리에 믿음을 보시고 그렇게 다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마땅히 받을 만한 그릇으로 준비된 뒤에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2.
45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그를 믿었으나
46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알리니라
47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2)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48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49 그 중의 한 사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51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52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53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온 유대가 시끌벅적해졌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들이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산헤드린 공회를 열어 모이고 예수를 어떻게 할 것인지 본격적으로 논의하게 됩니다. 그중 50절 대자사장 가야바는 예수를 죽어 민족을 위하자는 말로 예수를 제거하기로 독려합니다. 이 결정으로 인하여 53절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살리신 사건으로 인하여 죽음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인간들이 계획하고 모의했지만 아이러니하게 그 위에는 주님의 섭리과 구속적인 개입이 있었습니다. 인간의 악한 계획도 하나님의 구원 계획 안에 있습니다. 가야바는 정치적으로 예수를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사건을 통해 구원의 계획을 이루셨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악한 결정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에 구원의 방법입니다. 가야바의 말대로 주님은 대속적인 죽음으로 죽으시고 결국 흩어진 백성을 하나님께로 모으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3.
54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거기를 떠나 빈 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머무르시니라
55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우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성결하게 하기 위하여 유월절 전에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더니
56 그들이 예수를 찾으며 성전에 서서 서로 말하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그가 명절에 오지 아니하겠느냐 하니
57 이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신고하여 잡게 하라 명령하였음이러라

우리 주님은 사람들의 위협과 정치적인 상황 종교적인 공격 가운데 잠시 몸을 피해서 하룻길 유대광야 지역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머무르셨습니다. 이는 어떤 두려움과 안위를 위한 도피가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움직이시며 하나님의 때를 살아가셨습니다. 

유월절 즘에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주님에 대한 소문과 기대로 인함입니다. 반면에 주님을 잡기 위함입니다. 믿기 위한 자와 정죄하고 죽이기 위한 자들이 예수님을 찾아 다닙니다. 우리가 예수를 찾을 때 어떤 마음으로 주님을 원하며 찾고 바랍니까? 

사랑의 아버지!!
돌을 옮기며, 잃어버린 예수를 찾아 오늘도 우리의 신앙을 경주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요한복음 12:1-19

1.
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오는 본문 마리아의 향유 옥합의 사건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6일 전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앞서 11장에서 나사로를 살리시고, 잠시 유다광야 에브라임에 머무신 후에 다시 유월절을 보내시기 위해서 베다니 나사로와 마르다의 집에 방문하십니다. 이 때 마르다는 순전한 향유 값비싼 향유를 주님의 발에 붓고 그의 머리로 발을 닦으며 주님의 죽으심을 준비합니다. 

가룟 유다는 계산하며 돈과 신앙을 비교했으며,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를 죽이기 위해서 힘을 썼습니다. 그러나 오직 마리아 만이 참된 헌신으로 주님의 죽으심을 준비한 것입니다. 이 같은 마리아의 헌신과 영적인 은혜는 어디서 온 것일까요?

① 마리아는 말씀을 가까이 듣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복음서에서 항상 예수님의 발 앞에서 말씀을 듣는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누가복음 10:39 마리아는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여기서 “발치에 앉는다”는 표현은 제자의 자세를 의미합니다. 즉 마리아는 단순한 추종자가 아니라 말씀을 깊이 듣는 제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여러 번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21, 마가복음 9:31, 마가복음 10:33-34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말씀을 깊이 듣던 마리아는 그 의미를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먼저 이해합니다.

② 마리아는 예수님의 생명 권세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오빠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 사건을 직접 경험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나사로가 죽었을 때 마리아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요한복음 11:32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십니다. 이 사건을 통해 마리아는 분명히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는 분,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 따라서 예수님의 죽음이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는 사건임을 직감했을 것입니다. 부활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은 십자가의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합니다.

③ 마리아는 예수님을 깊이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2:3 마리아가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닦으니’ 이 향유의 값은 삼백 데나리온입니다. 당시 노동자의 1년 연봉 수준입니다. 즉 마리아는 계산하지 않았고 아끼지 않았고 가장 귀한 것을 드렸습니다. 사랑이 깊을수록 예수님의 마음을 더 민감하게 이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2:7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예수님이 마리아의 행동을 십자가 준비로 인정하신 것입니다.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먼저 깨닫습니다.

2.
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15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17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언한지라
18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19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하니라

본문은 종려주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5일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은 왕으로 환영받으시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백성들은 호산나(구원하소서)를 외치며 예수를 영접합니다. 본문은 ‘스가랴 9:9절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를 타나니’ 말씀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19절 환호하는 백성들 앞에서 바리새인들은 절망합니다. 

호산나 외치던 백성들이 몇칠후 돌변한 이유는 무엇때문입니까?
① 메시아에 대한 잘못된 기대 때문입니다(정치적 메시아 기대). 백성들은 예수님을 로마를 무너뜨릴 왕으로 기대했습니다. 요한복음 12:13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유대인들이 기다린 메시아는 로마를 몰아내고 다윗 왕국을 회복하고 이스라엘을 강대국으로 만드는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했습니다. 종려나무는 민족 해방과 승리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로마와 싸우지 않았고 정치 혁명을 하지 않았고 십자가로 가셨습니다. 결국 백성들의 마음에 실망이 생겼습니다.

② 십자가의 메시아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메시아는 승리하는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고난받는 종으로 오셨습니다. 이것은 이미 구약에 예언된 모습입니다. ‘이사야 53장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그러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이사야 53장의 메시아보다 다윗 같은 정치적 왕 메시아 만을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그들에게 실패와 패배처럼 보였습니다.

③ 군중 신앙의 특징 때문입니다. 군중은 깊은 신앙이 아니라 분위기에 반응합니다. 예루살렘에 모인 무리 중 상당수는 예수님을 깊이 아는 사람들이 아니라 기적 소문을 듣고 모인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 12:18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즉말씀 때문이 아니라 기적과 기대 때문에 모인 무리입니다. 그래서 분위기가 바뀌면 신앙도 쉽게 바뀝니다.

결국 이들은 성경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알지 못하면 잘못된 기대를 하게 되고,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됩니다. 성경을 오해하며 믿음이 오해되고 진리가 왜곡되며 결국 오신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를 못 박아 죽이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사랑의 아버지!!
마리아와 같은 헌신적인 사랑을 주옵시고, 우리안에 올바른 성경적 가치와 진리가 발견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요한복음 12:20-50

1.
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21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22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쭈니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요한복음 12:20-33절은 예수님의 공생애가 십자가 사건으로 본격적으로 향하는 전환점입니다. 앞부분(12:12-19)의 예루살렘 입성 이후에 나오는 사건으로, 이제 예수님의 사역이 유대인을 넘어 온 세상으로 확장될 것을 선언하는 장면입니다.

호산나 주님을 찬양한 이후에 헬라인들이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이들은 이방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입니다. 즉 유대교 신앙에 관심을 가지고 절기를 지키러 온 이방인입니다. 이는 ‘요한복음 10: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이제 구원의 문이 유대인 중심에서 열방으로 확장되어 가는 시점입니다. 

그러나 이방으로 구원이 퍼져 나가고 복음의 때가 이르기까지 아직 인자의 때가 오지 않았으며(십자가) 24절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비로서 복음의 때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은 십자가의 원리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이방을 향한 구원의 역사입니다. 죽으심으로 구원이 열리게 되는 연결입니다.

2.
34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36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37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
38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39 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40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41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이방인의 때는 주의 십자가로 열리게 되지만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는 이스라엘입니다. 37절 이들은 예수를 믿으러 하지 않았습니다. 표적을 보도고 믿지 않으며, 말씀을 듣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35절 잠시 빛이 남아 있는 동안 36절 빛을 믿어 빛의 아들이 되라 말씀하십니다. 이같은 불신의 원인을 이사야는 이전에 미리 간파하고 다음과 같이 예언한 바 되었습니다. 40절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들로 깨닫고 돌이켜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40절의 의미는?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한 결과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심판적으로 완악하게 두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마음이 있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이것은 강제 불신앙이 아니라 심판적 방임입니다. 유대인들이 지속적으로 예수를 거부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그들의 완악함을 심판적으로 그대로 두셨습니다. 결국 그로 인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믿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거부하면 마음이 점점 굳어집니다. 처음에는 양심이 찔립니다. 그러나 반복적으로 거부하면 감각이 둔해지고 결국 깨닫지 못하는 상태가 됩니다. 돌이킬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히브리서 3:15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3.
44 예수께서 외쳐 이르시되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45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47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48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
49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50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하시니라

예수를 믿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께 보내심을 받은 분이고 하나님을 완전히 드러내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전체의 핵심도 이것입니다. 요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즉 예수님은 하나님을 보여주는 계시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거부하면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47-48절 말씀을 거부하면 심판이 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심판의 기준이 예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심판하는 기준은 종교 전통 선행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였느냐입니다. 즉 말씀이 구원의 기준, 심판의 기준이 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주신이가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은 두 가지 역할을 합니다. ① 믿는 자에게는 생명입니다. 요한복음 12:50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말씀을 받아들이면 영생 구원 생명이 됩니다. ② 거부하는 자에게는 심판입니다. 요한복음 12:48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 말씀을 거부하면 그 말씀이 심판의 기준이 됩니다. 사람은 결국 말씀 앞에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믿으면 생명이고 거부하면 심판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이방을 향하여 보내신 주님 영광의 빛을 발견하게 하옵소서. 그 빛이 말씀이 되어 우리안에 구원의 은총을 이루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요한복음 13:1-17

1.
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요한복음 13장은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밤, 십자가를 바로 앞둔 시점에서 시작됩니다. 요한복음은 공생애 기적 사역(1–12장)을 마무리하고 제자들을 향한 마지막 가르침(13–17장)으로 들어가는데, 그 첫 장면이 바로 발을 씻기시는 사건입니다.

1절 주님이 끝까지 사랑한 사람입니다. 이들을 주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사랑하십니다. 끝가지는 마지막까지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주님이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지막을 붙들고 계심을 믿습니다. 반면 가룟 유다는 그 끝 사랑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가룟 유다는 주님의 끝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머무는 자리 은혜의 자리에 사단 마귀는 가룟 유다의 마음을 붙들어 악한 생각을 넣어 예수를 팔고 배신하게 합니다. 믿음과 배신은 한 끝 차이입니다. 우리안에 악한 생각 내 중심의 주장과 생각이 아닌 주님의 마음 주님이 머물도록 해야 합니다. 

2.
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5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8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9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11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주님의 마지막 최종의 가르침을 행하십니다. 첫 행위가 섬김입니다. 발을 씻기시는 주님을 베드로가 거부하자 주님은 8절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나와 상관이 없다 말씀하십니다. 즉 섬김을 이루지 못한 제자는 주님의 제자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섬김을 행할 때 우리는 겸손으로 섬겨야 합니다. 겸손은 주인이 종을 섬기는 것입니다. 종이 주인을 대하는 것을 우리는 섬김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높지만 크지만 힘이 있지만 그 곳에서 내려와서 낮은 자세로 임하는 것을 섬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섬김은 겸손이 필요합니다. 무엇에든지 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섬김을 행할 때 우리는 계산하지 않아야 합니다. 어떤 이익의 유불리를 따라서 행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섬김은 무조건입니다. 무조건의 이유는 하나입니다. 바로 주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제자라면 우리는 이해 관계와 유불리를 떠나서 사랑으로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3.
12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12절 너희가 아느냐? 주님은 발을 씻기신 후에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십니다. 

14절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섬기는 공동체가 될 때 비로서 우리는 참교회를 이룰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 3: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참된 섬김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 섭섭하지 않습니다. 오직 주께 섬김을 이루는 참된 공동체 되길 소망합니다. 

17절 결국 섬기는 자가 복을 받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행하면”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알면 복이 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행하면 복이 있다” 신앙의 핵심은 지식이 아니라 순종과 실천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아느냐?”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알면 행하라.” 신앙의 깊이는 얼마나 아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섬기느냐로 나타납니다.

사랑의 아버지!!
더욱 낮은 자리에서 자신을 주장하지 않고 섬김과 사랑의 실천이 습관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요한복음 13:18-30

1.
18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19 지금부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일러 둠은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가룟 유다의 배반과 성경 예언의 성취입니다. 때가 왔습니다. 숨겨졌던 악은 자라서 생각에서 마음으로 그리고 행동으로 실천하여 예수를 배신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가깝다고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원수가 자기 집안에 있다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사야 41:9절을 인용하여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였다 성경의 말씀을 응하게 하십니다. 주님께서 친히 이사야의 성경을 말씀하심은 19절 예수가 그리스도로서 죽임을 당한 것을 믿게 하려 함입니다. 

배반조차도 하나님의 구속 계획안에 있습니다. 이미 말씀하신 것처럼 이 사건은 우발적 실패가 아니라 성경의 성취입니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유다의 배반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배반을 통해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 계획입니다. 인간의 악도 하나님의 계획을 무너뜨리지 못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것까지 사용하십니다. 우리의 삶의 어두운 사건조차 하나님의 뜻안에 있으며 하나님의 구속 역사 안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2.
2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 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23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24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하니
25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니이까
2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27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28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자가 없고
29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가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주님은 끝까지 가룟 유다로 기회를 주십니다. 21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모든 것을 알고 있으니 돌이키라는 말씀입니다. 26절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시니 이는 사랑과 친절함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죄는 결국 나를 지배하고 말았습니다. 27절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30절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즉각적인 선택입니다. 돌이킬 기회를 거절하고 말았습니다. 영적인 상태를 밤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 곁에 있었지만 결국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반대로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빛 가운데 있는가, 아니면 이미 어둠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주님의 사랑은 끝까지 나를 붙들지만, 마지막 방향은 내가 선택 결정하는 것입니다. 

3.
31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32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33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어둠(배반)이 떠난 자리에서 빛(영광과 사랑)이 선포되는 장면입니다. ① 예수님의 죽으심 = 영광 ② 새 계명 = 사랑. 이 본문은 크게 두 축으로 이루어집니다.

주님은 죽음의 자리에서 새 계명을 선포하십니다. 자신의 죽음으로 새 계명을 이루신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심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희생적 사랑, 조건 없는 사랑, 끝까지 가는 사랑입니다. 실패해도 포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사랑의 기준이 ‘예수님’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 새 계명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라면 말이 아니라, 교리가 아니라, 십자가의 사랑 관계적인 사랑을 이루어야 합니다. 

사랑의 아버지!!
사랑의 실천으로 주님의 제자 됨이 확증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요한복음 14:1-14

1.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4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주님은 13장에서 가룟 유다가 자신을 배신할 것과 베드로가 자신을 부인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마음이 무거워지며 근심에 빠지게 됩니다. 이에 주님은 근심에 빠진 제자들을 향하여 근심하지 말 것과 하나님과 자신을 믿으라 말씀하십니다. 

근심의 일차적인 원인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믿지 못함에 있습니다. 지금의 상황 가운데 제자들은 근심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마치 일렁이는 파도를 보고 베드로가 물속에 빠져 들어가듯이 근심과 걱정은 제자들의 마음을 잠식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근심을 없애기 위해서 상황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에 대한 믿음’을 강조할 뿐이십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강조하시는 믿음이 무엇입니까? 제자들을 향하여 주님은 거처를 예비하러 가시고, 거처를 예비한 후에 다시 와서 제자들로 그 거처에 들어가게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 주님은 실로 하나님의 복음과 천국의 왕권을 가지시고 오늘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
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예수님은 이제 있을 십자가와 영적일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의 제자인 도마와 빌립은 육신의 일로 감각적인 것으로 질문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도마는 주님의 가신다는 곳을 알지 못하니 그 길을 설명해 달라고 장소적인 개념으로 질문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됨을 설명하고 오직 예수로만 하늘 아버지께로 갈수 있음을 설명하십니다. 이에 조용히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빌립이 거들어 질문하길 예수님의 말씀하시는 하늘 아버지를 시각적으로 보이라 요청합니다.

두 제자의 요청에 주님은 한 마디로 대답하십니다. 
11절 나를 믿으라
알지 못하는 인생의 길에 해답이 예수이며
보지 못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실체가 예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것이 모든 것에 해답이 되는 것입니다.

3.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믿음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12절 예수를 믿는 자는 예수가 하신 일도 할 것이요 그 보다도 더 큰 일을 행할수 있는 능력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가 하늘 지성소에 들어가서 인간의 모든 죄를 사하심으로 인간의 마음에 주의 성전이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주의 성전이 회복된다는 것은 성령이 임하시는 장소가 되다는 것입니다. 결국 성령으로 살아가는 능력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14절 예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주님께서 주님의 방법으로 시행하십니다. 이전에는 우리에게 예수의 이름이 없었지만 지금부터는 예수의 이름을 소유한 자가 되었습니다. 때문에 그 이름으로 요청하고 구할 자격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구하고 요청하는 것은 반드시 행하신다는 약속을 받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떠나심(십자가)는 우리에게 소망이며 믿음의 핵심이며 본질입니다. 떠남으로 우리 삶에 참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사랑의 아버지!!
예수가 길이요 진리요 소망 되심을 믿으며 십자가로 내려 주신 은혜를 체험하고 경험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요한복음 14:15-31

1.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오늘 본문의 핵심은? 15절 21절 계명을 지키는 자입니다. 계명은? 옛 언약 첫 번째 언약의 말씀이 아니라, 새 언약 예수로 인하여 우리 안에서 이뤄지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예수안에서 이뤄지는 모든 약속입니다. 새 언약은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자연스럽게 성취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품으면 말씀을 품는 것입니다. 그 날에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거하게 됩니다. 완벽하게 아버지와 우리 주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언약입니다. 

새 언약의 말씀을 품으면 우리안에 보혜사 성령님이 거하십니다. 우리가 고아와 같이 버려 둠을 당하지 않습니다. 하늘 아버지로 사랑을 받는 자녀가 됩니다. 주님의 나타내심을 경험하게될 것입니다. 

새언약은 우리가 계명을 지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계명을 이루시는 사건입니다. 예수를 품으면 말씀을 품는 것이고, 말씀을 품으면 성령이 역사하며, 성령이 역사하면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 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아멘.

2.
22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25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22절 유다는 주님께 질문합니다. 왜 이렇게 놀라운 비밀을 우리에게만 알리시고 세상 사람에게는 말씀하지 않으십니까? 23절 주님은 이 질문에 내가 나타내지 않음이 아니라 세상이 나를 사랑하지 않음으로 듣지 못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4절 반드시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말을 듣고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사실을 26절 보혜사 성령께서 가르치고 알게하고 생각나게 하실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세상으로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동일하게 말씀하시고 동일하게 사랑하십니다. 오직 반응의 차이입니다. 듣고 이해하고 감사하고 따르든지, 듣고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대로 살아가든지의 차이입니다. 세상은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며 진리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오직 사랑의 대상은 망할 자기 자신뿐입니다. 

본문의 흐름을 보면 흐름으로 보면, 사랑한다-말씀을 지킨다-하나님이 거하신다-성령이 가르치신다-예수를 깨닫는다. 반대로, 사랑하지 않는다-말씀을 거부한다-하나님이 거하지 않으신다-성령의 역사 없음-결국 모른다.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숨으신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 안에 성령으로 오셔서 스스로를 드러내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 마음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그 때 비로서 우리 주의 성령으로 우리를 가르쳐 깨닫게 합니다. 

3.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28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
29 이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30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31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

27절 주님의 마지막 말씀은? 평안입니다. 주님의 주시는 평안은 상황과 상관없는 평안입니다. 하나님과 관계에서 오는 평안입니다. 때문에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28절 우리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기쁨입니다. 이는 우리 주님이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입니다. 가셔야만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님이 오시는 것입니다. 30절 지금은 세상 임금의 시대(사단 마귀)의 시대입니다. 그러니 세상으로 주님은 관여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31절 우리는 세상인 여기를 떠나 주님의 십자가를 따르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일어나 여기를 떠나자, 지금은 결단의 때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향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십자가의 자리로 부르시고 하나님의 나라의 일꾼으로 부르신줄 믿습니다. 주님의 평안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의 두려움에 묶이지 않고, 십자가를 향한 순종의 길을 기쁨으로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새 언약의 계명이 우리안에 이뤄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로 보내신 보혜사 성령으로 우리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게 하여 주옵소서. 평안으로 담대함으로 십자가의 삶을 결단하길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요한복음 15:1-27

1.
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내 안에 거하라” 예수님은 자신을 참 포도나무, 우리는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어야 삽니다. 떨어지는 순간, 말라 죽습니다. 신앙의 본질은 “열심”이 아니라 연결(거함)입니다. 거함이 없으면 열매가 없고, 거함이 있으면 반드시 열매 맺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느냐”보다 “누구 안에 있느냐”입니다. 신앙은 “왔다 갔다”가 아니라 “붙어 있는 상태”입니다.

8절 우리가 이렇게 붙어 있을 때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제자가 되리라”. 열매는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거함의 결과입니다. 열매를 만들려고 애쓰기보다 주님 안에 머무는 것이 먼저입니다. 열매의 본질 성품의 변화 사랑 순종 영향력. 참된 신앙은 반드시 “보이는 열매”로 드러납니다.

2.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10절 거함의 방법은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12절 계명은 곧 사랑입니다. 모든 계명의 중심은 하나입니다. 사랑입니다. 하지만 이 사랑은 세상적인 감정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기준 희생적 사랑, 자기 내어주는 사랑,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 사랑은 말이 아니라 내어주는 행동입니다.

14-15절 사랑의 정체성으로서 친구입니다. 거함 → 순종 → 사랑으로 나아갈 때 신분이 변화됩니다. 종 → 친구입니다. 차이는 무엇입니까? 종은 명령만 아는 관계이지만, 친구는 마음을 아는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시키는 존재”가 아니라 “함께하는 존재”로 부르십니다. 

3.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20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21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라
22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23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주님은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어둠의 주관과 악함에 속해 있습니다. 때문에 세상의 주관은 주님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미워하는 것은 아버지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따른다는 이유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핍박을 받고 성도가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당연한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이 원리와 진리를 알고 있기에 당당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미움이 올 때 20절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주님이 세상을 향하여 말씀을 선포하며 지키며 살아갔듯이 우리 역시 세상을 향하여 말씀을 선포하고 지키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 안에서 사는 삶이요, 열매와 결실을 맺는 삶이요. 주님의 참 친구로서의 삶임을 믿습니다. 

사랑의 아버지!! 
주안에 거하며 그 말씀 안에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사랑으로 열매를 맺으며 믿음으로 흔들리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요한복음 16:1-33

1.
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2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3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4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이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라
5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6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1-2절 주님은 장래가 우리가 당할 일을 설명해 주십니다. 사람들이 믿음에서 실족할 것이며, 교회로부터 출교를 당하며, 나아가 고난과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일을 당하거든 우리는 이상한 일을 당하는 것으로 여기지 말고 오늘 주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의 믿음을 지켜 내며 더욱 강건하게 신앙을 이뤄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은 우리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진리와 거짓은 함께할 수 없으며, 주님과 세상은 병존할 수 없는 것입니다. 

7절 시험과 고난의 실상은 유익입니다. 이는 우리 주님의 십자가가 결국 유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이 떠나가지 아니하면 진리의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로 산 제사가 될 때 우리 안에 모든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살아질 때 비로서 거룩한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임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실상 주님이 떠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2.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8-11절 성령이 오시면 첫 번째 사역, 죄, 의, 심판에 대하여 책망(엘렝코) 하십니다. 책망은 드러내고 깨닫게 하시는 사역입니다. 성령은 어떤 단순 정보를 전달하는 사역이 아니라 양심을 찌르고 삶의 방향을 바꾸는 사역을 이루십니다. 

성령의 3가지 책망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죄에 대하여 즉 믿지 않음을 책망하십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의에 대하여 즉 예수께서 아버지께로 가니입니다. 이는 유대인들은 예수를 불법적 신앙 행위로 십자가에 못을 박은 것입니다. 예수가 불법을 행하였음으로 죄인이어야 합니다. 죄인은 아버지께로 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께로 가셨습니다. 다른 의미로 예수가 의고 유대인들이 불법이라는 사실이 드러난 것입니다. 성령은 이것을 심판하신 다는 것입니다. *세번째 성령은 심판에 대하여 즉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임금은 사단 마귀입니다. 따라서 이미 심판을 받은 세상을 추종하고 살아가는 모든 자에게 심판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은 죄와 의와 심판으로 우리를 책망하십니다. 이때 우리는 이 책망으로 드러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살피고 보아야 합니다. ‘죄-나는 죄인입니다’ ‘의-예수만이 옳습니다’ ‘심판-지금 세상으로부터 돌아서야 합니다’ 성령의 가르침으로 우리는 이 같은 결단으로 돌아서고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3.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23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20-22절 잠시의 슬픔과 영원한 기쁨입니다. 제자들은 잠시 예수를 보지 못하나 다시 보게될 것입니다. 그때 제자들은 마치 해산하는 여인처럼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기쁨은 영원한 기쁨이 될 것이며 누구도 빼앗아 가지 못할 기쁨이 될 것입니다. 

23-24절 그날 곧 부활과 성령 강림 이후에는 제자들은 주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구할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주의 마음으로, 주의 생각으로 구한다는 것입니다. 그 영원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우리게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주의 이름은 기쁨이고 영광의 충만입니다.

4.
3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주님의 교훈에 말씀의 마지막 결론은 31절 너희가 믿느냐!! 믿음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복음과 천국의 복음을 주고 믿게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항상 모든 결론은 믿느냐? 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지만 결국 이기게 될 것입니다. 이는 우리 주님이 세상을 이겼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같은 이김의 믿음이 우리 가운데 고백되는 은혜가 있길 소망합니다. 

사랑의 아버지!!
보혜사 성령님 우리 가운데 오시고, 우리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담대함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요한복음 17:1-26

1.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의 대제사장적인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시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마지막 드리는 중보기도입니다. 요한복음 17장은 3가지 기도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먼저 본문 1-5절, 자신을 위한 기도입니다. 1절 우리 주님은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주님은 5절에서 아버지가 내게 하라고 주신 일 즉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 땅 위에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우리 주님은 한 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입니까?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우리 심령이 복음을 받아들여 천국을 이루는 것이며, 공동체로 교회를 세우는 것이며, 천국 교회를 영생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 주님을 영화롭게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은 하나입니다. 교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받아 들이고, 하나님의 맡겨주신 공동체를 세우고, 결국 마지막 천국 영생을 이루는 것이 사명입니다. 우리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2.
9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10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12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13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14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15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두 번째 우리 주님은 남겨진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9절 내가 비옵는 것은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다. 제자들을 위한 기도는 2가지입니다. 11절 먼저 제자들을 보전 지켜주사,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됨 같이 제자들고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아들-제자입니다. 연합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기도이고 소망합니다. 두 번째 15절 악에서 보전해 달라 기도하셨습니다. 주님기도문에서처럼 악에서 구원하옵소서입니다. 악에 빠진 다는 것은 악에게 사로 집힌다는 것입니다. 악에 빠진 자가 바로 적그리스도입니다. 적그리스도는 개인의 감정과 생각으로 교회의 사역을 방해하고 목회를 방해하는 자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렇게 되지 않도록 기도하신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참된 천국 주님의 제자라면 우리의 사역은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바로 연합을 이루고 악에 빠지지 않는 것이어야 합니다. 교회를 갈라치지 말고 교회의 거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결국 가룟 유다처럼 개인의 불행입니다. 스스로 목매어 죽을 인생으로 전략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영원하고 불변합니다. 

3.
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세 번째 우리 주님은 미래의 모든 성도를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20절 이 사람들만(제자) 위함이 아니요 그들의 말(제자)로 나를 믿는 사람들(성도)을 위함이니다. 미래의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기도는 오직 하나입니다. 22절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하나 됨 연합입니다. 

우리 주님은 왜 이렇게 17장에서 연합과 하나됨을 강조하셨을까요?
① 하나 됨은 하나님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입니다. 교회가 목회자 성도와 성도와 성도가 하나 되지 못하면 하나님의 본질적 사명을 절대 이룰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음 모우고, 사단 마귀는 분리 이간 나눔 당짓게 하여 나누게 하는 것입니다. 

② 하나 됨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능력도 조직도 아니고 오직 연합니다. 우리가 일할 수 있는 원동력은 주님으로 연합될 때입니다. 교회가 든든히 세워지는 것은 성도간의 연합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연합 하나 됨을 방해하는 것이 있다면 어떤 아픔이 있더라도 수술하고 잘라내야 하는 것이 원칙이고 방법입니다. 

③하나 됨은 결국 사랑의 실체입니다. 긴말이 필요 없이 사랑이 있으면 하나 되는 것이요, 하나 됨이 없으면 사랑도 없는 것입니다. 사랑의 열매는 연합입니다. 그래서 연합은 단순한 결과가 아니라 오직 사랑의 증거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주님의 기도가 오늘도 섬기는 교회 위에 이루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요한복음 18:1-38

1.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
2 그 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
3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4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5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6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7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그들이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9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내가 그니라, 예수님은 신적 권위로서 자신을 잡으러 온 군인 앞에서 스스로 자신을 내어 주십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체포의 장면이지만 단순히 붙잡힘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내어 주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이 드러나는 본문입니다. 

찾으러 온 자들 앞에서 숨지 않고 주님은 먼저 나가십니다. 자신을 내어주심은 제자를 지키고자 하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8절 내가 그니라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이것이 바로 대속의 사랑입니다. 나는 죽고 우리는 사는 것입니다. 모든 사명을 묵묵히 받으시며 걸어가는 길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나는 죽지만 너는 살리는 것이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내가 그니라 이 한 마디 말에 우리 주님의 정체성, 십자가의 결단, 사랑의 희생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붙잡히신 분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자신을 내어주신 주님이십니다. 

2.
15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16 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는지라 대제사장을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오니
17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18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
25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아니라 하니
26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이라 이르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27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내가 그니라’는 신적 사명 주님이 택하신 길이라면, ‘나는 아니라’는 인간의 연약함과 불신앙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베드로의 결심과 담대함은 한 순간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인간적인 결심과 결단의 한계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 무엇을 결단해서 이룰 수 없는 어쩔수 없는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결심과 결단과 담대함도 주안에서 주어지는 것일 때 비로서 지켜 낼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따라가지만 멀찍이 서 있는 신앙입니다. 도망가지 않았지만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성경에 ‘불을 쬐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불은 세상이 주는 위로이며 안락함과 도피입니다. 주님곁에 서면 죽음이지만 세상이 주는 불 앞에서는 잠시의 쉼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불앞에 설 때 베드로는 작은 질문 앞에서 자신의 신앙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부정과 부인의 깊어져 가는 것입니다. 모릅니다, 진짜 모릅니다, 목숨을 걸고 이 사람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변해 가는 존재입니다. 

27절 닭이 울 때에 깨어지는 것입니다. 아 소리는 단순히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주님이 알려 주시는 은혜의 알람소리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깨닫게 하고, 자신의 모습을 자각하고 하고,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 회개하는 소리 신호입니다. 즉 주님의 음성입니다. 부인과 불신앙의 삶 가운데 우리에게 은혜의 알람이 작동 되어지길 소망합니다. 

3.
31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 하니
32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33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
35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37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38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대제사장 빌리도 관정 앞에서 예수님은 빌라도 법정으로 이송됩니다. 유대인의 법으로는 사람을 죽일 수 없기 때문에 빌리도 법정에 세운 것입니다. 빌리도 법정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36절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37절 내 나라는 진리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됨을 선언하고 계십니다. 이를 위해서 주님이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우리 주님의 오심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왕권을 가지고 오셨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가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로마로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당시에 권위주의 율법주의 세속주의에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 나라를 말씀했습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의 대항방법이며 싸움의 방법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많은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세상이 어렵고 복잡할수록 우리는 더욱 복음의 진리, 하나님의 나라에 집중하며 주님이 그렇게 살아가셨듯이 우리도 이처럼 살아가야 할 줄 믿습니다. 이유는 한가지 세상으로는 어떤 방법고 답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스스로 내어주신 사랑으로 우리도 살게 하시고, 혹 믿음과 신앙이 무너질대 영적 알람으로 우리를 일깨워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요한복음 18:39-19:27

1.
18:39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40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였더라
19:1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2 군인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3 앞에 가서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으로 때리더라
4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더라
5 이에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6 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
7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사람들은 예수가 아닌 바라바를 선택합니다. 바라바는 강도이며 반역자입니다. 진리와 진실은 외면하고 거짓과 악함을 선택하는 순간입니다. 사람들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립니다. 그리고 6절 대제사장과 아랫사람(성전 소속 실무자)들의 권력의 틀 아래서 일반 백성들은 선동되어 예수를 죽음에 자리에 던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은? 백성의 어리석은 선택입니다. 이는 영적 무지와 폭력적인 죄성 때문입니다. 감정에 휩쓸려, 분위기에 휩쓸려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였습니다. 또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은 권력자들의 조직적 선동의 결과입니다. 종교적 권위를 이용하여 정치적인 프레임을 씌우며 군중을 적절하게 자극하여 집단적 분노를 형성시키는 것입니다. 이는 의도된 방향으로 이끄는 조작된 외침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요한 복음은 이 사건을 단순히 ‘사람이 예수를 죽었다’가 아닌 ‘위에서 주지 아니하였더라면’입니다. 즉 모든 권세는 하나님의 아래 있습니다. 인간적인 차원에서 백성의 어리석음이며 지도자의 선동이며 빌라도의 비겁한 타협이지만, 영적 차원에서 보면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계획입니다. 구원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구속적 계획과 사건입니다. 모든 것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가는 것 뿐입니다. 이 성경이 기록 가운데 우리는 어떤 마음과 자세로 살아가야 할지? 생각하는 은혜가 있길 기도합니다. 

2.
8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9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부터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
10 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1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
12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13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가서 돌을 깐 뜰(히브리 말로 가바다)에 있는 재판석에 앉아 있더라
14 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15 그들이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16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 주니라

8절 빌라도는 사람의 말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진리가 아닌 비진리를 수용하고 말았습니다. 세상 사람은 세상을 먹고 살기 때문입니다. 인기가 떨어지고 돈이 떨어지고 명예가 떨어지면 세상 사람들은 죽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9절 주님의 침묵은 주권적 침묵입니다. 더 이상의 변명을 이어지가 않으십니다. 이미 마음을 정하고 결정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포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식대로 이루시는 방법입니다. 10절 빌라도는 권세를 착각하지만 11절 참된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임을 알게 합니다. 결국 12-16절 빌리도는 진리가 아닌 권력과 자리를 택하며 참된 정의 앞에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진리를 아는 것보다 진리를 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는 말씀을 아는 것보다 그렇게 사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여전히 세상은 위협적으로 우리를 공격하고 무너지게 하려고 힘을 쓸 것입니다. 하지만 타협하지 말고 무릎 꿇지 말고 살아야 할 것은 우리 주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신앙 양심을 따라서 살아가야 할 줄 믿습니다.

3.
23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24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ㄱ)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
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26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새벽 6시에 빌라도 법정에서 판결을 받으신 주님은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이때 25절 십자가 아래서 절규하는 4명의 여인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강한자들은 다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연약한 여인들만 남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역설입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십니다. 

끝까지 십자가의 자리까지 남는 것이 신앙입니다. 끝까지 남는 자는 어떤자입니까? 연약한 자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용기와 담대함은 우리의 의지가 아닌 하나님이 주시는 담대함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끝까지 남는 자는? 하나만을 보는 사람입니다. 단순하고 무식할지라도 하나님을 볼 때 즉 주님만을 볼 때 흔들리지 않습니다. 복잡하고 생각이 많은 수록 흔들리기 쉬우며 완주할 수 없습니다. 끝까지 남는 자는? 주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지식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사랑이 사람을 남게 합니다.

끝까지 남는 신앙은 강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붙드는 단순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진리를 왜곡하지 않게 하시고, 변함없이 진리의 자리 그 자리에 서서 살아가는 끝 사랑이 되게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요한복음 19:28-42

1.
28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29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
누가복음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누가복음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19:26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마태복음 27: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요한복음 19:28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요한복음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누가복음 23: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우리 주님은 겟세마네 기도 후, 금요일 자정경에 잡히셨습니다. 새벽 1-3시경에 유대 대제사장 가야바로 종교재판을 받으시고, 4-6시경에 산헤드린에서 공식 판결로 사형을 결정짓게 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재판으로는 사형을 집행할 수 없기 때문에 이른 아침 6시경에 빌라도 법정에 세운 후에 사형을 언도하고, 6-9시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후에,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12시 정오에 3시간 동안 어둠이 덮히고, 오후 3시경에 운명하십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후 오전 9시 ~ 오후 3시 까지 십자가에서 남긴 7가지 말씀이 있습니다. 이를 우리는 가상칠언, 주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이라고 합니다. 

①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눅 23:34)
용서의 복음, 구원의 시작입니다. 십자가는 심판의 자리가 아니라 용서가 선포되는 자리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인간의 죄는 “알지 못함”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는 그 무지를 넘어섭니다. 구원은 인간의 회개 이전에 하나님의 용서가 먼저 임하는 사건입니다. 성도는 상처 속에서도 용서를 선택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②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눅 23:43)
즉각적인 구원의 확신입니다. 십자가 강도는 아무 공로도 없었지만,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즉시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마지막 순간에도 돌아오면 하나님은 받아주십니다. 절망의 끝에서도 소망은 열려 있다는 선언입니다.

③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요 19:26-27)
새로운 공동체, 공동체 안에서 탄생되는 가족입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새로운 관계가 형성됩니다. 십자가는 단지 개인 구원이 아니라 공동체를 세우는 사건입니다. 교회는 혈연이 아니라 십자가로 맺어진 가족입니다. 성도는 서로를 책임지는 영적 가족 공동체입니다.

④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마 27:46)
버림받음 속에서 이루어진 대속입니다. 이 말씀은 시편 22편의 성취이며, 예수님이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버림받는 자리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하나님의 단절과 심판을 예수님이 대신 담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통은 단순한 육체적 고통이 아니라 영적 단절의 고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코 버림받지 않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⑤ “내가 목마르다” (요 19:28)
인간의 고통을 완전히 짊어지신 주님입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육체적 갈증이 아니라, 구속을 완성하시기 위한 철저한 순종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우리와 같은 인간의 고통을 실제로 경험하신 분입니다. 또한 이는 영혼의 갈증을 상징합니다. 인간은 하나님 없이는 결코 채워질 수 없습니다.

⑥ “다 이루었다” (요 19:30)
구속의 완성 선언입니다. 헬라어 “테텔레스타이(τετέλεσται)”는 “완전히 지불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죄값은 이미 완전히 지불되었습니다. 더 이상 인간이 더할 것이 없습니다. 구원은 완성된 사건이며, 우리는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존재입니다.

⑦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눅 23:46)
완전한 맡김, 믿음의 절정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십니다.
십자가는 절망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김의 자리입니다. 죽음조차도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성도의 삶의 마지막 고백은 ‘내 인생을 하나님께 맡깁니다’가 되어야 합니다.

2.
38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39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2)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40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41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42 이 날은 유대인의 준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

요한복음 19:38-42은 십자가 사건 이후, 숨겨졌던 제자들의 신앙이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특별히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의 모습은 매우 깊은 영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먼저, 아리마대 요셉입니다. 성경은 그를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긴 자”라고 말합니다. 그는 그동안 숨은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이후, 그는 놀라운 행동을 합니다. 빌라도에게 직접 나아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공개적으로 장례를 준비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행동이 아닙니다. 당시 십자가 처형자는 반역자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그의 시신을 요구하는 것은 자신도 같은 편임을 드러내는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전의 두려움 속에 숨은 믿음에서, 이후 위험을 감수하는 공개적 믿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십자가는 그의 신앙을 바꿨습니다.

다음으로 니고데모의입니다. 니고데모는 점진적으로 성장하는 신앙입니다. 니고데모는 처음에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입니다 (요 3장)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몰약과 침향 약 100리트라 (약 30kg 이상) 준비합니다. 이는 왕의 장례에 해당하는 엄청난 규모입니다. 그는 더 이상 숨어있지 않습니다. 그의 신앙은 이렇게 성장합니다. 탐색의 단계 (요 3장) – 밤에 찾아옴, 변호의 단계 (요 7장) – 공회에서 예수를 변호, 헌신의 단계 (요 19장) – 공개적으로 장례 참여. 결국 그는 완전한 헌신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모두가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변화된 삶을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이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아무런 감흥이 없다면 우리는 참 제자가 아니며 성도가 아닌 것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십자가에서 남기신 주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며 참 성도로 변화는 은혜가 있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요한복음 20:1-31

1.
요한복음 20: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4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오늘 성경에서 부활의 주일에 우리 주님이 살아나셨습니다. 살아나신 주님은 요한복음 20:14 빈 무덤가에서 울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후에 19절 예수님과 마지막 최후의 만찬을 한 예루살렘의 다락방에 도마를 제외한 열 명의 제자와 다른 몇 제자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 주님은 그 곳에 나타나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10제자는 주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것입니다. 

열 명의 제자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던 도마에게 이 사실을 알려 주었습니다. ‘도마, 예수님이 살아나셨다’ ‘예수님이 부활하였어’ ‘우리가 주를 보았어’ 기쁜 마음으로 이 사실을 도마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하지만 도마는 이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다. ‘무슨 말 같지도 않는 소리를 하나’ ‘내가 직접 그의 손에 못자국을 보고, 그이 옆구리에 찔린 창자국에 손을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않겠네’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을 거절하며 믿지 않았습니다.

함께 하지 못하면 믿음의 은혜를 누리지 못합니다. 모두가 한 마음이 될 때 다른 생각과 다른 마음을 품게 됩니다. 우리는 함께 하는 생명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생명공동체는 동고동락입니다. 기쁨이나 슬픔 모두를 공유하는 것입니다. 나쁘다고 고통스럽다고 떠나지 않으며, 좋다고 오버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정음 공동체가 온전한 생명 공동체로 충만하길 소망합니다.

2.
요한복음 20: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이후 여드레 8일이 지난 어느날 다시 제자들이 모여 함께 있을 때 부활하신 주님은 그 곳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활을 의심하였던 도마에게 이르되 27절 ‘내 손가락을 보고, 내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믿음 없는 말이라도 그대로 받으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주님은 도마를 책망하지 않으시며, 그의 부족함을 채워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혹 연약함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 기도해도 주님은 그 기도를 기억하시고 책망하지 않으시고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믿음의 증거를 구하시길 바랍니다. 지혜가 없으면 구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시길 예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결국 주님의 말씀에 도마는 마음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는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 이십니다’ 도마는 주님 앞에서 위대한 신앙고백을 하게 됩니다.

3.
요한복음 20: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성경에 기록한 목적 무엇입니까?

① 주님의 부활은 예수가 하나님 되심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오늘 도마의 고백처럼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 주 예수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창세로부터 약속하신 구원의 약속입니다. 새 언약의 성취’입니다. 

② 주님의 부활을 통하여 부활의 주님만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심을 선포합니다. 오늘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그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만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예수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이 예수입니다. 

요엘서 2: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로마서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오늘 성경은 예수가 부활하신 이유를 우리에게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그가 하나님 되심의 선포이며, *예수의 부활은 우리에게 그 이름을 주사 생명을 얻게 하시는 약속입니다. 

사랑의 아버지!!
부활 신앙을 이루며 믿으며 영생 생명의 주인공이 되게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요한복음 21:1-25

1.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6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오늘 성경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 번째 나타나셨습니다. 1일차 막달라마리아 앞에서, 8일 후 도마와 제자들 앞에서, 2-3주 후 디베라호수 즉 갈릴리 호수에서 베드로, 도마, 나다나엘,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익명의 2제자 총 7명의 제자앞에서 주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예수를 떠난 제자들은 빈 깡통과 같은 운명입니다. 다시 옛날로 돌아가서 고기잡이 전에 하던 자신들의 일을 찾아 돌아올 수밖에 없는 신세입니다. 그리고 그 것 마저도 변변치 않아서 3절 아무것도 잡지 못하는 소득없는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인생으로 전략합니다. 그러나 5-6절 주님이 찾아오신 인생위에 다시 활력이 솟고 희망과 소망이 싹트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물을 던지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우리가 허망하고 허무한 인생을 사는 것은 언제나 분명하고 확실합니다. 우리의 자리에 주님이 없기 때문이요, 주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으로만 우리는 회복되며 살아가며 소망을 가질수 있는 존재임을 깨달아 알길 소망합니다.

2.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
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12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13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14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예수님의 잡히시던 밤에도 예루살렘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하셨습니다. 떡을 떼심으로, 잔을 나눔으로 식탁 교제를 이루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동일하게 주님은 먹으심으로 자신의 부활을 강력하게 나타내시며 스스로 증거해 주십니다. 몸이 없는 영은 먹을 수 없습니다. 부활은 단순히 영적 환상이나 현상이 아닌 실제임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식탁의 교제를 통하여 은혜를 나누십니다. 이 식사는 단순한 식사가 아닌 은혜의 초청이며, 관계의 회복이며, 사명이 회복되는 자리입니다. 그물이 찢어지지 않음은 주님의 보호적 상징이며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풍성함의 의미입니다. 

자신을 친히 나타내시는 주님, 스스로 제자들에게 찾아오시고 은혜로 회복시키시며 보호를 약속하신 우리 주님이십니다. 

3.
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우리 주님은 상처입고 쓸어져 몸둘 바를 모르는 베드로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했던 것 같이 주님은 세 번 그의 마음을 만져주며 ‘요한의 아들 시몬’ 그의 이름을 불러 주십니다. 사랑(아가페, 절대적 사랑)로 묻고 사랑(필레오, 우정)로 대답하지만, 우리 주님은 베드로의 대답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18-19절 장래에 그가 어떠한 삶을 살 것이요, 어떠한 죽음을 죽을지 주님은 이미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의 대답은 필레오의 사랑이지만 아가페 사랑으로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회복이 있는 자리에 사명이 있습니다. 믿음이 회복되고 마음이 회복될 때 우리 안에서 사명이 불타게 될 것입니다. 이 사명의 자리는 분명 주님 찾아오심이요, 간섭의 자리됨을 고백합니다. ‘나를 따르라’ 주님 명령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사명으로 재조명되고 발견되고 회복되는 축복이 있길 소망합니다. 

사랑의 아버지!!
마지막 사명의 자리까지 이를 수 있는 신앙과 믿음이 있길 소망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description>
			<author><![CDATA[정음교회]]></author>
			<pubDate>Mon, 20 Apr 2026 22:21:4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jungumch.com/?kboard_redirect=5"><![CDATA[성경묵상코너]]></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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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2026년 04월 19일]]></title>
			<link><![CDATA[https://www.jungumch.com/?kboard_content_redirect=1431]]></link>
			<description><![CDATA[1. 환영합니다.
* 예배로 함께 하신 성도님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 새롭게 교회를 방문하신 성도님들은 ‘새신자 카드’ 작성하시고 등록해 주시길 바랍니다. 
* 새 가족모임: 매 주일 1시~1시 30분 본당입니다.

2. 47주년 임직 감사예배
* 임직자: 안수집사 최선호. 권사 유옥자, 이상희 
* 오늘은 오후 예배 없이 임직 예배로 드립니다.
* 교회에서 준비한 점심식사 드시고, 임직 수건 받아가세요.
* 식당이 좁을 경우 본당에서 식사하시길 바랍니다. 
* 임직 예배 권면 말씀 주신 김건환목사님(제일영광 원로목사) 감사드립니다. 

3. 토요전도
* 이번 주 토요일(25일) 오후 3시에 토요전도로 모입니다.

4. 교회 봄 야유회
* 다음 주(26일)는 본 예배 후 남선교회 주체 야회 행사가 있습니다.
* 장소: 인천대공원, 회비:1만원, * 교회출발:점심식사 후 1:30분~5:00분 

5. 교회사역일정
* 토요전도:25일       * 교회 봄 야유회:4월 26일]]></description>
			<author><![CDATA[정음교회]]></author>
			<pubDate>Mon, 20 Apr 2026 22:15:23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www.jungumch.com/?kboard_redirect=4"><![CDATA[교회소식]]></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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