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훔

작성자
정음교회
작성일
2018-11-22 15:48
조회
4261
나훔개론
선지자 나훔은 BC 612년에 멸망하는 앗시리아의 니느웨성에 대한 심판을 전달한 사람입니다. 니느웨성은 이미 선지자 요나로 멸망을 선포한적이 있는 곳입니다. 니느웨는 요나이후 150년 정도가 지난 이후에 과다한 정복 욕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당하게 됩니다.

나훔은 이사야와 예레미야 중간정도에 활동했던 선지자로 추측되며, 정확한 출신지인 엘고스는 성서지리학적으로 어디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고 합니다.

나훔서는 짧은 3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본서의 주제는 니느웨의 함락입니다. 하나님의 위엄을 찬양하는 찬미로 시작 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 대한 형벌과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 대한 자비와 선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나훔서는 니느웨가 포위된 일과 그 함락과 함락의 이유를 말하고 있는데 유다의 숙적 앗수르에 대한 불타는 분노와 증오가 예언의 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다른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을 강조하고 있는 데에 그들의 관심과 임무가 있었는데 나훔은 이러한 일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본서는 오래 동안 선민 이스라엘 민족을 괴롭힌 숙적 앗수르가 패배당하고 그 수도 니느웨가 함락 되는데 대한 환희에 넘치는 복수의 노래입니다. 약간 편협한 국수주의 사상이 나타나 있으나 앗수르가 오래 이스라엘과 유다를 괴롭힌 것에 대한 그들의 분노를 생각하면 이해되는 일입니다.

나훔1:1-8
1절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
묵시와 계시는 그리스어 '아포칼립시스'의 번역으로서, 이 말이 처음 책 이름으로 지칭된 것은 바로 요한 묵시록입니다. 이 두 단어는 모두 '하나님의 심오한 진리가 나타남'을 의미하지만 그 속뜻을 깊이 새겨보면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즉, '계시'라 할 때에는 하나님의 의도가 삶 가운데 드러남을 뜻하는 것을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한 것인 반면, '묵시'는 특별한 의미로서 마지막 때 다시 말해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관한 미래의 비밀이 나타남을 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묵시나 계시를 같은 의미에서 살펴보면 될 것 입니다. 중요한 것은 묵시나 계시나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말씀이라는 사실만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2-5절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질투하고, 보복하고 진노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아는 하나님은 은혜롭고, 자비롭고, 사랑이 충만하신 하나님입니다. 나훔 선지자는 전혀 우리에게 익숙치 않는 하나님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하나님을 말해줍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다양한 모습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다양한 성품을 우리가 알아야, 온전한 신앙을 가질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도 보면, 4개의 복음서가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 4개의 복음서를 하나로 통합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모두 실패했습니다.
왜냐하면, 4개의 복음서에서 보여주는 예수님의 모습이 각각 다르고, 그 다양한 예수님의 모습을 알아야 온전한 신앙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하나님의 모습, 다양한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가 다 알고 신뢰할 수 있어야, 바른 신앙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니느웨 백성들이 왜 멸망하였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심판받고 멸망하는 이유는 단 하나 하나님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하고, 또한 알려 주어야 합니다.

7-8절 선하신 하나님께 피하라
그러면 구원을 얻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을 믿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가 한 설교가운데 이에 대한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3:22-24,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 또한 사무엘 때부터 이어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 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

여기서 모세와 같은 선지자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사무엘로부터 나훔을 포함한 모든 선지자는 바로 예수님을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나훔의 묵시의 궁극적인 결론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께 피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피하는 삶! 사랑과 공의로 세상을 다스리사,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그 하나님의 은총가운데 늘 거하는 삶을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겠습니다.

사랑의 아버지!!
이 땅을 향하신 아버지의 말씀을 깨달아 알길 원합니다. 무지함으로 심판받지 않게 하시고 어리석음으로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길 원합니다. 오직 예수님께로 피할수 있는 인생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아멘.


나훔1:9-15
하나님께서는 악을 꼭 갚으시며, 심판하십니다. 바뀔 것 같지 않는 악한 상황들이 하나님의 선에 의해 회복되는 순간입니다. 그분의 위로하심을 들으며 기다려야합니다. 주님의 뜻을 바라보며, 주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키워야 할 것입니다.

나를 괴롭게 하는 환경과 사람들에 신경쓰지 말고 살아야겠습니다. 그 모든 것을 주님은 알고 계시면 금새 사라질 것이라고 위로하십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말씀을 통해 그분의 크고 놀라운 그분의 경륜을 깨닫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9-13절 악인의 인생을 마른 지푸라기와 같다 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른 지푸라기는 외형상 커보이고 거대해 보이지만 심판의 불이 임하는 날에는 한순간 불타 버리고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악을 꾀하는 사악한 사람은 멸절되어 없어질 것입니다. 다시는 우리를 괴롭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한철 모기처럼, 여름 내내 활개 치며 날아다니던 시절이 지나고 찬바람 부는 심판의 날에 뽀족하게 쏘아 붙이던 주둥이는 힘을 잃고 뭉개져 버릴 것입니다.

신앙의 가치는 영원의 가치입니다.
지금의 시간이 어렵고 힘들지만 영원을 바라고 악인의 형통과 박해가 심판의 그 날에 다시 고개를 들지 못하는 날들을 바라보며 살아가야겠습니다.

현 시국을 바라보면서
분별력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생각합니다. 한 나라의 국가를 운영하는 자도 분별 있게 판단하지 못하면 무너져 버린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됩니다. 영적인 일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잘 분별하고 항상 신앙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마음속에 깊이 새기시길 바랍니다.

15절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위에 있도다 유다야 네 절기를 지키고 네 서원을 갚을 지어다. 우리 인생의 궁극 울려 퍼지는 복음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말씀과 법도를 지키고 실천하기에 힘을 쏟아야 합니다. 복음의 소리는 주님이 지신 십자가 골고다 언덕, 산위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입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듣고 실천하며 승리하는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사랑의 아버지!!
분별력을 가지고 구원의 핵심 가치로 신앙의 중심을 잡고 살아가길 원합니다. 어리석은 미혹가운데 빠지지 않게 하시고 겸손하게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승리하는 하루가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아멘.

나훔 2:1-13
강대국 앗수르와 난공불락의 요새 니느웨성이 어떻게 멸망할 것인지를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무자비한 초강국 앗수르를 흩어버릴 더 강한 '침략자'가 그들에게 임하고 있습니다. 침략군은 바벨론과 매대 연합군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예언자 나훔은 마치 니느웨를 공격하는 바벨론 연합군을 현장에서 보도하는 종군 기자처럼 전황을 자세히 기술합니다.

예언자 나훔은 성령의 감동으로 말미암아 국제정세를 미리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계를 통치하는 강국으로 군림했던 앗수르의 멸망을 외치며, 그들에게 억압당하고 있던 유다 백성에게 위로와 소망을 갖도록 호소합니다.

마치 일제식민지 하에서 신음하던 조선 민족에게 하나님께서 일본을 곧 망하게 하고 조선을 해방시킬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외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기에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난세를 살아야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백성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굳은 믿음을 가져야하는 것입니다.

니느웨를 치러 올라오는 침략군의 위용과 엄청난 전력, 그리고 그들이 펼치는 맹렬한 공격 가운데 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셔서 심판을 유보하시기도 하지만, 악은 기필코 심판하시는 분이시며, 동시에 자기 백성을 회복시키는 위로의 하나님! 그분을 경외하고 의지해야할 것입니다

나훔3:1-19
1-4절 이유 없는 심판은 없습니다.
열국을 향한 니느웨의 기만과 포학을 지적하고 그들이 당할 응징을 예고합니다.
니느웨는 피로 물든 성이고, 음녀가 유혹하고 마술로 미혹하듯 자신들의 야욕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곳입니다. 거짓과 겁탈로 성안에 쌓아둔 부정한 재물이 그들의 악독을 증명합니다. 죄악 중에 번영하는 것은 결코 축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포학과 약탈을 행하는 것은 심판을 쌓는 일일 뿐입니다.

4-7절 부러움의 대상을 부끄러움의 대상으로 만드십니다.
미술에 능숙한 것도, 미모의 음녀도 모두 겉과 속이 다른 것입니다. 니느웨는 겉으로 거대하고 화려한 것으로 열국을 미혹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열국이 부러워하던 그 나라를 모두 앞에 부끄럽게 하실 것입니다. 크고 높고 강하고 부하면 안전하다는 세상의 말에 더는 속지 맙시다. 하나님 없는 성공과 번영은 동경할 대상이 아니라 애곡의 대상입니다.

8-13절 쌓여가는 재물(1절), 높은 성벽만큼이나 니느웨는 오만했습니다.
그러나 나일 강으로 둘러싸인 노아몬이 함락되었듯이, 니느웨도 무너질 것입니다. 오히려 흔들기만 하면 떨어지는 열매처럼 산성도 무너지고 빗장도 열릴 것입니다.
“내가 너보다 낫고, 나는 너와 다르다”는 교만이 나를 넘어드립니다.
하나님과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할 만큼 교만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만은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여 거짓 안전 속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14-19절 적들이 오는 줄도 모르고 권력에 취해 있던 니느웨는 뒤늦게 알고 서둘러 전열을 정비하지만 때늦은 일이 될 것입니다. 심판을 막을 수도 견딜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들의 멸망을 슬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마저 위로가 아닌 조롱을 보내십니다. 자신이 가진 부와 힘으로 약한 자들을 위로하기보다 약탈한 결과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입니다. 우는 자와 함께 울지 않는다면, 내가 울 때 아무도 곁에 없을지 모릅니다.

사랑의 아버지!!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않게 하시고, 잘못된 길을 걷다가 넘어지는 악인이 되지않길 원합니다. 10월 한 달을 보내고 이제 남은 2달 좋은 열매와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아멘.